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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19:24:18

영등포교도소 집단탈옥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전개3. 여파4. 대중매체

1. 개요

"이 바보들아! 나는 국민학교밖에 못 나왔어! 국민학교밖에 못 나왔지만, 난 그동안 생각했단 말이야! 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자기 인생을 버렸단 말이야! 그런데도 결국 오늘 이 사회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기 위해서 노태우 대통령, 국민을 위한! 국민을 위한 노태우 대통령!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고 있어!"
지강헌
"낭만적인 바람막이 하나 없이 이 사회에서 목숨을 부지하기에는 너무나 살아갈 곳이 없었다"
1988년 10월 8일 영등포교도소 재소자 12명이 이송 중 교도관흉기로 찌르고 탈주한 사건.

더 자세한 내용은 표창원의 사건추적 - “유전무죄, 무전유죄” 탈주범의 절규 편을 참고할 것.

2. 전개

1988년 10월 8일 영등포교도소[1]에서 대전공주교도소, 공주치료감호소[2]로 이송되던 25명 중 12명이 교도관을 흉기로 찌르고 탈주하여 서울시내로 잠입했다.[3]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달리 이들은 본래 흉악범이 아니라 잡범이었지만 사회보호법에 의한 보호감호제도 때문에 징역형을 마치고도 보호감호처분을 받아야 한다는 것과 560만 원 절도를 저지른 자신은 무려 17년을 살아야 되는데 알려진 것만 70여억 원을 횡령전경환(전두환대통령 막내동생)은 겨우 7년[4]을 선고받은 사실에 불만을 가지고 탈출했다. 나중에 탈출 과정에서 교도관을 흉기로 찌르고 권총을 탈취하면서 흉악범이 되긴 했지만 맨 처음 교도소에 수감됐을 땐 흉악범이 아니었다는 이야기.

파일:/pds/200901/21/35/a0102535_4976411be2eb4.jpg[5]
이 중에서 최후까지 잡히지 않던 5명 중 4명은 경찰의 검문을 피해 서울시에서 은신처 여러 군데를 전전하다가 10월 15일 밤 9시 40분경 서대문구 북가좌동[6] 고모 씨의 집에 잠입해서 고 씨의 가족을 인질로 잡았다. 이 인질극은 당시 TV로 생중계되었으며 인질극을 벌인 범인 4명은 다음과 같다.

인질로 잡혀 있던 고 씨가 새벽 4시쯤에 탈출하여[7] 인근 파출소에 신고했고 곧바로 경찰 병력 1천여 명이 집을 포위했다. 인질범들은 새벽 4시 40분부터 경찰과 대치하면서 실랑이를 벌이다가 낮 12시경 강영일이 협상을 위해 밖으로 나와 있을 때 한의철과 안광술이 지강헌이 가지고 있던 호송교도관 김○○ 교사(당시 54세, 1934년생), 김○○ 교사(당시 36세, 1952년생)[8]의 총을 빼앗아 각각 자살했고 지강헌은 경찰에게 비 지스홀리데이 카세트테이프를 요구한 뒤 노래를 들으면서 창문을 깨 유리조각으로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했다. 자살 시도 직후 경찰특공대원들이 집으로 진입해 인질로 잡혀 있던 가족들은 모두 무사히 구출되었으며 지강헌은 깨진 유리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 기도를 했는데 이를 지켜본 인질이 비명을 지르자 경찰특공대가 인질이 위험한 걸로 판단하여 즉각 무방비 상태의 지강헌에게 다리와 옆구리에 총을 발사하였으며 몇 시간 뒤 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도 못받고 사망했다. #

당시 '홀리데이'를 요구한 지강헌의 요구에 경찰이 실수로 스콜피온스의 홀리데이를 전달했다가 급하게 비 지스의 홀리데이를 다시 전달했다는 소문도 있다. 일단 사건 당시 현장에서 지강헌이 들었던 노래는 비지스의 홀리데이가 맞다. 비지스의 홀리데이가 울려퍼질 때 지강헌이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이 당시의 방송 녹화테이프에 기록되어 있다. 이 사실은 2006년 SBS의 영화프로그램 'TV박스오피스'의 '영화비하인드' 코너에서 확인되었고 관련 영상은 유튜브 등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9]

당시 검거되지 않았던 5명 중 인질극에 가담하지 않은 마지막 탈주범 김길호가 탈주한 지 1년 9개월 만인 1990년 7월 1일에 체포되면서 탈주극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10]

당시 인질 및 경찰들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그들은 예상 밖으로 대단히 신사적이었으며 그들의 요구는 '방송'이었지 '탈주'가 아니었다. 사실 지강헌 일행은 숨어 살다가 집주인이 몰래 도망친 탓에 인질극을 벌인 것이고 그러다 보니 방송을 탔다. 지강헌의 노트 인질극을 벌이기는 했지만 범인들은 "죄송하다 조금만 참아달라", "금방 끝날테니 이해해달라." 면서 두려워하는 인질들을 달랬고 경찰들 앞에서 인질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고성을 지르면서도 인질에게 귓속말로 "절대로 다치지 않게 할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최대한 인질들을 배려하려고 했다.[11]

