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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20:52:01

도고 헤이하치로

파일:일본 제국 해군기.svg
연합함대사령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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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령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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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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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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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오야마 이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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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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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마사타케
1919년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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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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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라우치 히사이치
19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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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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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후시미노미야 요리히토 친왕
1923년
가토 도모사부로
1932년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
1943년
야마모토 이소로쿠
1943년
나가노 오사미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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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대 연합함대사령장관
도고 헤이하치로
東郷平八郎 | Tōgō Heihachirō
파일:Tōgō_Heihachirō.jpg
<colbgcolor=#b0313f><colcolor=#fff> 출생 1848년 1월 27일
사쓰마국 가고시마군 카지야초
(현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카지야초)
사망 1934년 5월 30일 (향년 86세)
도쿄부 도쿄시 코지마치구 반초
(현 도쿄도 치요다구)
묘소 타마레이엔(多磨霊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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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0313f><colcolor=#fff> 본명 사네요시(実良)
통칭 헤이하치로(平八郎)
신체 153cm
최종 작위 후작
서훈 내역 서보장(瑞宝章)(3,5,6급)
욱일장(旭日章)(1,4급)
금치훈장(金鵄勲章)(1,4급)
대훈위 국화대수장(大勲位菊花大綬章)
대훈위 국화장경식(大勲位菊花章頸飾)
한국병합기념장(韓国併合記念章)
로열 빅토리아 훈장(영국)
메리트 훈장(영국)
레지옹 도뇌르 그랑도피시에 훈장(프랑스)
폴란드 재건국 훈장 대십자장(폴란드 제2공화국)
오드로제니아 폴스키 훈장 대십자장(폴란드 제2공화국)
성녀 안 훈장 1등급 (러시아 제국)
레오폴트 대훈장(벨기에)
산티 마우리치오 에 라자로 훈장(이탈리아 왕국)
해군공훈장 대십자장(스페인)
대훈위 금척대수장(大勳位金尺大綬章)(대한제국)[1]
순종황제 남서순행기념장(대한제국)
군사 경력
복무 일본 제국 해군
1863년 ~ 1913년
최종 계급 원수[2]
주요 보직 사세보진수부사령장관
상비함대사령장관
마이즈루진수부사령장관
연합함대사령장관
해군군령부장
주요 참전 사쓰에이 전쟁
보신 전쟁
청일전쟁
러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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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일화4. 가족5. 여담6.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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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해군 제독. 러일전쟁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한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해군을 승리로 이끈 지휘관이었다.

2. 생애

파일:Togo 1877.jpg
1877년 유럽 유학 당시 찍은 사진

규슈 사쓰마번에서 태어났으며[3] 원래 어렸을 때 이름은 '쥬고로(仲五郎)'였으나, 성인이 되면서 '헤이하치로'로 이름을 바꿨다. 집안은 13세기부터 무사 집안이었으며, 이런 전통의 영향으로 도고 헤이하치로도 무예를 좋아했다. 그러나 이웃 사람들에게서 '반항아'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반항이 잦았다.

조금 더 정확하게는 가고시마현 중에서도 사쓰마의 사무라이 아들이였다고 한다.[4]

도고 헤이하치로는 이후 자신의 능력을 더는 반항으로 낭비하지 않고 제대로 발휘하려고 대포를 다루는 기술을 배워서 사쓰마 지역의 다이묘시마즈 타다요시의 휘하 사무라이가 되었다. 사쓰에이 전쟁에도 사쓰마 번의 해안 포대 포술장으로서 참전했었던 전력이 있다. 그러던 중 1863년 어느 날, "앞으로 있을 외세의 침략에서 조국 일본을 수호하려면 먼저 막강한 해군력을 육성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해군 사관으로 임관해 1871년부터 1878년까지 동료 11명과 함께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 이 8년간의 유학 생활에서 돌아온 1878년 7월에 중위, 12월에 대위, 그 다음해 12월에 소좌가 되는 등 빠르게 승진을 계속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나니와급 방호순양함 네임쉽 나니와의 함장을 맡아 풍도 해전, 황해 해전, 웨이하이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그 후 1904년 러일전쟁 때는 일본 연합함대 총사령관에 올라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제국이 자랑하는 발트 함대를 함선의 성능과 진형, 그리고 러시아 함대의 약점을 정확히 찔러서 완전히 박살냄으로써 사기 측면에서 일본의 승리로 기울어 가던 전세를 완전히 굳혔고, 승전 이후 국가적 영웅으로 등극한다.

