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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커닝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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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M : 해병대, H : 명예진급(비왕실)
※ 진급시기 기준 세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통일된 1707년 이후 기준으로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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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영국 국기.svg 제2차 세계 대전 영국군의 장성급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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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전시에는 임시 계급이었으나 이후 정식 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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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38><colcolor=#fff> 제1대 하인드호프의 커닝엄 자작
앤드루 브라운 커닝엄
Andrew Browne Cunningham
KT GCB OM DSO & Two Bars
파일:Andrew_Cunningham_1947.jpg
출생 1883년 1월 7일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더블린 주 래스마인즈(Rathmines)
사망 1963년 6월 12일 (향년 80세)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런던
국적
[[영국|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직업 군인
작위 제1대 하인드호프의 커닝엄 자작
복무 영국 왕립 해군 (1897~1946)
최종 계급 원수
경력 HMS 스콜피온 함장
HMS 로드니 함장
순양전함전대 사령관
지중해함대 사령관
제1해군경
참전 제2차 보어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발트해전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2. 생애3. 평가4. 기타


[clearfix]

1. 개요

앤드루 브라운 커닝엄(Andrew Browne Cunningham)[1]은 아일랜트 태생의 영국군 지휘관으로,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에 모두 참전하였고, 지중해 전역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2. 생애

2.1. 1차 세계 대전 이전

커닝엄은 1883년 1월 7일, 더블린의 래스마인즈(Rathmines)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대니얼 존 커닝엄은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에서 해부학을 가르치는 교수였고, 어머니 엘리자베스 커밍 브라운은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 출신의 주부였다. 다섯 형제 중 셋째로, 육군 대장 앨런 커닝엄의 형이다.

1897년 커닝엄은 영국 왕립 해군에 입대했고 1899년 해군 소위로 제2차 보어 전쟁에 투입된다. 1900년 2월 해군 여단에 편성되어 프리토리아와 다이아몬드 힐 전투에서 참전하였다.

2.2. 제1차 세계 대전

1911년 커닝엄은 구축함 HMS 스코피온의 함장이 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1914년 스코피온은 몰트케급 순양전함 SMS 괴벤(Goeben)과 마그데부르크급 경순양함 브레슬라우(Breslau) 추격 작전에 투입되었으나, 괴벤과 브레슬라우는 영국 함대의 추적을 피해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주하였고, 이는 오스만 제국동맹국 가담에 영향을 주었다.

이후 커닝엄은 1915년 다르다넬스 해전에 참전하여 중령으로 진급하고 DSO를 수여받았다. 1916년 이후 커닝엄은 대부분 순찰과 호송 임무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1918년 지중해 전역에서는 전투의 기회가 거의 없다고 판단하여 본국으로 귀환을 요청한다.

2.3. 전간기

1919년 커닝엄은 발트 해에서 S급 구축함 시파이어(Seafire)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당시 라트비아볼셰비키와 다수의 라트비아 민족주의 세력들 및 현지 발트 독일인들의 발트 영토방위군과 이를 지원하는 독일이 영향력을 두고 대립하는 중이었고, 영국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신생 라트비아 제1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한 상태였다. 이곳에서 커닝엄은 월터 코완(Walter Cowan) 제독을 처음 만났고, 짙은 안개와 기뢰 등 위험요소를 헤쳐나가는 그의 방식에 큰 감명을 받았다. 코완 제독 또한 라트비아의 독립을 방해하려는 독일군과의 여러 차례 조우에서 커닝엄이 보여준 날카로운 판단력을 높게 평가하였다.

이후 커닝엄은 대령으로 승진했고, 제6 구축함전단, 제1 구축함전단, HMS 로킨바(Lochinvar)[2]의 지휘를 거쳐 코완 제독이 지휘하는 아메리카 및 서인도 함대의 참모장을 맡았다.

