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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04 00:47:02

아서 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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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M : 해병대, H : 명예진급(비왕실)
※ 진급시기 기준 세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통일된 1707년 이후 기준으로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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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영국 국기.svg 제2차 세계 대전 영국군의 장성급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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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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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가 있는 인물만 종전 당시 계급으로 서술
※ 윗 첨자 : 전사
1. 종전시에는 임시 계급이었으나 이후 정식 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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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e0e0e0> 아서 해리스
Arthur Harris
Bt, GCB, OBE, AFC
파일:Air_Chief_Marshal_Sir_Arthur_Harris.jpg
본명 아서 트래버스 해리스 경, 제1대 준남작
Sir Arthur Travers Harris, 1st Baronet
출생 1892년 4월 13일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잉글랜드 글로스터셔 첼트넘
사망 1984년 4월 5일 (향년 91세)
영국 잉글랜드 옥스포드셔 고링온테임스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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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NNNcm, NNkg, 혈액형
가족 이름 (관계)
학력 초등학교 (졸업·중퇴)
중학교 (졸업·중퇴)
고등학교 (졸업·중퇴)
대학교 단과대학 (학과1·학과2[복수전공] / 재학·학사·중퇴)
종교 종교
직업 군인
소속 영국 공군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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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경력3. 4. 어록

1. 개요

영국의 군인.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중 영국 공군 폭격기사령부의 사령관직을 재임했던 공군 원수였다.

2. 경력

아프리카 대륙 남부의 로디지아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어린 시절 그곳에서 살았기에 영국 내에 연줄은 많이 없었다.

잘 알려진 별명이 2개 있다. 하나는 '폭격기 해리스'(Bomber Harris)다. 별명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적극적인 성격의 해리스는 1942년에 폭격기 사령부 지휘관에 임명된 후, 독일 본토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명령하여, 함부르크, 베를린, 쾰른, 드레스덴 등에 불벼락을 내리고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 중 제일 유명한 것은 드레스덴 폭격이다. 이 폭격의 위력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이 수행한 어떤 폭격보다도 위력적이어서 독일측 공식 집계로는 사망자 25,000여명이 발생했으나 이후 35,000여명으로 조정되었다. 다만 실제 사망자는 20,000~70,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 작전기간 동안 독일 민간인들도 피해를 많이 입었는데, 쾰른과 함부르크에서 각각 사망자 40,000~50,000명이 발생했다.

또 다른 별명은 영국 공군에서 붙인 '도살자 해리스'(Butcher Harris)다. 이 별명은 폭격 전략 때문은 아니었고, 해리스가 폭격기 승무원들의 손실과 고난에 대해서 무심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라고 한다. 전쟁 전 기간을 걸쳐 영국 공군 폭격기 승무원 120,000명 중 55,573명이 전사했다. 사망률이 자그마치 45%였다. 1939년 개전 시점에서부터 참전한 승무원들은 1945년 종전 때까지 겨우 10%만이 살아남았다. 당시 폭격기 승무원들의 생존기간은 제1차 세계 대전때의 참호전에서 보병들의 생존기간보다도 짧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였다. 폭격기 조종사 120,000명 중 50,000명이 전사하고, 10,045대가 격추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서 해리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종사들과 유가족들이 분노했다. 해리스는 1946년에 원수로 진급한 후 퇴역했고, 1953년 준남작 작위를 받았으나 외아들이 자손 없이 먼저 죽어 준남작 작위는 자신의 대에서 끝났거니와 딸도 없었으므로 그의 자손은 없다.

전쟁이 끝난 후 "나치 전범들과 나의 차이는 그들은 감옥에 갔거나 교수형을 당한 반면 나는 자유롭다는 것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2] 연합군 장성으로서 적에게 보여준 태도 때문에 미 공군의 커티스 르메이와 자주 연관된다. 르메이 외에도 성향이 비슷한 인물로는 독일 루프트바페의 원수이자 그 유명한 만프레드 폰 리히트호펜의 사촌동생이었던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이 있다.

