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保護監護구 사회보호법(2005. 8. 4. 법률 제7656호로 폐지)에 규정되어 있던 보호처분제도 중 하나. 나머지 보호처분인 치료감호, 보호관찰은 현재는 치료감호 등에 관한 법률과 보호관찰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실시되고 있다.
2. 설명
1980년대 전두환의 신군부가 "상습범은 형기종료 후에도 즉각적인 사회 복귀를 막아야 한다"는 논리로 보호감호의 근간이 된 '사회보호법'을 제정하면서 시작됐다.재범 가능성이 있는 피고인에 대하여 교화 및 사회 복귀를 위한 직업 훈련을 목적으로 보호감호시설 수용 처분을 내리는 것이다. 상습범, 집단범을 대상으로 하며 보호감호 선고를 받으면 보호감호시설인 청송감호소에 수용되고 사회 복귀에 필요한 직업 훈련을 받게 된다.
3. 배경
계엄포고령이 끝나 계엄이 해제되면 삼청교육대도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되어 있지만 전두환 정권은 계엄 해제 뒤에도 이들을 계속 구금할 명분이 필요했다. 순화교육을 마친 후 교육대상자들은 계엄사령부의 지침에 따라 사회복귀자와 근로봉사자로 재분류되었는데 미순화자로 분류된 B급 1만 16명, 그러니까 전체의 25%는 순차적으로 9차에 걸쳐 전방 20개 사단에 수용되어 근로봉사에 투입되었다.이들은 1980년 9월 8일부터 1981년 1월 16일까지 사회보호법(1980.12.16. 제정.)에 의한 보호감호 처분 결정시까지 근로봉사 명목으로 전술도로 보수, 진지 구축 및 보수공사, 자재운반, 통신선 매설 등의 작업에 동원되었고 1981년 1월 24일에 계엄령이 해제된 후에도 7,478명이 사회보호법에 따라 정상적인 재판 절차 없이 1~5년의 보호감호처분을 받고 군부대에 분산수용되었다가 그 해 12월에 신설된 청송보호감호소로 이감되었다.
그들에게는 사회보호법 부칙 제5조가 적용되었다.
①이 법 시행당시 1980년 8월 4일 선포된 계엄포고 제13호에 의거하여 특정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자로서 재범의 위험성이 있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하여는 위원회는 제5조제2항에 정한 기간의 범위안에서 기간을 정하여 결정으로 보호감호에 처할 수 있다. ②감호시설의 소재지를 관할하는 지방검찰청 또는 지청의 검사는 제1항의 규정에 의한 피보호감호자가 충분히 교화되고 개전의 정이 현저하다고 인정되는 때에는 위원회에 피보호감호자의 출소를 신청할 수 있다. ③제1항의 규정에 의한 피보호감호자에 대하여는 제38조의 규정을 적용하지 아니한다. ④제1항의 규정에 의한 보호감호는 제5조제1항제2호의 적용에 있어서는 보호감호로 보지 아니한다. |
하지만 이는 명백한 소급 적용이었다.
그래도 삼청교육대 시절과 달리 국토건설단 성격이 강하긴 했지만 애초에 근로는 핑곗거리이고 격리가 주 목적이었다. 12.12 군사반란와 5.18 민주화운동에서 보인 학살 행위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전두환 정권에게 가장 두려운 일이었으며 가혹한 훈련을 받은 삼청교육 이수자들이 사회 불만세력화되는 것도 군사정권에 잠재적인 불안 요소였다.
원래 1980년 여름에 법무부 교정국이 선정 작업에서 초중구금 시설 부지로 전남 영광군 법성포에서 39킬로미터 떨어진 면적 6.77제곱킬로미터의 작은 섬인 안마도(鞍馬島)로 고르려고 했는데 육지에서 완전히 격리된 섬 자체가 실질적인 격리의 효과가 있고 대국민 선전 효과도 뛰어났다. 그러나 현장 실사 과정에서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혔는데 섬 인구가 400명에 지나지 않은 탓에 수천 명의 감호자뿐만 아니라 직원들과 경비 군인 등 1만명 이상의 상주인구가 거주하면 물 부족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지리적 약점 탓에 북한과 대치할 경우 안보상의 문제가 발생하는 데다 UN 등 해외 인권 단체들의 비난을 우려해 이 계획안은 취소되었다.[1] 그래서인지 최종적으로 내륙의 오지인 경북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 산 2번지로 돌려 청송보호감호소를 지었다.
당연히 큰 사건도 터졌는데 1980년 10월경 강원도 화천에 위치한 27사단에서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던 시민들이 PX에서 술을 가져와 마시고 취한 상태에서 행정보급관과 시비가 붙어 시민들이 단체 무장하면서 27사단 77연대 병사와 전투가 벌어젔고 그로 인하여 감호생 3명과 하사관 1명이 사망하고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 대대장은 이등병으로 강등되어 불명예 전역하는 등 당해 지역의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후 군사법정에서 구속된 25명 중 주동자급에게는 사형 내지는 무기징역이 선고되었고 나머지는 5~20년의 중형이 선고되었다.