1920년대 후반 커닝엄은 영국으로 돌아와 고급장교학교(Senior Officers' School)와 왕립국방연구대학(Imperial Defence College)[3] 과정을 수료하고, 노나 비야트(Nona Byatt)와 결혼하게 된다. 이후 그는 넬슨급 전함 HMS 로드니(Rodney)와 왕립해군병영의 지휘를 맡았다.

1933년 12월 커닝엄은 지중해에서 소장으로 진급하였고 1934년 CB를 수여받는다. 경순양함 코번트리를 기함으로 사용하며 커닝엄은 함대 지휘를 연습하였고, 이 기술은 나중에 2차 세계 대전에서 호평을 받게 된다. 또한 대서양에서 시행된 함대 훈련에서 야간 작전의 가치와 중요한 기술들을 배웠고, 커닝엄은 전쟁에서 이를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1936년 중장으로 진급하였지만, 당시에는 제2차 런던 해군 군축조약이 막 체결되었을 시점으로, 더이상 활약의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1년 후 제프리 블레이크(Geoffry Blake)경의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순양전함전대의 전대장과 지중해함대의 부사령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였고, HMS 후드를 기함으로 삼았다. 1938년 그는 해군본부의 참모차장으로 발탁되지만 행정업무를 혐오하는 커닝엄은 썩 달가워하진 않았다. 6개월동안 커닝엄은 제국국방위원회와 해군 본부 위원회에서 당시 병을 앓고 있던 로저 백하우스(Sir Roger Backhouse) 제1해군경의 대리로 참석했고 1939년 KCB을 수여받았다.

2.4.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커닝엄은 지중해 함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HMS 워스파이트를 기함으로 삼았다. 함대 사령관으로써 그의 가장 큰 고민은 이집트몰타를 향하는 수송대의 안전이었다. 커닝엄은 몰타의 전략적 중요성을 이해했고 영국의 지중해 제해권을 위협하는 가장 주요한 세력이 이탈리아 왕립 해군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커닝엄은 이탈리아의 공격에 대비해 그의 함대에 항상 만전의 상태로 대기할 것을 지시했다.

2.4.1. 프랑스의 항복

1940년 6월 프랑스 침공의 결과로 프랑스가 독일에게 항복하자, 커닝엄은 알렉산드리아에 위치한 프랑스 함대의 무장 해제를 위해 프랑스 해군 제독 르네-에밀 고드프루아(René-Émile Godfroy)와 협상해야 했다. 처칠은 프랑스 군함의 적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프랑스 군함이 항구를 떠나는 것을 막도록 지시하였고, 커닝엄은 브르타뉴급 전함 로렌과 순양함 넷, 구축함 셋,그리고 한 척의 잠수함으로 구성된 프랑스의 함대가 위협이 되지 않도록 섬세한 협상에 들어갔다.

그러나 협상이 타결되기 직전 캐터펄트 작전이 시행되어 알제리 메르 엘 케비르의 프랑스 함대가 대부분 손실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그 후 한동안 커닝엄은 알렉산드리아 항구 내에서 프랑스와 영국의 군함들이 전투를 벌일 것을 우려해야 했다. 기한을 초과하기는 했지만 결국 협상은 성공적이었고, 프랑스 군함은 연료를 비우고 포의 격발장치를 해제시켰으며, 영국은 프랑스 선원들을 송환시키는 조건에 합의했다.

2.4.2. 타란토 공습

프랑스 함대의 위협은 사라졌지만, 커닝엄은 이탈리아 함대가 이집트의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벌어지는 작전에 위협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 이집트의 영국군은 전적으로 바다를 이용한 보급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몰타섬을 둘러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구로 오는 해로가 최단 거리의 보급로였다. 지금까지 영국 해군은 수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이탈리아 해군은 현존함대 전략으로 항구에 배를 그대로 놔뒀기 때문에 영국은 제해권을 가지지 못했고, 이탈리아 함대의 공격 가능성은 큰 문제로 다가왔다. 당시 타란토 항구에 있는 전력은 전함 여섯 척, 중순양함 일곱, 경순양함 둘, 그리고 구축함 여덟 척이었다. 공격 가능성을 우려한 해군본부는 저지먼트(Judgement) 작전으로 타란토 항구를 기습 공격할 것을 계획했다. 공격을 위해 해군 본부는 HMS 일러스트리어스를 보냈고, HMS 이글과 함께 공격에 참여하게 되어 있었으나 HMS 이글에서 화재 사고가 발생하여 일러스트리어스는 함재기 일부만 인계받아 작전을 진행해야 했다.

