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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2 18:24:29

아라곤의 카탈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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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F6F0><colcolor=#000000> 잉글랜드 왕국 헨리 8세의 정비
아라곤의 카탈리나
Catalina de Aragó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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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atherine_aragon.jpg}}}
이름 스페인어 카탈리나 데 트라스타마라 이 트라스타마라
(Catalina de Trastámara y Trastámara)
영어 아라곤의 캐서린
(Catherine[2] of Aragon)
출생 1485년 12월 16일
카스티야 연합 왕국 알카라데에나레스 대주교의 궁전
사망 1536년 1월 7일 (향년 50세)
잉글랜드 왕국 킴볼튼 성
장례식 1536년 1월 29일
잉글랜드 왕국 피터버러 대성당
배우자 웨일스 공 아서 (1501년 결혼 / 1502년 사망)
헨리 8세 (1509년 결혼 / 1533년 무효화)
자녀 메리 1세
아버지 페란도 2세
어머니 이사벨 1세
형제 이사벨, 후안, 후아나 1세, 마리아
종교 가톨릭
서명 파일:아라곤의 카탈리나 서명.svg
1. 개요2. 작위3. 생애
3.1. 냉대받는 왕세자비3.2. 헨리 8세의 결혼과 사랑3.3. 이혼3.4. 복잡한 이혼 과정3.5. 쓸쓸한 말년3.6. 외로운 죽음
4. 가족관계
4.1. 조상4.2. 자녀
5. 대중매체
5.1. <튜더스>5.2. <위대한 대제, 카를로스>(Carlos, rey emperador)5.3. <천일의 스캔들>5.4. <스페인 공주>(The Spanish Princess)5.5. <식스 더 뮤지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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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통일 스페인 왕국을 성립시킨 가톨릭 부부왕 이사벨 1세페란도 2세의 막내딸로, 트라스타마라 왕조 아라곤과 카스티야 왕국의 공주였다. 이 때문에 '아라곤의 카탈리나'라고 불린다. 잉글랜드 튜더 왕조 제2대 왕 헨리 8세의 첫 번째 아내이자 메리 1세의 어머니였다. 후에 신성 로마 제국스페인의 지배자가 되는 카를 5세(카를로스 1세)와 포르투갈의 왕비 카타리나, 신성 로마 제국의 이자벨라 황후의 이모이기도 하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가 각자 왕국을 다스리는 군주였기 때문에 특별히 고귀한 혈통으로 여겨졌으며, 이에 대한 긍지는 후에 카탈리나의 행보에도 영향을 미쳤다.[3]

2. 작위

파일:Coat of Arms of Catherine of Aragon.svg
문장

3. 생애

3.1. 냉대받는 왕세자비

어머니인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은 남자 못지 않은 왕의 의무를 보이기 위해 임신한 몸으로 전장에 나갔고, 카탈리나는 이때 태어났다. 그리고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7세의 장남 아서 튜더와 맞선(?)을 봤고, 두 아이는 증인들 앞에서 아무 이상 없음을 확인받고 약혼이 성사되었다. 15세가 된 1501년 카탈리나는 잉글랜드로 가서 1세 연하인 아서와 결혼했다.

약혼 후 정식 결혼 전 여행을 하면서 산티아고 순례지로 유명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방문했는데, 이 때 사고가 발생했다. 콤포스텔라 성당에는 '보타푸메이로'(Botafumeiro)라는 큰 향로가 있었는데, 이 향로를 성당 천장에 매달고 이를 줄로 당겨 흔들어서 분향했다. 그런데 캐서린이 성당을 방문했을 당시 이를 맡은 사제들이 줄을 당기다가 힘 조절을 잘못했는지 이 향로가 그만 창문을 뚫고 날아가 버렸다. 불행 중 다행으로 죽거나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어떻게 보면 이 사고는 캐서린의 결혼 생활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전조 현상이기도 했다.

아서 튜더는 부왕 헨리 7세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왕세자였으나 유달리 병약한 체질이었고, 결혼 기간도 불과 몇 개월이었기에, 과연 부부관계가 이루어졌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중세 유럽에서는 부부결혼 서약을 했더라도 동침을 하지 않으면 결혼이 성사되지 않은 것으로 봤기 때문에, 이 부부가 동침하지 않았다면 진정한 결혼을 했다고 볼 수 없었다.

후에 캐서린은 시동생이었던 헨리 8세와 결혼하면서 자신이 아서와 부부관계를 하지 않은 처녀의 몸이라고 주장했고, 이 주장을 교황청에서 받아들여서 결혼이 성사됐다. 일단 캐서린과 아서가 부부 관계를 못했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긴 하지만 이견도 있다. 즉, 결혼 기간이 대략 20주 정도인데 한번도 동침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는 주장이다. 또한 아서가 그렇게까지 병약한 것은 아니고 캐서린과 동침했음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즉, 아서가 결혼식 다음날 친구들에게
"어젯밤 스페인을 정복했다."
고 말했다고 한다.

다만 이러한 기록은 걸러서 볼 필요가 있다. 그 시대의 관념상 '남자가 허약해서 아내와 동침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성적인 무능력의 낙인이 찍히는 것으로 엄청나게 망신스럽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심지어 아서 튜더는 일국의 왕세자인데, '왕세자가 허약하여 사내 구실을 못한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그의 자존심과 위신에 얼마나 큰 타격이 되겠는가? 극단적으로는 생식 불능을 이유로 왕위 계승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그나마 인식이 많이 개선된 현대 사회에서조차 남성이 성적 능력이 없거나 부족하다는 것은 당사자 입장에선 여전히 수치스럽게 느끼는 경우가 흔하며, 그 때문에 적지 않은 남성들이 거짓말과 과장을 섞어 가며 자신의 성적 능력을 과시하곤 한다. 하물며 중•근세 사회에, 오늘 내일 하는 노인도 아니고 신혼의 젊은 신랑이 '어젯 밤 새 신부와 초야를 치르지 못했다', 즉 본인이 '성적으로 무능력하여 자기 아내조차 만족시키지 못하는 부실한 남편'이라는 것을 솔직히 털어놓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며, 실제로는 일을 치르지 못 했을지라도 남들 앞에서는 허세를 섞어서라도 했다고 말하는 게 일반적인 상황이다.

어쨌든 결혼하고 그 이듬해인 1502년에 어린 부부는 아서의 영지인 웨일즈로 여행을 갔다가 모두 병에 걸리는데, 캐서린은 회복했지만 아서는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로써 캐서린은 16세에 '왕세자의 미망인'(Princess dowager)이 되었다.

여기서 문제가 복잡해졌다. 이 와중에 자식들을 아끼던 캐서린의 어머니인 이사벨 1세가 1504년 세상을 떠났고, 헨리 7세는 사돈인 아라곤의 페란도 2세지참금을 다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며느리인 캐서린이 자기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잉글랜드는 오랜 장미전쟁으로 쑥대밭이 되었던 터라,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7세는 다른 나라 군주들에 비해서 부유하지 못한 데다 지독한 구두쇠로 악명이 높았다.

헨리 7세의 지참금 지급 요청에 페르난도 2세는 "지참금을 다 보냈다"고 주장해서 든든한 어머니인 이사벨 1세를 떠나보낸 지 얼마 안 되어서 안 그래도 힘든 캐서린만 시아버지와 친정아버지 사이에서 불쌍하게 애매한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에 헨리 7세는 에스파냐와의 동맹 및 지참금을 놓치기 싫어했기에 차남이자 새로운 후계자가 된 헨리, 즉 미래의 헨리 8세와 큰며느리였던 캐서린을 맺어줄 수 있는 가능성을 내비쳤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더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 페르난도 2세에게 캐서린과 헨리의 결혼이 확정이라는 답은 주려고 하지 않았다.