3. 일화

파일:external/www.yuko2ch.net/1286084062731.jpg

해군 사관 예복을 입고, 황태자 신분으로 육군 및 해군 대좌이던 시절의 쇼와 덴노와 함께 찍은 사진.[5]

도고는 몇 안 되는 진짜 군인으로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뤼순 요새를 봉쇄하다가 후지급 전함 야시마와 시키시마급 전함 하츠세가 기뢰에 접촉하는 바람에 폭침되는 대참사 후에 함장들이 보고하러 와서 눈치만 살피자 오히려 따스하게 격려를 했다거나, 발트 함대 격파 이후에는 부상당하고 포로가 된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에게 직접 문병을 가는 등, 부하나 패자에게 너그러웠다. 이런 고매한 인품과 행동으로 생전에 전 일본 국민으로부터 추앙받았다.
파일:external/meiji.sakanouenokumo.jp/togo.jpg
1933년 사진(86세)
그러나 정작 퇴역 이후에는 지나치게 주변에서 추앙한 탓인지 여러 가지로 독선적인 인물이 되었고, 결국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불황기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체결 시기에 이르러서는 일본 해군의 체질 개선을 가로막은 원흉이 되고 말았다. 당장 12인치 포를 12문 탑재한 카와치급드레드노트급이 되지 못한 것은 적어도 주포 중 일부는 적함보다 강력한 것을 달아야 한다고 주장한 도고 헤이하치로의 실책이 컸다. 덕분에 카와치급은 12인치 45구경장과 12인치 50구경장 포를 혼용하는 바람에 일제사격협차같은 드레드노트급 전함이 사용하는 함포사격술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은 영국에서 기술을 수입할 목적으로 콩고급 순양전함을 도입하게 된다. 문제는 쓰시마 해전에서 드레드노트급 전함이 탄생하는 계기를 만들어낸 제독이 도고 헤이하치로라는 것이며, 따라서 동일인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실책이었다.

게다가 본인이 의도한 결과야 아니었겠지만, 해군 복제 개선을 막음으로서 일본 해군 장교들이 당시 미 해군 근무복을 참고해 만든, 목이 꽉 조여 시대에 뒤떨어지고 불편한 1종 군장(동근무복 겸 동정복)을 입고 싸우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1920년대에 해군 장교 동계 피복을 당시의 영국 및 미국처럼 목이 트인 더블 버튼에 셔츠넥타이를 안에 착용하는 보다 국제표준에 가까운 것으로 바꾸자는 의견이 나왔을 때, 도고에게 의견을 묻자 도고는 딱 잘라서 "이 옷은 쓰시마 해전 승리의 정수다."라는 말로 반대 의견을 밝혀 무산시켰다. 위 히로히토와 함께 찍은 사진 속에서 입은 동예복은 그나마 타국 해군의 피복과 유사한 형태다.[6]

노기 장군 사후, 그의 뒤를 이어 히로히토의 황태자 전담 교사를 맡았는데, 히로히토는 노기 장군을 훌륭한 스승으로 여겼으나 도고 제독은 박하게 평했다고 한다.

장남 도고 효는 군대에 가지 않고[7] 관료로 살다가 1969년에 사망, 차남 도고 미노루 제독은 해군 장교가 되어 소장까지 진급, 태평양 전쟁을 겪고 1962년에 죽었다.

