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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02 09:23:16

스콜피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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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391A7><colcolor=#000>{{{#!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align=center><table bordercolor=#A391A7> 파일:Scorpions-Logo.png 스콜피온즈
Scorp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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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corpions_in_Melbourne,_Australia_17.10.2016.jpg
[1]왼쪽부터 미키 디, 마티야스 얍스, 클라우스 마이네, 루돌프 솅커, 파베우 몬치보다
국적 파일:독일 국기.svg독일
결성
1965년
독일 니더작센 주 하노버
데뷔 1972년 2월
데뷔 앨범
활동 1965년 ~ 현재
멤버 클라우스 마이네(보컬, 기타)
루돌프 솅커(기타, 백킹 보컬)
마티아스 얍스(기타, 백킹 보컬)
파베우 몬치보다(베이스 기타, 백킹 보컬)
미키 디(드럼)
장르 헤비 메탈, 하드 록, 글램 메탈
레이블 라이노, RCA, EMI, Sony
링크 파일:Scorpions-Logo.pn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2. 역사3. 밴드 멤버
3.1. 현 멤버3.2. 전 멤버
4. 여담5. 디스코그래피
5.1. 정규 앨범5.2. 실황(공연) 앨범5.3. 편집 (컴필레이션)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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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하드록, 헤비메탈 밴드.

1948년 8월 31일 서독 하노버에서 태어난 루돌프 솅커(Rudolf Schenker)와 1955년 1월 10일 출생한 마이클 솅커(Michael Schenker) 형제가 주축이 되어 1965년에 결성[2]된 스콜피온즈는, 1969년 보컬리스트 클라우스 마이네(Klaus Meine)를 영입하여 1971년에 녹음한 'Lonesome Crow'를 1972년 발표함으로써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크라우트 록[3] 사운드를 들려주어 약간의 주목을 받는다.

주 멤버는 리더이자 창립 멤버인 루돌프 솅커(리듬 기타), 클라우스 마이네(보컬), 마티아스 얍스(리드 기타)가 주축이고 이 외 베이스는 가끔 드럼은 자주 바뀐 편이다.

2. 역사

루돌프 솅커는 10대 초반 시절 때 스콜피온즈를 결성해서 친동생 마이클 솅커와 동네 친구들과 같이 동네 밴드 정도의 수준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평생 같이 밴드를 할 클라우스 마이네도 만나게 된다.

당시 인기 영국 록밴드였던 UFO(밴드)가 순회공연의 오프닝을 맞던 중 기타리스트가 여권을 잃어버려 마이클 솅커를 대타로 빌려왔는데 UFO가 그를 맘에 들어한다. UFO의 구애에 마이클 솅커가 UFO로 이적하자 스콜피온즈는 최악의 상태를 맞는다.[4][5] 당장의 남은 투어 공연들은 루돌프 솅커의 친구였던 울리 존 로스(Uli Jon Roth)를 리드기타로 세워서 해결했다. 울리 존 로스는 자신의 밴드가 따로 있어서 활동을 계속할 수는 없었고 결국 스콜피온즈는 얼마 후 해체하게 된다.

이후 울리 존 로스의 밴드에 루돌프 솅커와 클라우스 마이네가 역으로 합류했고, 스콜피온즈의 이름이 상대적으로 더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밴드 이름을 스콜피온즈로 바꾸게 된다. 그렇게 새로이 구성된 멤버로 1974년 앨범 Fly To The Rainbow를 발표하여 정통 사이키델릭 록의 진수를 들려주었다. 조금씩 멤버 구성이 바뀌어가며 4개의 앨범을 내고 밴드는 일본에서 인기를 얻는 등 서서히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소속 레이블에서도 더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주는 동시에 더 상업적인 앨범을 만들라는 요구를 했다. 울리 존 로스는 계속 사이키델릭 록을 하고 싶어했고, 변해가는 밴드의 정체성에 반발해서 밴드를 떠나기로 한다.

1979년 원년 멤버 마이클 솅커가 잠시 참여한 앨범 'Lovedrive'가 상업적 성공을 거두어 대형 밴드로 성장했다. 1980년과 1982년에 'Animal Magnetism'과 'Blackout'을 발매했고, 둘 다 플래티넘 인증을 기록하며 히트했고, 2년 후인 1984년에 발매한 'Love At The First Sting'은 대한민국에서 한때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파워 발라드 Still Loving You, 80년대 헤비 메탈의 대표곡 중 하나인 Rock You Like A Hurricane 같은 명곡들을 수록하여 음악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음과 동시에 미국에서 트리플 플래티넘을 기록하는 대박을 터뜨렸고, 곧 스콜피온즈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또한 1985년에는 월드 와이드 라이브 투어를 다니면서 더욱 명성을 높였다. 이 라이브 투어는 앨범으로도 만들어져 미국 차트에서 14위를 랭크했다.

