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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03:30:30

장길산

張吉山(? ~ ?)

1. 개요2. 생애
2.1. 조선왕조실록2.2. 추안급국안2.3. 성호사설
3. 대중매체4. 같이보기

1. 개요

숙종 대의 도적. 소위 '조선 3대 도적'[1] 중 유일하게 끝까지 잡히지 않고 몸을 피해 종적을 감춘 인물이다.

2. 생애

실존 인물이긴 하나, 행적이 상당 부분 알려진 홍길동, 임꺽정과 달리 실록에는 숙종이 잡으라는 명을 내린 걸 제외하곤 큰 이야깃거리가 없는 인물이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그 이야기가 괴랄한 수준이다. 다만 조선 시대 활동한 범죄자들을 수사한 기록인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에는 장길산에 관하여 상당히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다. 또한 이익성호사설에서 장길산을 언급하였다.

후술하겠지만 사실 장길산이 알려진 행적이 적은 점이나 선배격 도적들인 홍길동, 임꺽정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것은 장길산의 주요 활동지역이 조선의 변방들 중에서도 러시아와의 국경을 맞댄 지역인게 컸다고 할수 있다. 이 당시 조선이 교류가 꾸준했던 중국, 일본과 달리 러시아와는 교류가 드문 시기였는데, 그런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지역이면 변방중의 변방이었던 곳이다. 이런 변방지역에서 활동했는데도 국왕이 직접 체포령을 내릴 정도였으니 나라를 뒤집어 놓았을 정도로 큰 활동을 한 것은 분명하다.

