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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조선 추존 국왕 이춘 | 李椿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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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릉 전경 | |||
출생 | 연대 미상[1] | ||
장소 미상 | |||
사망 | 1342년 7월 24일 | ||
장소 미상 | |||
능묘 | 의릉(義陵) | ||
재위기간 | 요동천호소 천호 | 다루가치 | ||
미상 ~ 1343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 전주 이씨 | |
휘 | 고려: 춘(椿) 원: 바얀테무르(孛顔帖木兒) | ||
부모 | 부왕 익조 모후 정숙왕후 | ||
형제자매 | 8남 1녀 중 4남 | ||
배우자 | 경순왕후 | ||
자녀 | 이자춘 외 6남, 6녀 | ||
아명 | 선래(善來) | ||
묘호 | 도조(度祖) | ||
시호 | 도왕(度王) → 공의성도대왕(恭毅聖度大王)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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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왕조의 추존 국왕으로 태조 이성계의 조부.조선 개국 직후에는 시호 '도왕'(度王)만 올렸다가 증손자인 태종이 1411년에 묘호 도조(度祖)를 올리고 시호를 '공의성도대왕'(恭毅聖度大王)으로 바꿨다.#
이름은 이춘, 아명은 선래(善來), 몽골식 이름은 이바얀테무르(李孛顔帖木兒)였다.[2] 묘호 도조(度祖)의 '度'자는 '(헤아릴) 탁'이라는 음도 있기 때문에[3] '탁조'라 부르기도 한다.
2. 생애
익조 이행리와 2번째 부인이었던 정숙왕후 최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으로 전체에서는 4남이었다. 익조 이행리가 죽자 천호 벼슬과 다루가치직을 세습하여 물려받았다. 아이가 안 생겨서 강원도 양양군에 있는 낙산 관음굴에 가서 정성스럽게 기도를 드리니 낳은 아들이라고 한다. 익조 이행리의 벼슬이 정실 손씨의 큰아들인 함녕대군 이규수에게 세습되지 않고, 측실인 최씨의 아들인 이춘이 세습한 것은 세력 형성에 최씨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다.원래 터전에서 밀려난 익조 이행리는 안변의 호족이자 장인인 최기열의 힘에 의해 세력을 재건했고, 그 힘을 기반으로 선대의 천호 벼슬을 다시 찾았기 때문에 최씨 사이에서 태어난 이춘을 후계자로 삼았다.[4] 이춘은 별 기록은 없으나, 노년에 중풍에 걸려 1342년 7월 24일에 죽었다. 죽기 전에 중풍으로 천호 벼슬을 수행할 수 없어서 정실인 박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큰아들 이자흥[5]에게 넘겨주려고 했지만 역대 쌍성총관을 배출하고 있었던 한양 조씨 가문 출신의 측실인 조씨는 자기 소생에게 넘겨주기를 바랬다. 그 일로 이자흥과 측실 조씨 사이에 다툼이 생기자 이자흥은 원나라에 직접 가서 자신이 적장자임을 밝히고, 천호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그는 2개월도 채 안되어 9월에 죽어버렸다. 이자흥에게는 이천계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너무 어렸다. 이에 측실 조씨는 자기 소생에게 물려주길 바랬는데 사실 조씨는 당시 쌍성총관부의 수장인 총관 조양기의 딸이었기에[6] 빽으로 밀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 이자흥의 친동생인 이자춘이 천호 직을 물려받았다.
화살 하나로 흑룡(黒龍)을 잡았다고 한다. #[7][8][9][10]
3. 가계
도조 이춘은 2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첫 부인은 쌍성총관 조양기의 딸 조씨였으며, 두 번째 부인은 오동백호를 지낸 박광의 딸로 경순왕후로 추존된 박씨다. 조선 왕실은 경순왕후의 후손이었으므로 훗날 기록에는 경순왕후가 첫 부인, 조씨가 두 번째 부인인 것으로 조작되었다.
