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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 | 義貞宮主 趙氏 | |
의정궁주 조씨묘 위치 | |
출생 | 미상 |
사망 | 1454년 3월 15일(음력 2월 8일) |
본관 | 한양 조씨 |
부모 | 부친 - 조뇌(趙賚) 모친 - 연안 이씨 이귀령(李貴齡)의 딸 |
배우자 | 태종 |
자녀 |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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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태종의 간택 후궁. 아버지는 돈녕부 지사를 지낸 조뇌(趙賚), 어머니는 좌의정 치사 이귀령(李貴齡)의 딸이다. 그녀의 선조들은 대대로 함경도 지역에 근거하여 살았으므로 태조 이성계의 가문과 밀접하였다.도조 이춘의 둘째 부인[1]과 환조 이자춘의 사위[2]가 그녀의 가문 사람이다. 따라서 그녀는 태조와 인척 관계가 되는 셈이다.
2. 생애
공비(恭妃)가 가례색(嘉禮色)에서 뽑아 올린 상호군(上護軍) 조뇌(趙賚)와 좌랑(佐郞) 장수(張脩)와 전 현감 신기(愼幾)의 딸을 궁중에 불러 보았다. 처음에 변계량이 조말생에게 말하기를, "대비가 이미 돌아가고, 김씨(金氏)도 또한 나가 버렸으니[3], 마땅히 태상왕을 위하여 다시 명가(名家)의 딸을 가려서 빈(嬪)과 잉첩(媵妾)의 모자라는 데를 보충해야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드디어 건의하여 여러 대신들과 함께 청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4년 2월 28일
《세종실록》 세종 4년 2월 28일
1422년(세종 4) 변계량의 건의로 태상왕 태종을 위한 간택을 하였다. 태종은 자신이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거절하다가 조뇌의 딸로 낙점하였다.
그런데 그해 5월에 태종이 세상을 떠났다. 결국 조씨는 제대로 된 혼례를 치르지도 못한 상태에서 과부가 된 것이다. 이에 조뇌는 "내 딸이 혼례식은 못 치렀지만, 궁중에 들어오라는 말이 있었으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이 받아들여져 조씨는 태종의 다른 후궁들과 똑같이 상복을 입게 되었다.
1454년(단종 2) 세상을 떠났다.
3. 여담
- 의정궁주의 묘는 연산군ㆍ폐비 신씨의 묘와 연산군의 적녀 휘신공주ㆍ구문경 부부의 묘 사이에 있다. 원래 의정궁주의 묘가 먼저 있었는데,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가서 죽은 연산군이 의정궁주 묘 쪽으로 이장되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