그런데 실제 영상을 보면 같이 탈주한 동료에게는 과격하게 대했는지 강영일에게는 위협 사격으로 권총을 한 발 쏘면서까지 자수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12]

다만 유념해야 할 점은 지강헌 일당이 무죄가 아니라는 것이며, 의도가 무엇이든 그 수단을 범죄로 삼았다는 것은 함부로 옹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나름대로 억울할 만한 사연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1989년 개정 이전의 사회보호법에서 보호감호 기간을 최대 10년으로 규정한 탓에 지강헌 일행은 잡범임에도 불구하고 흉악범죄자나 받을 수준의 10~20년 구속이라는 매우 과중한 형량이 내려졌다. 지강헌 일당이 이런 일을 벌인 이유 또한 권력층들은 특혜를 받고 돈 없고 권력이 없으면 중형을 받는 대한민국의 불평등한 현실에 분노했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이것을 그저 일개 범죄자의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으나, 권력자나 부자들에게는 지은 죄에 비해 너무나 가벼운 처벌이 내려지거나 아예 무혐의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해서 법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저하됨에 데 큰 일조를 했음을 상기하면 지강헌의 범죄와는 별개로 진지하게 고찰이 필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탈주극 중에 사망한 사람을 뺀 9명 가운데 2014년 9월 기준으로 석방된 사람은 가장 마지막에 체포된 김길호와 지강헌 인질극 중 유일한 생존자인 강영일이다. 나머지는 출소 후 재범으로 인해 다시 구속되었다고 한다.

3. 여파

이 사건을 기점으로 사회보호법의 단점이 폭로되기 시작했는데 이 사건 이후인 1989년에 사회보호법이 개정되면서 보호감호 기간이 7년을 넘지 못하게 고정되었지만 이후에도 시민단체와 보호감호 피해자에 의해 '이중처벌'이라는 지적을 받으면서 2005년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전술했듯이 당시 체포되었던 전경환과 비교되어 대한민국 경찰이 '시국치안에는 강하지만 민생치안에는 무능한 경찰'이라는 인식이 퍼지게 된 한 계기이기도 하다. 전경환은 지강헌이 있었던 영등포 교도소에 들어가 원예 작업장에서 깔짝대다가 3년 2개월 25일만에 가석방을 받고 1991년 6월 25일 출소했다. 참고로 동시기 원예에는 치안본부장과 서울시장을 지낸 엄보석이 있어 둘이 친하게 지냈다. 출소 후 형 전두환이 구속되었는데 그는 안양교도소로 갔고 노태우는 서울구치소행.

교정직 공무원들에게는 희극이 되었는데 바로 수감자들에 대한 몸수색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주 원인이 과도한 근무시간으로 인한 교도관들의 피로라는 지적이 나왔기 때문이다. 당시 보안과 교도관들은 갑을제(2교대)였는데 25시간 근무한 후 연속하여 주간 근무를 무보수로 하고[13] 다음날 다시 25시간 근무하는 살인적인 스케줄이 일상이었다. 아침 8시에 출근해서 철야하고 다음날 아침 9시에 퇴근해야 되는데, 인원 부족을 이유로 퇴근을 시켜주지 않고 비번날에 이송 근무를 보내는 것이 관행이었고, 지강헌 등은 이를 알고서 교도관들이 피곤해서 이송 중 곯아떨어지니 탈옥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일을 벌인 것이었다. 신체검사가 소홀했던 이유도 철야로 피곤해서일 가능성이 높다. 비번날에는 보통 이송 등 편한 근무배치를 해 주지만, 그 근무가 끝나고 퇴근하려 해도 회식이 잡혀 집에 가지 못하고 술을 마시러 가야 하는 지옥같은 반징역살이였다. 이걸 계기로 인원을 크게 확충하여 2부제에서 3부제로 전환하여 1989년부터는 1일차 24시간 근무, 2일차 비번, 3일차 주간근무(18시 퇴근)라는 3부제가 되어 근무가 여유로워졌다. 참고로 이 살인적인 2부제 시절 근무했던 교도관들은 대부분 정년 퇴임 후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부고가 들려왔다. 오죽하면 공무원연금공단에서 제일 좋아하는 직렬이 소방직과 교정직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을 정도.

지강헌을 호송한 교도관들에게는 비극이었다. 당일 호송을 담당했던 출정직원 6명 중 책임자인 계장(6급)과 부책임자(8급)는 구속되었고 나머지 4명은 파면되었다. 영등포교도소 직원 370명 중에선 무려 70명이 징계를 받았는데 해임, 정직, 감봉, 견책, 경고, 주의 등이 쏟아져내렸다. 지강헌 등은 미결 운동장에 떨어져 있던 못을 주워 수갑 푸는 열쇠를 만들었는데 이 때문에 미결 운동 담당 직원과 검신·검방 직원들이 대거 징계받았다.

인질극을 벌인 탈주범 4명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강영일은 다시 교도소로 들어와 형기를 살았는데 이때 같은 방에 있었던 사람 중 하나가 신창원이다.