사후에 이춘은 손자인 이성계가 국왕에 오르자 '도왕'(度王)으로 추존되었고, 증손자인 태종이 '도조'로 재추존했다. 박씨의 아들인 이자춘의 아들 이성계가 조선을 세웠기에 박씨가 정비로 인정되어 '경비'(敬妃)로 추존되었고, 태종이 '경순왕후'로 재추존했다.
도조는 영녕군 함흥 동쪽 운전사 주변에 마련된 '의릉'(義陵)에 안장되었다.
조선시대 지도와 구한말 흑백사진에 담긴 《의릉》 모습
[1] 장남 이자흥이 1305년인 점으로 볼 때, 최소 1285년에는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2] 제31대 공민왕과 몽골 이름이 같다.[3] 구한말 오늘날의 기획재정부(재무부)에 해당되는 부서를 '탁지부'(度支部)라 했다. 또한 《삼국지》의 유도의 이름도 劉度라서 유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4] 어째서 최씨의 장남인 이송이 아니라 이춘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송이 고려 왕조의 숭록대부였다는 기록을 보면 익조 이행리가 충렬왕(제25대)을 알현한 이후, 이송이 고려 조정에 출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다.[5] 조선에서 내린 봉호는 완창대군.[6] 참고로 이 측실 조씨는 조선 중반 중종때 기묘사화로 죽은 대학자 조광조의 가문인 한양 조씨 출신이었다. 위에서 나온 것처럼 천호 벼슬 계승 문제로 이성계의 전주 이씨 집안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총관 조양기의 차남인 조돈이 이자춘을 돕게 되고, 그 와중에 그의 후손만 대가 이어지게 되면서 개국공신 집안이 되었다. 총관 조양기의 손자인 조소생은 공민왕(제31대)과 이성계에 대항하다가 멸족당했고, 반역자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7]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황당한 조작으로, 고려 왕조의 자손들이 용왕의 자손이라, 양 겨드랑이에 비늘이 있다고 기록된 것을 황당한 조작이라고 비판한 조선왕조가 어떻게 이런 황당한 조작을.......[8] 그런데 이 신화는 본래 이성계의 신화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족 사이에서 전해지는 신화에는 두만강 하류에 밑바닥이 온통 붉은색인 늪이 있는데, 어느 날 이자춘은 왜적과의 싸움에서 고장군에 의해 목숨을 구하고, 이후 고장군은 증산에서 박달천과의 싸움으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 이성계는 고장군의 공적을 잊지 않고 늘 증산에 들르고, 어느 날 증산에서 낮잠을 자던 중 꿈을 꾸는데 두만강 신이 다가와 '박달천이 적룡으로 화하여 두만강 물을 흐려놓는다'며 없애줄 것을 청하고, 두만강 신은 적룡에게 싸움을 걸어 지는 척을 할 테니,[9] 화살을 겨누고 있다가 비늘 사이를 쏘라고 말하고, 이후 꿈에서 깬 이성계는 용당 산정자로 간다. 꿈에서 두만강 신이 말한 대로 적룡이 하늘을 빙빙 도는 사이, 비늘 사이로 화살을 쏘았는데 적룡은 화살을 뽑고 이성계에게 달려든다. 적룡은 대결 도중 화살촉에 묻었던 독약으로 인해 피를 토하며 사라진다는 이야기이고, 이 용 일화의 또 다른 이야기도 있는데, 또 적룡과 흑룡이 있었고, 적룡은 퉁투란의 조상이고, 흑룡은 이성계의 조상으로 둘이 사람으로 변해서 활쏘기 내기로[10] 적룡이 죽고, 흑룡이 승천했고, 흑룡의 자손인 이성계가 후에 왕위에 오른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조선왕조의 정식 문헌 기록인 조선왕조태조실록총서에서는 이 용의 일화가 이성계의 조부 이춘의 이야기로 변이되어 나타났다고 한다. 이화영 저 '이성계설화의 전승과 의미 연구' 논문 56P~59P.[11] 여진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