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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5:36:21

존 피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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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ral of the Fleet
The Right Honourable
[1]
The Lord Fisher
GCB, OM, GCVO
파일:John_Arbuthnot_Fisher,_1st_Baron_Fisher_by_Sir_Hubert_von_Herkomer.jpg
이름 John Arbuthnot Fisher
존 아버스넛 피셔
출생 1841년 1월 25일
실론 섬 람보다
사망 1920년 7월 10일 (향년 79세)
영국 잉글랜드 런던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복무 기간 1854년 ~ 1911년
1914년 ~ 1915년
최종 계급 파일:영국 해군기.svg 해군 원수
(Admiral of the Fleet)
지휘 북미 및 서인도 기지
(North America and West Indies Station)
지중해함대
(Mediterranean Fleet)
포츠머스 총사령관
(Commander-in-Chief, Portsmouth)
제1해군경
(First Sea Lord)
작위 노포크 카운티의 킬버스톤의 피셔 남작 (1909)[2]

1. 개요2. 생애3. 커리어

[clearfix]

1. 개요

영국 해군의 제독. 목조 범선의 시대에 입대해 60년 가까이 복무하면서 드레드노트급 전함에 이르기까지의 발전을 이끈 명제독이다.

2. 생애

존 피셔는 1841년 실론 섬에서 11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실론에 주둔중이던 하이랜더 연대의 대위였고, 어머니는 부유한 와인상인의 딸이었는데, 부모는 모두 큰키의 미남미녀였는데 반해, 그는 땅딸막하고 못생겼으며, 사람들이 아시아인으로 오인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난 해에 그의 아버지는 장교 계급을 팔고 커피 농장을 경영했다. 하지만 성과가 신통치 않았기에 결국 피셔는 6살의 나이에 영국의 외할아버지에게 보내져서 영국에서 자랐다. 하지만 외할아버지 역시 가세가 기울어, 결국 셋집을 전전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자란 탓인지, 그는 평생 어머니[3]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4]

피셔는 실론 주지사의 보좌관을 맡았던 아버지의 인맥[5]으로 1854년 해군에 입대할 수 있었다.[6] 아무래도 연줄이 연줄이었던만큼, 임관 시험은 필기는 주기도문을 쓰고, 실기로는 의자에 뛰어오르는 것일 정도 쉬웠지만, 배에 오른 첫날 채찍질 형벌을 받는 병사들을 보고 기절했다고 한다. 해군에 입대한 후, 피셔는 크림 전쟁제2차 아편전쟁에 참전했다. 영국에 돌아온 후에는 불과 스무살의 나이에 해군장교 시험에서 항해술과 포술에서 최우수 성적을 기록하며 합격했다. 이후 여러 함선 및 해군학교에서 포술 전문가로 복무했고 이 과정에서 당시 최신예 함포에 대한 경험을 쌓았다. 이와 동시 피셔는 최신예 무기인 어뢰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독일의 해군기지를 방문한 경험 계기로 전기 어뢰에 대한 논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1869년, 20대의 나이에 중령으로 진급한 피셔는 몇몇 군함에서 부함장으로 복무했고, 해군학교에서 포술 및 어뢰 교육을 담당했다. 1874년에는 대령으로 진급하여 교육용 함인 HMS 버논의 사령관이 되었다. 1878년에는 북미의 HMS 벨레로폰에 배치되어 첫 실전함장 직을 수행했다. 이후 지중해와 북미를 오가면서 여러 함선의 함장을 맡았던 피셔는 1882년 지중해를 순방하는 빅토리아 여왕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피셔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된다.

영국-이집트 전쟁에 참전한 피셔는 알렉산드리아 포격에 참여했고, 상륙 당시에는 정찰 수단이 부족하자 열차에 무장을 탑재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나 피셔는 이집트에서 말라리아에 걸렸고 본인이 병가를 고사했지만, 해군성의 명령에 의해 영국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영국에서 피셔는 웨일즈 공 부부와 친분을 쌓게 되었고, 빅토리아 여왕의 초대를 받아 오스본 하우스에 방문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하였다.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피셔는 포술학교장을 맡았지만, 건강 문제로 인해 다시 요양하게 된다. 다시 해군으로 복귀한 피셔는 해군병기국장에 임명되었다. 병기국장 임기 동안 피셔는 어뢰정에 대응하기 위한 속사포의 개발을 담당했다. 1887년부터 여왕의 부관 직을 같이 수행한 피셔는 1890년 제독으로 진급했다.

