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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03 00:54:48

크리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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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페인어권에서2. 프랑스어권에서3. 포르투갈어권에서4. 언어

1. 스페인어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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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은 포르투갈어인 "크리올루"로[1], 아메리카 식민지에 거주하던 스페인인들과 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혼혈들을 나누던 계층들 중에 하나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태어나 식민지에서 자라는 순수혈통 페닌술라르(peninsular) 바로 밑 계층으로, 유럽인의 혈통으로 식민지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말한다.

식민 종주국 스페인은 레콩키스타 시절 트라우마의 영향으로 순수 혈통을 많이 따졌다. 스페인 본토 기준으로도 조상 중에 유대계나 아랍계가 없어야 진정한 귀족으로 인정되었고 크리오요들 역시 족보를 확실하게 공증하지 못하면 이런저런 차별을 받게 되었다. 일단 대항해시대 당시 스페인 유럽 본토에서 라틴아메리카 식민지로 이주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군인 같은 남성들이었고 여성들은 소수에 불과했는데, 그 소수의 여성들도 대부분 유대인 출신이었다.[2] 스페인 본토에서 이를 모를 리는 없고 크리오요 대부분은 순수 기독교도 혈통이 아닌 원주민과 유대인의 혼혈로 치부되어 페닌술라르들로부터 천대받았다. 이러한 배경에서 크리오요가 공적인 일에서 페닌술라르를 비판하는 일은 엄연히 하극상으로 치부되었다.

크리오요는 순혈 백인인 사람도 있었지만 순혈 백인과 외모만 비슷한 사람도 많았다. 일단 인디오 혈통 1/8에 유럽계 혈통 7/8인 경우에는 공식적으로 백인으로 인정되었는데, 이는 스페인의 아즈텍 정복 당시 아즈텍 왕족 및 말린체 같은 틀락스칼텍 협조자들을 배려한 조치였다. 몬테수마 2세의 후손 사진 이외에도 당시 식민지 주민들이 족보를 휴대하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재산도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 외모상 다른 백인과 별 차이가 없으면 똑같이 백인 크리오요로 간주되었다. 굳이 조상이 산술적으로 7/8 백인이 아니더라도 식민지 내에서 여러 인종[3]이 혼합되다보니 유색인종 혼혈 중에서 혼혈인 부모로부터 백인 외모 형질만 물려받아 유달리 백인과 유사한 경우도 나왔다. 반대로 크리오요와 크리오요가 서로 결혼했는데, 하단의 그림처럼 한쪽 증조부모 쪽 흑인 외모 유전자가 뜬금없이 발현된 이유로, 별 다른 나쁜 이유 없이 흑백혼혈 외모를 가진 자녀가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파일:Castas_tornatras.jpg
일부 크리오요 부유층들은 족보를 들고 스페인 본토 법원까지 건너가서 자신의 조상들 중 유대인, 아랍인, 원주민, 흑인은 일절 없고 조상 전부가 순수 기독교도 유럽인이라는 공증을 받기도 했는데, 이런 과정을 거쳐야 페닌술라레스가 독점하던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물론 이런 공증 절차에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깨지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6]

하지만 크리오요들은 자신들이 엄연히 유럽 문화를 공유하고 혈통 대부분을 유럽인으로부터 물려받았다는, 그리고 원주민들과 흑인들 위에 군림한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인종주의가 만연하던 당시 시대상 증조부모나 고조부모 중 유색인종이 한두명 섞여있었다고 무시당하는 경우는 누구라도 참기 힘든 상황이었다. 크리오요들은 스페인과 페닌술라레스의 차별에 반발해 19세기 라틴아메리카 각지에서 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자세한 사항은 라틴아메리카 근현대사 문서 참조.

시간이 흐르며 중남미에서는 18세기 말 19세기 초반 이후부턴 크레올은 혼혈뿐만이 아니라, 본토가 아닌 식민지령에서 태어난 순수 백인들까지 포괄하는 넓은 의미의 단어가 되었다. 본토가 아닌 타국의 문화를 익숙하게 접하고 자란 백인 크레올들은 본토로 건너가서도 그곳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고, 이 탓에 광인 취급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필리핀과 마리아나 제도에서는 크리오요 대신 인술라레스라는 어휘가 사용되었다. 필리핀 기준으로는 라틴 아메리카와 다르게 스페인계 백인 혼혈 인구가 적었고,[7] 필리핀계/중국계 혼혈인 인구가 비중이 훨씬 더 컸다. 이들 중 이른바 "일루스트라도스"라고 불렸던 고학력 상류층들이 크리오요와 같은 이유로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2. 프랑스어권에서

이쪽 역시 어원은 동일하다. 다만 프랑스어권에서는 대신 크리올이 백인 아버지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난 흑백혼혈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다. 스페인어권에서 사용되던 물라토모리스코에 상응하는 말이라고 보면 된다.

파일:creole-collage.jpg[8]

프랑스 식민지들 이외에도 미국에서도 프랑스인들이 개척했던 루이지애나 주에서 흑백혼혈을 크리올로 지칭하였다. 미국으로 넘어가기 전 루이지애나 주는 프랑스령이었고, 아이티 혁명 당시 상당수의 백인, 흑백혼혈 난민들이 루이지애나로 피난하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단순한 흑백혼혈의 의미보다 케이준 비슷하게 프랑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루이지애나 흑인들을 지칭하는 어휘로 쓰였다.[9]

