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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8E5A6><colcolor=#000> 잉글랜드 왕국 스티븐 왕의 왕비 불로뉴의 마틸다 Mathilde de Boulogne | ||
이름 | 프랑스어 | 불로뉴의 마틸드 (Mathilde de Boulogne) |
영어 | 불로뉴의 마틸다 (Matilda of Boulogne) | |
출생 | 1103년경 프랑스 왕국 불로뉴 | |
사망 | 1152년 5월 3일 (향년 48~49세) 잉글랜드 왕국 에식스 주 헤딩엄 성 | |
재위기간 | 불로뉴 여백작 | |
1125년 ~ 1146년 12월 25일 | ||
잉글랜드의 왕비 | ||
1135년 12월 22일 ~ 1152년 5월 3일 | ||
노르망디 공작부인 | ||
1135년 12월 22일 ~ 1144년 1월 19일 | ||
배우자 | 스티븐 왕 (1125년 결혼) | |
자녀 | 마리, 외스타슈, 볼드윈, 기욤, 마틸드 | |
아버지 | 불로뉴 백작 외스타슈 3세 | |
어머니 | 스코틀랜드의 메리 |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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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스티븐 왕의 왕비, 불로뉴 여백작, 노르망디 공작부인.2. 생애
1103년경 프랑스 왕국 불로뉴에서 불로뉴 백작 외스타슈 3세와 스코틀랜드의 메리[1]의 외동딸로 출생했다. 그녀는 부계로는 카롤루스 왕조의 직계 후손이며, 모계로는 잉글랜드 국왕 애설레드 2세의 후손이었다. 1125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의 주선으로 모르탱 백작 에티엔 드 블루아와 결혼했다. 이후 아버지가 은퇴하고 수도원에 들어가면서, 그녀는 불로뉴 여백작이 되었고, 에식스를 중심으로 한 잉글랜드의 큰 영지를 물려받았다.1135년 12월 1일 헨리 1세가 사망하자, 에티엔은 헨리 1세가 후게자로 지명했던 마틸다를 제쳐놓고 잉글랜드 국왕이자 노르망디 공작 스티븐으로 등극했다. 이때 그녀 역시 잉글랜드 왕비가 되었으며, 왕국 관리에 깊이 관여했다. 그녀는 불로뉴 여백작으로서 대규모 함대를 통제하고 프랑스 왕국의 많은 대영주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또한 플란데런 백국과 긴밀힌 교류를 했고, 기욤 디프르를 비롯한 플란데런 용병들이 그녀의 섭외로 스티븐 왕을 섬겼다.
1138년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가 이복누이인 마틸다를 잉글랜드 여왕에 올리기 위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면서 무정부시대가 발발했다. 그녀는 보클랭 마미노가 이끄는 반군이 점령한 도버 성을 포위 공격했으며, 불로뉴의 가신들에게 도버 항구를 봉쇄하도록 지시했다.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한 도버 수비대는 항복했다. 또한 그녀는 그 해 크리스마스에 스코틀랜드 국왕 다비드 1세와 스티븐 왕이 평화 협정을 맺을 때, 반란 진압에 바쁜 남편을 대신하여 협상을 진두지휘해 1139년 4월 9일 더럼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1140년 아들 외스타슈와 프랑스 국왕 루이 6세의 딸인 콩스탕스와 결혼시킴으로서 프랑스 왕국과 결혼 동맹을 맺었으며, 베스에서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와 평화 협상을 벌였지만 결렬되었다. 1141년 2월 2일, 스티븐 왕이 링컨 전투에서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에게 패배해 생포되었다. 이후 대다수 잉글랜드 귀족들이 마틸다에게 귀순하자, 그녀는 켄트주로 피신한 뒤 기욤 디프르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재건했다.
이후 마틸다 여왕에게 남편을 풀어주고 아들 외스타슈가 영지를 물려받는 걸 허락해 준다면, 남편이 잉글랜드 왕위를 완전히 포기하고 순례자로 살도록 설득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마틸다 여왕이 이 제안을 단호히 거부하자, 기욤 디프르와 플란데런 용병대, 그리고 켄트 출신 민병대를 소집한 뒤 런던으로 진군해 인근 농촌을 약탈했다. 이에 시민들은 그녀에게 호응하기로 마음먹었고, 당초 마틸다 여왕을 추대하기로 했지만 형제를 풀어주길 거부하고 조카에게 영지를 물려주는 걸 거부한 것에 불만을 품었던 앙리 드 블루아 주교도 여기에 가세했다. 6월 24일, 런던 수비대가 봉기를 일으켜 윈저 성으로 쳐들어가 약탈을 자행했고, 마틸다 여왕은 가까스로 탈출해 옥스퍼드로 피신했다.
1141년 9월 14일, 윈체스터 전투에서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를 생포했다. 그녀는 로버트에게 귀순하면 상당한 특권을 누리게 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하자, 마틸다 여왕에게 남편과 로버트의 교환을 제안해 성사했다. 1152년, 스티븐 왕은 장남 외스타슈를 공동왕으로 등극해서 왕위 계씅을 보장하려 했다. 켄터베리 대주교 테오발드가 거부하자, 스티븐 왕은 테오발드를 잉글랜드에서 추방하도록 했다. 이때 그녀는 테오발드를 생오메르에서 지내도록 했다. 그러나 성직자와 영주들의 강력한 반대로 인해 외스타슈를 공동왕으로 세우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녀는 말년에 종교 생활에 전념했다. 성전 기사단을 후원했으며, 생 니콜라 다르루에즈 수도원을 설립했다. 또한 남편과 함께 1148년에 켄트 지방에서 파버샴 수도원을 세웠고, 1140년 에식스 지방에서 코그스홀 수도원을 세웠다. 또한 런던 탑 인근에 성 캐서린 병원을 세웠고, 수녀가 된 딸 마리를 위해 릴처치 수녀원을 세웠다.
1152년 4월부터 열병에 시달리던 그녀는 그해 5월 3일에 에식스의 헤딩엄 성에서 사망했다. 사후 파버샴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자녀
- 마리 드 블루아(1131 ~ 1182): 어렸을 때 부모에 의해 수녀원에 보내졌고, 롬시 수녀원장이 되었다. 그러다가 1159년 동생 기욤이 사망하면서 불로뉴 영지와 작위를 물려받자, 플란데런 백작 티에리의 아들인 마티유가 그녀를 수녀원에서 납치한 뒤 결혼해 불로뉴 백작을 맡았다. 이에 교황청은 두 사람을 파문했고, 마티유는 1168년까지 버티다가 거듭되는 압박에 버티지 못하고 헤어졌다. 그 후 마리는 몽트뢰유 수녀원에서 여생을 보냈고, 마티유는 계속해서 불로뉴 백작을 역임했다.
- 외스타슈 드 블루아(1129 ~ 1153): 불로뉴 백작 외스타슈 4세. 1152년 아버지 스티븐 왕에 의해 공동왕이 될 뻔했지만 영주와 성직자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153년 헨리 플랜태저넷과 스티븐 왕이 월링포드 평화 협약을 맺자 이에 반발해 군대를 일으켜 헨리를 잉글랜드에서 몰아내려 했지만 도중에 급사했다.
- 볼드윈 드 블루아(1136/1137)
- 기욤 드 블루아(1135 ~ 1159): 불로뉴 백작, 모르탱, 서리, 페벤시 영주.
- 마틸드 드 블루아(1134 ~ 1140): 1136년 에브뢰 자작, 우스터 백작, 멜룬 백작을 역임한 갈레랑 4세 드 묄룬과 약혼했지만 1140년 6세에 요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