2.1.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기준으로 장길산에 대한 이야기는 3번 나오는데, 숙종 18년과 숙종 23년 기사이다. 18년 기사는 장길산을 놓친 양덕 현감을 벌주라는 일반적인 내용이지만 운부, 정도령과 엮이는 23년 기사는 그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다.
날이 저문 뒤에 이절(李梲)·유선기(兪選基) 등이 상변(上變) 하기를,
"어느 날 이영창(李榮昌)이 이절의 집에 와서 자면서 갑자기 묻기를, ‘그대가 장사지낼 땅을 얻으려고 한다면 우리 스승을 가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스승이란 중은 바로 운부(雲浮)로서, 당시 나이 70세로 송나라 때의 명신(名臣)이었던 왕조(汪藻)의 후손인데, 명나라가 망한 뒤 중국에서 표류하여 우리 나라에 도착하였으며, 머리를 깎고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갔는데, 그 사람은 위로는 천문(天文)을 통달하고 아래로는 지리를 통찰하고 중간으로는 인사(人事)를 관찰하여 재주가 옛날의 공명(孔明)유기(劉基)에 밑돌지 않는다는 자였습니다. 그가 불경(佛經)을 승려의 무리들에게 가르쳤는데, 그 중에서 뛰어난 자로는 옥여(玉如)·일여(一如)·묘정(卯定)·대성(大聖)·법주(法主) 등 1백여 인을 얻어 그 술업(術業)을 가르치면서 팔도(八道)의 중들과 체결(締結)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장길산(張吉山)의 무리들과 결탁하고, 또 이른바 진인(眞人) 정(鄭)·최(崔) 두 사람을 얻어 먼저 우리 나라를 평정하여 정성(鄭姓)을 왕으로 세운 뒤에 중국을 공격하여 최성(崔姓)을 왕으로 세우겠다고 하였습니다."
(중략)
임금이 또 국청(鞫廳)에 하교(下敎)하기를,
"극적(劇賊)[2] 장길산(張吉山)은 날래고 사납기가 견줄 데가 없다. 여러 도(道)로 왕래하여 그 무리들이 번성한데, 벌써 10년이 지났으나, 아직 잡지 못하고 있다. 지난번 양덕(陽德)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체포하려고 포위하였지만 끝내 잡지 못하였으니, 역시 그 음흉함을 알 만하다. 지금 이영창(李榮昌)의 진술함을 관찰하니 더욱 통탄스럽다. 여러 도에 단단히 타일러서 경계하여 있는 곳을 상세하게 정탐하게 하고, 별도로 군사를 징발해서 체포하여 뒷날의 근심을 없애는 것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숙종실록 31권, 숙종 23년 1월 10일 임술 3번째기사 / 반역 모의에 관련된 이절·유선기 등은 복주되고 이익화·장영우 등은 귀양 보내다
국청(鞫廳)에서 죄인 이영창(李榮昌)을 다시 추문(推問)하자, 말을 변경해서 공사(供辭)를 바쳤는데, 대략에 이르기를,
"이형징(李衡徵)이 윤두서(尹斗緖)·윤창서(尹昌緖)와 같이 찾아 왔기에 그대로 그들과 함께 심단(沈檀)의 집으로 갔더니, 심단의 아들 심득천(沈得天)과 윤두서가 은전(銀錢)을 후하게 주면서 말하기를, ‘우리가 김춘택(金春澤)과는 원한을 맺었으므로, 그가 반드시 죄를 꾸며서 해치려고 할 것이니, 그대가 모름지기 상세하게 엿보고 탐지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심득천이 죽은 뒤에 가까이서 유선기(兪選基)·이절(李梲)과 서로 친밀했다는 뜻을 심단과 윤두서 등에게 말하니, 윤창서가 말하기를, ‘이 무리들은 일찍이 환국(換局)을 도모하다가 유배당했었다. 이들은 틀림없이 불량한 일을 할 것이니, 그대가 모름지기 잘 처리하라.’고 하였는데, 탐지한 지 수일 뒤에 가서 이절 등을 보니, ‘우리가 어지러움을 틈타 일어나려고 이미 군장(軍裝)과 마필(馬匹)을 갖추었다.’고 하면서 내어 보이므로, 즉시 그 말을 심단 등에게 전하니, 모두 말하기를, ‘반드시 손수 쓴 필적(筆跡)을 얻은 연후에야 착실하게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김경함(金慶咸)은 개국 충신(開國忠臣)이란 말을 들어서 알고 돌아가 윤두서의 무리에게 보이니, 이형징이 인해서 해상(海上)의 정씨(鄭氏) 성(姓)을 가진 자, 옥여(玉如)·정학(鄭涸)·최헌경(崔憲卿) 등 및 삼광 사한(三廣四漢)이란 말을 지어내고, 또 신건(申鍵)의 은(銀)과 인삼에 대한 말과, 장길산(張吉山)과 관계를 맺은 상황과 여인(女人)이 소를 탄 상황을 지어내어, 그것으로 이절의 무리를 속이고 미혹되게 하였으며, 일여(一女)와 혜일(惠一)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서로 아는 터이며, 풍열(楓悅)이 이름난 중이란 것을 빙자해서 말하고, 여러 절의 이름과 다른 지역의 이름은 더러는 혜일에게 배웠고, 더러는 자신이 지어 낸 것이었으며, 묘정(卯丁)이란 이름도 자신이 지어 내어 이절 등에게 보여 세력이 확대됨을 보이려는 뜻이었고, 지난날의 거짓 초사는 과연 윤두서·이형징 제인(諸人)과의 약속을 매우 굳게 하였으며, 또 은화(銀貨)를 받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차마 바로 고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숙종실록보궐정오 31권, 숙종 [보궐정오실록] 23년 2월 16일 정유 1번째기사 / 국청에서 죄인 이영창을 다시 추문하자 말을 변경해서 공사를 바치다

뭔가 정감록에 등장하는 정진인이 언급되고, 왕조를 뒤엎고, 중국을 공격하고, 온갖 이야기가 다 돌아다니는데, 정작 장길산의 역할은 조력자 수준에 가깝다.[3] 유명하고 규모있는 범죄를 많이 저질렀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딱 그 정도. 사실 저 사건은 애꿎은 장길산을 끌어들여서 상대 파벌을 모함한 정치 사건에 가깝다.