라이브 투어가 끝난 시점부터 밴드는 새 앨범의 제작에 착수했고, 3년이라는 긴 제작 기간을 거쳐 1988년 'Savage Amusement'가 발매된다. 앨범은 미국 차트에서 5위를 기록하고 역시나 플래티넘을 올리는 등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비평적으로도 성공한 듯 보였지만, 기존의 팬들과 평론가들 몇몇은 이 앨범을 기대에 못 미치는 다소 실망스러운 앨범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앨범의 대표곡으로는 스콜피온즈의 또다른 하드록 명곡인 Rhythm Of Love가 있다. 한편 앨범의 발매 후 밴드는 러시아에서 공연을 했고, 이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러시아 투어 후, 스콜피온즈는 새로운 시도를 위해 프로듀서를 디에테르 디에르크스에서 키스 올센으로 바꾸게 되고, 1990년 'Crazy World'가 발매된다. 이 앨범은 비평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가장 성공한 앨범이며, 700만 장이 판매되었다. 싱글로 발매되어 무려 1400만 장이 판매된, 명백한 스콜피온즈의 최고 인기곡인 Wind of Change, 애절한 멜로디가 계속 반복되는 Send Me An Angel 같은 히트곡들을 수록했고 이전까지 그저 독일에서 건너온 평범한 록 밴드였던 스콜피온즈를 유럽을 대표하는 전설적인 밴드로 만들어주는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핑크 플로이드의 전 리더 로저 워터스가 주최한 역사적인 The Wall의 베를린 장벽 라이브 공연에도 참가하였다. 유수의 독일 밴드들이 전부 참여한 이 콘서트에서 스콜피온즈는 서독을 대표하는 하드 록 밴드답게 첫 트랙인 In the Flesh의 부분을 맡았다.

레이블을 폴리그램으로 옮겨 1993년 발매한 'Face The Heat'은 이전의 앨범에 비하자면 정말 형편없는 성과를 거둔 실패작이지만, 잔잔한 발라드곡인 Under The Same Sun을 비롯해 스콜피온즈 팬들이 꽤나 좋아하는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1996년에는 'Pure Instinct'를 발매했고, 이 앨범에도 밝은 분위기의 파워 발라드 You And I 등 스콜피온즈 후기 사운드를 대표하는 곡들이 몇 곡 수록되어 있지만 이전 같은 성공은 되찾지 못했다.

'Pure Instinct' 이후에 발매된 앨범들은 전성기 시절에 비하면 유의미한 성과를 못내고 있지만, 몇 년마다 꾸준히 앨범을 발매하고 월드 투어를 하며 밴드의 건재함을 알리고 있다.[6]2010년 'Sting in the Tail'을 발표하면서, 앨범이 본인들의 마지막 앨범이 될 거라고 했고, 월드 투어를 가진 후 밴드를 해체하고 은퇴할 거라고 선언했지만, 투어 중 기를 잘 받은 모양인지 은퇴를 번복했다. 이후 2011년에 말 그대로 돌아왔다고 'Comeback' 앨범을 발표했다. 단, 해당 앨범은 신곡이 아닌 과거곡의 재녹음 음원만 수록한 앨범이다. 2015년 2월 20일, 멤버들의 나이줄이 50대 후반에서 60대가 넘어감에도 불구하고 새 스튜디오 앨범 'Return To Forever'을, 2022년에는 'Rock Believer'를 발표했다.

3. 밴드 멤버

3.1. 현 멤버

3.2. 전 멤버

4. 여담


Coast To Coast에서 루돌프 솅커는 단순히 파워코드만 연주 할 줄 하는 실력이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솔로잉만 잘 안될 뿐이지 왠만한 리프들도 충분히 잘 연주하는 실력이고, 무대위에서 시도때도 없이 달리가나 움직이는 퍼포먼스를 하면서 정확하게 연주를 한다. 그 이외에 Still Loving You 같은 곡만들어도 아르페지오 주법은 완벽하게 구사하는 등 리듬 기타로서 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실력이다. 대부분 밴드들이 그렇듯이 리듬기타는 베이스 못지않게 좀 소외받는 이미지가 강하다.

