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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28 09:58:02

이병원


조선 인조의 6대손
이병원 | 李秉源
본관 전주(全州)
이름 병원(秉源)
경심(景深)
생부 이진익
생모 청풍 김씨[1]
부인 연일 정씨[2]
광산 김씨[3]
자녀 5남 1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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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장남 - 이도중(李䆃重, 1787 ~ 1872)
적차남 이채중(李寀重, 1788 ~ 1836)[4]
적삼남 - 이휘중(李彙重, 1803 ~ 1888)
적장녀 - 남준응(南駿應)의 처
서장남 - 이과중(李果重, 1803 ~ 1867)
서차남 - 이내중(李來重, 1807 ~ 1892)
묘소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 산46-1번지
생몰
기간
음력 1752년 4월 6일 ~ 1822년 11월 11일
양력 1752년 5월 19일 ~ 1822년 12월 23일
1. 개요2. 생애3. 사후4. 가족과 후손
4.1. 적장남 이도중4.2. 적3남 이휘중4.3. 적장녀4.4. 서장남 이과중 · 서차남 이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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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의 인물. 인평대군의 5대손으로, 대궁의 6대 종주 이진익의 차남이다. 남연군의 생부, 흥선대원군의 친조부, 고종의 친증조부이다.

2. 생애

1752년(영조 28년) 한성부에서 태어났고, 성균관 관학유생으로 수학했다. 1783년(정조 7년) 생원시, 1795년(정조 19년) 진사시에 합격했지만, 과거 시험에서 응시자격을 박탈당했다. 이후, 감역관, 부사과, 삼가현감 등을 역임했으며, 1806년(순조 6년) 질병으로 면직되었다. 1822년(순조 22년) 음직으로 통정대부, 부호군, 오위장,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면직되었다.

3. 사후

1822년(순조 22년)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70세.[5] 처음에는 경기도 양주군 진관면 동진관 인좌에 안장되었다가, 훗날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 인평대군 묘소 동쪽으로 이장되었다. 사망 후,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으로 추증되었으며, 1864년(고종 1년) 친증손 고종이 즉위한 후, 흥선대원군의 친조부 자격으로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4. 가족과 후손

연일 정씨 정의환의 딸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고, 광산 김씨 김진구의 딸 사이에서 1남을 두었으며, 무명의 소실 사이에서 2남을 두었다. 총 5남 1녀.

자녀들 중, 정씨 부인 소생의 적차남 이채중은 1815년(순조 15년) 사도세자의 서차남 은신군의 양자로 출계하여 남연군에 봉해졌다. 남연군의 4남이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의 차남이 고종으로, 조선 최후의 왕통은 이병원의 혈통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남연군과 그 후손들에 대해서는 문서 참조.

4.1. 적장남 이도중

이병원의 적장남 이도중은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6] 이도중의 독자 이달응은 슬하에 2녀만 두었기에, 동생 이휘중의 장손 이재윤을 양자로 들였다. 이재윤은 적자 없이 서자 이좌용과 이우용을 두었다. 일제강점기인 1918년에 이좌용이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손이라 하여 채무를 이왕가에서 대신 탕감해준 것을 보아, 서자임에도 이좌용이 가독을 승계받은 것으로 보인다.

4.2. 적3남 이휘중

적3남 이휘중은 슬하에 5남 1녀를 두었다.[7] 이휘중의 장남 이상응은 슬하에 아들 이재윤 한 명을 두었는데, 이재윤은 자식이 없던 이병원의 장손이자 이도중의 아들 이달응에게 출계했다. 그러자, 정작 이상응 본인의 후계가 끊겼고,(...) 이에 이상응은 동생 이명응의 아들 이재구를 입양했다.

이휘중의 차남 이명응은 2남을 두었는데, 그중 적장자 이재구는 이명응의 형 이상응에게 출계했다., 그러자, 정작 이명응 본인의 적자계열이 끊겼고,(...) 뭐야 왜 다들 남에게 아들주고 자기 대가 끊겨 서자 이재택으로 가계가 이어진다. 이재택은 아들 이호용과 이관용을 낳았고, 그 중 이관용은 1912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장남 완은군의 양자로 입적했다. 이관용에 대한 내용은 문서 참조.

이휘중의 3남 이노응은 아들이 없어, 무려 세종 때 갈라진 광평대군의 16대손 이재충을 입양했다. 이휘중의 4남 이한응도 아들이 없어, 선조 때 갈라진 경평군의 10대손 이재구를 양자로 들였다. 이휘중의 서장남 이순응은 아들 이재항 한 명을 두었다.

4.3. 적장녀

이병원의 하나뿐인 딸(적장녀)은 의령 남씨 남준응과 혼인했다.

4.4. 서장남 이과중 · 서차남 이내중

서장남 이과중은 세 아들과 한 딸을 두었다. 그의 장남인 이면응은 외아들 이재현을 낳았으나, 이재현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이에 성종 때 갈라진 양원군의 14대손인 이훈용을 양자로 들였다.

이과중의 차남인 이민응은 그의 동생이자 이병원의 서차남인 이내중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이내중은 적자녀는 물론 서자녀도 없었다.

이과중의 서장남인 이현응은 적자로 이재봉을, 서자로 이재지를 두었다.
[1] 김도건(金道健)의 딸.[2] 정의환(鄭義煥)의 딸.[3] 김진구(金鎭九)의 딸. 연일 정씨와 사별 후 재혼.[4] 1815년(순조 15) 사도세자의 서차남 은신군에게 입적 후 '남연군'으로 봉군되고 왕족이 되었다.[5] 당시 나이 셈법인 세는나이로 71세.[6] 1남은 정실 소생, 1녀는 서출이다.[7] 4남은 정실 소생이고, 1남 1녀는 서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