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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운군

조선 인조의 현손
밀운군
密雲君
봉호 밀운정(密雲正) → 밀운군(密雲君)[1]
본관 전주(全州)
이름 훈(壎)
증조부 소현세자
생부 임창군 이혼(臨昌君 李焜)
생모 응천군부인 밀양 박씨(密陽 朴氏)
부인 서원 한씨 (西原 韓氏)
자녀 3남 5녀
생몰
기간
음력 1704년 7월 12일 ~ 1763년 10월 25일
양력 1704년 8월 12일 ~ 1763년 11월 29일

1. 개요2. 생애3. 사후4. 가족 관계
4.1.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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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왕족. 이름은 이훈(李壎). 소현세자 이왕의 증손으로,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 이석견의 손자이며, 경안군의 장남 임창군 이혼의 6남이 밀운군(密豊君)이다.[2]

2. 생애

1704년(숙종 30년)에 태어났다. 첫 작호는 밀운정(密雲正)이었고 나중에 밀운군(密雲君)으로 승격했다.

현종경안군이 복권된 후, 효종의 후손인 현종, 숙종, 경종, 영조는 본래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왕이 되지 못했던 소현세자계 자손에게 동정심을 가졌는지 상당히 잘해주었다. 경안군의 두 아들은 한때 역모에 엮여 제주도에 유배된 적도 있었지만 풀려났고, 《경종실록》의 〈임창군 졸기〉에 따르면, '여러 왕족 가운데 감히 바라볼 자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고 한다. 이는 임창군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여서 밀운군의 큰형 밀풍군은 왕실의 큰어른으로서 청나라에 사은 정사로 다녀오기도 했다.

그런데 상술했듯, ‘원래 왕이 되었어야했다’는 위치 때문에 밀운군과 그의 형제들은 걸핏하면 반란 세력들의 이용대상이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1728년(영조 4년)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인좌 세력이 밀운군의 큰형 밀풍군을 옹립하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난은 실패로 끝났고 이후 밀풍군은 사사당했다.

밀풍군 사망 시 밀운군은 엮이지 않아 한동안 무사했으나, 한참 뒤인 1755년(영조 31년)에 나주 괘서 사건으로 죽은 신치운의 아내 민연을 흑산도로 유배시킬 때와 맞물려, 역적 밀풍군의 동생이란 이유로 진도귀양가고 말았다.#

여기서 그친 게 아니라 나중에는 아예 다른 반역 사건에 연루되었다. 1763년(영조 39년) 8월 말에 심내복 역모 미수 사건의 추대 대상인 것이 발각당하고 만 것.

심내복은 나주 괘서 사건으로 죽은 소론 준론 심정연의 조카로, 연좌제를 적용받아 당시 어느 외딴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심내복의 말에 따르면, 그는 조정에 앙심을 품고 1757년(영조 33년)부터 같이 귀양왔던 조영득, 유동혼 등과 함께 군대를 모았다고 했다. 그리고 이들을 상인으로 위장시킨 다음 육지로 보내서, 먼저 호남의 고을을 습격하고 무기와 식량을 빼앗은 후 한성으로 쳐들어가 밀운군을 옹립할 계획을 세웠다고 했다. 그리고 1762년(영조 38년)에는 직접 밀운군을 찾아가 만나기까지 했지만, 계획을 실행하기도 전에 먼저 체포당했다고 밝혔다. 심내복은 역모 계획을 자백한 후 처형당했다.#

비록 심내복은 처형당했지만, 역모의 전말을 밝히기 위해 영조는 관련자들을 모두 잡아들인 다음, 죄인들을 직접 국문했다.

밀운군은 “섬에서 병들어 치료를 할 수 없었는데, 마침 심내복이 의술을 안다고 해서 만난 것 뿐”이라며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하지만 영조는, 어쨌든 추대 대상에 이름을 올렸으니 밀운군의 목을 베어야 마땅하나 종친이기에 차마 죽일 수는 없으니 대신 거제도로 유배보낼 것을 명했다.# 이에 사헌부사간원에서 불러들여 엄중하게 벌주라고 했으나 영조는 듣지 않았고# 나중에는 대간홍문관의 신하들까지 나섰으나 영조는 계속 무시했다.#, 그렇게 영조와 신하들의 기싸움이 몇 달 간 지속되는 동안 밀운군은 계속 옥에 갇혀있었다.#

물론, 영조가 진심으로 밀운군을 생각해서 살려주려 저런 것은 아니고, 일종의 요식행위라고 봐야한다. 군주 국가에서 아무리 왕족이 잘못했다한들, 신하들이 왕족을 죽이라는 청을 임금이 바로 수용하는 것은 왕실의 위신 상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금이 죽이고 싶어도 어쨌든 혈족을 냉큼 죽이는 게 모양새가 좋지 않기 때문에, 신하들이 계속 청을 하게 만들어 “난 싫은데 너희들이 계속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사형시킨다.”는 이미지를 만들어 임금의 체면을 지키려는 계산도 숨어있었다. 이는 비단 영조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 조선시대 임금들이 그랬다.