5. 디스코그래피

5.1. 정규 앨범

5.2. 실황(공연) 앨범

5.3. 편집 (컴필레이션) 앨범

히트곡 모음이 1979년부터 2017년까지 무려 29가지(영문판 위키피디아 기준, 독일판에는 39개)나 나와 있어서 멤버들도 다 모른다.

[1] 2016~현재 라인업[2] 밴드의 시작이긴 한데, 루돌프가 17살에 동생 미하엘은 겨우 10살. 클럽에서 연주하던 동네 밴드였고 마이네 영입 이후가 제대로 활동한 거라 보아도 된다.[3] 독일산 프로그레시브 록, 하드록을 영어권에서 부르던 명칭. 독일 배추 절임인 자우어크라우트에서 나온 말로, 우리 식으로 하면 "김치 록"정도 된다. 다른 밴드로는 크라프트베르크, 노이!가 있다. 한국인이나 한국산더러 김치 어쩌고 하면 그다지 좋은 의미가 있지 않은 것처럼 독일 것에 크라우트를 붙이면 깔보는 의미인 멸칭이 되었으나, 일종의 고유명사처럼 대중적으로 사용된다. 그래도 독일 사람들에게는 하지 말자. 저먼 록, 도이치 록이라고 불러 주면 된다.[4] 이는 리더인 루돌프 솅커가 리드가 아닌 리듬 기타를 했던 탓도 크다. 록/메탈 밴드 특성상 곡 멜로디 중심을 좌우지하는 리드기타의 포지션이 중요한데 그걸 리더가 아닌 다른 멤버가 담당했기에 큰일이었다. 기타리스트 중심인 밴드들 보면 특정 멤버 부재 시 그 큰 공백이 얼마나 큰지 잘 보여준다. 루돌프는 믿을 만한 친동생이니 맡긴 건데, 나갈 줄을 몰랐을 것이다.[5] 루돌프 역시 리드 기타쪽으로 연습을 많이 하였으나 그쪽으로 실력이 전혀 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루돌프가 기타 솔로잉을 하는 모습은 거의 볼 수 없다. 그나마 가끔 Still Loving You의 솔로를 연주하지만 그렇게 현란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루돌프 솅커의 기본기가 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리듬기타로서 그의 능력은 우습게 볼 만한 것이 결코 아니며, 걸출한 연주자들을 옆에 두고 굳이 솔로에 집착할 이유도 없다. 또 할 때는 하는 양반이라 3집 수록곡 Life's Like a River의 라이브에서 트윈기타 솔로를 멋들어지게 소화하는 모습도 보여줬다.[6] 사실 이런 밴드들은 주 수입이 앨범 판매가 아니고 공연이기 때문에 앨범은 계속 음악을 내고 있다는 지표일 뿐 실패라고 하기도 뭐하다. 그 유명한 롤링 스톤스도 전성기 시절은 따로 있을지언정 활동 자체는 꾸준하다. 공연 수입은 물론, 그 동안 히트곡의 저작권료만으로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7] 전임 리드 기타리스트들의 명성이 워낙 넘사벽이라서 그렇지, 진정한 스콜피온즈의 기타리스트는 이 사람이라고해도 무관하다.[8] 폴란드 출신의 베이시스트, 스콜피온즈 가입 이전까지는 수많은 밴드를 전전하다가 스콜피온즈에 가입 후 꾸준히 활동 중이다.[9] 모터헤드의 드러머. 모터헤드의 리더인 레미 킬미스터 사망 후 밴드가 해산된 후 여러 세션 활동을하다가 마침 공백이 된 스콜피온즈 드러머가 되었다. 내로라 하는 정통 하드락/메탈 드러머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실력이 뛰어나며 강렬한 파워의 더블 베이스가 인상적이다.[10] 그 독일 정치가 베르너 호이어가 맞다![11] 스콜피온즈가 이 당시엔 동내 밴드 수준이었고, 밴드 탈퇴 후엔 일반인으로 살았을 수 있다. 이 인물에 대해선 검색을 해도 이력이 아에 나오지 않는다.[12] 스콜피온스 재직시 이름은 울리히 로스 었다. 독일의 지미 헨드릭스라고 불릴 정도로 내로라하는 실력의 기타리스트이다. 하지만, 루돌프 셍커가 지향하던 단순하고 힘찬 대중적인 스타일과는 거리가 먼 개성이 강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둘이 작곡한 곡들을 비교해 보면 스타일이 확연히 다르다. 결국 울리히는 4년 만에 밴드를 탈퇴하였다. 그가 참여한 앨범들은 매우 좋은 평가를 받긴하였지만, 골수 스콜피온스 팬이 아닌 일반 대중이 알고있는 스콜피온즈의 사운드는 울리히가 나가고 루돌프가 작곡을 독점 하면서부터 완성되었다. 