지참금 협상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자 헨리 7세는 낯선 나라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린 며느리 캐서린에게
"너는 내 식객이나 마찬가지다."
라며 심하게 눈치를 주고 생활비까지 끊어버렸다. 실제로 이 시기에 캐서린이 친정아버지 페란도 2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헨리 7세의 푸대접으로 대국의 왕녀라는 지위가 무색할 정도로 빈곤하게 지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특히 시아버지의 궁정에서조차 소외된 상태였던지라, 친정에서 데려온 시녀들의 월급을 지급하는 것은 고사하고 옷도 없어서 에스파냐에서 가져온 낡은 옷을 입고 지냈다. 사실 옷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먹을 것을 마련하는 것조차 힘든 형편이었다. 그래서 캐서린은 지참금으로 가져온 보석과 식기를 팔아서 생활해야 했는데, 시간이 지나며 그것들도 모자라서 결국 빚을 지게 되어 친정인 스페인에 생활비를 보내달라는 편지를 쓸 정도였다.

이 와중에 헨리 7세는 "캐서린을 차남 헨리와 약혼시키겠다"고 간을 보다가, "지참금을 다 못 받아냈으니 취소하자"는 등 계속 희망고문을 해댔다. 더구나 친아버지라는 페란도 2세 또한 캐서린에게 생활비만 보내줄 뿐, 딱히 돌아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으며, 먼 잉글랜드로 떠나보낸 딸의 안위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4] 이 상태가 무려 7년이나 계속되었다.

3.2. 헨리 8세의 결혼과 사랑

다행히도 헨리 7세가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왕위에 오른 10대의 헨리 8세프랑스나 다른 나라 왕녀들과도 혼담이 오갔지만 형수인 캐서린에게 청혼했다. 형수와 결혼하는 것은 근친상간으로도 여겨질 수 있었지만, 캐서린 자신이 아서와 합방하지 않은 처녀이므로 헨리의 형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절차를 거치자[5] 교황청에서는 둘의 결혼을 허가했다. 그래서 1509년에 캐서린은 23세의 나이로 18세의 헨리 8세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려 잉글랜드의 왕비가 되었다.

많은 창작물에서 아라곤의 캐서린은 보통 검은 머리에 매력이 없는 중년의 라틴계 스페인 여성으로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형적인 라틴계 여성과는 거리가 먼 외모였고, 더구나 상당한 미인이기까지 했다. 키가 매우 작았던 걸 빼면 고전적인 게르만계 미인의 조건인 새하얀 피부와 치렁치렁한 붉은 끼가 도는 금발푸른 눈동자를 모두 갖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고 한다.[6] 더구나 캐서린은 강대국의 왕녀라는 고귀한 신분이었기에, 낭만적이며 기사도를 좋아했던 젊은 시절의 헨리 8세는 7년이나 시련을 겪은 가엾은 공주를 자신이 구출해낸다는 사실에 큰 매력을 느꼈다.

참고로 키가 너무 작은 것은 10대 중후반 동안 시아버지 헨리 7세에게 냉대받아 경제적으로 힘들게 지낸 탓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니까 헨리 7세 때문에 경제난에 시달리느라 발육 부진이 왔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캐서린은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힘든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훗날 캐서린이 헨리 8세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여러 번 가졌지만 대부분 유산/사산한 것 또한, 이 시기의 어려운 생활의 후유증이라는 의견도 있다. 결국 튜더 왕가의 대가 끊긴 것은 결과적으로 헨리 7세의 잘못이 되는 셈이다.[7]

훗날 헨리 8세가 그 유명한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캐서린을 냉정히 내치는 방식으로 이혼을 강행한 것 때문에,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은 애정이 없는 철저한 정략결혼이었다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헨리 8세는 캐서린과 결혼을 하던 당시만 해도 캐서린을 진심으로 사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20대 무렵에 쓴 시에서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나는 캐서린을 골라 결혼할 것이다."
라고 자랑하기도 했다.[8]

캐서린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순종적이고 얌전한 성격이었으나, 한편으로는 7년에 걸친 시아버지 헨리 7세의 핍박과 가난을 견딘 경험 덕분에 인내심도 대단했으며,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에스파냐의 왕녀 지위보다는 어렵게 획득한 잉글랜드의 왕비 지위에 더 높은 자긍심을 가졌다고 한다. 결혼 초기에는 부부 금슬도 상당히 좋은 편이었기에, 헨리 8세와의 사이에서 여러 차례 아이를 가졌다. 기록에 따르면 6번이나 임신을 하여 총 3남 3녀를 낳았다고 한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모두 사산하거나 태어난 지 얼마 못 되어 숨졌다.

이 잦은 유산과 태아의 사망이 실질적으로는 헨리 7세 탓이라는 주장들도 있다. 헨리 7세가 캐서린을 정략적으로 이용하고 냉대하면서, 캐서린이 신체적으로 한창 자랄 나이인 10대 중후반에 무려 7년 동안이나 식사도 제대로 못할 정도의 어려움을 겪었으니 신체 발육이 제대로 안 되었을 거란 추측을 할 수 있다. 각종 창작물에서 이 상황이 더 극적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물론 그 시대의 영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던 점을 감안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 높은 사망률을 딛고 살아남은 자식이 딸인 메리 1세 뿐이었다. 그래서 헨리 8세는 앤 불린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유일한 적자녀인 메리 1세를 매우 아꼈다고 한다.

3.3. 이혼

하지만 세월이 지나 캐서린이 나이가 들어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적어진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헨리 8세앤 불린에게 반하면서 캐서린은 헨리 8세에게 눈엣가시가 되고 말았다. 헨리가 젊고 매력적인 앤에게 푹 빠져 있기도 했지만, 당시 헨리 8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이제서야 형수를 아내로 삼았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헨리 8세는
"나에게 아들이 안 생기는 것은, 형수와 결혼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벌을 내린 것이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튜더 왕가 이전의 잉글랜드 왕가인 플랜태저넷 왕조의 계승자들이 아직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헨리 8세는 자신에게 적법한 아들 후계자가 안 생기면 자신의 사후에 튜더 왕가가 왕위를 찬탈 당할까봐 무척이나 두려워했다. 왕비가 왕자를 낳지 못해서 자기 대에서 튜더 왕가의 맥이 끊어질까 두려워한 것이다.[9] 그래서 왕자가 태어나지 않는 것이 자신이 형수와 결혼해서 하느님께 벌을 받은 게 아닌지 진심으로 고민하던 찰나에 그 유명한 앤 불린이 등장한 것이다.

그 시대 전통적인 여성상인 캐서린과는 전혀 다르게, 발랄하고 신선한 매력으로 무장한 앤 불린은 머리까지 좋았다.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 왕궁에서 유학한 경험으로 외국어와 화술, 매너에 능통했으며 다른 여자들처럼 왕의 정부가 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헨리 8세에게 정식 결혼을 요구하며 육체 관계를 피했던 것이다. 앤 불린은 자신에게 몸이 달아 있는 헨리에게 결혼하면 원하던 대로 자신을 가질 수 있으리라 유혹하면서 끊임없이 '왕자를 낳아드릴 수 있으니 날 왕비로 삼아달라.'고 말하며, 정식으로 결혼하여 아내로 삼아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헨리 8세는 앤 불린을 왕비로 책봉하기 위해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화[10]하기로 결정한다. 캐서린이 원래 자신의 형인 아서의 아내였다는 점, 형수와 결혼해서는 안 된다는 《성경》의 구절을[11] 어겼다는 이유를 들어 교황에게 혼인 무효를 청구했다. 그러나 교황은 당시 위세가 높았던 에스파냐와 신성 로마 제국의 압력[12] 때문에 이를 기각했다.[13]
로마 교황 클레멘스 7세: 아들이 없다고 조강지처를 몰아낸대서야 어디 말이 되는고? 아들 딸 구별 말고 건강하게 잘 키우자는 표어도 모르는가?[14] 더구나 가톨릭이 이혼을 금하고 있는 줄 알면서도 뻔뻔하게 그런 신청을 해?![15]

스페인 국왕 페란도 2세: 뭐야? 내 딸을 몰아내려고 해? 고~얀지고! 로마 교황에게 압력을 넣어서 이 이혼을 절대로 인정하지 못하게 하라!
먼나라 이웃나라 - 영국편》에서 헨리 8세의 이혼을 불허하는 로마 교황과 에스파냐 국왕의 대사

다만 이 발언은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흔히 있는 고증오류 중 하나이다. 페란도 2세는 이미 고인이었고, 당시의 스페인 국왕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겸하는 카를 5세였다. 따라서 카를 5세가 "죄 없는 우리 이모를 몰아내려 한다고?"라고 말하는 것으로 바꿔야 한다.