공격은 1940년 11월 11일 오후 9시에 시작되었고, 페어리 소드피쉬 편대의 두 차례의 공습은 성공적이었다. 유류탱크를 파괴하고 콘테 디 카보우르를 격침시켰으며 카이오 두일리오리토리오도 어뢰에 두들겨맞아 수 개월 동안 수리를 해야 했다. 하룻밤 사이에 이탈리아 해군은 전력이 반토막났고 현존함대 전략의 실효성이 사라졌다. 이 전투는 역사상 최초의 항공기만을 이용한 해전으로, 일본군이 진주만 공습을 계획할 때 타란토 공습을 중요한 참고 자료로 사용했다.

공습에 대한 커닝엄의 반응은 매우 간결했으며, 마지막 함재기가 착륙한 후 일러스트리어스는 "저지먼트 작전 시행 완료" 라는 신호를 보냈고, 다음날 타란토 항구를 항공 정찰한 사진을 본 커닝엄은 "작전이 잘 시행됨"을 뜻하는 두 글자의 암호로 답장했다.

2.4.3. 마타판 곶 해전

1941년 3월, 히틀러는 그리스에 있는 영국 원정군을 보급해주는 호송대를 막는 것을 원했고, 이를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이탈리아 해군이었다. 커닝엄은 이탈리아 해군이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독일의 압력을 받은 이탈리아 해군은 3월 28일 영국 함대에 대한 공격을 계획했다. 이탈리아 해군의 안젤로 이아치노 제독은 영국 순양함 전대에 대한 기습 공격을 의도했고, 비토리오 베네토(전함)을 이용한 양면 공격을 계획했다.

그러나 커닝엄은 이탈리아군 에니그마 신호를 도청해 이탈리아군의 활동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탈리아군의 의도는 불투명했지만, 커닝엄과 참모들은 병력 호송함대가 공격당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이탈리아군의 계획을 망쳐버리고, 가능하면 이탈리아 함대를 요격할 계획을 지시했다. 커닝엄은 또한 자신의 활동을 숨기기 위해, 전날 골프를 치고 저녁에 파티에 참석한다는 거짓말을 퍼트렸다.

해가 진 직후에 그는 HMS 워스파이트에 승선해 알렉산드리아에서 출항하였다. 커닝엄은 공습이 상대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HMS 포미더블페어리 알바코어 뇌격기 공격을 명령했다. 비토리오 베네토가 어뢰에 맞아 잠시 배가 느려지자 이아치노는 제공권 없이는 함대가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아 이탈리아 함대에게 후퇴할 것을 명령했고, 커닝엄은 후퇴하는 이탈리아 함대를 추격할 것을 지시했다.

포미더블의 공습으로 순양함 폴라가 무력화되었고, 이아치노는 커닝엄의 추격하는 전함 함대를 알지 못한 채 순양함과 구축함으로 구성된 전대에게 돌아와 폴라를 보호하도록 명령했다. 한편, 커닝엄은 프리덤 비펠의 순양함대와 합류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몇 차례의 추격과 출격이 일어났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이탈리아 배들은 야간 전투를 위한 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밤이 되자 타란토로 돌아갔다. 레이더가 장착된 영국 전함대는 22:00 직후 이탈리아군을 탐지했고, 전함 버럼, 밸리언트워스파이트는 이탈리아 순양함 2척을 불과 3.5km의 거리에서 5분 만에 파괴했다