결국 10월에 들어서 영조는 더 이상 밀운군을 보호하기를 포기했다. 다만, 밀운군이 자결하게끔 했다. 그러자 삼사의 신하들이 안된다고 계속 만류했는데 영조는 삼사를 모두 파직시키는 것으로 대응했다.# 저기서 삼사가 말린 것은 밀운군을 살려주자는 뜻이 아니었다. 자결시키지 말고 법률에 따라 처형하라는 뜻이었다.

마침내 그해 10월 25일에 밀운군은 처형당했다. ## 향년 59세.[3]

3. 사후

밀운군은 죽었지만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의 아들들도 연좌제를 적용받아 국문당하고# 귀양을 가고 만 것.

그리고 밀운군의 직계는 아니지만, 소현세자 후손들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밀운군의 큰형 밀풍군의 현손 이명섭(李明燮)과 이명혁(李明赫) 형제가[4] 철종 시기에 또(...) 역모에 엮여 다시 한 번 집안이 풍비박산 날 뻔 한 것. 이명섭은 체포당해 압송되던 중에 사망했고#, 이명혁은 철종의 배려로 살아남았으나# 제주도로 유배를 가고 말았다.#

1864년(고종 1년) 7월에 고종이 밀운군을 복권시켰다. 그달 11일에는 죄명을 삭제했고, 18일에는 관작을 회복시켰다.# 이때 밀운군 뿐 아니라 다른 소현세자의 후손들도 대부분 복권시켜 소현세자 후손들의 질기고 질긴 수난은 끝나게 되었다.[5]

4. 가족 관계

4.1. 후손

서원 한씨 한중희의 딸과 혼인하여 슬하에 아들 3명을 낳았다. 《선원속보 – 소현세자파보》[A]에는 장남이 이주석(李胄錫), 차남이 이윤석(李胤錫), 3남이 이응석(李膺錫)이라고 적혀있는데#[7], 《영조실록》에는 이응석 대신 이사석(李師錫)이란 이름이 나온다.# 이응석과 이사석이 동일인물인지, 아니면 각 기록에 한 명씩 누락된 것인지는 모른다.

상술했듯, 밀운군이 사형당한 후 이들은 유배형을 받았는데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이주석은 전라도 강진현 고금도[8]로, 이윤석은 황해도 장연부 백령진으로 갔다고 한다.[9]

《선원속보 – 소현세자파보》[A]에 따르면, 장남 이주석은 1780년(정조 4년)에 세상을 떠났고, 나머지 아들들의 몰년은 나와있지 않다. 다만, 이윤석의 경우 《정조실록》에 1799년(정조 23년) 경에 사망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 몰년을 확인할 수 있다. 기사에 따르면, 낚시를 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백령 첨사를 언급한 것을 보아 죽을 때까지 유배 생활을 했던 듯 하다. 참고로 《선원속보 – 소현세자파보》[A]에는 이주석의 아들을 제외하고 밀운군의 손자녀는 아무도 적혀있지 않다.

이주석의 아들 이원효(李源孝)는 1762년(영조 38년)에 태어나 1782년(정조 6년)에 사망했다. 자식에 대한 기록도 남아있는 것이 없다.

[1] 봉호는 경상남도 밀양에서 유래했다.[2] 다만, 임창군의 차남 밀남군이 친숙부이자 법적 당숙부인 임성군 이엽양자로 갔기에, 족보상으로 밀운군은 임창군의 5남이다.[3] 당시 나이 셈법인 세는나이로는 60세.[4] 혈통상으로는 그렇지만, 이명섭, 이명혁의 증조부 이항석(밀풍군 3남)이 밀풍군의 동생 밀원정의 양자로 가서 족보상으로는 밀원정의 현손이다.[5] 단, 저때 이명섭, 이명혁을 복권시킨다는 말은 없었다. 그렇지만 1871년(고종 8년) 1월 30일 자 《고종실록》의 기사에 따르면, 소현세자의 후손들을 생각한다면서 (이명섭, 이명혁의 동생인) 이교응(李敎應)을 장릉 친제에 참석하게 했는데 이를 보아 그 가족들에 대한 대우는 좋아진 듯 하다. 여담으로 저 이교응의 손자 이한용(李漢鎔)은 철종의 형 영평군의 손자로 입적한 후 풍선군으로 봉군되어 정식 종친으로 편입되기까지 한다.[A] [7] 8면.[8] 현재 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면.[9] 현재 인천광역시 옹진군.[A]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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