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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17:06:20

쿠트 포위전


1. 개요2. 발단
2.1. 오스만군의 포위
3. 여파

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메소포타미아 전역의 전투 중 하나로 갈리폴리 전투와 함께 유럽의 환자 오스만 제국군이 날린 영국군 역사상 최악의 참패로 불리는 전투다.

2. 발단

갈리폴리 전투가 지지부진하자 영국은 메소포타미아 전선에 있는 영국군에게 빠른 진격을 요구했고, 현지상황에 맞춰 진군하던 영국군은 길어지는 보급선을 무시하고 진격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진격하던 영국군의 찰스 타운센트 장군은 크데시폰의 오스만 방어선을 공격했지만, 오스만군의 강한 저항에 물러나 쿠트로 물러났다. 이후 타운센드 장군은 바스라에서 강을 따라 계속 진군하는 대신 쿠트에 머물러 위치를 고수하기로 했다. 긴 강 고리 안에 위치한 쿠트는 바스라에서 오는 보급선이 늘어져 있었지만 방어하기 유리한 지형이었다. 당시 오스만군과 영국군 모두 1만명으로 엇비슷했기에 공격하기보단 방어하면서 기회를 보기로 결정했고 병사가 2만명까지 충당될땐 그 판단은 옳다고 생각됐다. 그러나...

2.1. 오스만군의 포위

영국군을 추격한 오스만 제국의 할릴 쿠트 파샤와 콜마르 폰 데르 골츠 장군은 직접공격하지 않고 쿠트와 바스라 사이의 길을 막고 역으로 포위했다. 당시 쿠트남부는 모래폭풍이 심해서 정찰이 어렵고, 증원도 띄엄띄엄 왔으니 비워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 틈을 파고들었다. 바스라에 있는 영국군의 구원시도를 막기위해 요새를 건설하고 주요 탈출로를 봉쇄해 쿠트의 영국군을 말려죽이려 했다.

3. 여파

영국 군사 역사상 가장 비참한 항복
얀 모리스-영국의 역사가-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군이 겪은 최악의 패배
크리스토퍼 캐서우드
항복한 영국군은 알레포에 있는 포로수용소로 보내졌고, 그 중 인도군 일부는 오스만 인도의용군에 합류해 오스만군과 같이 싸우게된다. 항복한 타운센트 장군은 콘스탄티니예로 보내져, 수도 근처 섬에서 유폐된다.

이 전투 이후 메소포타미아 전선은 잠시 소강상태를 유지했지만, 오스만 제국은 주요 전선인 캅카스와 시나이 반도,아랍에서 밀려나고 있었고 영국군은 이 전투 패배를 교훈삼으며 준비해 10개월 뒤 바그다드를 점령하면서 쿠트에서의 패배를 부분적으로 설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는 유럽의 환자라고 불리던 오스만 제국이 1차 대전에서 대국을 상대로 보여준 2번째 대승[1]이며 제국이란 이름이 결코 노름으로 딴게 아님을 보여줬다.

[1] 1번째는 당연히 갈리폴리 전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