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종의 왕자에 대한 내용은 임성군 문서 참고하십시오.
전주 이씨 소현세자파의 역대 종주 | ||||
2대 경선군 이백 | ← | 3대 임성군 이엽 | → | 4대 밀남군 이감 |
조선 인조의 증손 임성군 | 臨城君 | ||
봉호 | 임성군(臨城君)[1] | |
본관 | 전주 이씨 | |
이름 | 엽(熀)[A] | |
조부 | 소현세자 | |
양부 | 경선군(慶善君) | |
생부 | 경안군(慶安君) | |
생모 | 분성군부인 김해 허씨(盆城郡夫人 金海 許氏) | |
부인 | 익성현부인 남양 홍씨(益城縣夫人 南陽 洪氏) | |
자녀 | 1남 4녀 | |
묘소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 |
생몰 기간 | 음력 | 1665년 8월 10일 ~ 1690년 9월 18일[3] |
양력 | 1665년 9월 18일 ~ 1690년 10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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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왕족. 이름은 이엽(李熀)[A]. 소현세자 이왕와 민회빈 강씨의 손자로,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 이회(초명은 이석견)의 차남이자 소현세자의 장남 경선군 이백(초명은 이석철)의 양자이다.2. 생애
1665년(현종 6년)에 경안군과 분성군부인 허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는 형 임창군이 있었다.임성군의 아버지 이석견(경안군)은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의 사후 할아버지 인조에 의해 4살 때부터 제주도에서 형인 이석철(경선군), 이석린(경완군)과 함께 유배 생활을 했다. 이석철과 이석린은 귀양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주도에서 죽었는데 그 내막이 석연찮다. 자세한 내용은 경선군, 경안군 문서 참조.
다행히 이석견은 살아남았고 삼촌 효종이 즉위한 후 강화도로 옮겨갔다가 1656년(효종 7년)에야 귀양에서 풀려났다. 해배[5] 2년 뒤에는 복권받아 경안군(慶安君)으로 봉해졌고 품계가 정2품 승헌대부(承憲大夫)로 올랐다. 그러나 아주 어릴 때부터 청소년기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유배 생활을 한 후유증 때문인지, 경안군은 1665년(현종 6년)에 22살의 나이로[B] 요절하고 말았다. 그 때 임성군은 겨우 생후 1개월이 조금 지난 아기였다.
경안군 사후에도 임성군과 그의 형 임창군은 왕실에게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효종의 아들인 현종은 본래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왕이 되지 못했던 소현세자계 자손에게 동정심을 가졌는지 상당히 잘해주었다.
그런데 '원래 왕이 되었어야했다'는 위치 때문에 항간에서는 임성군의 형 임창군을 왕위에 올릴 것이란 유언비어가 돌았고, 그 때문에 임성군 형제는 늘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안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1679년(숙종 5년) 3월에 결국 사건 하나가 터졌다. 강화도에서 흉서가 나돌았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흉서를 국청에 내려 제장들에게 보내다
"아! 오늘이 이 어떤 때인가? 혼란이 더없이 심한 날이다. 어지럽던 조정을 혁폐하여 종묘 사직을 붙들어야 할 텐데 합당한 사람이 없는 것이 한이구나. 아! 오늘의 위정자(爲政者)는 위로 임금을 속이고 아래로 백성을 저버려 외구(外寇)를 계도(啓導)하고 백성을 괴롭혀 성을 쌓으니, 이 무슨 심술(心術)인가? 이번 13일은 곧 계해년(癸亥年) 반정(反正)한 날이다. 이날을 기하여 쳐들어갈 것을 의논하였는데, 서울로 들어가는 길에 나루터 둘이 있으니, 하루 전날 비변사에 정문(呈文)을 올리고 각각 수백 인을 보내되 미리 배와 노를 준비하여 건넌다. 대중들을 한 곳에 모으고 다 모인 뒤에 영(令)을 내리기를 ‘사기(邪氣)가 대궐을 범했으므로 중들로 하여금 불경을 외어 쫓아내야겠기에 급급하게 불러들였다.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손자 임천군(林川君)[7]은 곧 경안군(慶安君)의 아들인데 지금 안국동(安國洞)에 살고 있다. 이분이 진짜 성인이며 또 나라의 종통(宗統)이다. 오늘 당쟁의 화가 이에 이른 것도 다 종통이 순서를 잃었기 때문이다. 나라 사람들 치고 그 누가 이 군(君)을 세워 국통(國統)을 바로잡고 붕당을 없애기를 원하지 않으리요마는, 시세(時勢)에 눌려 세울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제공(諸公)이 만약 이 임금을 세워 종통을 바로잡고 붕당을 제거한다면, 난을 평정하고 질서를 회복한 그 공은 다만 한 때만의 공이 아닐 테니, 어찌 쾌한 일이 아닌가? ...(후략)...“
