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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8-20 13:31:52

공빈 최씨


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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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예종의 후궁
공빈 최씨 | 恭嬪 崔氏
공빈 최씨묘 위치
출생 미상
사망 미상
능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27
본관 전주 최씨
부모 부친 - 최도일(崔道一)
모친 - 경주 정씨
형제자매 남매 - 최세현(崔世賢)
자매 - 김제군부인 최씨(金堤郡夫人 崔氏)
배우자 예종
자녀 없음
봉작 소훈(昭訓) → 숙의(淑儀) → 귀인(貴人) → 공빈(恭嬪)
1. 개요2. 생애3. 논란4. 가족 관계

[clearfix]

1. 개요

조선 예종후궁. 아버지는 군기시 판관을 지낸 최도일(崔道一)이며, 어머니는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한성부판사를 지낸 정희계(鄭熙啓)의 딸 경주 정씨이다.

또한, 조선 후기에 이르러 문종의 계비로 거론되면서 논란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2. 생애

1462년(세조 8) 당시 세자였던 예종의 후궁이 되었다.[1] 이때 그녀의 아버지 최도일은 죽고 없었지만, 집안 배경 덕분에 후궁이 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2]

본래 그녀의 집안은 왕실과 인연이 깊었다. 우선 고조부 최유경(崔有慶)은 태조 이성계의 원종공신으로 6남 1녀를 두었는데, 그 중 둘째 아들 최사의(崔士儀)의 딸이 세종의 후궁 명의궁주이다. 증조부 최사강(崔士康)은 최유경의 넷째 아들로 3남 2녀를 두었는데, 그 중 맏딸이 태종의 아들 함녕군 이인과 혼인한 전주군부인이고, 막내딸은 세종의 아들 금성대군 이유와 혼인한 완산부부인이다. 조부 최승녕(崔承寧)은 최사강의 맏아들로 3남 1녀를 두었는데, 맏아들이 최도일(崔道一)이고 외동딸은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 이구와 혼인한 제안부부인이다.[3] 그리고 최도일의 맏딸이 광평대군 이여의 아들 영순군 이부와 혼인한 김제군부인이며, 막내딸이 예종의 후궁 '공빈 최씨'이다.
유(瑜)의 처족인 최도일의 딸을 왕비(王妃)로 세우려다가 뜻을 얻지 못하고 드디어는 중궁(中宮)이 자기가 세운 바가 아니라 하여 온갖 계교로 이간(離間)하여 왔습니다.
세조실록》 세조 1년 윤6월 11일

또한, 1455년(세조 1) 금성대군을 논죄할 때 '최도일의 딸'이 언급되는데 이 딸이 '공빈 최씨'이거나 또는 그녀의 언니일 것이다.[4] 즉, 금성대군이 단종의 왕비로 세울 생각을 할 정도의 집안이었다.

이러한 집안 배경을 갖고 있었던 그녀는 처음에 소훈(昭訓)[5]으로 입궁했는데, 예종 연간에는 기록에서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성종 대에 "예종의 후궁인 숙의 최씨를 귀인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6] 다만, 빈(嬪)으로 품계를 올려주었다는 기록은 없고 전주 최씨 족보에서 공빈(恭嬪)으로 나온다.

3. 논란

영조 대에 이르러 충청도의 유학 박통원이 상소를 올리면서 논란이 일어났다.
문종 대왕 왕비 현덕왕후께서 승하(昇遐)하신 후 12년간 곤위(壼位)가 오래 비어 있었습니다. 사체(事體)로 헤아려 보건대 반드시 이러한 이치가 없습니다. 《명사(明史)》 열전(列傳)에 문종 왕후에게 고명(誥命)의 말을 내린 것이 있는데, 그 연월(年月)을 고찰하면 문종조(文宗朝)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고양(高陽) 땅에 한 고묘(古墓)가 있는데, 비석이 잘려서 고찰할 수가 없습니다만, 고로(古老)들이 서로 전하기를 공빈(恭嬪) 최씨(崔氏)의 묘라고 합니다. 그런데 최씨 집 족보 가운데 역시 공빈 최씨가 있습니다. 연대(年代)를 미루어 보면 역시 문종조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반드시 그 사이에 계빈(繼嬪) 최씨(崔氏)가 있었던 듯하나, 문헌으로는 징거할 수 없었습니다. 청컨대 문적(文蹟)을 널리 고찰하여 이를 정하여 처리하소서.
영조실록》 영조 23년 12월 16일

당시 이러한 논란이 불거진 데에는 '12년간 왕비 자리가 비워져 있었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멀게는 성종이나 중종도 왕비가 죽자 계비를 맞이하였고, 가까이는 숙종이 왕비가 세 명이다. 이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문종이 왕비 자리를 12년 동안 비워뒀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때 영조는 실록이 보관되어 있는 강화도까지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하였다. 영조는 "원손이 이미 탄생하여 국가의 근본이 이미 굳어져서 계비를 맞이하지 않은 것"으로 결론을 내고, 전주 최씨 집안의 기록은 견강부회한 것으로 정리하였다.[7]

그러나 1791년(정조 15) 사간 윤행리가 상소하면서 논란이 지펴졌다가 실록을 살펴본 뒤에 정조가 사실을 정리하였고, 또 1887년(고종 24) 부사과 이국응이 공빈 최씨에 대해 밝혀달라며 상소했으니 조선 후기는 공빈 최씨가 문종의 계비냐 아니냐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4. 가족 관계


[1] 세조실록 28권, 세조 8년 6월 11일 갑술 1번째기사. #[2] 최도일은 1461년(세조 7) 사망하여 세조가 관곽과 함께 쌀, 콩 20석과 종이 1백 권을 부조하였다.[3] 최승녕의 막내 동생인 최승종(崔承宗)의 6대손이 인조 대에 활동하는 최명길이다.[4] 일단 공빈 최씨의 언니일 가능성이 더 높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영순군 신도비에 1455년(세조 1) 3월에 세조가 잠저에 있으면서 영순군의 혼사를 주관하였고, 부인이 된 최도일의 딸은 15세에 시집왔다고 써있다.[5] 세자 후궁의 품계로 종5품이다.[6] 성종실록 155권, 성종 14년 6월 15일 병자 2번째기사. #[7] 영조실록 66권, 영조 23년 12월 21일 정축 2번째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