게다가 애초에 페르난도 2세는 교황을 압박할 정도의 힘이 있다고 보기도 힘들었다. 아내인 이사벨 1세와 함께 동군연합의 군주이기는 했지만 본인은 아라곤의 왕, 이사벨 1세는 카스티야의 여왕으로 아라곤이 카스티야보다 여러모로 뒤처져서 아내에게 눌리는 편이었기 때문이다.[16] 이사벨 1세가 저 말을 했다면 모를까, 페르난도 2세는 그런 말을 할 처지가 못 되었다.

참고로 페르난도 2세의 발언권 부족에 대해서 신대륙에서 오는 수익을 카스티야에서 꿀꺽해서 아라곤이 위축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있는데, 이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이사벨 여왕의 시대를 한참 지나, 펠리페 2세의 시기에도 스페인은 신대륙에서 오는 이익이 적어서 전비는 죄다 스페인 왕국에서 충당하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아라곤은 금융업과 해운업, 조선업이 발달해서 스페인 동군 연합 왕국의 신항로 개척 사업에 자금과 선원, 기술력을 제공했다. 스페인의 신항로 개척과 아메리카 탐험은 양대 왕국의 공동 사업이었지, 카스티야의 전유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두 왕의 치세에 아라곤은 신항로 개척의 악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당시 연도를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캐서린의 부모님인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 둘 다 이혼 공방 당시 이미 승하한 상태라서, 캐서린은 헨리 8세의 이혼 및 폐위 위협에 든든한 보호막 없이 맞서야 했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3.4. 복잡한 이혼 과정

이 과정에서 무려 7년 간의 지루한 공방이 이루어졌다. 유일한 딸 메리 1세의 신분과 안위를 걱정하여 이혼을 극렬히 거부하는 캐서린과 "나를 왕비로 세워달라"며 닦달하는 앤 불린 사이에 낀 헨리 8세는 완전히 녹초가 됐다.

헨리 8세는 자신에게 직접 찾아와 "혼인 무효 신청을 거두어달라"고 간청하는 캐서린한테 "수녀원에 들어가라"고 했으나, 당연하지만 수녀원에 들어가면 평생을 홀몸으로 살아야했기에 캐서린은 단호히 거부했다. 캐서린은 자신이 잉글랜드의 왕비가 되는 것은 하느님이 내려주신 운명이라 생각했으며, 지금은 헨리 8세가 앤 불린이라는 요부의 유혹에 넘어가 죄악에 빠져들었지만 결국 진정한 아내인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캐서린이 시아버지 헨리 7세에게 겪었던 냉대를 생각하며, 이것 역시도 그때처럼 하나의 시련이라 생각했다 해도 이상할 건 없다.

아무튼 캐서린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이모로서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앤 불린이단으로 생각했기에, 앤이 왕비가 된다면 헨리 8세도 이단으로 빠져들 것이라고 생각했다.[18] 무엇보다도 자신이 왕비 지위에서 물러나면 사랑하는 외동딸이자 왕위 후계자인 메리 1세의 입지가 너무나 위태로워진다. 만약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이 적법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 대 에스파냐의 왕녀이자 잉글랜드의 왕비인 자신과 헨리 8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메리 공주도 일개 사생아에 불과하다는 것이 아닌가? 과거에 캐서린은 아서가 죽은 후 7년이나 시아버지의 냉대를 버텼는데, 하느님은 그녀의 인내에 제대로 보답해주시지 않았던가? 당연히 캐서린은 굽힐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헨리는 그저 순종적이라고만 생각했던 아내가 의외로 강하게 이혼을 거부하며 버티자, 대단히 화를 내며 그녀를 증오하게 된다. 그녀의 얼굴조차 보지 않다가 나중에 가서는 근위병들을 시켜 궁정에서 강제로 내쫓아 버리고, 딸 메리가 어머니인 캐서린과 만나는 것조차 막았으며, 앤 불린에게 선물하기 위하여 캐서린이 지니고 있던 왕가의 보석들을 강제로 빼앗는 것도 모자라 캐서린과 메리 모녀가 편지로 교류하는 것조차도 금지시켜버리는 악행도 저질렀다. 교황청에서는 헨리 8세의 요청을 들어줄 듯하다가, 결국 캐서린의 조카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압박에 굴복하여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은 적법하다고 선언해버렸다. 그러자 헨리 8세는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를 설립함으로써 교황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자신이 잉글랜드 국교회의 수장이 되는 강수를 두면서까지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화하며 캐서린을 정식으로 왕비에서 폐위시켰다. 이 과정에서 토머스 울지가 몰락하고, 토머스 크롬웰이 왕의 오른팔로 떠올랐다.

3.5. 쓸쓸한 말년

"아서와 결혼했지만 초야를 치르지 않아 처녀인 몸으로 헨리와 결혼했기에 절대 혼인 무효는 안 된다"고 버티던 캐서린은[19] 결국 다른 궁인 킴볼튼 성으로 쫓겨났으며, 한때 왕비였다고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초라하고 궁핍하게 살아야 했다. 혼인무효화에 저항하느라 헨리 8세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미워하여 생활비는 물론 연금조차 끊어버리다 보니[20] 시종들에게 급료를 줄 수조차 없었기 때문에, 세간살이와 보석과 옷을 팔고 여기저기서 빚을 내기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게다가 저렇게 쫓겨난 후에 딸 메리를 그토록 그리워했는데도 헨리 8세의 방해로 다시는 딸과 만날 수 없었다.

3.6. 외로운 죽음

일방적인 이혼과 폐위를 당해 궁에서 쫓겨나고 딸 메리와 생이별한 채 어렵게 지내다 수녀원에 들어가서 교회의 도움을 받으며 살게 되었고, 기도와 금식을 하며 종교 활동에만 전념했다. 그러나 캐서린은 수녀원에 들어간 지 2년 만에 결국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 그녀의 나이 향년 51세. 사후 캐서린의 시신을 부검한 부검의가
"심장에 시커멓게 종양이 있었다."
라는 기록을 남겼다. 현대 의학 관점에서 보면 암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검게 변한 심장을 두고, "앤 불린이 캐서린을 독살한 거다", "캐서린이 자신을 버린 남편을 너무 사랑해서 심장이 썩어 들어간 거다" 등의 소문이 돌았다. 캐서린은 생전에 신앙심이 깊고 예의 바르며 가난한 백성들에게 자선도 베푸는 등, 귀족들과 백성들 사이에서 덕망이 높고 인기가 많은 왕비였기에 그녀와 친하게 지내던 귀족들과 시종들은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찾아와 그녀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했다.

캐서린은 죽기 전에 편지를 남겨 조카 카를 5세에게 자신의 딸 메리를 돌봐달라고 했으며 헨리 8세에게도
"당신이 내게 저지른 모든 것을 용서하며, 우리 딸 메리를 잊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말을 남기고자 합니다. 다시 한 번만이라도,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라고 애끊는 마지막 편지를 남겼다. 그러나 헨리 8세는 마지막까지 비정하게 캐서린에게 오지 않고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게다가 헨리 8세는 딸 메리가 어머니 캐서린의 장례식에도 가지 못하게 했고, 캐서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선 앤 불린과 함께 축하의 뜻을 상징하는 노란 옷을 입고 공식 석상에 나타나기까지 했다.

심지어 앤은 캐서린의 사망 소식을 듣자 "이제야 내가 진정한 왕비가 되었다"며 의기양양하게 말하고 다녔다는 비화도 있다. 하지만 정작 앤도 왕비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도 똑같이 아들을 못 낳는다는 이유로 폐위당하고 하나뿐인 딸도 사생아로 전락한 뒤, 본인은 아예 목이 잘려서 캐서린보다 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아무튼 시신은 예를 갖추어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안장하는 대신 피터버러 대성당에 안장했다.