《숙종실록》 8권, 1679년(숙종 5년) 3월 19일 갑인 5번째 기사#
즉, '임창군이 왕실의 종통이니 그를 보위에 올려야한다'는 내용이었다. 사건의 배경은 이러했다. 1678년(숙종 4년) 말부터 숙종은 강화도에 돈대 수십 개를 축조하게 했고, 공사 시작은 다음해인 1679년(숙종 5년)부터 했는데 당시 강화도 백성들은 공사 진행으로 인해 논밭 경작 등에 꽤 큰 피해를 입었던 듯 하다.# 그래서 반란 세력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아! 오늘이 이 어떤 때인가? 혼란이 더없이 심한 날이다. 어지럽던 조정을 혁폐하여 종묘 사직을 붙들어야 할 텐데 합당한 사람이 없는 것이 한이구나. 아! 오늘의 위정자(爲政者)는 위로 임금을 속이고 아래로 백성을 저버려 외구(外寇)를 계도(啓導)하고 백성을 괴롭혀 성을 쌓으니, 이 무슨 심술(心術)인가? 이번 13일은 곧 계해년(癸亥年) 반정(反正)한 날이다. 이날을 기하여 쳐들어갈 것을 의논하였는데, 서울로 들어가는 길에 나루터 둘이 있으니, 하루 전날 비변사에 정문(呈文)을 올리고 각각 수백 인을 보내되 미리 배와 노를 준비하여 건넌다. 대중들을 한 곳에 모으고 다 모인 뒤에 영(令)을 내리기를 ‘사기(邪氣)가 대궐을 범했으므로 중들로 하여금 불경을 외어 쫓아내야겠기에 급급하게 불러들였다.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손자 임천군(林川君)[7]은 곧 경안군(慶安君)의 아들인데 지금 안국동(安國洞)에 살고 있다. 이분이 진짜 성인이며 또 나라의 종통(宗統)이다. 오늘 당쟁의 화가 이에 이른 것도 다 종통이 순서를 잃었기 때문이다. 나라 사람들 치고 그 누가 이 군(君)을 세워 국통(國統)을 바로잡고 붕당을 없애기를 원하지 않으리요마는, 시세(時勢)에 눌려 세울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제공(諸公)이 만약 이 임금을 세워 종통을 바로잡고 붕당을 제거한다면, 난을 평정하고 질서를 회복한 그 공은 다만 한 때만의 공이 아닐 테니, 어찌 쾌한 일이 아닌가? ...(후략)...“
《숙종실록》 8권, 1679년(숙종 5년) 3월 19일 갑인 5번째 기사#
그러다 이 흉서를 축성장 이우(李㒖)가 병조판서 김석주에게 고변하여 세상에 알려졌다.[8] 원래 저런 사건이 터지면 본인은 몰랐다하더라도 추대 대상인 왕족들은 무사하지 못했다. 임창군은 숙종의 배려로 목숨은 부지했으나 어쨌든 연루되었단 이유로 제주도로 귀양을 갔는데, 임성군도 저때 연좌받아 형과 같이 유배갔다.# 이듬해인 1680년(숙종 6년)에는 한성과 가까운 교동으로 옮겨갔고# 그 다음해인 1682년(숙종 8년)에는 해남으로 갔다가 1685년(숙종 11년)에 형 임창군과 함께 유배에서 풀려났고 직첩을 환수받았다.
1686년(숙종 12년)에는 품계가 한 단계 올라갔으며#, 확실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왕대비 조씨(장렬왕후)의 명으로 큰아버지 경선군의 양자로 입적했다. 이로써 임성군은 소현세자의 종손(宗孫)이 되었다.[9]
1689년 1월[10]에는 장렬왕후의 재궁(관)을 묻을 때 당숙 동평군[11], 형 임창군과 함께 참석했고# 1689년(숙종 15년)에는 기우제를 지낼 때 헌관으로 참여했다.#
3. 사망
1690년(숙종 16년) 10월 19일[12]에 사망했다. 향년 26세.[B] 묘는 친아버지 경안군의 묘가 있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으며 부인과 합장되었다. 친형 임창군의 묘도 인근에 있으며, 얄궂게도 조선 건국 과정에서 처형당한 최영 장군의 묘도 근처에 있다.4. 가족 관계
- 생부 : 경안군 이회(慶安君 李檜, 1644 ~ 1665)
- 생모 : 분성군부인 김해 허씨(盆城郡夫人 金海許氏, 1645 ~ 1723) - 사헌부장령 허확(司憲府掌令 許確)의 딸
- 형 : 임창군 이혼(臨昌君 李焜, 1663 ~ 1724)
- 양부 : 경선군 효헌공 이백(慶善君 孝憲公 李栢)
- 정부인 : 익성현부인 남양 홍씨(盆城郡夫人 1670 ~ 1700)
- 장녀 : 심명철(沈命哲)에게 출가
- 차녀 : 정석삼(鄭錫三)에게 출가
- 양자 : 밀남군 이감(宻南君 李堪) - 임창군(臨昌君)의 차남
- 며느리 : 기계 유씨(杞溪 俞氏) - 유명홍(俞命弘)의 딸
- 첩부인 : 성씨 미상
4.1. 후손
아래 서술한 내용은 1900년(광무 4년)에 펴낸 《선원속보 - 인조대왕자손록: 소현세자파보》를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다.남양 홍씨 홍구서(洪九叙)의 딸 익성현부인(盆城郡夫人)과 혼인하여 슬하에 딸 2명을 두었고, 측실 사이에서도 딸 2명을 두었다. 적장녀는 청송 심씨 심명철(沈命哲)과, 적차녀는 동래 정씨 정석삼(鄭錫三)과 혼인했고, 서장녀는 평산 신씨 신경서(申慶瑞)와, 서차녀는 황주 변씨 변진망(邊震望)과 혼인했다.