사건이 발생한 집은 주민들이 이사가면서 매물로 나왔는데 사람이 죽은 집이라 무섭다며 팔리지 않았다. 이에 교정당국이 매입해서 현재까지도 지방 교도관들의 대학생 자녀를 위한 '교정학사'로 사용되고 있다.

이 사건 이후로 법무부 소속 호송버스에 교도관석과 재소자석 사이에 철창이 설치되었다고하는데 언제부터인지는 불명이다.[14]

4. 대중매체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

* 2020년 6월 14일 SBS 스페셜 597회로 방영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1에서 다루었다.


[1] 당시 서울특별시 구로구 고척동에 있었으나 2011년 천왕동으로 옮기면서 서울남부교도소로 개명되었으며 (구)영등포교도소 부지는 철거되어 그 자리에 고척 아이파크가 지어졌다.[2] 국립법무병원[3] 이송 시 검신을 똑바로 안 해 흉기를 발견하지 못했으니 피습당한 당사자의 잘못은 아닐지 몰라도 교정당국의 책임은 맞다.[4] 실제로는 3년 3개월 만에 풀려났다.[5] 맨 윗 사진과 마찬가지로 자세히 보면 지강헌이 든 M1911 권총의 슬라이드가 분리되어 앞으로 튀어나와 있는 상태인데, 저 상태에선 발사되지 않는다. 머리에 대고 있는 사진들 외에는 제대로 조립되어 있는 걸 보면 저 사진이 찍힐 때 쯤에 총을 잘못 만졌던 듯 하다. M1911권총은 슬라이드 멈치를 겸하는 분해결합핀 하나로 고정되는 방식이라 노후된 경우에 슬라이드멈치가 빠져 분실되면서 이렇게 되는 경우가 간혹 있다. 사진상으로 볼 때 이때도 슬라이드 멈치 부품이 빠져서 분실된듯.[6] 인질극이 터졌던 곳은 수색로10길 광명빌라 바로 옆인데 그 집은 지금도 있다. 피해자 가족들이 이사를 가길 원했는데 3명이 사망한 흉가라며 팔리지 않자 1989년에 재단법인 교정협회(2015년 10월에 교정공제회가 설립되어 재단법인 교정협회 해체)에서 사들여 교도관 자녀 생활반으로 사용 중이다. 경찰특공대원들이 넘었던 담장은 담장허물기 사업으로 철거되었다.[7] 고 씨가 인질범들에게 캪틴큐를 제공했고, 이를 마신 인질범들이 뻗어버리자 탈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8] 당시 호송지휘관인 김○○ 교감(당시 54세), 김○○ 교사(당시 54세)는 직무유기로 구속되었다가 1심에서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상고심에서도 그대로 무죄인 대신 재판에 넘겨진 2명 외에 재판에 넘기지 않은 나머지 호송 교도관들도 직위해제, 감봉, 견책 등의 칼은 피하지 못했다.[9] 당시 영상을 보면 홀리데이를 요구한 후 나자레스의 'Please Don`t Judas Me'를 추가로 요구하는데 공교롭게도 나자레스의 발표곡 중에도 홀리데이란 동명의 노래가 있다.[10] 탈주 당시 김길호가 절대 한 장소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고 주도면밀하게 행동한 탓에 "김길호가 나타났다."는 제보를 받고 잠복하고 있으면 영판 다른 장소에서 또 김길호를 목격했다는 제보가 들어와 경찰 관계자들 사이에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홍길동 같다."며 '김길동'으로 불릴 정도였다고 하며 1989년경에는 삭발한 야구 선수를 탈주범 김길호로 오인 신고하면서 어처구니 없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다.[11] 사건 종료 후 당시 인질들은 지강헌 일당들에 대해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들은 매우 신사적이었고 마음이 따뜻했던 사람들이었다"며 그들을 변호하는 탄원서를 써서 보내었다고 한다.[12] 강영일은 교도소에서부터 지강헌과 친했고 지강헌을 제외한 나머지 두 명도 자살했으니 이미 도주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을 알고 자수하게 만들어 살리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요구한 승합차를 확인하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강영일의 발밑에 총을 쏴 못 들어오게 하며 "너는 내가 살린다. 영일아 내 말 들어라." 라고 말했다. 지강헌이 어떤 마음이었든 사살되었으니 강영일은 결국 지강헌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13] 원칙적으로 25시간 근무 후 퇴근해야 하니 주간 근무해도 돈이 안 나왔다.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져내려온 근무 제도다.[14] 당시에는 경찰 호송차와 달리 법무부 호송차는 격리칸막이가 없었다.[15] 문학과 지성사 <입 속의 검은 잎> 中[16] 천국의계단에서 한정서의 아버지로 나온 그분이다.[17] 슬기로운 감빵생활의 최종 빌런인 염반장 역을 맡았던 배우 주석태가 명연기를 펼쳤다.[18] 다만 작중에서 탈취한 권총은 자동권총이 아니라 리볼버로 묘사되었다.[19] 출연 당시의 강영일은 세월이 지나서인지 나이가 50대의 중년이었으며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허리가 많이 아픈 상태였고 그 외의 건강도 썩 좋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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