한편 캐서린의 외동딸 메리는 어머니의 이런 아픔을 보고 자라며 졸지에 공주 지위를 상실하고 레이디(Lady)의 지위로 격하되었고 사생아 신세까지 된 데다가 강제로 이복동생 엘리자베스시녀가 되는 수모를 당했고, 아버지 헨리 8세의 방해로 어머니를 보지도 못하고 편지도 못 보내며 연락 한번 못하다가 어머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으며 장례식에 가는 것마저 금지당했기 때문에 평생 아버지와 새어머니 앤 불린을 매우 증오했다.[21]

덧붙여 이 때문에 메리가 앤 불린의 딸 엘리자베스를 싫어하고 경계했다고 하는데, 사실 이 자매의 사이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선 엇갈리는 이야기가 있어서 확실하진 않다. 메리가 엘리자베스에게 느낀 건 애증이었다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많다. 확실한 건 메리가 즉위한 후엔 정치적, 종교적인 이유 탓에 엘리자베스와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가 유일한 피붙이이며 자식이 없는 자신의 후계자이기도 해서 엘리자베스를 빌미로 수많은 반역 모의가 있었는데도, 메리가 엘리자베스를 처형시키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설사 미워했더라도 죽일 정도로 미워하진 않았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특히 메리는 상당히 정이 많고 무른 면이 있었기 때문에, 이복동생 엘리자베스에게 애정과 미움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가졌다고 보는 편이 맞을 듯. 한국사에 비유하면 경종영조의 관계와 유사하다.

캐서린은 순종적이지만 강단 있는 성격으로, 6년이라는 긴 이혼 재판 기간 동안 자신이 진정한 잉글랜드왕비라는 것을 주장했고, 앤 불린이 잉글랜드의 왕비로 즉위한 뒤에도 자신의 모든 문서 서명을 Katherine the quene[22]으로 했다.

어머니의 임종조차 지킬 수 없었던 딸 메리 1세는 어머니가 묻힌 옆에 묻히길 원하지만, 결국 그 꿈은 이뤄지지 못한다. 대신 메리의 옆자리는... 메리 1세 항목 참조.

여러모로 조선시대의 인현왕후와 비슷하다. 남편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본인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쫓겨나고, 민중들의 동정을 받고 쓸쓸한 최후를 맞이한 게 공통점. 그 외에도 왕인 남편에게 순종적이었지만 의외로 자신의 신념으로 버티는 뚝심 하나는 제법 있었다는 점. 몸이 병약했다는 점도 같다.[23] 다만 캐서린은 자녀를 둘이나 낳았고 그 자녀 중 하나가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인현왕후는 숙종과의 사이에서 자녀가 없었다는 것이 차이점.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아라곤의 카탈리나
(Catherine of Aragon)
<colbgcolor=#fff3e4,#331c00> 페란도 2세
(Ferdinand I)
<colbgcolor=#ffffe4,#323300> 추안 2세
(John II)
페란도 1세
(Ferdinand I)
알부르케르케의 엘레오노르
(Eleanor of Alburquerque)
후아나 엔리케스
(Joanna Enriquez)
파드리케 엔리케스
(Fadrique Enríquez)
마리아나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
(Mariana Fernández de Córdoba)
이사벨 1세
(Isabella I)
후안 2세
(John II)
엔리케 3세
(Henry III)
랭커스터의 캐서린[24]
(Catherine of Lancaster)
포르투갈의 이자벨
(Isabella of Portugal)
포르투갈의 장관 주앙 왕자[25]
(Infante John, Constable of Portugal)
바르셀루스의 이사벨
(Isabella of Barcelos)

4.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녀 메리 1세
(Mary I)
1516년 2월 18일 1558년 11월 17일 펠리페 2세

5. 대중매체

5.1. <튜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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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도일 케네디[26]가 연기한 아라곤의 캐서린.

시즌 1, 2에 걸쳐서 등장, 극 중에서 발음이 심히 뻣뻣(?)한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스페인 공주다운 설정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조카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카를 5세가 런던에 왔을 때나 황제가 보낸 스페인 대사들과 대화할 때는 종종 스페인어를 사용하기도 하며, 헨리의 뜻에 따라 메리가 웨일스로 보내질 때도 스페인어로 메리에게 "너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말아라. 너는 카스티야의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피를 이었으며 잉글랜드 왕의 유일한 딸이다. 언젠가는 여왕이 되거라."라는 당부를 말해주기도 한다.

전형적인 현모양처형의 왕비로, 정말 답답할 정도로 헨리 8세에게 애정을 쏟는다. 잉글랜드 자체와 백성들을 아끼는 마음도 커서 이혼 문제가 불거졌을 때는 스페인 대사 차푸이스에게 "다른 건 몰라도 무력을 동원한 잉글랜드 침공은 안 된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헨리가 혼인무효 구상을 시작하고 이를 토머스 울지 추기경에게 지시했을 때 토마스 모어는 "캐서린 왕비께서는 위대한 왕과 여왕의 딸인 동시에 전 신민들에게 추앙을 받고 있다"고 일갈하며, 이어서 "설령 하느님께서 이를 용납할지라도 백성들이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캐서린과는 척을 지고 사는 울지 추기경조차도 이에 대해 반박을 내놓지 못하고 끙끙거릴 정도다.

다소 중립적이거나 왕비와 적대적인 인사들의 평가마저 이러한데, 왕비에게 우호적인 서포크 공이나 스페인 인사들 쪽으로 가면 가히 성녀 수준으로 추앙받고 존경받는다. 백성들이 성당과 주점에서 "왕비님 만세!!"를 외치는 장면, 기어이 헨리에 의해 궁을 옮길 때 궁정 사람들은 전부 그녀를 My Lady라고 칭하는 와중에도, 연도에 늘어선 백성들이 그녀를 'Her Majesty'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민중에게 인기 있던 왕비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실제 역사에서도 캐서린의 인기가 앤 불린의 죽음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이와 같은 백성들의 지지, 부모 양쪽으로 모두 제왕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정통성과 위신, 레콩키스타로 무어인을 밀어낸 이사벨의 전적 등으로 헨리는 왕비를 불편하게 여겼고, "메리가 아프니 간호를 하게 해달라"는 왕비의 주청에 대해서도 "캐서린은 마음만 먹으면 군대를 일으켜 메리를 여왕으로 세울 수도 있을 사람"이라며 딸을 만나게 해달라는 부탁을 뿌리친다.

이후 캐서린은 병으로 죽어가면서도 하나뿐인 딸 메리를 볼 수 없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만 헨리에게 편지를 남겼다.[27] 그리고 캐서린의 편지를 전해받은 헨리는 자신에게 끝까지 다정하게 대했던 캐서린을 떠올리면서 그녀의 죽음에 슬퍼하고 죄책감에 시달린다. 또한 캐서린의 독실한 신앙 생활은 극중에 자주 나타나는데, 정작 그동안 남편은 캐서린이 의지한 시녀와 검열삭제를 벌여 시녀를 임신까지 시키는 바람에 나중에 이를 알고 상처받는다. 오프닝 크레딧에서도 묵주는 캐서린의 상징이고, 그 상징은 후에 그녀의 딸, 메리 튜더의 상징으로도 쓰인다.
폐하, 그간 우리가 나누었던 사랑을 돌아봐 주십시오. 부디 제게 주어진 정당한 권리와 진실을 되찾아 주십시오. 폐하의 나라 밖에서 이곳에 온 일개 여인인 저를 가엽게 여겨 주십시오. 믿을 수 있는 이 하나 없이 무심한 시종들의 보좌를 받아야 하는 이곳에서 저는 이 땅의 정의이신 폐하 외엔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저는 하느님과 세상의 모든 이들을 청해 제가 폐하께 진실로 순종적이었으며, 오직 폐하의 뜻과 폐하의 기쁨에만 따라 살았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습니다. 저는 폐하께서 아끼시는 모든 이들을 사랑했습니다. 그 어떠한 이유도 없이, 저 자신의 이해를 생각지 않고, 오직 폐하를 위해 그리 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저를 통해 많은 아이들을 보실 수 있었습니다. 비록 하느님께서 그 아이들을 데려가시긴 했지만, 그렇지만 폐하께서 저를 처음 취하셨을 때, 하느님 앞에 말씀드리건대, 저는 분명 그 어떤 이의 손길도 받지 않은 정결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은 폐하의 양심에 맡기겠습니다.