전쟁이 끝난 후 각종 훈장과 메달을 받았으며 1946년에는 공군 참모총장을 거치지 않고 공군 원수로 진급했다. 영국 공군은 공군 참모총장이 아니면 원수로 진급하기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례적인 일이었다. 공군 참모총장을 거치지 않고 원수로 진급한 사례는 아서 해리스와 숄토 더글러스 2명 뿐이다. 그러나 드레스덴을 포함한 도시를 공습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막대한 피해도 있었다.

뉘른베르크 재판의 판결이 나온 직후, 영국의 한 제독이 "되니츠가 10년형이면 해리스는 종신형"이라고 비판 했다고 한다. 해리스에 대한 영국군 내 평가도 미묘했다는 뜻이다. 이덕에 1945년 종전 직후 영국군 수뇌부의 장군 및 제독 동상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해리스 혼자 제외되는 등 은근히 푸대접을 받기도 했다. 이에 실망한 해리스는 이놈의 나라는 영웅을 대접할 줄 모른다면서 당시 대영제국·영연방의 일원으로 영국과 동군연합 국가였던 남아프리카 연방[3]으로 이민을 갔다. 굳이 아서 해리스뿐만 아니라 영국 공군의 폭격기 승무원들은 전투기 조종사들에 비해 은근히 푸대접을 받았고, 심지어 학살자 취급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아서 해리스는 1953년 준남작 작위를 받고, 윈스턴 처칠이 다시 수상 자리를 차지하는 등 상황이 변하자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템스강에 뜬 배로 만든 집에서 살았다. 이후 1984년 4월 5일에 향년 91세로 죽었다. 그의 92번째 생일을 며칠 앞둔 때였다. 해리스가 죽은 지 5년 후인 1989년 런던의 세인트 클레멘트 교회에서 그의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제막식에서 반대 시위대는 "히틀러도 1시간에 100,000명을 죽이진 못했다."라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폭격으로 민간인 피해자가 생길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해리스가 유독 비판받는 것은 부임한 직후 내린 지령 22호 때문이었다.(1942,2,14) 그 내용은 공군의 주요 목표를 더이상 산업지대 같은 건물이 아니라 노동인구, 즉 "민간인" 그 자체로 변경하는 내용이었다. 이전의 전략폭격은 사실 큰 성과를 거두질 못하고 있었다. 폭격기로는 지정한 폭표를 맞출 가능성이 너무나도 낮아서 목표한 공장 하나를 부수는데 약 9천발의 폭탄이 필요했다고 한다. 이러다보니 대체 대형 전략 폭격기가 쓸모가 있긴하냐는 비난을 받게되자 결국 목표를 건물이 아닌 "시가지"와 "민간인"으로 변경하는 대 변환을 이끈다.[4] 해리스 입장에서 해명을 하자면 그는 성과를 내야만 하는 입장이었지만 당대 기술로는 별 방법이 없었다. 어찌되었건 지령 22호로 주요 목표를 적의 군사시설로부터 "민간인" 그 자체로 변경하자 이제 건물이 아니라 도심지 가운데 폭탄이 떨어지면 되기 때문에 폭격난이도는 크게 내려갔다. 소이탄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흔히 이 당시와 지금과 같은 기준이 적용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할 수 있지만 2025년에도 가자지구와 이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면 딱히 뭐가 다른지 알 수 없다. 중세시절에도 민간인을 공격하는 것은 기사도에 어긋나는 일로 생각했고 실제 그런 일이 자주 벌어지긴 했지만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도적, 산적영주 같은 취급을 받았다. 국제법적으로도 1864년 8월 22일날 맺어진 제네바 협약이 민간인 보호에 미흡하다는 지적을 받아 1907년 헤이그 협약에 의해 민간인에 대한 보호를 의무로 규정하고 상설 중재재판소를 설립하여 이에 대한 고의적인 공격은 전쟁범죄로 규정하였다. 물론 교전 당사국들에 의해 자주 무시당하긴 했지만 이를 기초로 전후 국제전범재판소가 열렸는데 까놓고 말해, 패전했다면 해리스는 사형을 면치못했을 것이고 그 스스로도 독일 전범들과 자신의 차이는 그들은 교수형을 당했고 나는 그렇지않다. 라고 말하며 변호를 포기할만큼 잘 알고 있었다. 말의 뉘앙스로 보아 약간은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작전의 효율성을 근거로 들며 자신의 정당성을 설파했다. 다시말하지만 독일군도 이를 능가하는 전쟁범죄를 저지르고 다닌건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게 적극적으로 열심히 민간인을 불테워 죽여도 될만한 이유나 면죄부는 되지 않으며 승전국이기에 법적 책임을 지지않는다할지라도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좋게해줘야할 이유도 되지 않는다. 그저 우리편 학살자였을 뿐인 것이다.