프랑스어권에서는 스페인어권이나 영어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흑백혼혈에 대한 차별이 덜한 편이었는데,[10] 백인 농장주가 흑인 정부(情婦)를 두는 경우는 다른 문화권에서도 흔하긴 했지만, 프랑스어권에서만큼은 알렉상드르 뒤마의 가정사 사례에서 보듯 백인 아버지들이 혼혈 서자들에게도 양질의 교육을 시키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11] 종종 능력도 되고 아버지가 괜찮은 사람이면 본국 프랑스로 유학을 가기도 했으며 이 크레올들은 향후 미국에서 재즈의 발생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제인 에어의 외전 격으로 영국의 작가 진 리스가 쓴 '광막한 사르가소 해(Wide Sargasso Sea)'에서는 원작에서 로체스터의 미친 부인으로 소개되었던 크레올 버사 메이슨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3. 포르투갈어권에서

크리올의 어원은 포르투갈어 크리올루(Crioulo)이다. 이 단어는 같은 포르투갈어권에서도 브라질 기준으로는 아프리카 출생이 아닌 현지 태생 흑인이란 의미로 쓰였으며,# 과거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등에서는 아프리카 현지에서 태어난 포르투갈계 백인을 의미한다.# 같은 단어가 같은 언어권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정 반대로 사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브라질에서는 이 크리올루라는 말이 사실상 인종차별 욕설 비슷하게 사용되고 있는데,[12] 그 이유는 아프리카 출신 흑인 노예가 아닌 브라질 현지 태생으로 포르투갈어를 할 줄 아는 (백인과의 혼혈이 아닌) 흑인 노예를 지칭하는 용어였기 때문이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브라질은 노예 노동 환경이 상당히 가혹하였고, 플랜테이션 농업에 투입된 노예 상당수가 평균 7~10년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나가서 계속 수입을 통해 보충해야 했기 때문에, 근대까지는 포르투갈 현지에서 태어난 노예 수보다 아프리카에서 새로 수입한 노예 수가 더 많았던 편이었다.

근대까지 브라질의 노예 대농장은 백인 농장주와 그 가족, 그 다음은 흑인 정부 및 그 흑백혼혈 자녀들, 그 다음은 말레라고 해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흑인 노예, 그 다음에는 브라질에서 출생해서 포르투갈어를 모어로 구사하는 흑인 노예, 그 다음에는 아프리카에서 새로 유입된 노예 순으로 계급이 정해졌고 포르투갈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흑인 노예 크리올루는 여기에서 아프리카에서 새로 유입된 흑인 노예보다는 우월하지만 흑백혼혈보다는 열등한 존재로 취급당하곤 했다.

4. 언어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언어 간에 상인 등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형성된 언어(피진;pidgin)가 그 사용자들의 자손에 의하여 모국어화된 언어를 말한다. 대표적인 예로 아이티프랑스어를 변형한 아이티 크레올어가 있으며 이쪽은 아예 공용어가 되었다.


[1] 포르투갈어 cria(자식) 혹은 criar(키우다)란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이다.[2] 레콩키스타 완료 이후 스페인에서는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들을 전부 추방하고,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 중에서 의심스러운 사람들을 대상으로 정기적으로 종교재판을 벌여 처벌하였는데 이때 겁에 질려서 라틴아메리카 식민지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당시 아직 의학 기술이 발전하지 않은 상태라서 라틴아메리카로 이주했다가 질병으로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종교재판 때문에 목숨이 경각이 달린 사람들 입장에서는 별 방법이 없었다.[3] 당시 아메리카 식민지에는 백인, 흑인, 아메리카 원주민만 있던 게 아니라 중국인, 일본인, 필리핀인, 말레이인, 인도인과 스리랑카인들도 적잖이 유입되었다고 한다.[4] 이 그림이 그려진 시기에 알비노/알비나라는 단어는 일반적인 그 알비노가 아니라 흑인 혈통 1/8, 백인 혈통 7/8 정도를 물려받은 혼혈인을 의미했다.#[5] 굳이 불륜이 아니더라도 백인 부부 사이에서 3~5세대 이전 흑인 조상의 외모 유전자가 갑툭튀하는 경우는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1#2[6] 다만 본토 스페인인 중에서도 무슬림이나 유대인 조상을 두지 않은 사람들이 드물다보니,(바스크인 아닌 이상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이베리아 전체 인구의 9할 정도가 한때나마 무슬림들의 지배를 받았었다.) 본토인들 사이에서도 족보조작 사업의 수요가 있었고 크리오요 입장에서는 불행 중 다행히도 돈만 있으면 족보조작이 그닥 어렵지는 않았다.[7] 라틴아메리카 식민지에서는 원주민들이 백인들이 옮긴 질병에 때죽음을 당했던 것과 다르게 필리핀에서는 백인들이 필리핀 현지인에 비해 면역력이 약했고, 필리핀 도독령은 스페인 본토와 직접 교류하는 경우보다 오늘날의 멕시코를 거쳐서 간접교류하는 경우가 많아 라틴아메리카에 비해 백인 인구가 적었다. 혼혈인들 중에서 백인 유전자가 우세한 인구 비중이 더 적었음은 물론이다.[8] 가운데 그림은 루이지애나 크리올을 상징하는 깃발 문양이다.[9] 참조[10] 흑인 노예에 대한 처우는 미국이 상대적으로 나았지만, 흑백혼혈 관련해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북미 쪽은 원래 혼혈인 인구가 적은 것도 있고 해서 한동안 "조상 중에 한 명이라도 흑인이 있으면 흑인"이라는 식의 이른바 One drop rule이 암묵적으로 적용되었다.[11] 엄밀히 말하자면 포르투갈어권도 흑백혼혈에 대한 차별이 덜 한편이지만, 이 쪽은 농장주들부터가 문맹이 많고 포르투갈 본토도 교육 인프라가 부실하여 자식들을 따로 유학시켜 공부시킬 환경이 되지 못했다.[12] 흑인 뿐만이 아니라 피부색이 짙은 사람들을 비하하는 패드립 비속어로 폭넓게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