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버트 키치너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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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Horatio Herbert Kitchener 호레이쇼 허버트 키치너 |
출생 | 1850년 6월 24일 |
아일랜드 카운티 케리주 발리롱포드 | |
사망 | 1916년 6월 5일 (향년 66세) |
영국 오크니 제도 서쪽 해상 HMS 햄프셔 | |
국적 | 영국 |
작위 | 초대 키치너 백작(1914년 ~ 1916년) [2][3] |
복무 기간 | 1884년 ~ 1916년 |
최종 계급 | 육군 원수 (Field Marshal) |
지휘 | 이집트군(Egyptian Army) 남아프리카 주둔 영국군(British Forces in South Africa) 인도 총사령관(Commander-in-Chief, India)(1902년 ~ 1909년) |
약력 | 버뮤다의 총독(1908년 ~ 1912년) 영국 전쟁 장관(1914년 ~ 191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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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육군의 장군이자 식민지 행정관이다. 찰스 조지 고든의 죽음 이후 마흐디 운동을 진압했으며, 제2차 보어 전쟁 당시에는 영국군 참모장, 사령관을 맡았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전쟁국무장관을 맡아 키치너 육군을 조직하고 대대적인 징병제를 실시했다.훗날 이 장군의 이름을 딴 도시가 캐나다 온타리오주에 세워진다. 사실 도시 자체는 이전부터 있던 곳으로 본래 이름은 베를린(Berlin)이었으나, 1차 세계대전 당시 반독일 정서 때문에 주민투표를 통해 시명을 키치너로 바꾸기로 정한 것.
2. 생애
키치너는 육군 장교 출신인 아버지를 두었고, 보불전쟁 당시에 프랑스 야전구급부대에서 복무하기도 했다. 1871년에 영국군에 공병으로 입대한 후, 이 경력으로 인해 케임브리지 공작에게 까이기도 했다. 키치너의 형 월터 역시 육군에서 복무했으며, 중장까지 진급하고 버뮤다 주지사를 지내기도 했다.입대 후 키치너는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키프로스에서 측량을 맡았다. 1874년에는 서부 팔레스타인을 조사하는 원정대를 이끌기도 했다. 1883년 대위가 된 키치너는 이집트군 재건을 위해 이집트에 배치되었고, 이집트군 소령 계급을 받았다. 이집트에서 키치너는 기병연대의 부연대장이 되었고, 찰스 조지 고든을 돕기 위한 구원군 소속으로 원정에 참여하기도 했다.
키치너는 실패한 원정 이후 연달아 임시 소령과 중령으로 진급했고, 잔지바르 경계 위원회의 영국 측 위원을 맡기도 했다. 1886년 키치너는 이집트 동부 수단과 홍해 연안의 총독이 되었고, 마흐디군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기도 했다. 1888년에는 임시 대령으로 진급하고, 다음 년에는 정식 소령으로 진급한 키치너는 계속 이어지는 마흐디 전쟁에서 기병대를 지휘했다. 뒤이어 키치너는 이집트 경찰 감찰관을 거쳐 이집트 육군 부관감을 맡았고, 1892년에는 지역 준장 계급과 함께 이집트군 사령관이 되었다.
마흐디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소장으로 진급한 키치너는 이전 고든을 돕기 위한 원정의 실패가 강을 통한 보급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철도를 건설해 보급을 하기로 했고 이를 통해 옴두르만에서 마흐디군을 말 그대로 지워버리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4] 계속 남하하던 중, 키치너의 군은 프랑스가 보낸 마르샹의 원정대와 마주치게 되면서 파쇼다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파쇼다 사건은 해프닝으로 끝났고, 키치너는 수단 총독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마흐디 전쟁에서의 공로로 키치너는 하르툼과 서퍽 카운티의 아스팔의 키치너 남작(Baron Kitchener, of Khartoum and of Aspall in the County of Suffolk)에 서임되었다.