2.2. 추안급국안

추안급국안에 의하면, 장길산은 지금의 함경북도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 남쪽의 서수라(西水羅)나 평안북도 벽동군(碧潼郡)의 해천동(蟹川洞)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서수라는 현재 러시아 연해주와 국경을 마주한 곳이고, 벽동군은 중국과 마주한 압록강 유역의 지역이다. 두 곳 모두 조선의 북쪽 끝인 변방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추안급국안에서는 장길산이 거느린 무리들의 규모를 가리켜, "말을 탄 병사 5천 명과 걸어 다니며 싸우는 보병 1천여 명이 있었다(有馬騎五千步兵千餘)."라고 기록했다.[4]

또한 추안급국안에 의하면 실제로 장길산은 이영창 사건 주동자들과 만남이 있었으며, 맹약의 징표로 '吉'자가 새겨진 단검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 장길산이 "만약 큰 일을 일으키려 하면 선사를 기다릴 것 없이 다만 나의 기병만으로도 거사하여 쳐들어가기에 충분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옥여에게 단검을 주어 표시로 삼았다고 합니다. 저는 직접 그 단검을 보았습니다.[5]

2.3. 성호사설

이익이 쓴 저서 성호사설 14권 인사문(人事門)편에서 처음 연산조의 홍길동과 명종조의 임꺽정과 함께 조선 3대 도적으로 언급되었다.

3. 대중매체

숙종실록에서 극적(劇賊)이라고 표현한 것을 괴거에는 탈놀이를 하는 광대 출신 도적이라고 오역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창작물에서 광대 출신으로 묘사된다.

3.1. 소설

파일:external/img.etnews.com/dakfdadafda-f.jpg

1970~80년대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을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6] 1974년 7월 11일부터 1984년 7월 5일까지 한국일보에 2,092회에 걸쳐 연재되었으며 1984년 전 10권으로 출간되었다.

본래는 임진왜란병자호란 후 피폐해진 조선 사회를 통해 자연스레 형성된 군도(群盜)였으나 황석영은 자신의 소설을 통해 민중성을 주입하여 대동 세계를 꿈꾸다 실패한 영웅이미지로 그려 내었다. 소설은 '장산곶매'의 전설로 시작하여 운주사 천불천탑의 전설로 마무리된다.

당대 민중 문학계의 대표적인 소설로 꼽히며 상징성과 대중성을 잘 조화시킨 소설로 불린다. 전반적으로 견고한 신분제와 시스템 아래에서 고통받고 갈등하는 민중의 삶과 이를 무너뜨리려는 주인공 장길산의 분투기로 읽히고 실제로도 그렇기는 하다. 그러나 동시에 작품 내에서 다양한 성격과 현실관을 갖춘 여러 인물들과 그들의 갈등을 끊임없이 부각시킴으로써 단순한 영웅 서사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 높은 평가를 받는 주된 원인이다.

소설가 김훈황석영이 악연을 맺은 작품이기도 한데 황석영이 <장길산>을 <한국일보>에 연재할 때 이를 담당한 기자가 김훈이었기 때문.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대학 새내기들에게 선배들이 꼭 읽어보라고 추천한 소설 중 하나이기도 했다. 당시 대학 도서관의 가장 많이 대출된 소설 부분에 꼭 등장하던 책 양대 산맥이 <장길산>과 <태백산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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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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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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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같이보기



[1]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2] 과거에는 연극을 하는 광대 출신의 도적이라고 오역하곤 했으나, 범죄의 규모가 큰 도둑이라는 의미이다.[3] 첫번째 기사 중 발췌된 부분의 주체는 장길산이 아니라 운부이다. 이 때문에 이덕일 같이 뒷이야기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운부에 집중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4] 출처: 한국의 판타지 백과사전/ 도현신 저/ 생각비행/ 149~151쪽[5] 출처: 조선의 예언 사상 상/ 김탁 저/ 북코리아/ 295쪽[6] <추안급국안> 연구자인 정석종 교수가 장길산에 대한 기록을 발견하고 황석영에게 장길산을 소개하고 자료를 제공하여 쓰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