4. 가족

아버지: 도고 사네토모
어머니: 도고 마사코
첫째형: 도고 사네나가
누나: (요절)
둘째형: 도고 히로유키(요절)
셋째형: 오구라 소쿠로(양자)
남동생: 도고 사네타케

장남: 도고 효 - 손녀: 도고 료코
차남: 도고 미노루
장녀: 도고 야치요
차녀: 도고 치요코 = 사위: 소노다 미노루

5. 여담

6. 창작물에서

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에서는 와타리 테츠야가 연기했다.

문명 6에서는 위대한 제독으로 등장한다.

도고 헤이하치로도 후손들의 모에화를 피하지 못했다. 일본에서 출간된, 《여체화!! 세계장군열전~20세기편~(にょたいか!!世界の将軍列伝~20世紀編~)》에서 도고 헤이하치로를 충격의 미소녀로 모에화했다. 링크


[1] 대한제국 최고 훈장[2] 정식명칭은 원수 해군대장이다. 호칭은 원수이지만 계급은 대장으로 일종의 명예계급이다. 계급으로서의 원수는 육해군 통틀어 동향 출신의 사이고 다카모리가 유일하다.[3] 그래서 가고시마시 기온노스에 기념 공원이 있다.[4] 드와이트 존 짐머만.역사를 들썩인 전쟁 244장면.현암사.2011.pp.293[5] 쇼와 덴노의 키는 165cm로 당대 일본인의 평균 신장보다 다소 큰 편이었다.[6] 사실 영국식 해군 정복보다는 독일 제국 해군 예복과 더 비슷하다.[7] 딱히 징병을 기피한 건 아니고, 메이지 정부 시절엔 징병제 도입 초기라 징집 제외 대상이 매우 많았는데, 집안의 장남 역시 가문의 대를 잇는 존재로 여겨지던 때라 징병 대상에서 제외됐었다.[8] 1812~1901년으로 지금 시각으로 봐도 꽤나 장수한 편이다.[9] 그러나 노기 항목에도 일부 나와 있듯이 그 당시엔 누구라도 노기가 한 행동(포격 이후 기관총 진지로 보병 일제 돌격) 이외에는 다른 선택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러일 전쟁이 1차대전 당시의 참호전 고기분쇄기의 프리퀄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노기가 비판받아야 한다면 1차대전 당시 기술 부족으로 요새를 점령하기 위해 일제 포격 이후 일제 돌격이라는 선택지 밖에 쓸 수 없던 동맹국, 협상국 장성 모두들이 다 비판받아야 한다.[10] 메인급 전함 3번함으로 이 이름은 나중에 페이퍼 플랜이 된 몬태나급의 2번함 (BB-67)로 계승된다[11] 이 신분은 준사관 계급에 상당하는 위치인데, 20세기 초까지 미국은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준사관으로 2년쯤 복무하다가 소위 임관시험을 통과해야 정식 장교 생활을 할 수 있게끔 했다.[12] 미카사 함의 보존을 강력 주장한 인물 역시 니미츠 제독이었다.[13] 핀란드어로 '제독'[14] 한 예시로 당장 영국인들의 괴식이라며 돌아다니는 정어리 파이(stargazy pie)콘월 항구마을에서만 먹던 토속요리였지. 인터넷으로 밈으로 접하기 전에 해당 음식에 대해 모르는 영국인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정어리 파이가 시각적으로 괴상망측해보이는건 사실이지만 먹어본 사람들 이야기론 먹을만하다는게 중론[15] 다만 여기에는 제국주의적 야망과 꼭 맞아떨어지는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과 명나라를 정복하려 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의 밑에서 임진왜란을 수행했던 장군들를 띄워주던 분위기도 한몫 했는데 그 히데요시의 야망을 틀어막은게 이순신이다보니 이순신을 띄워주어야 그들이 진 것이 합리화되기 때문이다. 특히 이순신을 띄워주는 분위기는 해군에서 강했는데 제해권을 장악하여 조선을 승전으로 이끈 이순신을 사례로 들어 그걸 이유로 해군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기 위해서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