드라마 <튜더스>에서 아라곤의 캐서린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헨리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

성격은 앞서 말한 대로 현모양처의 표본이며 해바라기처럼 헨리를 사랑하지만, '잉글랜드의 왕비'라는 칭호를 죽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역사 속의 캐서린처럼 <튜더스>에서도 왕비 직위를 결코 앤 불린에게 내주려 하지 않는다. 이혼 문제를 다루기 위해 설치된 법정에서 캐서린은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헨리 8세 앞에서 무릎을 꿇고[28] 자신이 분명한 처녀로서 정결을 지킨 상태로 혼인했고, 그로부터 스스로 정당한 왕비이자 헨리의 아내임을 호소한다. 헨리 8세의 이야기는 워낙에 영상화가 많이 된 소재라 다른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비슷한 대사로 스스로를 변호하는 캐서린을 볼 수 있지만, 이처럼 헨리 앞에 무릎을 꿇은 것, 또 그 직후에 법정 밖으로 나아가며 몰려든 백성들의 박수와 환호, 지지를 받는 모습은 이 드라마에서 그려낸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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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4 마지막 화에서는 늙고 병들어 임종을 앞둔 헨리 8세 앞에 유령의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이때 생전에는 보이지 않던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하느님의 눈 앞에서는 자신만이 헨리의 진짜 아내임을 강조한다. 또한 하나뿐인 딸 메리와 함께 나타나 메리가 여태껏 헨리 때문에 약혼을 번복하고 결혼조차 하지 못한 채 쓸쓸히 나이 들어가는 사실을 지적하며 "이 아이는 진작에 결혼해서 아이도 낳았어야 했다."며 분노를 표했다.

5.2. <위대한 대제, 카를로스>(Carlos, rey emperador)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일대기를 그린 스페인 사극 <위대한 대제, 카를로스>(Carlos, rey emperador)에서도 황제의 이모로서 아라곤의 캐서린과 헨리 8세가 등장한다. 아라곤의 캐서린 역할은 스페인 발렌시아 출신의 배우인 멜리다 몰리나(Mélida Molina)가 맡았다. 잉글랜드를 배경으로 한 <튜더스>에서 영어를 기반으로 간혹 스페인어 대사가 등장한 것과 달리, 카를로스 대제에서는 영어 대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당연 헨리 8세나 토머스 울지 그리고 여타 잉글랜드 쪽 인물들 모두 스페인어로 대사를 친다.

카를 5세의 잉글랜드 방문 및 메리와의 약혼, 스페인잉글랜드 그리고 프랑스가 얽힌 외교전, 아들을 낳지 못한 캐서린과 헨리 8세 사이의 불화, 혼인무효화 과정, 캐서린의 죽음 등 캐서린이 등장하는 장면은 위의 <튜더스>와 유사한 편이다. 다만 <튜더스>에서보다는 조금 더 강하게 그려지는 면이 있는데, 법정에서 스스로를 변호하겠다고 나서는 캐서린에게 추기경이 "왕후 폐하께서는 스스로를 변호하실 만큼 법에 관해 잘 아십니까?"라고 비아냥거리는 것에 대해 "나는 전쟁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하나도 없었지만, 내 남편이 프랑스에 있을 때 이 땅을 침공한 스코틀랜드군을 맞아 물리친 적이 있다."라고 되받아치는 것이 그 예.

<튜더스>에서는 기도하고 있던 캐서린에게 헨리가 찾아와 형의 아내와 결혼한 것에 문제가 있었음을 거론하며 혼인무효를 통보하지만, <카를로스 대제>에서는 캐서린의 조카인 황제가 헨리 8세의 뜻과 대치되는 조약을 프랑스와 체결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혼인무효를 통보한다. 법정에서는 <튜더스>에서도 나온 바 있는 내용으로 스스로를 변호하지만 당연히 역사대로 혼인무효가 이루어졌고, 헨리 8세에 의해 궁정에서 쫓겨난다. 다만 <튜더스> 그리고 실제 역사와 달리 딸인 메리와 함께 물러나오게 되었으며[29], 이후 메리가 캐서린의 임종을 지켰다는 것이 차이점. 죽기 직전 헨리에게 편지를 보내고, 헨리는 이를 나름대로 착잡하게 읽어나가지만 끝내는 벽난로에 던져 태워버린다.

5.3. <천일의 스캔들>

원작 소설에서는 인덕이 훌륭한 왕비로 묘사되며, 정치적 입장으로 캐서린을 적대할 수밖에 없는 메리 불린조차 개인적으로는 캐서린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꼿꼿하고 자존심이 강한 인물인 동시에 남편과 딸에 대한 애정이 매우 깊으나, 아들을 낳지 못해 남편에게 정신적 학대에 가까운 심한 냉대를 당하다가 끝내 내쳐지고 만다.

영화에서는 아나 토렌트라는 배우가 연기했다. 초반, 아들을 사산하고는 어린 딸 메리 공주에게 "왕위를 이을 네 남동생을 낳지 못했다"고 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후 왕이 메리 불린, 앤 불린 자매에게 차례로 빠져들다가 마침내 자신을 내치기 위해 재판까지 열지만, 재판정으로 들어가기 직전 불린 자매를 만나 앤 불린을 말빨로 완전히 털어버리고 그녀에게 "나는 캐서린, 잉글랜드의 왕비이니라"라고 선언한다. 영화에서도 원작 못지않게 고고하고 자존심 강한 인물.

5.4. <스페인 공주>(The Spanish Princ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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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방송사 Starz에서 시즌 2까지 방영되었으며 한국에서도 Wavve에서 스트리밍되고 있다. 기존 사극에서 주로 앤 불린과 대립관계에 놓여져 있는 조연으로 등장했다면, 이 드라마에서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아예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만큼 캐서린의 어린 시절부터 묘사된다. 영화 <천일의 스캔들>의 원작 소설 《The Other Boleyn Girl》의 원작자 필리파 그레고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로, 기존에 같은 방송사인 Starz에서 방영되었던 <화이트 퀸(The White Queen)>[30], <The White Princess>[31]의 후속작이기도 하다.

주로 스페인 출신이라는 걸 나타내기 위해 흑발과 흑안의 외모로 묘사되었던 기존 사극과 달리, 실제 캐서린의 초상화 속 외모처럼 벽안과 조금 어두운 진저톤의 금발로 묘사된다. 연기한 배우는 <왕좌의 게임>의 미란다로 유명한 샬럿 호프.

여러모로 그간 세간에 퍼진 아라곤의 캐서린 이미지를 타파한 드라마이다. 캐서린의 외모며[32] 여제와 황제 부모를 둔 공주의 면모,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대리청정, 전투 지휘 장면과 부군인 남편을 대상으로 여러 충고를 하는 장면이 가감없이 등장하였다.

다만 원작자가 그 유명한 필리파 그레고리[33]인 만큼 고증 오류도 많다. 예를 들면 캐서린이 실제로는 아서 튜더와 동침한 것이 맞지만 그렇지 않다고 거짓말을 했다든지(...), 혹은 헨리 8세가 캐서린의 사산과 메리 공주의 출생을 겪으며 캐서린에게 냉혹한 태도를 취한다든지와 같은[34]적당히 걸러 보아야 할 장면들이 있다.

1부에는 차가운 시어머니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이도저도 아닌 시아버지 헨리 7세, 그리고 자신을 무지막지하게 구박하는 시할머니 마거릿 보퍼트를 헤쳐내고 잉글랜드 왕비의 자리에 오르는 모습이 생생하게 담겼다.

