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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2 17:49:02

숙빈 홍씨

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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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식 후궁 첩지가 있는 사람만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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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문종의 후궁
숙빈 홍씨 | 肅嬪 洪氏
출생 1420년대 추정[1]
사망 1485년 이후[2]
능묘 미상
재위기간 조선 승휘
1431년 4월 26일 ~ 1450년
조선 귀인
1450년 ~ 1452년 8월 21일
조선 숙빈
1452년 8월 21일 ~ 1485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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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남양 홍씨
부모 부친 - 홍심(洪深, 1398 ~ 1456)
모친 - 파평 윤씨 윤규(尹珪)의 딸
형제자매
1남 1녀 중 장녀 [ 펼치기 · 접기 ]
남동생 - 홍응(洪應, 1428 ~ 1492)[3]
배우자 문종
자녀 슬하 1녀(조졸)
왕녀(1441 ~ 1444)
봉작 승휘(承徽) → 귀인(貴人) → 숙빈(肅嬪)
}}}}}}}}} ||
1. 개요2. 생애
2.1. 간택의 배경2.2. 세자의 사랑2.3. 실질적인 왕비2.4. 단종 시절2.5. 왕실의 어른
3.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조선 문종왕세자 시절에 맞이한 간택 후궁. 문종이 즉위하고 '내궁(內宮)'이라고 불리면서 사실상 왕비와 다름없는 예우를 받았다[4] 그 이후 성종 재위 연간까지 왕실의 어른으로서 자리를 지켰다.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2. 생애

2.1. 간택의 배경

조부는 중추부 영사에 추증된 홍덕보(洪德輔)이고, 증조부는 시랑을 지낸 홍유룡(洪有龍)이다. 아버지는 한성부윤을 역임하고 세조의 즉위를 도와 원종공신이 된 홍심(洪深)이며, 어머니는 이조 참의를 지낸 윤규(尹珪)의 딸이다.[5] 또한, 동복동생 홍응(洪應)의 아들인 홍상(洪常)은 덕종소혜왕후의 장녀 명숙공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다.[6]

남편인 문종과는 외조부 윤규를 통해 이중, 삼중으로 인척을 형성하고 있다.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는 홍씨의 종이모이고, 문종의 후궁인 소용 윤씨는 윤규의 아들 윤희의 딸로 홍씨와는 외사촌 관계이다. 또 다른 문종의 후궁인 숙의 문씨는 홍씨의 5촌 조카다.[7]

즉, 숙빈 홍씨가 후궁으로 간택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배경이 작용한 것으로 추측된다.[8].

2.2. 세자의 사랑

1427년(세종 9) 세종은 김오문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아 휘빈(徽嬪)으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휘빈 김씨는 압승술(壓勝術)[9]을 사용하다가 발각되어 폐출되었다.[10] 이어서 1429년(세종 11) 봉여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고 순빈(純嬪)으로 책봉하였지만, 순빈 봉씨 역시 세자와의 사이가 원만하지 못하고 후사가 없었다.

1431년(세종 13) 경복궁 사정전에서 왕세자 이향의 후궁 간택이 정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때 가산군지사 권전의 딸, 직예문관 정갑손의 딸과 함께 선발되었다.[11] 세종은 홍심에게 쌀과 콩 30석을 내려주었고, 한 달 후에 홍심의 딸을 승휘(承徽)[12]로 봉작하였다. 그러나 순빈 봉씨는 질투가 심했던 데다가 그런 마음을 숨길 줄도 몰라서 권 승휘임신하자 "권 승휘가 아들을 두게 되면 우리들은 쫓겨나야 할 것" 이라고 대성통곡을 하는 등 기행을 벌였다. 심지어 궁인 소쌍(召雙)과 동침하는 일까지 있었다.[13] 레즈비언 며느리 일부러 순빈 봉씨를 불러다가 좋은 말로 타이르고 가르치기도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고, 휘빈 김씨에 이어 순빈 봉씨마저 폐출되고 말았다.

애써 명문가에서 가려 뽑은 며느리를 두 번이나 내쫓은 끝에 세종은 조정 대신들의 의견에 따라 후궁 중에서 세자빈을 간택하기로 하였다. 다만, 당시에 왕세자 이향의 의견은 홍씨를 낫게 여겼던 것 같다.
권 양원(權良媛)과 홍 승휘(洪承徽) 중에서 누구가 적임자인가. 두 사람은 모두 세자의 우대하는 사람이며 우리 양궁(兩宮)의 돌보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세자의 뜻은 홍씨를 낫게 여기는 듯하나, 내 뜻은 권씨를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세종실록》 세종 18년 12월 28일

권 양원이 나이와 지위가 더 높았고, 이미 을 낳았기에 아들을 낳을 가능성이 높아서 세자빈이 되었다. 나중에 홍씨도 딸을 낳았지만, 그 딸은 1444년(세종 27) 4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14]

