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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00:49:45

아이티 혁명

파일:Battle_for_Palm_Tree_Hill.jpg
Révolution haïtienne, 1791 ~ 1804.[1]
1. 개요2. 배경3. 혁명의 전개4. 이후5. 의의와 한계6. 여담7.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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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91년 프랑스 왕국식민지 생도맹그에서 일어난 혁명.

혁명의 결과로 식민지의 아프리카인 노예들이 해방되었으며, 새로운 국가 아이티가 세워졌다.

2. 배경

그들은 사람들의 목을 매었고 자루에 넣어 바다에 던져 익사시키고 십자가에 못 박고 산채로 묻고 분쇄기에 넣어 갈았습니다. 그들은 배설물을 먹도록 강요하였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가죽을 벗겨 산 채로 벌레에게 먹히거나 개미집에 던지거나 말뚝에 묶어서 모기에게 뜯기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끓는 가마솥에 우릴 던져 넣었습니다. 그들은 남자와 여자를 못이 박힌 통에 넣어 산비탈 아래로 굴리고 올리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들은 지쳐쓰러진 흑인들을 개들에게 산채로 먹였습니다. 개들이 인간의 살을 먹고 난도질당한 희생자들이 고통스러워해도 총검과 총으로 그들을 편히 보내주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에 대한 이유가 더 필요하십니까? 필요하시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말할 수 있습니다.
카리브해의 지주들은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설탕을 생산하였고 이를 유럽으로 판매하여 큰 이익을 얻었다. 그 중 프랑스 식민지인 생도맹그는 자메이카와 더불어 최대의 설탕 생산지였다.

지주들은 설탕을 생산하기 위해 흑인 노예들을 부렸는데 이들의 노동 환경은 매우 열악하여 영양 부족, 의료 부족 등의 가혹한 환경으로 사망률이 높았다. 반면 흑백혼혈크레올은 백인들에게 차별받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자유민으로 취급받아 흑인들에 비해 우대받았다. 이러한 인종차별과 가혹한 노동으로 흑인 노예들의 불만은 점차 고조되어 백인들과의 무력 충돌로 발산되었다.

그러던 중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은 생도맹그의 식민지인들에게 혁명 정신을 심어주었다. 뱅상 오제를 비롯한 크레올들은 백인과의 평등을 위해 식민지 총독에게 투표권 등의 권리를 요구했다. 하지만 식민지 총독이 이를 거부하자 오제는 크레올들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고 생도맹그의 수도인 르캅에서 수레바퀴형[2]으로 처형당했다. 하지만 백인들이 크레올들을 잔인하게 진압하는 과정을 지켜본 흑인 노예들은 오제의 뒤를 이어 아이티 혁명에 불을 지폈다.

3. 혁명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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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생 루베르튀르
1791년 8월 22일 아이티 혁명이 발발했다. 한편 일부 흑인 노예들은 마름이나 집사 일을 하면서 크레올 엘리트 층을 이루기도 했는데 아이티 혁명의 지도자인 투생 루베르튀르가 이 계층에 속했다. 투생 루베르튀르는 독학으로 전술을 공부했지만 전투 지휘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뛰어난 지휘관이었고 혁명의 지도자가 되어 반란을 이끌었다. 투생이 이끈 혁명 세력은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생도맹그의 대부분을 차지해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1798년 투생은 자메이카에서 보낸 영국 군대를 무찔렀다. 그리고 산토도밍고를 공격하여 그곳의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1801년 생도맹그에 자치 정부를 수립하였다. 1802년 프랑스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처남인 샤를 르클레르를 보내 생도맹그를 다시 차지하고자 했다. 프랑스군 사령관 르클레르는 투생에게 항복하면 자유를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투생은 그 말을 믿고 협상하러 갔지만 그 약속은 프랑스의 계략이었다. 투생은 투옥되어 프랑스에 끌려간 뒤 1803년에 옥사했다.[3]

르클레르가 생도맹그를 탈환한 뒤 나폴레옹이 생도맹그의 노예 제도를 부활시키려고 하자 장자크 데살린알렉상드르 페시옹이 다시 반기를 들었다. 프랑스군은 우수한 무기로 무장했지만 황열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했다.[4] 지휘관인 르클레르가 황열병으로 사망하고 난 뒤 후임 지휘관이 혁명군을 잔인하게 진압하여 왕당파 일부가 반란군에 붙은 것과 프랑스 본국이 영국의 해상 봉쇄로 지원군을 보내기 어려웠던 것도 패배에 일조했다. 혁명군은 1803년 마지막 전투인 베르티에르 전투에서 승리하고 나서 1804년 아이티 제1제국을 세웠다.