이 당시 해리스의 행동은 영국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 영국 본토 항공전의 결과로 폭격을 맞아본 영국인들은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고 해리스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폭격부 사령부에 언론가 정치인들을 불러들여서 전과를 자랑하고 정당성을 설명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이 필요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스스로도 꺼림직한 부분이 있었다는 이야기기도 하다.

뤼베크에서의 전략폭격에서는 2만, 함부르크에서는 5만 드레스덴에서는 10만명을 죽였는데 독일의 15개 대도시는 이렇게 쑥대밭이 되었고 이후 3년간 중소도시를 포함하여 집요한 폭격에 시달리게 된다. 전투기들은 기총소사로 가정집과 기차, 트럭 버스들을 긁고 지나갔다. 이렇게 수십만 명을 폭살한 반면 폭격기로 전쟁기간 내내 5만 정도의 전사자를 내었는데 이정도는 육상에서의 한번 대공세 정도로 날릴만한 인력피해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인도주의적 평가는 별개다. 유럽에서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 수용소에 몰아넣고 가스를 틀어버리는 것이 매우 즉각적이고 효과적이라는 것 자체는 틀림이 없다. 이 정책의 결과 유럽의 유대인은 3분의 1이 죽었고 나머지는 도망쳐서 이후 유대인이 유럽에 문제가 되는 일이 발생한 적은 없다.[5] 그에 대한 인도주의적 평가는 별개인 것과 마찬가지다.

사실 영국인들도 전략폭격을 처음부터 지지한건 아니었다. 심지어 히틀러마저도 그랬다. 전쟁 초반에는 양군 모두 군사시설물에 대한 엄격한 폭격만을 허가했다. 영국본토항공전의 초반에는 독일군도 민간인 폭격은 하지않았고 애초에 히틀러가 전략폭격의 효과를 의심하고 있었다.[6] 그랬는데 1940년 8월 24일 길을 잃은 독일 폭격기가 런던 시가지를 폭격하는 오폭사건이 났다. 영국인들은 분노했고 영국 공군은 즉각 베를린에 81대의 폭격기를 보내어 공습하였다. 이후에는 상호간에 야간폭격이 시작되었다. 즉 우발적인 사고가 상호간의 폭격의 문을 열었지만 여전히 폭격의 주요목표는 군사시설이고 어디까지나 무차별적인 폭격을 한다 정도였지만 해리스는 아예 주 목표를 "민간인"으로 전환하고 얼마나 효과적으로 민간인을 죽일지 교리부터 무장까지 손을 본 책임은 분명 존재한다.

해리스의 폭격은 뤼베크부터 시작했는데 왜 뤼베크가 선정되었느냐하면 두개의 강에 둘러쌓여있는 하중도에 조밀한 시가지가 형성되어있어서 폭격의 효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한자동맹시기부터 개발된 오래된 도시라 목조건물이 많아서 화염확산 효과를 얻기도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명령 22호에 따라 폭격의 목표를 군대나 군수산업 시설로부터 민간인으로 바꾼 효과는 명백해서 이로부터 독일은 크나큰 타격을 입기 시작했고 수천년간 유지되었던 수많은 건축 문화재와 고서 그림들이 다 불타 없어져서 심리적으로나 장기적으로나 독일에게 타격을 주기 시작했다. 동맹국 미국 여론에 조차 영향을 주자 미국 공군지휘관들은 우리는 그런 작전을 하지 않는다고 다급히 해명할 정도였다. [7]

파일:external/www.viewpictures.co.uk/STAT-LOND-0089_THE_STATUES_OF_LONDON_BOOK_AIR_CHIEF_MARSHALS_LORD_DOWDING_AND_SIR_ARTHUR_HARRISLOCATION_IN_FRONT_OF.jpg
아서 해리스의 동상은 영국 공군의 중앙 교회인 런던의 성 클레멘트 데인스 교회 앞에 있는데, 휴 다우딩[8] 공군 대장의 동상과 함께 나란히 세워져 있다. 현대까지도 반발이 이루어지는듯. 24시간 경찰이 감시한다.