2.3. 실질적인 왕비

문종이 즉위하면서 귀인(貴人)으로 봉작되었다. 비록 후궁이지만 왕비의 자리가 비어 있었기 때문에 궁중의 일은 홍씨가 도맡았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다른 간택 후궁들과 다르게 혼자 귀인으로 책봉된 점[15], 내궁(內宮)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명나라 사신이 예궐하여 그녀에게 선물을 바친 점을 볼 때 사실상 왕비로 여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내궁(內宮)에게 단자(段子) 2필, 사(紗) 1필을 바치고, 【내궁(內宮)은 곧 귀인 홍씨(貴人洪氏)이다. 이때 중궁(中宮)은 이미 훙서(薨逝)하시고 홍씨가 내전(內殿)을 다스렸다.】
문종실록》 문종 즉위년 8월 5일

이 당시 사신은 과, 세자, 그리고 홍씨에게만 선물을 바쳤다. 게다가 기록에서 왕과 홍씨, 세자의 순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보통 인명을 기록할 때는 신분, 직첩 순으로 기록하기 때문에 이는 굉장히 이례적인 경우이다.[16]

2.4. 단종 시절

문종의 사후, 홍씨는 정1품 빈(嬪)의 품계를 받아 숙빈(肅嬪)으로 봉작되었다. 이는 단종을 어린 시절부터 양육한 세종후궁 혜빈 양씨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기 위한 수양대군의 목적이었다.[17]

숙빈 홍씨가 혜빈 양씨와 갈등했다는 기록은 딱히 찾아볼 수 없지만, 간택 후궁과 궁인 출신 후궁의 격 차이로 혜빈 양씨의 궁중 내 입지는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18]

2.5. 왕실의 어른

1453년(단종 1) 안평대군이 사사된 이후에 안평대군의 집을 하사받았고, 단종의 왕비를 간택하는 자리에 혜빈 양씨와 함께 나아가 정순왕후를 직접 보기도 하였다.

1485년(성종 16)에는 속공 노비를 줄 것을 청하여 80구를 받았다.

그녀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않다. 다만 성종 시절에 사망한걸로 추측된다.

3. 대중매체에서


[1] 함께 간택되었던 현덕왕후(1418년 생)보다는 어렸다는 기록이 있다. 후궁으로 간택될 때 현덕왕후도 14살 밖에 안된 것으로 보면, 숙빈 홍씨는 1420년 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2] 1485년(성종16년)에 생존해있는 기록이 있다.[3] 홍응의 아들이 당양위(唐陽尉) 홍상(洪常)으로, 명숙공주의 남편이다.[4] 이런 그녀를 진작에 왕비로 책봉했으면 계유정난이 일어나지않았을거란 추측이 존재한다. 계유정난의 명분은 왕실이 대신들의 손에 흔들리는걸 볼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숙빈이 왕비였다면 대비가 되었을 것이고, 수렴을 할 명분이 생기니 계유정난은 이뤄지지 못 했을 것이다. 또한 만약에 홍씨 본인의 야심이 커서 단종을 본인의 휘하에 두어 정권을 휘어잡는다 쳐도 세조에게 찬탈당해 비극적으로 죽는거보다는 훨신 나은 결말이 되었을 것이다.[5]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태종의 과거 급제 동기이기도 해서 많은 후대를 받았다. 형조좌참의로 있을 당시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죄를 엄히 다스리라는 상소를 올린 적도 있다. 정희왕후의 아버지인 파평부원군 윤번은 그의 남동생이다.[6] 혼인 당시 덕종은 왕으로 추존되지 않아 명숙공주는 태안군주였으며, 세조가 직접 홍상을 부마로 간택하였다.[7] 숙의 문씨의 어머니는 홍씨의 이종사촌 자매이다.[8] 남양 홍씨는 명문가 중 하나지만, 홍씨가 후궁에 간택되는 시점에서 증조부 홍유룡은 여러 번 사고를 쳐서 파직을 당하는 등 인품이나 처세에 대한 평이 그다지 좋지 않았고, 조부 홍덕보는 아예 과거시험에도 합격하지 못했다. 아버지인 홍심도 딸이 세자의 후궁이 되기 전까지는 그다지 눈에 띄는 활동을 한 적이 없다.[9] 주술을 쓰거나 주문을 외어 음양설(陰陽說)에서 말하는 화복(禍福)을 누르는 일이다. 여기서는 부인이 남편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술법을 말한다.[10] 세종실록 45권, 세종 11년 7월 20일 갑자 3번째기사. #[11] 세종실록 51권, 세종 13년 1월 19일 갑신 6번째기사. #[12] 내명부 종 4품 세자 후궁.[13] 세종실록 75권, 세종 18년 10월 26일 무자 2번째기사. #[14] 홍씨가 낳은 딸은 책봉되기 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도 죽은 사실이 실록에 실려있다. 작위도 받지 못한 세자의 서녀치고는 대단히 이례적인 경우이다.[15] 홍씨 외의 다른 간택 후궁들은 모두 정3품 소용의 품계를 받았다. 그 중 소용 정씨는 홍씨와 같은 시기에 입궁했고, 문종과의 사이에서 아들까지 낳았다.[16] 홍씨가 문종의 실질적인 왕비로 대접 받았고, 상국인 명나라 측에서도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17] 기록에서 강맹경이 혜빈 양씨를 경계하여 홍씨의 품계를 높이자고 청하는데, 강맹경은 수양대군의 측근이다.[18]세조실록》에 "양씨는 노산군(魯山君)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궁중을 드나들면서 요구가 많았는데, 세조가 이에 약간의 절제를 가한 바 있어 양씨가 이를 원망하였고" 라는 말이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