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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연산군의 후궁 숙원 김씨 | 淑媛 金氏 | |
출생 | 미상 |
사망 | 1506년 9월 22일(음력 9월 2일) |
조선 한성부 군기시 앞 | |
휘 | 귀비(貴非) |
부모 | 부친 - 생불(生佛) |
부군 | 연산군 |
자녀 | 없음 |
봉작 | 숙원(淑媛) |
[clearfix]
1. 개요
조선 연산군의 후궁. 이름은 김귀비(金貴非)이다. 아버지는 생불(生佛)이라는 사람으로 가계에 대해 더이상 알려진 바 없다.언제 어떻게 연산군의 후궁이 되었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중종반정이 일어나기 전까지 연산군의 총애를 받으며 전횡을 휘둘렀던 것으로 보인다.
2. 생애
《중종실록》에서는 신하들이 김씨의 종 말응삭(末應朔)이 남의 집 재산을 빼앗고, 사람을 다치게 하였으며, 의롭지 못한 행동을 많이 하였으니 치죄하라고 주청한다.[1]또한, 시간이 많이 흐른 1544년(중종 39)에도 '연산군의 후궁 김숙원의 아비 생불(生佛)이 세력을 믿고서 전답과 노비를 빼앗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 연산군의 총애를 믿고 상당한 악행을 저지른 모양이다.[2]
대신 등이 모두 아뢰기를,
"숙용(淑容) 장녹수(張綠水)·숙용(淑容) 전전비(田田非)·숙원(淑媛) 김귀비(金貴非) 등 세 사람은 모두 화근의 장본인이니, 마땅히 속히 제거하여야 합니다." 하니, 그리하라고 전교하였다. 모두 참형에 처하고, 가산을 적몰하였다.
《중종실록》 중종 1년 9월 2일
"숙용(淑容) 장녹수(張綠水)·숙용(淑容) 전전비(田田非)·숙원(淑媛) 김귀비(金貴非) 등 세 사람은 모두 화근의 장본인이니, 마땅히 속히 제거하여야 합니다." 하니, 그리하라고 전교하였다. 모두 참형에 처하고, 가산을 적몰하였다.
《중종실록》 중종 1년 9월 2일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그의 후궁들도 마찬가지로 지은 죄에 맞는 처분을 받았다. 이때 장녹수, 전전비와 함께 처형되었으며 가산은 적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