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536349> 샹파뉴고지 전투 Battle of the Hills Bataille des Monts de Champagne troisième bataille de Champagne. | |||
제1차 세계 대전 서부전선의 전투 | |||
샹파뉴고지 전투 기간 중 전선의 변화 | |||
날짜 | |||
1917년 4월 17일 ~ 1917년 5월 20일 | |||
장소 | |||
프랑스 샹파뉴 지방 | |||
협상국 | 동맹국 | ||
교전국 | [[프랑스 제3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 [[독일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
지휘관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필리프 페탱|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프랑수아 앙투안 | ]][[틀:깃발| ]][[로베르 니벨|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빌헬름 폰 프로이센|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카를 폰 아이넴 | ]][[틀:깃발| ]][[에리히 루덴도르프| ]]|
병력 | 13개 사단 | 17개 사단 | |
피해 규모 | 21,697명 | 6,120명 포로 | |
결과 | |||
전술적 측면의 프랑스군 승리 전략적으로는 승부 미결 | |||
영향 | |||
모롱빌리에 고지 일부의 프랑스군 장악 양측의 막대한 인명 피해 니벨 공세의 부분적 실패와 니벨의 실각 페탱의 신임 총사령관 부임 |
[clearfix]
1. 개요
샹파뉴고지 전투(Battle of the Hills)는 1917년 4월 17일부터 5월 20일까지 제1차 세계 대전 중 샹파뉴 지역의 랑스와 오브리브(Aubérive)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로베르 니벨 장군의 니벨 공세의 일환으로, 프랑스군이 모롱빌리에(Moronvilliers) 고지군을 장악하고 있던 독일 제국군을 공격했다. 결과적으로는 프랑스군이 고지의 일부를 점령하는데 그쳤으며, 양측 모두 큰 손실을 입었다.2. 배경
1914년 이래 서부전선에서는 참호전으로 인해 전선에 큰 변화가 없었다.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양측은 살상력이 강화된 화력과 증가된 병력을 앞세워 공세를 반복했지만 눈에 띄는 성과는 없었다. 1916년 베르덩 전투와 솜 전투 등 대규모 공방전에서도 양측은 막대한 사상자만 발생했을 뿐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로베르 니벨 장군이 1916년 12월 조제프 조프르의 후임으로 프랑스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니벨은 1917년 봄 대규모 공세를 통해 전선 돌파를 모색했다. 영국군과 함께 아라스 전투를 조율하는 한편, 프랑스군 단독으로 엔(Aisne) 전투와 샹파뉴고지 전투를 계획했다. 특히 샹파뉴고지 전투의 목표는 모롱빌리에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당시 이 고지군은 독일군의 중요한 전략거점이었다. 이곳만 점령하면 독일군을 동쪽으로 밀어내고, 엔강 북쪽에서 아라스 공세를 펼치는 영국군과 연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3. 전투 준비
전투 준비를 위해 프랑스군은 랑스와 오브리브 사이의 16km 전선에 병력과 화력을 집중했다. 공격 부대로는 제4군 예하의 제12군단, 제17군단, 제8군단 등 총 13개 사단이 투입되었다. 여기에 탱크 그루프망 III의 슈나이더 CA1 2개 그룹과 생샤몽 전차 일부가 배속되었다. 제공권 장악을 위해 비행대대(Escadrille) 22개와 기구부대 11개가 배치되었고, 포병 지원을 위해 1,600문의 야포가 전선에 배치되었다.4월 10일부터 제4군 포병은 공격 준비 사격을 개시했다. 독일군 참호와 철조망, 벙커를 파괴하고 모롱빌리에 고지로 가는 길목을 열어젖히기 위해 대규모 포격이 단행되었다. 독일군 측에서도 800문 이상의 야포로 맞대응했다. 쌍방의 포격전으로 전장은 시뻘건 불바다로 변했고, 포탄 구덩이와 시신들이 즐비했다.
개전 전야인 4월 16일까지 프랑스군 공격 준비가 완료되었다. 기상 악화에도 불구하고 니벨 장군은 공격 개시를 명령했다. "수백만 명의 병사들이 최후의 승리를 위해 1917년의 대전투로 나아갈 것"이라는 격려의 연설과 함께, 샹파뉴고지 전투의 막이 올랐다.
4. 전투
4.1. 4월 17일
프랑스 제4군이 폭우와 눈보라 속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초기에는 기습 효과로 진격했으나 독일군의 저항으로 점차 돌파구가 줄어들었다. 특히 코르니예 고지(Mont Cornillet) 터널을 통해 증원된 독일군이 프랑스군을 압박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군은 몽 코르니예와 몽 블론(Mont Blond)의 일부만 점령한 채 공세가 멈췄다.4.2. 4월 18일 - 5월 20일
프랑스군은 코르니예 고지와 페르투아 고지(Mont Perthois)의 독일 거점을 집중 공격했다. 오 고지(Mont Haut) 동쪽 정상도 함락되었으나 서쪽 정상의 독일군은 완강히 저항했다. 이후에도 제한된 공격이 있었으나 돌파구를 마련하지는 못했다. 5월 20일 프랑스군의 마지막 대공세가 실패로 끝나며 전투는 사실상 종결되었다.5. 결과
약 1개월간의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진지를 다소 진전시켰으나 독일 방어선을 돌파하지는 못했다. 프랑스군은 2만 1,697명의 사상자를 냈고, 독일군은 6,120명이 포로가 되었다. 니벨 공세의 실패로 프랑스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고, 부분적인 병사들의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한편 모롱빌리에 고지의 상실은 독일 측에도 타격이 되어 이후 16차례의 역습이 있었으나 대부분 실패했다.6. 전투의 의의
샹파뉴고지 전투는 니벨 공세의 일부로, 서부전선 교착 상태를 돌파하려 한 시도였다. 그러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을 뿐더러 양측에 큰 피해만 안겨주었다. 결국 야심찬 니벨 공세는 실패로 끝나 4월 말에는 로베르 니벨이 물러나고 필리프 페탱이 새 총사령관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전투는 지형과 화력이 유리한 방어 측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당시의 전쟁 상황을 잘 보여주었다.7. 기타
- 다이스가 제작한 게임이자 제1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FPS 게임인 <배틀필드 1>에서 이 전투의 무대 중 하나인 샹파뉴고지를 배경으로 한 맵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