잉글랜드의 왕자비, 더 나아가 왕비가 될 꿈을 품고 잉글랜드로 왔으나 정작 남편이 될 아서 튜더는 유약한 성정을 지닌데다 시작부터 꼬인 관계였다.[35] 더군다나 스페인과 잉글랜드의 애매한 관계와 시가 식구들의 냉랭한 태도로 첫 시작은 좋지 않았다. 겨우겨우 아서와 마음을 터놓고 정식으로 결혼해서 잠자리를 가지며 부부 사이가 좋게 풀리나 싶었지만 아서는 병에 걸려 곧 죽어버리고, 젊은 과부가 된 캐서린은 복중에 아서의 아이를 가졌는지 아닌지로 궁중에 남을 수 있는 여부가 결정되는 애매한 상태에 놓인다.

그러나 캐서린은 임신하지 못했고 실권을 쥔 마거릿 보퍼트가 캐서린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넣으며[36] 스페인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한다. 그러나 캐서린은 잉글랜드의 왕비가 되겠다는 포부와 시녀들의 삶을 보장하겠다는 일념 아래 자신에게 계속 마음이 있었던 헨리 8세를 매혹하기 시작한다. 둘은 교황에게 사면을 받고 결혼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헨리 7세가 캐서린을 아내로 삼겠다고(...) 선언하거나 마거릿이 캐서린과의 결혼을 완강히 반대하며 캐서린의 동생인 후아나 여왕과 짜고 엿을 먹이는 등, 그 여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러다 헨리 7세가 결핵으로 급사하고, 헨리 8세가 뒤이어 왕좌에 오르게 되며 캐서린의 삶은 급격히 오르막길을 타게 된다. 헨리 8세의 왕비가 되어 대관식을 올리고 뒤이어 왕자까지 생산하며[37] 요크의 엘리자베스마거릿 보퍼트가 저주처럼 외던 "아들을 낳지 못할 거다" 라는 공식을 깬 캐서린은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처럼 보이지만, 2부에서 망했어요.[38]

2부에서 자신의 소생인 왕자를 안아 달래며 즐거운 나날을 보내던 캐서린이었지만 그 왕자가 급작스럽게 사망하며 고생길이 시작된다. 다행히 어렵지 않게 다시 임신에 성공하지만 참전 이후 사내아이의 모양새를 갖춘 태아를 유산하며 고생길을 예고한다. 그 뒤 약속한 듯 사산과 유산이 이어지면서 캐서린은 왕자를 낳아야 한다는 부담감에 시달린다. 본디 성격이 불같고 여색을 밝히던 남편 헨리 8세는 왕비가 아들을 낳기 위해 전전긍긍해하는 동안 캐서린을 위로하거나 부담을 가라앉혀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녀의 부정을 의심하고 유산을 질책하며 아들 출산에 대한 부담을 팍팍 주었다.[39] 거기다 나이까지 겹쳐 임신이 잘 되지 않고, 결국 캐서린은 자신만의 굴에 갇혀 고향에서부터 따라온 시녀이자 친구를 방문하지 못하고 젖먹이 유모들만 제공해 주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40]

정치적으로도 둘은 계속해서 엇갈린다. 스페인의 황제이자 캐서린의 아버지인 페르난도 2세가 잉글랜드를 배신하면서 헨리에게 스페인과의 동맹은 쓸모없는 것이 된다. 이때는 그나마 헨리가 캐서린의 말을 귀담아 듣던 때였고 캐서린이 임신 중이었으므로 막장까지 치닫지는 않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뒤 메리 공주를 프랑스의 왕과 결혼시킨다는 계획이 나오면서부터 부부는 완전히 다른 정치노선으로 갈라지게 된다.

거기다 헨리가 극 내내 순종적인 아내상을 요구하며 캐서린과 사사건건 부딪히는 장면이 등장한다. 임신한 몸으로 나라를 구하러 전쟁터에 나간 섭정여왕 캐서린의 모습은 현대에서라면 극찬을 받겠지만, 16세기 잉글랜드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헨리는 캐서린이 낸 성과에 자존심이 상한 모습을 보였으며 ??? 캐서린이 아기를 유산하자 "당신은 여자보다는 군인이 되길 선택했다."라고 말하곤 뒤이어 폭언을 서슴지 않는다.[41]

그런 상황에서도 겨우겨우 임신에 성공하지만 아이는 조산되고, 겨우 살아난 아이가 딸이라는 사실에 절망한 캐서린은 어렵게 태어난 딸을 한 번도 안아주지 않을 정도로 내적 갈등에 시달린다. 한 술 더 떠 아이의 아버지인 헨리 역시 아이를 만나보지도 않으며[42] 여기저기 바람을 피우고 다니기 시작한다. 참 가지가지 한다 캐서린이 남편과 동침하는 시녀의 모습을 목격하고, 심지어 그 시녀가 임신까지 하며 그녀는 더욱 수렁으로 빠져든다.[43] 헨리 8세의 정부가 낳은 아들을 안고 가서 "내가 드디어 당신에게 아들을 주었네요." 라고 말하는 부분은 처참함의 끝판왕이다.

부부의 갈등은 토머스 울지가 추기경으로서 세력을 키우며 극한으로 치닫는다. 울지는 정치적으로 캐서린을 여러 번 엿먹여 그녀를 끌어내리는가 하면, 개인적인 모욕까지 일삼아 캐서린의 반감을 산다. 하지만 유산과 사산을 반복하는 아내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던 헨리 8세는 캐서린을 완전히 무시했고, 안하무인으로 활개치는 울지를 전혀 말리지 않는다.[44] 여기에 캐서린이 겨우 임신한 마지막 아이를 유산하면서 부부 간의 사랑은 막을 내리게 되고 만다. 헨리가 토머스 불린의 두 딸을[45] 왕비의 시녀로 들이겠다며 불륜을 선언하는데도 캐서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된다.

남편과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고 무엇 하나 할 수 없는 처지가 된 캐서린은 딸 메리와 관계를 회복하면서 자신을 바꾸어 나간다. 주변 사람들을 가엾게 여겨 이것저것 도와주었던 것을 딱 끊어내고, 헨리에게 정부에 대해 지적하는 대신 모든 걸 다 놓아버린 듯 "당신의 아내는 나다." 라고 못을 박는 것으로 끝낸다.[46] 헨리의 방 밖에 서 있는 앤에게 "헨리의 잠자리에 들어도 좋고 사생아를 낳아도 좋아. 하지만 왕비 자리는 내 것이다." 라고 말한 뒤 뒤돌아서서 자신의 방으로 가는 장면까지 나온다. 화려한 옷차림과 머리장식 대신 시청자들이 익히 알고 있는 아라곤의 캐서린의 수수한 옷차림과, 머리를 감싸는 형태의 답답한 두건으로 차림새를 바꾸는 것이 그 정점이다. 처음에는 강단 있고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캐서린이 점점 한계를 깨닫게 되며 서서히 본인을 놓아버리고, 헨리가 원하는 대로만 살아가게 되며 느끼게 되는 씁쓸함이 강한 여운을 주는 부분. 사람들이 아는 현모양처로서의 아라곤의 캐서린은 이렇게 완성되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극이 끝난다.

캐서린의 심리 변화가 극 내내 뚜렷하게 나온다. 당찬 모습의 공주에서 뚝심 있는 왕비로, 그리고 현실과 싸우며 괴로워하는 왕비에서[47] 싸워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해탈한 아라곤의 캐서린으로 변모하는 모습이 담겼다. 전반부와 후반부의 모습을 대조해서 보는 것도 백미.

여담으로, 앤 불린의 아이 시절 모습이 나온다. 언니 메리 불린의 손을 잡고 나오는 것을 불러세운 캐서린이 다정하게 "헨리 왕자가 어디 있는지 아니?" 라고 묻는 짧은 장면. 훗날 셋의 앞날을 아는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정말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5.5. <식스 더 뮤지컬>


튜더 가의 여섯 왕비를 모티브로 식스 더 뮤지컬에도 출연한다. 한국 초연 배우는 이아름솔, 손승연. 솔로곡은 No Way. 테마색은 금색이다.
자신이 16살 때 아서 왕자와 결혼하고, 헨리가 바람을 피우는 것까지 모두 오케이 했지만, 헨리와의 이혼은 절대 참을 수 없다며 No Way를 선언한다.
비욘세샤키라를 음악적 모티브로 삼아 굉장히 파워풀한 무대를 보여준다.[48] 이후 앤 불린과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다섯 번 유산했다고 말하며 자신이 더 불행하다고 주장한다.
왕비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원하는 대로 다시 쓰는 마지막 넘버인 SIX에선 헨리의 청혼을 거절하고, 수녀원에 들어가 성가대에서 차트 1위를 기록한다.


