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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11 17:04:03

숙의 지씨

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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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 : 환조 ~ 연산군 · 중종 ~ 고종
왕자 : 목조 ~ 연산군 · 중종 ~ 고종
왕녀 : 익조 ~ 연산군 · 중종 ~ 철종
※ 정식 후궁 첩지가 있는 사람만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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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종의 후궁
숙의 지씨 | 淑儀 池氏
본관 충주(忠州)
부모 부친 - 지윤(池奫, ? ~ 1377)
모친 - 순흥 안씨
형제자매
2남 3녀 중 3녀 [ 펼치기 · 접기 ]
오빠 - 지익겸(池益謙, ? ~ 1377)
오빠 - 지득린(池得鱗)
언니 - 삼한국대부인 지씨(三韓國大夫人 池氏)[1]
언니 - 성빈 지씨(誠嬪 池氏)
배우자 정종
자녀
슬하 3남 1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의평군(義平君, 1391 ~ 1461)
차남 - 선성군(宣城君, 1392 ~ 1460)
3남 - 임성군(任城君)
장녀 - 함양옹주(咸陽翁主)
봉작 숙의(淑儀)
능묘 황해도 개풍군 광덕산
1. 개요2. 생애3. 대중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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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정종후궁. 아버지는 고려 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낸 지윤(池奫)이며, 어머니는 순흥 안씨이다.

지윤의 세 딸은 모두 태조 이성계의 자식들과 혼인하였는데, 맏딸은 태조의 장남 진안대군 이방우와 혼인하여 삼한국대부인이 되었고, 둘째 딸과 막내딸이 정종의 후궁이 되었다. 바로 성빈 지씨와 숙의 지씨이다.[2]

슬하에 의평군 이원생, 선성군 이무생, 임성군 이호생함양옹주를 낳아 3남 1녀를 두었다.

2. 생애

숙의 지씨가 언제 어떻게 정종의 후궁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정종의 왕비 정안왕후가 자식을 낳지 못한 것에 비해 그녀는 정종의 자식들 15남 8녀 중 서장자 의평군을 낳았다는 점, 그리고 가장 먼저 봉작된 점으로 보아 일찍 정종과 혼인하여 자식을 낳은 것으로 보인다.
효령군(孝寧君)ㆍ충녕군(忠寧君)을 진봉(進封)하여 대군(大君)으로 삼고, 상왕(上王)의 궁인(宮人)의 아들 이원생(李元生)ㆍ이군생(李群生)을 봉하여 부정윤(副正尹)으로 삼았다.
태종실록》 태종 12년 5월 3일

1419년(세종 1) 정종이 승하하자 아들 의평군이 섭상주(攝喪主)가 되어 장례를 주관하였다.[3][4]

3. 대중 매체


[1] 진안대군의 정부인.[2] 앞서 고려 때는 이와 같은 혼인이 흔한 일이었다. 박영규의 두 딸은 정종과 혼인하여 문공왕후문성왕후가 되었고, 이자연의 세 딸은 문종과 혼인하여 인예왕후, 인경현비, 인절현비가 된 사례가 있다.[3] 세종실록 5권, 세종 1년 9월 27일 기사 2번째기사. #[4] 임금을 대신하는 상주(喪主)를 의평군이 맡았다는 뜻. 상당히 이례적인 상황인데, 후대로 가면 부자 관계, 형제 관계에 상관없이 차기 국왕이 무조건 상주를 맡았다. 예를 들어 예종의 상주는 제안대군이 아닌 성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