아서 해리스는 폭격기 사령부에서 대장 계급으로 사령관직을 수행한 사람이었다. 이후 폭격기 사령부가 전투기 사령부와 통합되어 'Strike Command'로 바뀌는 1968년까지 모든 사령관은 중장 계급이었다. 종전되자마자 기록말살형에 가깝게 행사에서 따돌림당하고 군 경력을 끊어버린 것도 영국군도 이 사람의 작전이 문제가 될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빠르게 꼬리를 잘라버려 군에서 예편된다. 반면 커티스 르메이는 승승장구했는데 이는 민간인 거주구역과 군수공장이 섞여있어서 어쩔수 없었다는 도쿄의 특성이 작용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현대 기준으로 따지면 학살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 문제를 다룸에 있어 아서 해리스의 방법론을 옹호하면서 당연하다 생각하면, 현대에도 재발할 수 있다. 그때는 되는데 지금이 안되는 이유가 있을리 없다. 전쟁 중 인명피해와 폭격피해를 입고 보복여론에 불타던 영국인도 아니고, 나치독일에게 폭격한번 안맞아본 한국인이 독일 민간인에 대해 이러이러한 이유로 죽어 마땅하다는 판단을 내릴 정도면, 전쟁행위의 당사자에 있어서 적은 언제나 죽일 이유가 더욱 넘쳐나며 훨씬 절실할 것이다. 그래서 민간인과 문화재를 고의로 목표로하여 죽여 없앰으로서 전쟁의지를 말소시킨다는 생각으로 작전을 한다면 그게 바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된다. 해리스는 이미 2차대전 당시에도 논란이 많았으며 그 덕에 그 공에도 불구하고 은근히 따돌림을 당했다. 물론 이 사람의 행적을 바탕으로 독일군의 만행이나 전쟁책임을 희석하려고 시도해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선은 분명히 그어야한다.

어느나라건 무고한 피해자는 있는 법이고 이들을 죽임으로서 전쟁에서 이기려고 하는 자들은 현재진행형으로 우크라이나에도 있고 팔레스타인에도 있다. 현재 뿐만이 아니라 당장 내일 새로운 전쟁이 일어나도 누군가는 민간인과 군인을 가리지않고 죽이고 세균병기도 쓰고 핵무기도 쓰자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걸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전쟁행위의 효율성과 인도주의는 사실 반비례 관계에 있기 쉽다. 효율적이면서 동시에 인도주의적인 해법은 동화의 영역이다. 그런 대안이 있으면 누구나 그것을 선택할 것이므로 아무도 논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9] 그보다는 학살자로 낙인찍히면서 효율적인 승리를 노리던지,[10] 아니면 인간의 금도를 지키던지 어느것을 선택하건 각자에게 달린 일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 역시 각자가 책임져야할 일이 될 것이다. 민간인 보호와 인륜을 지킨다는건 그만큼 무거운 일이며 어려운 일이다.

3.

4chan 등지에서 독일 혹은 독빠들을 깔 때 "DO IT AGAIN BOMBER HARRIS."("다시 해주세요. 폭격기 해리스.")라고 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는데, 유튜브레딧 등을 포함해서 과도한 독일 찬양이나 홀로코스트 부정론을 펼치는 독빠들이나 네오나치들이 보이거나, 혹은 그냥 독일이 맘에 안들때 수시로 소환되어 극딜을 넣는 일종의 주문이 되었다. 국내 인터넷 커뮤니티의 비슷한 상황에서 리틀 보이와 팻 맨을 찾거나 커티스 르메이를 셰프로 추대하는 것과 대충 일맥상통하는 밈이다. 그 외에 상기한 발언으로 광풍 성애자 기믹도 있다. 유래는 의외로 안티도이체같은 자국혐오 독일인들이 지어냈다.