[1] 아라곤 연합 왕국,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왕녀였기 때문에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카탈리나(Catalina de Aragón y Castilla)라고 불렀다. 아라곤어로는 카타리나 다라곤(Catarina d'Aragón).[2] Katherine으로 적기도 한다.[3] 필리파 그레고리의 소설 《천일의 스캔들》에서는, 메리 불린(앤 불린의 언니, 해당 작품에선 동생으로 나온다.)이 캐서린 왕비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자기를 밀어넣으려는 집안 어른들에게 반발하면서 캐서린 왕비를 두고 세 번에 걸친 공주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이 고귀한 혈통을 두고 한 말이다. 아라곤 왕의 딸이자 카스티야 여왕의 딸이며, 잉글랜드 왕자와 결혼했으니, 세 나라의 princess인 셈이다.[4] 캐서린을 비롯한 자식들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신경써주던 사람은 어머니인 이사벨 1세이다. 문제는 이사벨 1세는 페르난도 2세보다 일찍 먼저 세상을 떠났고, 본인보다 권한도 막강했던 아내 이사벨 1세가 세상을 먼저 떠나자 페르난도 2세는 더욱 자식들에게 무정한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5] 당시 관습상 부부가 첫날밤을 보내지 않으면 결혼은 무효였다.[6] 사실 족보를 따지면 어머니 카스티야의 이사벨이 게르만계 서고트족에서 비롯한 게르만계 출신이고, 아버지 페르난도도 어머니와 친가(트라스타마라 가문)로 6촌이라 혈통면에서 대동소이하므로 이렇게 될 확률이 높다. 족보만 따지게 된다면 서고트 게르만계에 바스크와 라틴 혼혈이 살짝 가미되었다고 볼 수 있다.[7] 다만 그녀의 딸 메리 1세도 키가 작았던 것을 보면 단순한 유전일 수도 있다. 엘리자베스 1세도 메리 1세만큼이나 힘든 성장 환경이었지만 170cm의 장신이었다.[8] 참고로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헨리 8세가 '내가 왜 늙고 못생긴 형수와 결혼해야 하냐.'고 반발을 하는 것으로 묘사해 놓았다. 하지만, 당시 캐서린은 '늙고 못생긴 형수'가 아니라 아직 23세라는 당시 기준으로도 한창인 나이였다.[9] 헨리 8세앤 불린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가 미혼으로 살다 죽은 후로 왕위 계승자가 없어서 튜더 왕가의 맥이 끊어졌으니, 이 걱정이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결국 관점에 따라서는 뒤늦게 죄책감을 느껴 이혼 및 재혼까지 했는데도 후사 단절을 막지 못한 것.[10] 가톨릭에서는 이혼을 인정하지 않고, 다만 몇 가지 경우에 '혼인 무효'는 가능하다. 자세한 것은 혼인성사 참조.[11] <레위기> 20 : 21 형제의 아내를 취하는 자는 자식이 없을 것이다라는 구절. 드라마 <튜더스>에서는 헨리 8세의 고해를 듣고 이 구절을 말해준 신부가 '자녀 분이 계시잖습니까?'라고 하자, 여성 군주라는 선례가 없던 시절이었기에 심각하게 '아들은 없소.'라고 받아친다.[12]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에스파냐의 왕이었던 카를 5세는 캐서린의 조카였다.[13] 이 역시 《성경》이 인용되는데, <신명기> 25 : 5에 남편이 죽고 아들이 없으면 그 형제를 남편으로 들여야 한다는 역연혼의 구절이 반대파의 근거였다.[14] 사실 이 대사는 1980년 당시 산아제한이 권장되던 한국의 시대상을 반영한 개그성 대사로, 실제로는 먹고 살기 위해 노동력이 절실했던 평민이나 왕위나 영지가 남의 가문에게 넘어가지 않기 위해 딸보다는 아들이 더 필요했던 당대의 왕족 및 귀족들에게 안 먹히는 구호였다. 당장에 헨리 8세도 그토록 아들을 갈구했건만, 얻은 아들은 에드워드 6세 하나뿐이었고, 그마저도 성인이 되지 못한 채 일찍 죽었다. 이후 헨리 8세의 딸들인 메리 1세엘리자베스 1세를 거친 뒤 튜더 왕조의 대는 끊겨, 잉글랜드의 왕위는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조에게 넘어갔다.[15] 더욱이 클레멘스 7세는 그 유명한 사코 디 로마 사건을 겪은 지 6년밖에 안 되었다. 교리상 이혼이 되건 안 되건 상관없이 카를 5세의 보복이 무서워서라도 반대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원복이 감수한 계몽사 《학습만화세계사》에도 "교리뿐만 아니라, 당대 최강국인 레이노 디 에스파냐 국왕의 비위를 거스를 수 없었다"고 쓰여있다. 여기에 에스파냐 국왕이 하는 말 "너 이혼하면 왕 다한 줄 알아라!"[16] 전근대 유럽에서 부부의 초상화는 보통 남편이 크고 아내가 작게 그려지는데, 이사벨 1세나 페란도 2세나 같은 군주였기 때문에 둘은 초상화는 동등한 크기로 그려졌다. 게다가 이사벨은 나이마저 페르난도보다 연상이고, 부계상으로도 이사벨이 6촌 누나였기 때문에, 항상 남편에게 자신이 여왕이고 연상임을 주지시켰다고 한다.[17] 헨리 8세는 나이 든 이후에는 엄청나게 뚱뚱해졌다고 하지만 젊은 시절에는 키가 180cm가 넘는 당당한 체격으로 스포츠나 무예를 즐기는 인물이었다. 국왕이나 귀족에게 남자답고 기사다운 면모를 기대하던 당시 서유럽의 정서로 보면 '멋진 남자'로 여겨질 만한 조건이었던 것. 게다가 캐서린의 입장에서 보면 다섯 살 어린 연하남이니 이것만 봐도 캐서린이 '그동안의 고난은 고통스러웠지만, 그 보상으로 얻은 것도 아주 크다'고 생각하여 기뻐할 조건이 충족된다.[18] 결국 이 사건이 성공회가 생기는 것에 영향을 끼쳤기에, 캐서린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19] 캐서린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게, 실제로 처녀였는지 아니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중요한 점은 헨리 8세가 캐서린과의 결혼을 밀어붙일 때의 논리가 저거였다.[20] 쫓겨나기 전에 헨리 8세가 "나와의 혼인무효를 인정하고, 앤 불린을 새로운 왕비로 인정하면, 생활비와 좋은 집을 제공해주고 메리도 만나게 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캐서린이 끝까지 거부했기에 헨리 8세는 캐서린을 더욱 미워했다.[21] 처음에는 앤 불린도 그래도 공주이니 메리에게 자신을 잉글랜드의 왕비로 인정해달라며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지만, 누구 때문에 어머니가 그 꼴이 되었는지 알고 있던 메리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엘리자베스의 시녀로 만들어버리고 시종과 결혼시켜 버리겠다며 협박했다.[22] 고어 표현으로 당시엔 여왕 또는 왕비를 나타내던 queen의 표기법이 quene이었다.[23] 인현왕후는 복위는 됐지만 몸이 너무 병약했던 탓에 다시 왕비가 된 메리트라고는 사실상 느껴보지도 못한 채로 고통스럽게 죽었다. 원래부터 튼튼한 몸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남편에게 박대당한 것과 유배 생활로 몸이 더 망가져 버린 것. 그래도 복위되어 7년은 살았다. 34세로 단명해서 그리 행복한 최후는 아니었지만.[24]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과 그의 두번째 부인 카스티야의 콘스탄사의 외동딸.[25] 주앙 1세의 아들이다.[26] 아일랜드 출신 가수 겸 배우. <덱스터> 시즌 5에서 아일랜드계 보모 소냐를 맡기도 했다.[27] 임종 직전 캐서린은 메리가 자신을 찾아오는 환영을 보았고, 자신을 끝까지 보필하던 충실한 시녀에게 메리가 다녀갔다고 말한다. 시녀는 쇠약해진 캐서린이 헛것을 봤음을 알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에 "저도 공주께서 다녀가신 걸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비록 환영이었지만, 죽음을 앞둔 캐서린에게는 마지막 위안이었던 셈이다.[28] 극중 그 분위기를 보면 상당히 돌발상황이었다.[29] 헨리 8세가 캐서린에게 찾아와 혼인무효가 이루어졌음을 알리며 메리 또한 사생아가 되었다고 말하는데, 마침 캐서린의 방으로 오던 메리가 이걸 들어버린다. 