아르헨티나의 前 축구 선수 | ||
이름 | 훌리오 리보나티 (Julio Libonatti) | |
생년월일 | 1901년 7월 5일 | |
사망년월일 | 1981년 10월 9일 | |
국적 | 아르헨티나 | |
출신지 | 로사리오 | |
포지션 | 센터 포워드 | |
신체조건 | 169cm / 69kg | |
등번호 | -[1] | |
소속팀 | CA 뉴웰스 올드 보이스 (1919-1926) 토리노 FC (1926-1934) 제노아 CFC (1934-1936) 리미니 칼초 (1937-1938) | |
국가대표 | 15경기 / 8골 (1919-1922 / 아르헨티나) 18경기 / 15골 (1926~1931 / 이탈리아) | |
감독 | 리미니 칼초 (1937-19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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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에서 뛴 경력이 있는 전 축구선수.2. 선수 생활
2.1. 클럽
리보나티는 로사리오에서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16살에 CA 뉴웰스 올드 보이스에 들어갔는데 처음에는 아르헨티나 리그가 없어서 지역 리그에서 뛰었다. 프란세 등과 함께 뉴웰스 올드 보이스에서 7시즌 동안 활약했다.그러다 1925년 부모님의 국적으로 인해 이탈리아 이중국적을 취득하였고 1926년에는 토리노 FC로 팀을 옮겼다.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리보나티는 비슷한 시기에 팀에 같이 들어온 아돌포 발론체리, 지노 로세티와 좋은 호흡을 보여주며 토리노의 공격을 이끌었다.[2]
리보나티는 1927-28시즌, 팀의 첫 우승과 함께 35골로 득점왕을 차지하는 기쁨을 누렸다. 이후 8년 동안 토리노에서 241경기에 출전 157골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세리에 B의 제노아로 이적하였다. 그리고 제노아에서 승격과 함께 2년 동안 활약한 후 리미니 칼치오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축구 커리어를 마무리 하였다.
2.2. 국가대표
처음 리보나티는 아르헨티나의 유니폼을 입었다. 거기에서 그는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아르헨티나의 첫 우승을 맛보았다. 그리고 이탈리아에 건너가서는 이탈리아의 파란 유니폼을 입었는데 5년간 17경기에 출전하여 15골을 기록하였다. 다만 이탈리아가 초대 월드컵에 불참하여 FIFA 월드컵에 출전하지는 못하였다.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기술이 뛰어났고 골을 만들어내는 센스가 좋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오리운디 중 한 사람으로 19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까지 이탈리아 축구에 영향을 주었다.4. 뒷이야기
- 그의 토리노로의 이적은 축구 역사상 최초의 대륙 간 이적이다.
- 그는 매우 쾌활하고 유머감각이 뛰어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우아함에 관심이 있어서 많은 비단 셔츠를 사놓았다.
- 경제관념이 없어서 돈을 모으지를 못했다고.[3] 그래서 아르헨티나로 돌아갈 때 구단 측에서 돈을 줘야했다.
5. 수상
5.1. 클럽
- 디비시오네 나치오날레 우승 1회: 1927-28(토리노 FC)[4]
- 디비시오네 나치오날레 준우승 1회: 1928-29(토리노 FC)
- 세리에 B 우승 1회: 1934-35(제노아 CFC)
- 이바구렌 컵 우승 1회: 1921(CA 뉴웰스 올드 보이스)
5.2. 국가대표
5.2.1. 아르헨티나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우승 1회: 1921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준우승 1회: 1920
5.2.2. 이탈리아
- 중유럽 인터내셔날 컵 우승 1회: 1927-1930
5.3. 개인
- 디비시오네 나치오날레 득점왕 1회: 1927-28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득점왕 1회: 1921
- 중유럽 인터내셔날 컵 득점왕 1회: 1927-1930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지노 로세티와의 호흡은 당시 수류탄이라는 칭호로 불렸고 발렌치에리는 브레인의 역할을 했다[3] 지금만큼 축구 선수들이 큰돈을 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당시 일반인들보다는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었다[4] 원래 전 시즌에 한 번 더 우승 기록이 있지만 알레만디 스캔들로 인해 취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