비록 비토리오 베네토가 타란토로 귀환함으로써 전투에서 벗어났지만, 참모들의 반대에도 추격을 계속한 커닝엄에게 많은 찬사가 있었다. 타란토 이후 마타판 곶에서의 패배는 이탈리아 해군에 또 다른 전략적 타격을 주었다. 3척의 중순양함과 2척의 구축함이 침몰했고, 약 2,400명의 이탈리아 선원들이 사망, 실종 또는 포로가 되었다. 반면 영국군은 한 대의 뇌격기가 격추되면서 승무원 3명을 잃었을 뿐이었다. 이는 이탈리아 해군이 1941년 후반 그리스와 크레타 섬에서의 철수에 개입할 전력이 없다는 것과, 전쟁의 남은 기간 동안 지중해 동부 제해권을 연합군 함대에 상실해 항구를 떠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2.4.4. 크레타 섬 전투

1941년 5월 20일 아침, 나치 독일은 크레타 섬에 공수작전을 개시했다. 초기의 많은 사상자에도 불구하고, 크레타 섬 서부에 있는 말레메 비행장은 독일군에게 함락되었고, 독일군은 수송기로 중장비를 지원받아 연합군을 압도할 수 있었다.

1주일간의 격전 끝에 영국 지휘관들은 상황이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크레타 섬 남부의 스파키아(Sfakia)에서 철수를 명령했다. 이어지는 4일 밤 동안 16,000명의 병력이 배를 타고 이집트로 대피했다. 소수의 배들이 이라클리온에서 별도의 철수작전을 수행하기로 했지만, 루프트바페 급강하 폭격기의 공격을 받았다. 공중 엄호가 없었기 때문에 커닝엄의 배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커닝엄은 "해군은 육군를 실망시켜서는 안된다"고 결심했고, 육군 장군들이 그가 너무 많은 배를 잃을까 두려워하자 커닝엄은 이렇게 말했다.
"It takes the Navy three years to build a ship. It will take three hundred years to build a new tradition. The evacuation will continue."
(해군이 배를 만드는데 3년이 걸립니다. 새로운 전통을 만드는데 300년이 걸릴 것입니다. 대피는 계속될 것입니다.)
커닝엄과 그 휘하의 병사들의 "죽지 말라"는 태도 덕에 크레타 섬에 있던 22,000명의 병사들 중 16,500명이 구조될 수 있었지만, 순양함 3척과 구축함 6척을 잃었다. 15척의 다른 주요 군함들도 손상을 입었다.

2.4.5. 연합군본부

1941년 3월, 커닝엄은 최근 중동에서의 성공적인 연합 작전을 인정받아 GCB를 수여받았고, 1942년 7월 사우샘프턴 카운티에 있는 비숍스 월섬의 남작으로 임명되었다. 1942년 말부터 1943년 초까지, 그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 휘하에서 연합군 해군 사령관으로 일했다. 이때 커닝엄은 횃불 작전에서 영미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상륙을 호위하는 대규모 함대를 지휘했다. 아이젠하워는 그를 높이 평가했다.

1943년 1월 21일, 커닝엄은 해군 원수로 진급했고 2월에 지중해 함대의 총사령관으로 돌아왔다. 3개월 후, 북아프리카의 추축국 군대가 항복 직전에 있을 때, 그는 단 한명의 적도 탈출하지 못하게 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자신의 함대에 "침몰시키고, 불태우고, 파괴하라: 아무것도 통과시키지 말라"는 지시를 보냈다. 그는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에서 허스키 작전, 베이타운 작전, 그리고 눈사태 작전 동안 영미 연합 해군을 감독했다. 1943년 9월 11일 아침, 이탈리아 함대가 항복했을 때, 커닝엄은 몰타에 있었다.

2.4.6. 제1해군경

1943년 10월, 더들리 파운드 경의 사망으로 제1해군경이자 해군참모총장이 되었다. 이 승진은 그가 지중해 함대 사령관 자리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동명이인인 존 H. D. 커닝엄 제독[4]을 후임자로 추천했다. 커닝엄은 제1해군경의 지위와 참모장위원회의 일원으로서 남은 전쟁 기간 동안 해군의 전반적인 전략적 방향을 책임졌다. 그는 카이로, 테헤란, 얄타, 포츠담에서 열린 주요 회의에 참석했고, 이때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영국 함대의 태평양 배치 등의 미래 전략을 논의했다.