탈퇴 후 자신의 밴드 일렉트릭선을 결성하여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13] 1983년까지 음악일을 하고 은퇴를 하여 일반인으로 살고 있다.[14] 스콜피온즈 데뷔 초창기 및 황금기를 같이 하였던 멤버. 울리 존 로스의 밴드 Dawn Road에서 같이 활동했던 멤버로서 드러머 위르겐 로젠탈(Jürgen Rosenthal)과 같이 가입. 울리 존 로스와 위르겐 로젠탈의 탈퇴 후에도 밴드에 남았다. 현 베이시스트인 파베우 몬치보다가 2022년 기준으로 18년차이며 그 이전까진 프란시스 부흐홀츠가 가장 오래 재직한 베이시스트였다. 마이클 솅커 밴드 3기의 멤버.[15] 이 양반도 꽤 오래 재직하였는데, 영화 감독을 한답시고 탈퇴하였다.[16] 여러 밴드를 전전하면서 드러머로 아직도 활동 중이다[17] 미국인 멤버로서 초창기 드러머, 아직도 드러머로 활동 중이며 스콜피온즈 멤버들과 만나는 모양.[18] 울리 존 로스와 Dawn Road라는 밴드를 같이하다가 같이 스콜피온즈에 가입. 베이시스트 프란시스 부흐홀츠도 같은 멤버였다. 하지만 군입대를 위해 바로 탈퇴를하고 전역 후 Eloy에서 활동.[19] 1980년대 말까지 음악인으로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20] Steelover, Such a Noise 라는 밴드서 활동, 아직도 드러머로서 활동 중.[21] 스콜피온즈 황금기 시절 라인업의 멤버. 훗날 마이클 솅커 밴드 3기 멤버. 스콜피온즈 황금기가 지나고 한참 이것 저것 실험적인 음악을하면서 제대로 갈피를 못 잡을 때, 루돌프와 마티아스와 엄청 갈등이 생긴 후 탈퇴하였다고한다. 인터뷰를 보니 아직 스콜피온즈 멤버들과 화해는 안 한 듯 하다.https://ultimateclassicrock.com/herman-rarebell-quit-scorpions-hated-music/[22] 활동 당시 작사에도 상당히 기여했는데 대표적으로 "Rock You Like a Hurricane", "Make It Real", "Dynamite", "Blackout", "Arizona", "Bad Boys Running Wild", "Don't Stop at the Top", 그리고 "Tease Me Please Me"가있다.[23] 독일에서 상당히 유명한 드러머 세션이자 작곡가. 새 드러머를 찾을 때까지 잠시 세션으로 활동.[24] 역대 드러머들 중 가장 오랜 시간을 재적하였지만 2016년 알코올 의존증으로 인해 밴드에서 해고되었다. 2024년 1월 9일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기사(한글). 사망원인은 불명.[25] 사실 이는 독일 록 그룹들의 특성이기도 하다. 독일, 네덜란드 등 서유럽 국가 자체가 성에 대해 개방적인 만큼, 록 그룹들의 이름이나 곡의 제목, 커버 아트에서 선정성이 나타나는 경우가 흔히 보인다. 대표적인 예 중 하나로 Die toten hosen과 같은 그룹이 존재한다.[26] Die toten hosen, Die Ärzte 등이 스콜피온즈의 활동으로 다져진 기반 위에서 성공한 그룹들 중 대표적인 예다.[27] 무슨 말인가 싶지만, 들어보면 진짜 그렇다. 아주 독특한 목소리이다. 약간 쇳소리도 섞여 있는데, 흔히 얘기하는 록커의 메마른 쇳소리(철금성)은 또 아니다. 노안 외모와 싱크로가 전혀 안 되는 것은 덤이다.[28] 국내 가수 중에서는 코요태의 신지가 비슷한 느낌이다. 허스키한데 맑고, 답답한데 시원한 보컬.[29] 그렇다고 한국 밖에서 발라드곡이 인기가 없다는 얘긴 아니다. 공연 때 발라드 히트곡을 부르면 관객 호응이 엄청나다.[30] 더구나 두 앨범을 프로듀싱 한 편곡자가 같은 사람이었기에 더더욱 그런 걱정이 들 수 밖에 없었다.[31] 국내 스포츠 방송이나 에어쇼같이 화려한 시작이 필요한 곳에서 많이 우려먹는다[32] 이 워스트 20 리스트들의 선정기준은 '좋은 의도로 기획되고 최고의 음악가들이 참여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애초의 목적에서 너무나 벗어나 서투른 모방으로 전락한 음반'이었다.