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839년부터 1842년까지 이어진 사건. 노예들의 선상반란 사건이 미국과 스페인의 외교 문제로까지 발전하였다.2. 전개
2.1. 아미스타드 호의 반란
1839년 6월 28일 쿠바 연안을 항해하고 있던 아미스타드 호(La Amistad)[1]는 53명의 아프리카계 사람들을 노예로 싣고 있었다. 배는 쿠바의 아바나를 출발하여 푸에르토 프린시페 항으로 가고 있었다.7월 2일 노예들 가운데 한 명이었던 조셉 친퀘(Joseph Cinqué)는 끈질긴 노력 끝에 자신의 쇠사슬을 풀어내고 동료들의 쇠사슬도 풀어주었다. 봉기를 일으킨 그들은 배의 선장과 요리사를 살해했고 2명의 선원이 죽었으며 이 과정에서 2명의 아프리카인이 사망했다.
아프리카인들은 서류상으로는 그들의 소유주가 되어 있던 호세 루이즈(José Ruiz)와 페드로 몬테즈(Pedro Montez)를 강요하여 목숨을 살려주는 대신 배를 아프리카로 돌리도록 했지만 호세는 배의 진로를 몰래 다른 곳으로 잡았다. 바로 미국이었다.
8월 26일, 아미스타드 호는 미국 해군의 전함 워싱턴 호에 나포되었다.
2.2. 아미스타드 호 소송
United States v. The Amistad스페인 정부가 핀크니 조약(Pinckney 's treaty)에 따라 아미스타드 호의 노예들이 스페인 사람의 소유라고 주장하여 연방 정부는 스페인을 대신하여 소송을 시작했다.
이에 노예 폐지 운동가들이 반발하였다. 루이스 타펜(Lewis Tappan)을 비롯한 노예 폐지 운동가들은 아미스타드 협회를 결성하여 아미스타드 호의 아프리카인들을 구명하려고 했다. 언어학자 윌러드 기브스(Willard Gibbs)는 그들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 항구를 뒤지고 다닌 끝에 서아프리카 출신으로 노예였다가 선원이 된 제임스 코베이(James Covey)를 알게 되었다.
아미스타드 협회는 아프리카인들의 증언에 따라 그들이 본래 자유인이며 포르투갈 노예상에게 불법적으로 납치되었고 불법적으로 쿠바에 이송되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 아프리카 인들은 노예가 아니라 불법 납치의 피해자이고 자유가 보장되어야 했다. 루에즈와 몬테즈는 이들이 1820년부터 노예였다는 서류가 있었지만 이는 쿠바에서 만들어진 위조 서류로 당시에는 흔히 쓰이던 관행이었다. 이들은 루이즈와 몬테즈를 불법 감금과 납치, 폭행 혐의로 고소하였고 한 번 체포되었던 이들은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 쿠바로 갔다.
여기에서 의외의 변수가 나타나는데 바로 당시 미국 대통령 마틴 밴 뷰런이었다. 밴 뷰런은 스페인과의 관계와 남부에서 노예 찬성론자들의 지지를 잃을 것을 염려하여 스페인 측의 입장을 은밀히 지지하였고 해군 소속의 스쿠너 선을 뉴 헤이븐 항구에 대기시켜 놓고 원하는 판결이 나오면 아프리카 인들이 항고하지 못하도록 곧바로 연행해 스페인령 쿠바로 이송시킬 준비까지 했다.
하지만 지방법원은 아미스타드 협회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아미스타드 호의 아프리카 인들은 자유라고 선언했다. 단, 이전부터 선장 소유의 개인 노예였던 한 명에 대해서는 선장의 소유권이 인정되어 선장의 상속인이 소유권을 넘겨받았는데 이 노예는 캐나다로 도망갔다.
정부의 대리인은 밴 뷰런의 뜻에 따라 순회법원에 상고하였고 순회법원은 사안의 중대함을 감안하여 대법원에 사건을 송치시켰다.
대법원에서는 전 대통령이자 국회의원인 존 퀸시 애덤스가 이들의 변호사로 나섰다.
대법원은 결국 이들이 (스페인 법에 따라) 합법적인 노예가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들의 자유를 인정하고, 폭력을 쓴 것도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인정했다.(The Amistad 40 US 518 (1841))
당시 대법관 대부분은 노예제를 지지하는 남부 출신이었기 때문에 위의 판결이 나온 것은 굉장히 의외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