제2차 보어 전쟁이 일어나자 키치너는 프레데릭 로버츠 원수를 사령관으로 하는 대규모 지원군의 참모장이 되었다. 키치너는 훌륭하게 로버츠를 보좌했고, 전쟁이 초토화 작전으로 이행하자 중장 진급과 함께 사령관이 되었다[5].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역 대장으로 진급한 키치너는 로버츠의 전술을 이어받아 초토화 작전을 수행했고, 종전과 함께 정식 대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인도 총사령관에 임명된 키치너는 인도군의 개혁을 시도했지만, 키치너의 임명을 지지했던 조지 커즌 총독과 충돌을 일으켰다. 결국 키치너는 커즌 총독과의 파워게임에서 승리했고, 인도 총독의 자리를 노렸지만 이는 성사되지 않았다.
1909년에 원수로 진급한 키치너는 조지 5세의 대관식 동안 왕실 호위대장을 맡았고, 이집트 총영사에 임명되었다. 1909년 10월에는 아시아 방문에 나섰으며, 1909년 10월 27일에 대한제국을 방문해 궁중 유물인 창해 역사의 철퇴를 구경한 기록이 있고, 그 직후 일본을 방문해 이토 히로부미의 국가장에 영국 조문 사절로 참석했다. 1914년에는 하르툼과 켄트 카운티의 브룸의 키치너 백작(Earl Kitchener, of Khartoum and of Broome in the County of Kent)에 서임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총리는 키치너를 전쟁국무장관에 임명했고, 기존의 영토군을 불신한 키치너는 유명한 모병광고와 함께 대대적인 지원병을 모집하는 데 성공했다. 이 부대들은 '키치너 육군'으로 불렸다. 그러나 키치너는 내부에서 불신에 시달렸고, 긴 전쟁에 대비한 식량 조달의 어려움에 대해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포탄 부족으로 비난을 받고 권한 일부를 잃었다. 이후 니콜라이 2세와 협상을 위해 HMS 햄프셔에 탑승해 러시아로 향하던 키치너는 독일 해군의 U보트가 설치한 기뢰에 의해 배가 침몰하면서 사망했다. 침몰 당시 키치너는 선미 갑판에 서있었다고 하며, 끝내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3. 기타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에서는 영국의 명배우 찰스 댄스가 연기했다. 해당 작품에선 주인공 옥스포드 공작의 절친으로 나온다. [6]
첫 등장은 보어 전쟁 당시 보어군의 게릴라전을 끝장내기 위해 민간인들을 모두 강제수용소에 가두는 작전을 지휘하는 것으로 나왔다. 공작 부부가 적십자 지원을 위해 전쟁터에 나왔다가 자신을 노린 총격 때문에 공작부인이 사망하자 안타깝게 여긴다.
이후 공작에게 찾아와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의 호위를 부탁했으나 결국 가브릴로의 테러로 페르디난드 부부는 살해당하고 그의 우려대로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고 만다.
전쟁이 불리해지는 가운데, 공작과 콘래드를 통해 그레고리 라스푸틴이 러시아가 영국을 돕지 못하게 막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부관인 막시밀리안 모튼의 조언대로 러시아로 향한다.
그러나 목자가 그를 경계했기 때문에 잠수함의 어뢰로 배째로 날려버린다. 그의 사인은 U보트의 기뢰에 의한 폭사로 발표되지만 공작과 콘래드 옥스포드는 비밀결사의 소행인것을 눈치챈다.
[1] 백작 본인에 대한 경칭[2] 큰형인 제2대 키치너 백작 헨리 엘리엇 슈발리에 키치너 대령이 습작받았다.[3] 키치너 백작위는 제3대 백작 헨리 허버트 키치너 소령 (1919년 2월 24일 – 2011년 12월 16일)을 끝으로 소멸했다.[4] 이때 그의 부하 중에는 젊은 장교 윈스턴 처칠이 있었다.[5] 이때 나이가 고작 쉰이었는데, 프레데릭 로버츠가 1832년생, 그 전임인 레드버스 불러가 1838년생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어린 나이에 빠르게 육군의 총사령관이 된 셈이다.[6] 다만 그와 별개로 공작과는 자주 다퉜다. 이 작품에서 허버트 키치너가 전형적인 제국주의자였다면, 옥스퍼드 공작은 영국이 무슨 자격으로 다른 나라를 침략해 군인들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아가냐며 전쟁, 더 나아가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