그러나 슬하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친형 임창군 이혼(臨昌君 李焜)의 차남 밀남군 이감(密南君 李堪)이 양자로 입적하여 대를 이었다.
밀남군은 아들 3명을 낳았다. 장남은 이태석(李泰錫), 차남은 이이석(李頤錫), 3남은 이건석(李健錫)이다. 이중 장남 이태석과 3남 이건석의 대가 끊겼고 차남 이이석만 아들 둘을 낳았다.
이이석의 장남 이원경(李源慶)은 백부 이태석에게 출계하여 소현세자파의 종가를 이었다. 이원경부터 그의 손자 이호응(李浩應)까지는 독자로 이어졌는데, 이호응은 서자만 둘이라서 적장자로 이재민(李載敏)을 입양했다. 이재민은 밀남군 이감의 친동생이자 임창군 이혼의 3남 밀원정 이용(密原正 李墉)의 5대손이므로, 이호응과 실제 혈통 상으로는 11촌, 입양 전 법적 촌수로는 15촌 숙부 - 조카 관계이다. 이재민은 아들 3명을 낳았는데, 이재민의 장남 이복용(李復鎔)은 이재민의 친형 이재철(李載徹)의 양자로 갔고[14] 가계는 차남 이익용(李益鎔)이 물려받았다. 이호응의 서자 이재홍(李載洪)과 이재욱(李載旭)은 각각 아들 한 명씩 낳았고, 이재욱의 아들 이경용(李景鎔)은 덕흥대원군파로 출계했다.
이이석의 차남 이원후(李源厚)부터 그의 손자 이한섭(李漢燮)까지도 독자로 이어졌으며, 이한섭은 아들을 낳지 못해 밀원정 이용의 5대손 이재명(李載明)을 양자로 들였고 그도 아들을 이화용(李華鎔) 한 명만 두었다.
즉, 실제 남아있는 임성군의 후손은 현재는 매우 극소수이다.
[1] 봉호는 경상남도 김해의 옛 지명인 임해(臨海)에서 유래했다.[A] ‘熀’은 ‘이글거리다’는 뜻으로, ‘엽’, ‘황’ 두 가지 음이 있다. 그래서 ‘이황’이라고도 부르는 경우가 있으나, 본 문서에서는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의 표기를 따라 ‘이엽’으로 표기한다.[3] 출처: 《선원속보 – 인조대왕자손록: 소현세자파보》. 1900년(광무 4년) 제작.[A] [5] 解配. 유배에서 풀려나다.[B] 당시 나이 셈법인 세는나이.[7] 임창군을 잘못 표기한 것인지 아니면 임천군에서 훗날 임창군으로 봉호가 바뀐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8] 우습게도 고변한 이우는 상은커녕 축성장 직에서 파면당하고 고문사했다.[9] 사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족보가 꼬인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임성군과 그의 자손들이 소현세자 종가의 적통을 잇는 것이 맞으나, 소현세자의 3남 경안군의 차남이 양자로 계승한 것에 불과하므로 실제로는 경안군의 장남 라인(즉, 임성군의 친형 임창군 계열)이 더 적통에 가까웠던 것.[10] 음력 무진년(숙종 14년) 12월.[11] 인조의 서장남 숭선군의 장남.[12] 음력 9월 18일.[B] [14] 사실 이재철에게는 친아들 이한용(李漢鎔)이 있었는데, 철종 이변(哲宗 李昪)의 형 영평군 이경응(永平君 李景應)의 손자로 입적하여 풍선군(豐善君)으로 봉해졌기 때문에 대가 끊긴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