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15:10:36

명빈 김씨


조선의 후궁
[[틀:조선의 후궁(환조 ~ 연산군)|{{{#!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ackground: #ffd400; border-radius: 3px; font-size: .8em"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6E1D55, #89236A 20%, #89236A 80%, #6E1D55); color: #ffd4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이자춘|{{{#!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fd400; font-size: .7em"]]
[[덕종(조선)|{{{#!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fd400; font-size: .7em"]]
국왕 · 추존 국왕 · 왕비 · 추존 왕비 · 왕세자 · 왕세자빈
후궁 : 환조 ~ 연산군 · 중종 ~ 고종
왕자 : 목조 ~ 연산군 · 중종 ~ 고종
왕녀 : 익조 ~ 연산군 · 중종 ~ 철종
※ 정식 후궁 첩지가 있는 사람만 기재
}}}}}}}}}


<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태종의 후궁
명빈 김씨 | 明嬪 金氏
명빈 김씨묘 위치
출생 미상
사망 1479년 6월 5일
묘소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산 14
재위기간 조선 명빈
1411년 11월 22일 ~ 1479년 6월 5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구 안동 김씨
부모 부친 - 김구덕(金九德, ? ~ 1428)
모친 - 장숙택주 영산 신씨
형제자매 형제 - 김오문(金五文)[1]
배우자 태종
자녀 없음
봉작 명빈(明嬪)
}}}}}}}}} ||
1. 개요2. 생애3. 여담

[clearfix]

1. 개요

조선 태종간택 후궁. 아버지는 돈녕부 판사를 지낸 김구덕(金九德)이며, 어머니는 신경창(辛慶昌)의 딸로 장숙택주이다.[2] 동복동생은 김오문(金五文)으로, 그의 딸이 세종의 첫 번째 큰며느리이자 문종의 첫 정실 부인인 휘빈 김씨이다.

태종의 다른 후궁들과 달리 자녀가 없었지만, 가장 장수하여 성종 10년까지 내명부를 지켰다.

2. 생애

1411년(태종 11) 태종은 '일빈이잉(一嬪二媵)'의 빈어 제도를 마련한 후, 김구덕의 딸을 빈(嬪)으로 삼고, 전 제학(提學) 노귀산의 딸과 전 지성주사 김점의 딸을 두 잉(媵)으로 삼았다.
김씨(金氏)를 봉하여, 명빈(明嬪)을 삼고, 노씨(盧氏)는 소혜궁주(昭惠宮主)를, 김씨(金氏)는 숙공궁주(淑恭宮主)를 삼았다.
태종실록》 태종 11년 11월 20일

이때부터 후궁 제도가 완전히 정착하였다. 태종의 재위 연간에 유일하게 빈(嬪)의 지위에 있던 후궁이었고, 그녀의 거처를 가리켜 명빈전(明嬪殿)이라고 불렀다.[3]

한편, 태종은 명빈 김씨에 대한 처우 때문에 교서교감(校書校勘)으로 있던 방문중(房文仲)의 상언을 받았다.
"정비(靜妃)와 명빈(明嬪)이 각각 양전(兩殿)을 설치하여, 빈(嬪)으로서 적비(嫡妃)와 나란하게 함은 신(臣)의 이해할 수 없는 첫째이요, 궁중에 창기(娼妓)를 많이 불러들이는 것이 신의 이해할 수 없는 둘째이요, 후궁을 총애하여 큰 집을 많이 지어서 '신전(新殿)'이라 칭함이 신의 이해할 수 없는 세째입니다."
《태종실록》 태종 18년 7월 6일

조정에서는 "방문중이 망령되게 두 중궁(中宮)을 두었다 하였으니 죄가 있다"고 하여 처벌하기를 주장하였다. 이에 방문중을 전옥서에 가두고 형조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방문중의 말이 '망언'이라고 해도, 당시 태종이 원경왕후와 화합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며, 명빈 김씨의 존재가 중궁으로 비춰질만큼 이례적으로 여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1479년(성종 10) 음력 6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4]

3. 여담


[1] 딸이 문종의 첫번째 세자빈이었던 휘빈 김씨이다.[2] 고려시대에는 왕의 딸을 택주(宅主)라고 불렀고, 조선 전기에는 종친의 처, 또는 공신의 처를 봉작할 때 쓰는 칭호였다.[3] 의빈 권씨의 경우 세종이 즉위한 다음에 태종을 위해서 봉작한 것이고, 그 외에 효빈 김씨, 선빈 안씨 등은 고종이 정1품 빈(嬪)으로 봉작하였다.[4] 성종실록 105권, 성종 10년 6월 5일 경인 2번째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