4. 어록

무기를 만드는 공장을 부술 수 없다면 그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의 집을 잿더미로 만들자.
폭격의 목표는 적국의 민간인, 그 중에서도 산업 인력을 죽이는 데 있다.
독일인들은 누구든지, 제복을 입었든지 않았던지를 가리지 않고 모두 합법적인 표적이다.
적국의 민간인도 적이다.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적을 위해 흘릴 눈물 따윈 없다.
최단시간 내에 최다수의 폭격기를 통해 단시간에 최대의 단위면적을 쥐새끼 한마리 남기지 않고, 모조리 초토화시켜야 한다.
나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이 자리에 앉았다.
나치 전범들과 나의 차이는 그들은 교수형을 당했거나 감옥에 갔고, 나는 자유라는 것 뿐이다.
“The Nazis entered this war under the rather childish delusion that they were going to bomb everyone else, and nobody was going to bomb them. At Rotterdam, London, Warsaw, and half a hundred other places, they put their rather naive theory into operation. They sowed the wind, and now they are going to reap the whirlwind.”

“나치는 다른 모든 사람을 폭격하고 자신들은 누구에게도 폭격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다소 유치한 착각으로 이 전쟁에 뛰어 들었습니다. 로테르담, 런던, 바르샤바 및 기타 50개 장소에서 그들은 그 순진한 이론을 적용했습니다. 그들이 바람을 심었으니 이제 그들은 광풍을 거둘 것입니다.”[11]
Attacks on cities are strategically justified in so far as they tend to shorten the war and so preserve the lives of allied soldiers.

도시에 대한 공격은 전쟁을 단축시키고, 연합군의 생명을 보존하는 한 전략적으로 정당화됩니다.
“In spite of all that happened at Hamburg, bombing proved a relatively humane method.”

"함부르크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폭격은 상대적으로 인간적인 방법임이 입증되었습니다."

[복수전공] [2] 본인 입장에서도 다소 괴로워했다는 것을 보여준다.[3]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전신[4] 커티스 르메이도 비슷한 이유로 비난받았지만 이 사람은 당대 백인들 기준으로는 인간 언저리로 취급받는 일본인을 죽인 사람이고, 해리스는 무려 같은 백인을 대상으로 이런 짓을 했기에 영국인들이야 옹호해줘도 다른 국가의 시민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5] 유대인은 중동과 미국에서 영향력을 떨치고 있지 유럽에선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6] 괴링이 런던 시가지에 대한 폭격으로 전쟁수행의지를 꺽자는 주장을 했는데 히틀러는 다음과 같이 반론하며 일축했다고 한다. "자네는 베를린에 폭탄이 떨어지면 즉시 항복할텐가?"[7] 실제로 미국은 유럽전선에선 이러한 방식의 민간인 폭격을 하지 않았다. 일부 지휘관들이 폭주한 사례는 있고 아이젠하워도 전략폭격을 종용했지만 일선 비행사와 지휘관들이 그정도로 독일을 미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적극적으로 민간인 대상 전략폭격을 한건 일본 대상일 뿐이다. 인종주의적 문제도 있을 수 있긴했지만 기본적으로 미국은 독일로부터 피해를 그다지 받은게 없어서 복수심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 민간인을 고의적으로 노리고 학살하는 작전에 혐오감을 보였다.[8]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전투기 사령관[9] 이를테면 식인행위 같은게 그렇다. 잔인한 행동이지만 그걸 한다고 딱히 얻을게 없으므로 대개 고려할만한 대안이 못되며 따라서 극히 일부의 사례외에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문제는 효율성과 인도주의가 상반되는 지점에 존재한다.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라던가, 이 전략폭격 같은 문제가 그렇다.[10] 나치는 전쟁에서 졌지만 독일에서 유대인 세력을 근절한다는 의미에선 반제회의에서 결정된 최종해결책 덕분에 이미 근절해놓았기 때문에 결국 승리했다.[11] 《구약성경》<호세아> 8장 7절에서 유래한 문장으로, 나치 독일이 바르샤바, 로테르담, 영국 공습으로 시작한 전략폭격을 그들에게 혹독하게 되갚아주겠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 현재도 아서 해리스의 옹호자들 사이에서 자주 인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