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뜻에 대한 내용은 박은빈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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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세조의 후궁 근빈 박씨 | 謹嬪 朴氏 | |||
근빈 박씨묘 위치 | |||
출생 | 1425년 | ||
사망 | 1504년 이후 | ||
묘소 | 경기도 양주시 광사동 산 98 | ||
재위기간 | 조선 숙의 | ||
1455년 이후 ~ 1468년 10월 16일 | |||
조선 귀인 | |||
1468년 10월 16일 ~ 1483년 7월 28일 | |||
조선 근빈 | |||
1483년 7월 28일 ~ 1504년 이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 선산 박씨(善山 朴氏) | |
배우자 | 세조 | ||
자녀 | 슬하 2남 장남 - 덕원군(德源君, 1449 ~ 1498) 차남 - 창원군(昌原君, 1458 ~ 1484) | ||
봉작 | 숙의(淑儀) → 귀인(貴人) → 근빈(謹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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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세조의 후궁. 정희왕후의 인지도에 밀려서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세조의 후궁 중 유일하게 자식을 낳아서 키운 후궁이다.[1]슬하에 덕원군, 창원군을 낳아 2남을 두었다.
2. 생애
현재 남아있는 기록이 많지 않아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이 극히 제한적이다. 다만, 장남 덕원군이 1449년(세종 31)에 태어났고, 차남 창원군이 1458년(세조 4)에 태어났으므로 세조가 수양대군일 때 만나서 측실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또한, 계유정난 이후에 수양대군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종2품 숙의로 봉작되었을 것이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하고 사람들의 품계를 높여주고 상급을 준 적이 있었는데 이때 "숙의 박씨는 귀인으로 올리며" 라고 언급하기 때문이다.[2]
1483년(성종 14)에 정1품 빈으로 책봉되어 이때부터 근빈이 되었다.[3] 조선시대 평균 수명을 고려한다면, 나이 80세까지 대단히 오래 살았다. 그런데 하필 연산군 시절까지 사는 바람에 그녀는 말 못할 고통을 겪었다.
이때 세조의 후궁 근빈(謹嬪) 박씨(朴氏)가 나이 80세로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 항상 자수궁(慈壽宮)에서 거처하다가 이 무렵 입궐하였는데, 왕이 나놀려면, 근빈에게 교자(轎子)를 타도록 하고, 궁인이 메게 하므로 궁인들이 항시 승혜(繩鞋)를 신고 갔다. 술이 취하면 왕이 스스로 일어나 춤을 추고, 또한 근빈도 일어나 춤추게 하였는데, 근빈은 늙어서 할 수 없었으나 치열한 학대가 두려워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 9월 4일
《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 9월 4일
연산군은 이미 부왕의 후궁들을 때려 죽인 적도 있었다. 연산군은 이런 사실을 딱히 은폐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의 시신으로 젓갈을 담그라고 내수사에 명한 바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살기 위해서 춤을 췄을 것이다.
연산군 때의 기록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