4. 이후

이 전쟁으로 프랑스는 최대의 설탕 생산지를 잃어 큰 타격을 입었으며 나폴레옹북아메리카 재식민화 계획을 포기하고 루이지애나를 매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생도맹그, 즉 아이티는 전쟁으로 인구가 55만 명에서 30만 명으로 크게 줄었다. 전쟁 후 아이티 주민 중 백인이나 일부 크레올뉴올리언스로 이주하였다.

아이티의 총독이 된 데살린은 나폴레옹을 흉내내 1804년칭제했다가 1806년 10월 17일 동지였던 공화파에게 암살당했다. 이후 아이티는 정치적 혼란에 빠져 크레올들의 지지를 받은 남부와 흑인들의 지지를 받은 북부로 분단됐다. 남부는 알렉상드르 페시옹이 대통령이 되는 공화국 체제였고 북부는 원래 공화국이었으나 앙리 크리스토프가 왕으로 즉위하면서 왕국을 세웠다. 1820년 북부의 왕인 앙리 1세가 죽고 나서 얼마 뒤에 장피에르 부아예의 남부가 통일에 성공했다. 아이티를 통일한 지 얼마 안 된 1822년 아이티는 스페인계 아이티 공화국으로 독립한 지 얼마 안 되었던 현 도미니카 공화국 지역으로 침입하여 히스파니올라 섬 전체를 차지했다. 1844년 도미니카 공화국은 독립을 선언하였고 1856년 독립 전쟁의 마지막 전투를 거쳐 현재의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완전히 분리 독립했다.

육지에선 핏값으로 프랑스를 쫒아내서 상륙을 방어할 순 있어도 총칼로 함선을 박살내는 것은 불가능하여 해상에서 압도적인 프랑스 해군을 쫒아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로인해 프랑스는 아이티를 무려 20년간 해상봉쇄하여 외부와는 고립된 무인도 생존물과 같은 닫힌 사회로 만들었고 한정된 자원에 굶주리고 남들의 죽음에 익숙해진 아이티는 정치, 경제 모든 분야에서 심각하게 불안정하고 극단적인 상태가 된다.

아이티를 식민지배했던 프랑스는 1825년에야 아이티의 독립을 인정했지만 그 대가로 아이티 노예주들에 대한 거액의 배상금을 요구했다. 아이티는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인정받기 위해, 그리고 경제적 봉쇄를 풀기 위해 배상금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100년 동안 아이티의 경제를 발목잡은 데다 국내 정치도 안정되지 못해서[5] 아이티는 가난한 나라가 되었다.

2004년 아이티에서 독립 200주년을 기념했다.

5. 의의와 한계

역사상 유일하게 성공한 노예 혁명이다.[6] 노예 혁명은 다른 국가에서도 일어난 적이 있었지만 그것이 성공한 경우는 아이티 혁명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또 아이티의 혁명은 다른 국가의 노예 해방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이티 혁명 이후 많은 국가의 노예들이 아이티 혁명에서 영감을 받아 혁명을 시도했고 그 결과 영국은 1807년 노예무역을, 1834년에는 노예제를 폐지했다.

아이티 혁명으로 아이티가 건국됨으로써 최초의 흑인 근대 정부이자 라틴 아메리카 최초의 근대적 독립 국가가 세워졌다. 하지만 흑인 독립국가라는 외양의 이면에는 사회의 지배계급이 백인에서 물라토로 교체되었을 뿐 기존 계급구조를 그대로 재생산했다는 한계도 있다. 영국과 같이 독립을 지원한 외부 세력은 프랑스가 물러가자 혁명의 기운이 주변 영국 식민지로 번지는 것을 경계해 적으로 돌아섰고 아이티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는데 이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결국 독립의 발단이 되었던 가혹한 사탕수수 농장을 유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독립 후 토지주들은 신분이 상승했으나 농민들은 이름만 자유민일 뿐 여전히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해야 했고 불만이 쌓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농민들이 과거의 독립 영웅들을 상대로 다시 봉기했고 독립 영웅들은 독재자 혹은 군벌이 되었으며 이들은 서로 싸웠고 프랑스, 영국을 비롯한 외국 세력들은 이를 조장했다. 결국 아이티는 제국, 왕국, 공화국이 난립하며 분열되어 1820년에야 하나의 공화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게다가 공화국은 아이티 섬의 남은 절반, 즉 스페인령 아이티를 해방하겠다고 침공했으나 이들이 오히려 아이티에 저항하며 별도의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독립하는 실패를 맛보았고 여기에 전쟁 배상금, 국방비 등으로 막대한 자금지출로 인해 재정이 파탄나 몰락하게 되었다.또한 프랑스 재침공을 막기위해서 프랑스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주어야 했는데 그 배상기간이 백년 동안이나 되어서 아이티 국가재정의 막대한 부담이 되었고 오늘날 아이티가 최빈곤국이 되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6. 여담