병기국장 임기를 마친 후, 포츠머스 조선소장에 임명된 피셔는 함선의 건조에 걸리는 시간을 줄여 비용을 절감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제3해군경으로 영전한 피셔는 구축함의 건조를 추진했다. 이후 북미 및 서인도 기지사령관을 역임하던 중 피셔는 솔즈베리 후작의 지명으로 제1차 만국평화회의에 영국 해군 대표로 파견되었다.

만국평화회의 이후, 지중해함대사령관에 임명된 피셔는 임기 동안 함대의 훈련과 전투 준비 태세를 개선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피셔는 해군성과 마찰을 빚었고, 군수업체 이사로 옮길 것을 권유받기도 했다. 이후 제2해군경으로 해군성에 돌아온 피셔는 해군 내에서 과학 기술의 중요성이 높아짐에 따라, 병기 장교와 항해 장교를 따로 육성하던 기존의 커리큘럼을 합치는 개혁을 추진했다. 이후 포츠머스 총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긴 피셔는 1904년에 제1해군경에 취임하게 된다.

제1해군경이 된 피셔는 드레드노트급 전함순양전함의 건조를 추진했으며, 여러 구형 함선을 매각하거나 예비역으로 전환시켰다. 그리고 함선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바꾸는 개혁을 추진했다. 한편 피셔는 독일 해군을 상대로 선제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킬 운하의 확장이 완료되는 1914년 10월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7] 1909년에 남작 작위를 받은 피셔는 1911년 70세의 나이에 해군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 왕립 연료 및 엔진 위원회 의장을 맡았던 피셔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해군성을 지속적으로 방문하면서 윈스턴 처칠과 면담을 가졌다. 그리고 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자가 출신 문제로 제1해군경에서 사임하자, 피셔는 현역으로 복귀해 제1해군경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처칠과 갈등이 일어나면서[8] 피셔는 다시 해군에서 은퇴했고, 나머지 전쟁 기간 동안 피셔는 발명 및 연구 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피셔는 1920년 79세의 나이에 런던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3. 커리어



[1] 남작 본인에 대한 경칭[2] Baron Fisher of Kilverstone in the County of Norfolk[3] 아버지는 그가 젊었을 때 이미 사고로 사망했다.[4] 어머니와 싸우거나 한 것이 아니라 아예 만나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5] 실론 주지사의 미망인의 이웃집 아저씨(...) 윌리엄 파커 경이 해군 제독이었다. 파커는 50년전에 넬슨제독 휘하의 선장 중 한명이었다.[6] 피셔의 동생들도 해군에 입대했다. 남동생 프레데릭은 몰타 조선소장과 그리니치의 왕립해군대학장을 지내고 대장까지 진급했으며, 또 다른 남동생인 필립은 대위까지 진급했지만 1880년 폭풍우 속에서 탑승한 함선과 함께 실종되었다.[7] 제1차 세계 대전은 1914년 8월에 일어났으니 놀랍게도 시기는 거의 맞췄다. 다만, 전쟁의 발단은 킬 운하나 독일 해군 때문이 아닌, 전혀 다른 사건이었다.[8] 윈스턴 처칠갈리폴리 상륙작전을 추진했지만, 반면에 피셔는 발트 해 상륙을 선호했다. 무엇보다 갈리폴리 전투 중 다수의 수상함이 침몰하자 결국 처칠에게 항의하는 의미에서 사퇴한다.[사관후보생] [중위] [대위] [12] HMS 엑설런트는 함선이 아니라 육상에 설치된 해군의 포술 학교다.[중령] [14] HMS 버넌은 함선이 아니라 육상에 설치된 해군의 어뢰 학교다.[대령] [소장] [17] 해군 통제관이라고 불리며, 해군의 선박과 장비의 공급을 총괄하는 직책이다.[중장] [대장] [20] 해군의 인사를 담당하는 직책이다.[원수] [퇴역] [현역] [재퇴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