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30066, #262A9A 20%, #262A9A 80%, #030066); color:#ffffff"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알렉상드르 페시옹 | 장피에르 부아예 | 샤를 리비에르에라르 | 필리프 게리에 | |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장 루이 피에로 | 장 밥티스트 리셰 | 포스탱 엘리 술루크 | 파브르 제프라르 | |
임시 | 제9대 | 제10대 | 권한대행 | |
장 니콜라 니사주 사제 | 실뱅 살나브 | 장 니콜라 니사주 사제 | Council of Secretaries of State의 대행 | |
제11대 | 제12대 | 임시 | 제13대 | |
미셸 도맹그 | 피에르 테오마 부아스롱 카날 | 조제프 라모트 | 리시위스 살로몽 | |
임시 | 제14대 | 임시 | 제15대 | |
피에르 테오마 부아스롱 카날 | 프랑수아 드니 레지팀 | 몽포앵 죈 | 플로르빌 이폴리트 | |
제16대 | 임시 | 제17대 | 제18대 | |
티레시아스 시몽 상 | 피에르 테오마 부아스롱 카날 | 피에르 노르 알렉시스 | 프랑수아 C. 앙투안 시몽 | |
제19대 | 제20대 | 제21대 | 제22대 | |
생시나튀스 르콩트 | 탕크레드 오귀스트 | 미셸 오레스트 | 오레스트 자모 | |
제23대 | 제24대 | 제25대 | 제26대 | |
조제프 다빌마 테오도르 | 빌브륑 기욤 상 | 필리프 수드레 다르티게나브 | 루이 보르노 | |
제27대 | 제28대 | 제29대 | 제30대 | |
루이 외젠 루아 | 스테니오 뱅상 | 엘리 레스코 | 프랑크 라보 | |
제31대 | 제30대°° | 제32대 | 임시 | |
뒤마르세 에스티메 | 프랑크 라보 | 폴 마글루아르 | 조제프 느무르 피에르 루이 | |
임시 | 권한대행 | 임시 | 제33대 | |
프랑크 실뱅 | Executive Government Council의 대행 | 다니엘 피뇰레 | 안토니오 트라시뷜 케브로 | |
제34대 | 제35대 | 제36대 | 제37대 | |
프랑수아 뒤발리에 | 장 클로드 뒤발리에 | 앙리 낭피 | 레슬리 마니가 | |
제36대°° | 제38대 | 권한대행 | 임시 | |
앙리 낭피 | 프로스페르 아브릴 | 에라르 아브라암 | 에르타 파스칼 트루요 | |
제39대 | 제40대 | 임시 | 대통령 대행 수석국무위원 | |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 라울 세드라 | 조제프 네레트 | 마르크 바쟁 | |
제39대°° | 임시 | 제39대°° | 제41대 | |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 에밀 조나생 |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 르네 프레발 | |
제39대°° | 임시 | 제41대°° | 제42대 | |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 보니파스 알렉상드르 | 르네 프레발 | 미셸 마르텔리 | |
대통령 대행 수석국무위원 | 임시 | 제43대 | 권한대행 | |
에반스 폴 | 조슬레름 프리베르 | 조브넬 모이즈 | 클로드 조제프 | |
권한대행 | 임시 | |||
아리엘 앙리 | 게리 코닐 | |||
°: 대통령(1847-1849), 황제(1849-1859) °°: 아이티 대통령은 임기가 단절되었다가 다시 집권해도 처음 집권했을 당시의 대수를 유지한다. | ||||
아이티 국왕 | }}}}}}}}}}}} |
Faustin-Élie Soulouque
포스탱엘리 술루크
생몰년: 1782년 8월 15일 ~ 1867년 8월 3일
[clearfix]
1. 개요
포스탱엘리 술루크는 아이티 대통령과 황제를 지낸 인물로, 포스탱 1세(Faustin Ier)라고 불리기도 한다.2. 일생
2.1. 노예에서 대통령까지
포스탱엘리 술루크는 아이티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시절인 1785년에 흑인 노예로 태어났는데 1793년에 해방되어 자유민이 되었고, 아이티 혁명 막바지인 1803년부터 1804년까지는 혁명군에 병으로 입대하여 프랑스군에 맞서 싸웠다.아이티의 독립이 확정된 이후에도 아이티군에 남아있던 술루크는 1806년에 아이티 육군 중위로 임관하여 본격적으로 직업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1810년에는 알렉상드르 페시옹 대통령에 의해 대통령 호위 기병대 장교로 임용되었고, 필리프 게리에 대통령 하에서는 대령으로 승진했으며, 장 바티스트 리셰 대통령 하에서는 중장으로 승진하여 아이티 육군 총사령관 겸 대통령 경호부대 사령관에까지 올라 아이티 군부와 정계의 핵심 인물 중 1명이 되었다.
이와 같이 출세가도를 달리던 술루크는 리셰 대통령이 임기 중인 1847년 2월 27일에 사망하자 대통령으로 추대되어 1847년 3월 2일에 취임했다.
2.2. 황제 포스탱 1세
그러나 술루크는 대통령직에 만족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집권 2년째인 1849년 8월 25일에 개헌을 단행하여 공화정을 폐지하고 1849년 8월 26일에 황제 포스탱 1세로 즉위했다.그가 수립한 아이티 제2제국은 장자크 데살린의 제1제국이 선거군주제를 채택했던 것과 달리, 세습군주제를 채택했고, 측근들에게 귀족 작위를 하사하며 지지를 확보했다.
경제적으로는 커피와 면화 재배를 독점하며 국고를 충당했으나, 낭비와 부정부패로 이를 탕진했고, 아이티의 지배를 받다 독립한 도미니카 공화국을 네 차례에 걸쳐 침공하여 재정복하려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856년에 있었던 4차 침공마저 실패로 끝나자 군부 내에서 포스탱 1세에 대한 불신이 갈수록 커졌는데, 그에게 작위를 하사받은 인물 중 하나인 타바라 공작 기욤 파브르 니콜라 제프라르가 1858년에 총대를 메고 반란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제프라르가 이끄는 반군은 같은 해 12월에 아이티 대부분을 장악했고, 1859년 1월 15일에 포스탱 1세가 퇴위를 선언하고 망명하면서 제국은 붕괴되었다.
당시 포스탱 1세는 프랑스 공사관에 망명을 받아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고, 결국 영국령 자메이카 킹스턴에 정착했다.
2.3. 퇴위 이후
자메이카 킹스턴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포스탱 1세는 이후 아이티 공화국 정부로부터 사면을 받아 귀국할 수 있었으나, 다시는 정계에 복귀하지 못한 채 조용히 여생을 보내야 했고 1867년에 사망했다.다만 제위 세습 자체를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라서 그의 후손이 명목상의 아이티 제위를 계속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