헨리는 메리가 온 것을 보고서도 기어이 "나의 새 아내가 곧 아들을 낳을 것이고 그 아이만을 후계자로 인정할 것"이라 선언한다. 분노한 캐서린은 영국에 자신 이외의 왕비는 있을 수 없다고 외치고, 메리는 헨리를 가로막고 서서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나를 사생아라고 불러보세요"라고 말한다. 이에 헨리는 "너를 위해 기도할 테니 네 어머니를 따라가라"는 말로 얼버무리고, 메리는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원망하며 어머니와 함께 떠난다. 해당 장면의 영상[30] 에드워드 4세의 왕비 엘리자베스 우드빌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로 이때 레베카 페르구손이 엘리자베스 우드빌 역을 맡아 스타덤에 올랐다.[31] 전작 화이트 퀸에 이어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딸 요크의 엘리자베스를 주인공으로 삼은 드라마다. 요크의 엘리자베스 역은 킬링 이브의 빌라넬로 유명한 조디 코머.[32] 앤 불린한테 허무하게 밀려난 늙은 현모양처 이미지 때문에 대중매체에서의 캐서린은 대부분 흑발에 나이가 많고 추레한 왕비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역사의 캐서린은 붉은끼 도는 금발과 벽안의 소유자로 매우 전통적인 미인이었다고 하며 스페인 공주에서도 보는 사람마다 아름답다고 감탄하는 미녀로 나온다. 후술하다시피 드라마 내에서 고증 오류가 차고 넘치지만 캐서린의 외모만큼은 역대 영상화 중 가장 고증에 맞는다.[33] 가장 많은 인기를 언은 《천일의 스캔들》에서도 지적된 부분이지만, 필리파 그레고리는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야사를 갖다 쓰거나 스스로 자극적인 설정을 지어내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천일의 스캔들》에서도 스스럼없이 12세인 메리 불린의 성관계를 묘사하거나 야 인마 조지 불린를 동성애자이지만 근친상간을 저지른 사람으로 표현한 점, 앤 불린을 장녀로 설정한 점 등이 비판받았다.[34] 실제의 헨리 8세는 캐서린의 사산과 유산, 영아 사망을 겪는 동안 캐서린을 다정하게 위로했으며 메리 공주의 출생에는 건강한 아이가 태어났으니 곧 아들도 태어날 거라며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물론 공식 기록이 그런 것이고 실제로 헨리 8세가 부부끼리 있을 때 캐서린에게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알 수 없기는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적어도 공식 기록에는 다정한 남편이었다고 기재될 정도로 드라마에서처럼 무작정 캐서린을 대신들 앞에서 대놓고 다그치거나 구박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35] 결혼 전부터 아서가 꾸준히 사랑이 담긴 편지를 스페인으로 보냈고, 캐서린이 이에 화답하며 사랑을 키웠던 것으로 나온다. 그녀는 편지처럼 로맨틱한 남편을 기대하며 잉글랜드로 왔으나 정작 아서는 편지를 보낸 적도 없었고, 장자인 형을 견제하던 망나니 차남 헨리 8세가 아서인 척 편지를 꾸며 보낸 것이었다. 자신의 신부와 동생이 먼저 사랑에 빠졌다는 생각에서 깃든 질투심과 형제간의 견제, 그리고 캐서린이 잉글랜드에 올 수 있었던 계기가 다름아닌 아서의 사촌인 테디의 죽음이었기 때문에 정치적/가족애적 이유까지 더해져 둘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36] 임신했는지 확인해보겠다며 캐서린의 가슴을 만지려 들고 스페인산 창녀라고까지 부르는 등 폭언을 일삼았다. 거기다 궁 밖으로 나가 사는 캐서린의 집세를 터무니없이 높이 올려놓으며 괴롭힘을 멈추지 않았다. 캐서린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는 마거릿 폴에게 일체 지원을 끊으며 감옥까지 밀어넣는데, 보답으로 캐서린은 헨리 8세가 차기 왕으로 선포되자마자 그녀를 풀어주고 왕비전의 시녀로 삼아준다.[37] 헨리가 아기를 높이 들어올리며 "잉글랜드의 차기 군주, 헨리 9세요!" 라고 외치는 장면이 나온다.[38] 사실 캐서린보다는 앤 불린이 넘사벽으로 유명세와 인기도가 더 많기 때문에 이미 캐서린의 앞날을 알고 극을 보는 시청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캐서린의 성공에 같이 기뻐하기보다는 곧 있을 일들에 안쓰럽다는 반응이 많았다고 한다.[39] 현대에는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임신에 방해가 되는 원인 1, 2위를 다투는 사항이 바로 스트레스다. 오늘날에도 수년간 불임 치료를 하며 스트레스를 받다가, 다 포기하고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 갑자기 자연임신이 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40] 이 시녀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쌍둥이 아들을 낳은 후 그 뒤로 또 아들을 낳는, 캐서린과는 완전히 대착점에 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나중에 가슴 속 응어리를 풀고 찾아가 화해하기는 했다.[41] 웃긴 것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캐서린의 반복된 유산과 사산이 자신의 부친인 헨리 7세 탓이라는 의견이 가장 많다는 것이다. 헨리 7세는 과부 왕자비 시절의 캐서린에 대한 모든 지원을 끊어버렸고, 따라서 성장기의 캐서린은 끼니마저 제대로 때우지 못한 삶을 7년간이나 지속하게 되었다. 제대로 되지 않은 영양 공급이 신체 발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만큼 큰 과오라 볼 수 있는 부분. 게다가 여성의 자궁은 유달리 스트레스에 민감한데, 7년간이나 극한의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하기까지 했으니... 이하생략.[42] 고증오류이다. 실제 역사 속의 헨리 8세는 메리가 태어났을 때, 메리 공주를 안고 다니며 대신들에게 자랑할 정도로 아꼈다고 한다. 앤 불린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지[43] 하지만 캐서린은 심성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 임신한 남편의 정부인 엘리자베스 블런트가 난산을 겪자 아기를 순산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했다. 물론 다정하게 돕지는 않았고 직접 살을 째어 아기가 나올 수 있게 한 정도였지만, 캐서린의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출산 중 죽게 내버려두지 않고 도운 게 성자인 수준이다.[44] 활쏘기를 하는 왕과 그 옆을 지키는 캐서린의 옆에서 "여자는 나라를 다스려서는 안 된다." 라는 캐서린을 정치판에서 끌어내리려는 목적의 성차별적 발언을 하고, 여제를 어머니로 둔 공주: ??? 그 다음 바로 왕에게 적당한 불륜 상대를 골라준다(...). 옆에서 토머스 모어가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 딸들은 하나같이 잘 교육받았고,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라고 조용히 말하는 모습과 대조되는 부분. 거기다 여성편력이나 사치, 뇌물과 같은 울지의 성직자답지 않은 행보들을 눈감아주고 있었다는 점도 헨리의 대사로 드러난다.[45] 그 유명한 메리 불린앤 불린이다.[46] 이때는 시간이 흘러 앤 불린이 헨리 8세와의 관계를 이어가며 왕비 자리를 요구하는 중이었다. 울지의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혼인 무효를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라는 대사로 미루어 볼 수 있다.[47] 거짓말이 아니라, 극한의 스트레스에 시달린 탓인지 극 후반 무렵에는 초반의 총명한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아들타령만 하는 노이로제에 걸린 모습을 보인다.[48] 하이 C를 찍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