1981년 6월에 경기 연천의 5사단에서는 군인들이 감호생을 구타한 것이 빌미가 되어 감호생들이 집단으로 시위를 했고 끝내 군인들은 탈출을 감행하려는 감호생들을 무력 진압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기관총과[2] 소총이 무차별 난사되어 감호생 전정배가 숨지고 4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당시 감호생은 추가 사망자도 있을 거라고 증언했으며 특히 감호생인 이 모씨는 당시 50대 노인이 철조망을 넘다 옆구리에 총을 맞아 죽었다고 증언했다.[3] 5공 청문회 당시 당 부대에 근무하던 윤창중 대대장은 발포 사실마저 부인했다.
4. 취지
상술한 대로 본래 신군부의 불만 세력을 격리하기 위한 목적이지만 그래도 국민들의 눈이 있기 때문에 이를 정당화 시키려는 그럴싸한 명분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대외적으로는 흉악범 및 상습범의 사회 격리 및 교화를 내세웠는데 5공의 불순한 목적이야 그렇다 쳐도 명분 자체는 그럴싸했기 때문에 후대 정권에서도 해당 제도가 유지되었다.5. 대상
적용 대상은 다음과 같다.- 동종 또는 유사한 죄로 2회 이상 금고 이상의 실형을 받고 형기 합계 3년 이상인 자가 최종형의 전부 또는 일부의 집행을 받거나 면제를 받은 후 다시 동종 또는 유사한 죄를 범한 때
- 일정죄를 수회 범하여 상습성이 인정될 때
- 보호감호의 선고를 받은 자가 그 감호의 전부 또는 일부의 집행을 받거나 면제를 받은 후 다시 동종 또는 유사한 별표의 죄를 범한 때에 해당하고 재범의 위험성이 있다고 인정되는 때
6. 문제점
보호감호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이중처벌이며 그 외에도 과잉처벌의 문제점, 재범의 위험성 판단의 논란, 보호감호제도의 운영상 난제 등이 있다.
보호감호는 보안처분 중에서도 수형자의 신체의 자유를 가장 크게 제한하는 것으로, 그 실질이 징역형과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이중처벌로 판단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국이 법제도를 대부분 계수한 독일에서는 아직 보호감호제도를 운영하고 있는데 독일에서조차도 이중처벌인 데다 인권 침해라는 비판이 나온다.
일각에선 조두순을 들먹이지만 조두순과 같은 논란이 큰 범죄자가 사회에서 돌아다니는 것에 대해 불안해하며 격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한다면 처음부터 중형을 선고하고 만기출소 이후 위치추적장치 부착명령 등을 부가하면 된다.
보호감호제도를 만약 운영한다면 처벌 자체는 이미 징역으로 끝났기 때문에 보호감호처분 대상자들이 현재 죗값을 치르는 상태가 아닌 만큼 그에 걸맞은 보호감호 시설과 거주 환경 등을 제공해야만 한다. 실제로 보호감호를 실행하는 독일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거주 환경과 갱생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문제는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미지수다. 징역을 끝마쳤다고 해도 보호감호 역시 엄연히 잘못을 저질러서 보호수용 처분을 받은 사람들인 만큼 상당한 수준의 처우 개선을 했을 경우 여론의 긍정적 반응이 나올 가능성은 낮다.
게다가 당시 보호감호 제도의 운영에도 모순점들이 드러났는데 그로 인한 반감이 터진 게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유명한 영등포교도소 집단탈옥 사건이다. 지강헌의 죄목은 7차례에 걸쳐 현금, 승용차 등 약 556만 원을 절도한 것이었으며 징역 7년에 보호감호 10년을 선고받은 반면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은 막강한 권력으로 몇백억 원의 횡령을 저질렀지만 재판부에서 인정한 횡령금은 76억 원에 그쳤고 그가 받은 처벌은 징역 7년이었으며 그마저도 3년 정도 복역하다 석방됐다.#
7. 폐지
일사부재리의 원칙 및 이중처벌 문제와 인권 침해 문제로 인해 이에 대한 폐지 논의가 있었다. 80년대 후반 청송보호감호소의 실태가 대중에 공개되면서 이에 대한 성토 및 폐지가 논의된 적이 있었고 1989년에는 헌법재판소에 의해 1980년판의 일부 조항이 위헌 판결을 받았다.(89헌가86)
그러나 대중들의 이목이 민생 치안 문제로 집중되고 노태우도 국면 전환을 위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자 당시의 인식으로 몇몇 범죄자들의 인권 때문에 보호감호제도를 폐지한다는 것은 민생 치안 안정이라는 목적과 상충되고 당연히 정치권도 이를 폐지했다가는 '몇몇 범죄자들 인권 챙기느라 민생 치안을 내팽개친다'는 소리를 들을 게 뻔했기 때문에 보호감호 폐지는 유야무야되었다.