[33] 다만 임마누엘 파후드, 알브레이트 마이어 등을 위시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유명한 솔리스트 연주자들은 대부분 레코딩에 참여하였다.[34] 영문 위키피디아에는 29장이 올라가 있다.[35] 대표적인 발라드곡 제목과 스코피온스가 아직 팬들을 사랑한다는 두 가지 뜻을 담았다.[36] 신해철이 1998년 영국에서 돌아온 후 결성한 그룹 모노크롬 활동을 같이 한 기타리스트 크리스 상그리디가 'Machine Messiah'에 들어간 기타 리프를 갖다 썼다.[37] 이 사이에 아주 잠깐 복귀하여 앨범 한 장을 낸 적 있다. 그게 바로 Holiday와 Always somewhere가 실린 국내 최고 히트 앨범인 Lovedrive.[38] 초기 앨범에만 참가했다가 첫 해외 순회 공연 때 때려치우고 유에프오로 갔기 때문에 국내 팬들은 대부분 그가 참여한 러브드라이브를 좋아하는 것이다.[39] 앨범 후기에 루돌프는 "참여해 준 동생에게 고맙고, 특히 같이 보아 준 어머니에게 감사한다."고 하였다.[40] 지금도 그렇고 독일이나 북유럽쪽에서 영어가 아닌 모국어로 활동하는 락/메탈 밴드들은 보기 어렵다. 일단 이들의 가장 큰 시장은 북미인 것도 크다. 스콜피온즈 결성 당시 때도 영국과 미국이 한참 밴드 시장이 컷을 때라 아에 처음부터 미국 시장 진출을 노렷을 수도 있다. 마이클 솅커도 이 때문에 영국으로 넘어갔었다.[41] 이미 러브드라이브 녹음 당시엔 후임 기타리스트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고, 마이클의 연주 실력이 후임자보다 못한 것도 아니며 다른 그룹에서 그럭저럭 잘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복귀를 구걸할 이유가 없다는 상황만 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마이클이 완전히 자리잡은 건 아니었으니 누구 말이 맞는지는 모른다. 러브드라이브 앨범에도 연주자로서 이름만 올라가 있지 멤버 명단에는 없으며, 함께 순회 공연을 다닌 것도 아니다. 즉 스콜피온즈에 정식 재가입 한 것이 아니다. 그룹은 루돌프와 그 친구인 보컬 마이네가 같이 이끌고 있었지만 리더는 어디까지나 그의 형이기도 한 루돌프였기 때문에 루돌프의 주장도 근거가 있을수 있다.[42] 지금이야 평범하게 입고다니지만, 뭔가 화려하게 차려입었던 것은 80년대 쯤이었고 그 당시 대부분의 락 밴드들이 다 그러고 다녔다. 본인도 뭐라하기 뭐한게 마이클 솅커도 무대위에서는 비쥬얼에 상당히 신경을 썻다.[43] 루돌프의 연주 실력이 마이클보다 못한 건 사실이지만, 위에 상기되어있듯이 리듬 기타리스트로서는 결코 무시할 실력이 아니다. 리드 기타리스트가 바뀔 때마다 계속 성향이 바뀌는 가운데서도 그에 다 맞춰 절묘한 하모니를 보여준다. 메탈리카의 리듬 기타인 제임스 헷필드처럼 무대를 휘어잡는 능력은 일품이다. 공연을 하는 밴드로서 무대를 장악하고 관객들의 호응을 받아내는 역할이 얼마나 어려운지 밴드를 해본 사람들은 안다. 마이클이 이렇게 비판하는 것을 보면 뭔가 형제간에 다툴 일이 더 있었는지도 모른다.[44] 그런데 2018년에 인터뷰에서 또 형을 깠다. 2021년에는 "러브드라이브 당시 형이 밴드에 있어 달라고 전화로 울며 매달렸다."라고 더 심하게 깠다. 아무래도 뭔가 있나 보다.[45]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유명한 지강헌 탈주 사건 때 인질 대치 중 틀어 달라고 했던 곡으로 아는 사람도 있는데, 그 때의 노래는 비 지스의 Holiday이다.[46] 뮤직비디오 혁신으로 꼽히는 A-haTake On Me가 1984년, MTV 시대를 이끈 다이어 스트레이츠Money fot nothing 뮤직비디오가 1985년이다.[47] 국내에선 여러 곳에서 BGM으로 자주 활용되던 베를린필과 협연한 Hurricane 2000이 훨씬 더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