앤트워프 항구는 D-Day 이후 연합군에게 매우 중요했지만, 커닝엄 제독과 램지는 연합원정군 최고사령부몽고메리에게 독일군이 근교를 장악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 항구가 무용지물이 될 거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몽고메리는 셸드 강 하구 전투를 연기했고, 이 때문에 항구의 개방이 지연되자, 연합군은 마켓 가든 작전이 망한 후 겨울이 다가오기 전에 재정비를 하는 데 심각한 차질을 빚었다.

2.5. 은퇴 이후

1945년 1월, 커닝햄은 엉겅퀴 기사 작위에 임명되어 셀커크 카운티 커크호프에 있는 하인드호프의 커닝햄 남작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1945년 전쟁 말에 은퇴할 수 있었지만, 평시 체제로 전환하는 동안 복무를 계속하기로 결심했다. 클레멘트 애틀리가 영국 수상으로 선출되고 전후 합의 이행으로 국방 예산이 크게 감소했다. 대대적인 개편은 커닝엄에게 큰 부담이었고, 그는 "우리는 곧 평화를 위해 개편하는 것보다 전쟁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깨달았다"고 말했다. 결국 예산 압박으로 인해 해군은 커닝엄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큰 규모의 감축에 착수했다.

1945년 10월, 그는 에든버러 대학교의 부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946년 신년 서훈에서 하인드호프 자작으로 임명되었고 그 해 6월에 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1946년 5월 말, 평시로의 이행이 완료된 후, 커닝엄은 제1해군경직에서 은퇴했다. 커닝햄은 햄프셔의 비숍스 월섬에 있는 '시골의 작은 집'인 '팰리스 하우스'로 이사했다. 그와 부인은 둘 다 바쁜 은퇴 생활을 보냈다. 그는 이따금씩 상원에 출석했고, 가끔 영국 해군에 관한 언론 성명, 특히 1940년 지브롤터 지휘에서 해임된 더들리 노스(Dudley North) 제독과 관련된 성명에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었다. 커닝엄과 살아남은 몇몇 함대 제독들은 1957년에 부분적인 정당성을 입증하며 노스 제독의 명예 회복에 성공했다

1950년과 1952년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 고등판무관 (Lord High Commissioner)을 지냈고, 1953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서 왕실 집사장(Lord High Steward) 역할을 했다. 커닝엄은 1963년 6월 12일 80세의 나이로 런던에서 사망했고 포츠머스 앞바다에 묻혔다.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작위는 그의 죽음으로 소멸되었다.

3. 평가

횃불 작전 당시 아이젠하워는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앤드루 브라운 커닝엄 경. 그는 절대적 이타심, 에너지, 의무에 대한 헌신, 임무에 대한 지식, 연합군 작전의 요구사항에 대한 이해 등에서 여전히 나의 부하들 중 최고위를 지키고 있다. 그의 뛰어난 자질에 대한 나의 의견은 단 한 순간도 흔들리지 않았다."

4. 기타

1967년 4월 2일 에든버러 공작 필립공에 의해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프란타 벨스키가 제작한 커닝엄 흉상이 공개되었다

2010년 4월 영국 해군은 2010년 에이야퍄들라이외퀴들 폭발로 항공 여행 차질로 인해 유럽 대륙에 발이 묶인 영국 군인들과 항공 승객들을 수송하기 위해 커닝엄 작전을 수행했다.


[1] 줄여서 ABC라는 별명이 있다[2] 함선이 아니라 소해 훈련용 육상 고정시설이다[3] 현 Royal College of Defence Studies[4] 서로 아무런 관계도 없는 완벽한 타인이다. 우연히 성이 같았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