김영삼이 집권했을 시에도 치안 문제와 상충할 법한 해당 제도를 섣불리 폐지하지 못했는데 정권 내내 갖은 사건·사고가 많았기에 섣불리 폐지할 수 없었다. 이는 김대중 때도 마찬가지여서 2001년에는 헌법재판소에 의해 합헌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수많은 논란을 뒤로하고 노무현의 참여정부 시기인 2005년 7월 사회보호법이 폐지됨에 따라 보호감호제도도 폐지되었으며 청송감호소는 경북북부교도소에 속한 경북북부제3교도소로 바뀌었다. 하지만 폐지 뒤에도 부칙에 따라 2005년 7월 이전에 보호감호 처분받은 재소자는 종전대로 수감되고 있는데 역시 논란이 많아 2014년 헌법소원까지 제기됐으나 기각되었다.(2014구합11359)
8. 폐지 이후
제도의 폐지에 불구하고 피보호감호자 자체가 바로 없어진 것은 아니다.사회보호법폐지법률(법률 제7656호) 부칙 제2조 (이미 선고된 보호감호 판결 및 집행에 관한 경과조치) 이 법 시행 전에 이미 확정된 보호감호 판결의 효력은 유지되고, 그 확정판결에 따른 보호감호 집행에 관하여는 종전의 「사회보호법」에 따른다. 다만, 보호감호의 관리와 집행에 관한 사회보호위원회의 권한은 「치료감호법」에 따른 치료감호심의위원회가 행사한다. 제4조 (보호감호시설의 수용에 관한 경과조치) 이 법 시행 전에 이미 보호감호 확정판결을 받아 그 집행 중에 있거나 집행하여야 할 자는 종전의 「사회보호법」의 규정에 불구하고 교도소에 수용할 수 있다. 이 경우 “교도소” 및 “교도소의 장”은 “보호감호시설” 및 “보호감호시설의 장”으로 본다. 제5조 (벌칙에 관한 경과조치)이 법 시행 전이나 부칙 제2조에 따른 보호감호 집행계속 중에 「사회보호법」 제43조의 죄를 범한 자에 대하여는 종전의 규정에 의한다. |
법규정상 피보호감호자가 가출소한 경우에 전자발찌를 부착하거나 성충동 약물 치료를 할 수도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로 '성폭력범죄자의 성충동 약물치료에 관한 법률'이나 '전자장치 부착 등에 관한 법률'(제정 당시에는 '특정 성폭력범죄자에 대한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에 관한 법률') 모두 사회보호법이 폐지된 후에 제정되었다.
9. 기타
2018년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문서에 따르면 대한민국 제5공화국은 사회로 내보내지 말아야 한다고 봤던 수용 인원을 계속 감금하고자 '특수교도소' 설립을 추진했었다. 지역 부지 선정까지 하였지만 무산되고 청송교도소 등이 파생되어 나왔다.이명박 정부 들어 검찰과 법무부가 보호감호와 유사한 보호수용제 도입 방침을 밝히며 관련 논의가 있었는데 처벌보다는 치료와 사회 적응에 중점을 맞춘 제도라고 하며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4년에는 논의가 입법 시도로 구체화되어 윤상직 등 새누리당 의원들이 보호수용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지만 국가인권위원회와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이 인권 침해라며 반발했고 법안은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그대로 폐기되었다.#1#2
이처럼 보호수용법에 대한 찬반 논란이 이어지던 가운데 사법시험 존치 논란 등 다른 이슈에 밀려 결국 제대로 논의되지 못하고 19대 국회 종료와 함께 폐기됐다. 법무부는 2016년에도 한차례 더 보호수용법 입법예고를 했지만 기획재정부가 보호수용시설 마련 등 예산 문제를 우려하면서 또 다시 흐지부지됐다.#
2020년 조두순 출소 후 윤화섭 안산시장 등 더불어민주당 정치인들이 보호수용 제도 도입을 주장하고 나섰다.#1#2 국민의힘 김병욱·양금희 국민의힘 국회의원 등도 보호수용 제도 도입을 주장하고 나섰다. #1 #2 그러나 이후 불발됐다.
2023년 한동훈 법무부장관이 아동 대상 성폭력 범죄자, 상습 성범죄자 등을 국가가 정하는 시설에 수용하겠다는 법안을 발표했다.#
10. 관련 문서
[1] 당시 법무부 교정국 관리과장 정갑섭 씨 증언. <우리들의 현대침묵사(정길화, 김환균 저, 해냄출판사(2006)> 참고.[2] 당시 감호생의 증언에 의하면 시위가 벌어지자마자 내무반 지붕에다 M60 기관총을 거치해놓고 사격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3] 다른 감호생도 이에 대해 증언했는데 "캐리바 50"을 맞아 온몸이 두동강이 났다고...[4] 영등포교도소 집단탈옥 사건의 원인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