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Chartism, Chartist Movement차티스트들 사이에서도 쓰였다고 알려진 영국 공화주의 기. 1816년 스파 필즈 폭동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1838년부터 1840년대 후반까지 보통 선거를 바탕으로 한 의회 민주주의의 실시를 요구하며 영국에서 벌어졌던 최초의 노동자 운동. 1850년대 전반까지 영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끼쳤으며 민주주의의 중요한 원칙을 제시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차티즘, 차티스트라는 명칭은 노동자들이 제기한 인민헌장(People's Charter)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1838년 차티스트 운동의 요구를 구체화한 문서를 말한다. 보통 선거와 비밀 선거, 선거구 평등화, 의회 매년 소집, 하원 의원 유급제, 재산에 따른 피선거권 자격 제한 폐지와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 보면 지극히 당연한 내용들이지만 당시 주요 지배층에게는 충격과 공포에 가까운 급진적인 내용들이다.
시기적으로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는 공화주의 혁명이 한창일 때 다른 공화주의 혁명에서 영감을 받은 기와 슬로건이 사용된 만큼 공화주의 운동으로 착각될 법도 하며 실제로 많은 영국의 공화주의자들도 차티스트 운동에 참여하였으나 차티스트 운동의 주류 의견 자체는 위와 같은 개혁들이었지 왕정 폐지와 같은 급진적인 주장들을 하는 이들은 소수였다.
2. 진행
본래 19세기 영국은 일정 이상 재산을 가진 성인 남성에게만 참정권이 있었다.[1] 1830년대 초반부터 영국 노동 계층은 재산의 보유액과 상관없이 성인 남성 전체에게 투표권을 줄 것을 호소했지만 의회는 그 부탁을 사뿐히 무시했다. 정확히는 도시의 중산층에게만 선거권을 줘 버렸다. 노동계층과 연대해서 선거권을 받기 위해 온갖 애를 쓰던 중산층은 자신들이 선거권을 획득하자 태세를 급전환해서 노동자들을 나 몰라라 했다.1834년 휘그당의 주도하에 빈민법이 개정되면서 영국 노동자들의 사회적인 입지는 사실상 전무해졌고 이들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랐다. 1830년대 중반부터 런던과 웨일스 지역에서 수립되기 시작한 노동 단체들이 노동자들의 불만에 불을 지피면서 마침내 차티스트 운동은 막을 올리게 되었다.
1838년 5월 런던 노동자 협회의 지도자였던 윌리엄 러벳(William Lovett)은 인민헌장을 발표하고 이 헌장이 의회에서 통과될 수 있도록 런던과 버밍엄 등 영국 각지의 대도시에서 집회를 갖는 한편 120만명의 서명이 담긴 청원을 영국 하원에서 제출했다. 물론 의회에서 이 청원은 부결됐으며 정부도 러벳을 비롯한 주요 지도자들을 체포하는 한편 집회를 강제로 해산하는 강경책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분명히 보여줬다.
정부의 강경책에 반발하여 급진 세력들도 실력을 행사할 것을 주장하면서 1840년 웨일스에서는 뉴포트 봉기(Newport Rising)가 발발했으며 무장 투쟁까지 이르지는 않더라도 파업과 같은 형태로 투표권을 주장하는 움직임은 1840년대 초중반 내내 영국 전역에서 끊이지 않았다.
이 운동이 가장 정점에 이르렀던 1842년에는 러벗의 뒤를 이어 운동을 이끈 퍼거스 오코너(Feargus O'Conner)가 전국 헌장 협회를 맨체스터에서 조직한 데 이어 지난번보다 거의 3배 가까이 많은 325만 명의 서명이 담긴 청원을 재차 영국 하원에 제출했다. 이후 한동안 잠잠한 것처럼 보였던 차티스트 운동은 1848년 전 유럽을 뒤흔든 혁명에 고무되어 다시 한번 영국 정국을 뒤흔들었다.
지난번보다도 한층 많아진 570만 명의 서명이 담긴 청원이 하원에 제출됐으며[2] 4월에는 런던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지만 3월 혁명 당시 유럽 대륙의 노동자들이 행한 '급진적'인 행동들은 영국의 기득권층들로 하여금 공포심을 심어줬고 결국 차티스트 운동은 분쇄되었다.
그래도 몇몇 지도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운동을 이어나가고자 했지만 1858년 전국 헌장 협회가 해체되면서 결국 무산되었으나 영국의 기득권층이 아무리 보수적이라고 할지라도 시대의 흐름을 거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던 터라 마침내 1867년과 1884년의 선거법 개정을 통해 영국에서 보통 선거가 정착되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남성'에게 한정된 보통 선거였다. 여성에게도 참정권이 주어진 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인 1918년이었는데 남성 21세 이상, 여성 30세 이상으로 여전히 차별이 있었지만 1928년에 21세로 통일되었고 1969년 18세로 하향되어 지금에 이른다.
3. 기타
- 당시 체포된 극렬 차티스트 활동가들은 호주를 비롯한 영국의 전세계 식민지로 유배를 당했는데 유배지에서도 자신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전파하고 각종 소요를 일으켜서 영국 정부는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이들이 진보적 사상을 호주와 뉴질랜드에 퍼뜨린 덕에 이들 지역에서는 본토보다 훨씬 빠른 20세기 초반에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졌다. 특히 뉴질랜드는 1893년에 여성 참정권이 주어져 세계에서 최초로 여성 참정권을 준 나라가 되었다.
- 당시 교회는 기득권층의 편에 서서 차티스트 운동을 맹렬히 반대했는데 이로 인해 차티스트 운동이 한창 격화됐던 1840년대 초중반에는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반교회 활동이 벌어졌다.
- 한편 런던에서 망명 중이었던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도 이 운동에 활발히 참가했는데 오코너의 뒤를 이어 운동을 이끈 조지 하니(George Harney)와 함께 1845년 민주주의자 우애 협회(Fraternal Democrats)를 설립에 참여했다. 이 조직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영국을 떠난 뒤인 1845년 9월 22일에 창설되었다.
- 차티스트 운동이 한창이었던 시기에 즉위한 빅토리아 여왕은 재위 내내 차티스트 운동을 비롯한 모든 투표권 확대 운동에 대해 극도로 부정적인 입장이었는데 '비천한 것들이 감히 정사에 끼려고 하다니 무엄하기 짝이 없구나'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심지어 본인이 여성이면서도 여성들의 투표권 부여에 대해서 대놓고 극도의 거부감을 표현했는데 이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보다는 당시 유럽의 여왕들처럼 '군주'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4.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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