7. 참고자료



[1] 예리한 역덕후나 전공자라면 그림의 유럽인 진압군의 모자가 프랑스군이 아니라 오히려 폴란드군이 많이 쓰던 사각모 로가티프카(Rogatywka), 통칭 차프카라는 걸 알아볼 것이다. 본격적인 유럽 열강 간의 전쟁도 아니고 자연환경과 질병 때문에 비전투 손실이 막대할 것이 뻔한 전장이라 프랑스가 당시 폴란드 분할에 저항하며 프랑스군에 붙었던 폴란드 의용병 5,200여 명을 아이티의 진압군으로 투입했기 때문이다.[2] 사형수를 수레바퀴에 묶은 뒤 둔기로 죽을 때까지 패는 형벌.[3] 사실 아이티의 혁명가들은 투생이 속아서 프랑스로 가는 걸 알고 있었지만 투생이 자신들과는 달리 아이티의 완전 독립을 바라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를 방관했다.[4] 참고로 이때 파병된 프랑스군의 구성원 대부분은 프랑스군의 '폴란드 군단'에 속했던 폴란드인들이었다. 이들은 당시 자신들의 나라를 멸망시킨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싸우기 위해 프랑스군에 입대했던 것인데 오히려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다. 조국의 자유를 위해 다른 이들의 자유를 핍박하는 황당한 사태가 벌어지자 전의를 잃은 폴란드인들은 포로 학살을 거부하는 등 항명을 저지르거나 탈영 후 아이티 혁명군에 참가하였다.[5] 1843~1915년까지 집권한 대통령 22명 중에서 21명이 쫓겨나거나 암살당했다. 그 전에도 데살린(암살), 크리스토프(자살)가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 1849년~1859년에는 포스탱 술루크 대통령이 데살린을 흉내내서 칭제했다가 쫓겨났다. 포스탱은 영국령 자메이카로 망명한 뒤 아이티로 귀국하는 걸 허락받고 돌아와 1867년에 죽었다.[6] 역사적으로 노예 반란이 성공한 경우는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 오스만 제국 예니체리의 반란 등 여럿이 있지만, 아이티 혁명이 이들 노예 반란과 차별화된 점은 적어도 그 목적이 노예의 해방에 있었다는 점이다. 맘루크 왕조와 예니체리의 반란 모두 노예가 기존의 지배자를 교체하긴 했으나 그 목적이 노예 제도의 타파에 이르지는 못한 반면에, 아이티 혁명은 노예 제도의 혁파를 목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물론 아이티가 처한 대외환경 때문에 사실상의 강제노동이 부활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아이티 혁명의 여러 후속 사태가 맞물린 결과인 것이지 아이티 혁명의 결과라고 하긴 힘들다.[7] 폴란드인 귀족 콘스탄티 야브워노프스키가 영국인 귀족 여성 마리아(Maria Dealire)와 결혼했는데 그녀가 어떤 아프리카계 남성과 외도를 저질러 그 사이에서 낳은 흑백혼혈 의붓아들을 받아준 경우였다. 여기에 대해서는 물론 부부 사이에 추궁과 다툼은 있었지만 콘스탄티 본인도 외도를 저질렀기에 도덕적으로 정당한 입장은 아니어서 받아들였단 얘기가 있다.[8] 마을 이름의 유래는 폴란드에서 가장 흔한 성씨 중 하나인 잘레프스키의 집(kay Zalewski). 의미가 통하게 한국식으로 생각해 보면 생뚱맞은 바다 건너 전혀 다른 언어를 쓰는 먼 나라에 "김씨집"이란 마을이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