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살인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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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東京·埼玉連続幼女誘拐殺人事件(도쿄 사이타마 연속 유아 납치 살인 사건)공식 명칭: 경찰청 광역 중요지정 제117호 사건(警察庁広域重要指定第117号事件), 사건번호 헤이세이 13년 형사상고사건 제1205호 (平成13年(あ)第1205号)
피해자들(콘노 마리와 난바 에리카)을 찾는 전단지를 뿌리는 영상 |
노모토 아야코 살인과 범인의 행적과 관련된 영상 |
2017년에 방영된 ‘30년째 진실’ 재연드라마. |
미야자키 츠토무의 자택 옆 인쇄소를 조사하는 경찰 |
1988년(쇼와 63년) 8월 22일부터 이듬해 1989년(헤이세이 원년) 6월 11일까지 도쿄도 특별구(고토구) 및 북서부[1] ~ 사이타마현 세이부 이케부쿠로선 연선지역[2]에서 미야자키 츠토무라는 26세 인쇄공이 일면식도 없던 여아 4명을 잇따라 연속적으로 납치하여 살해한 후 인근 지역에 유기한 사건.[3]
이후 한노시에서 어린 자매를 납치해 성폭행하려다가 자매의 아버지가 현장을 목격하여 결국 범행이 드러나면서 피의자로 체포, 기소된 미야자키 츠토무는 형사재판에서 일관되게 무죄를 주장했으나 1심, 항소심, 상고심을 거쳐 사형을 확정받았다.
2. 피해자
노모토 아야코 (野本綾子) 1983년생, 향년 5세 | 콘노 마리 (今野真理) 1984년생, 향년 4세 | 난바 에리카 (難波絵梨香) 1984년생, 향년 4세 | 요시자와 마사미 (吉沢正美) 1981년생, 향년 7세 |
3. 사건 전개
3.1. 1번째 사건
첫번째 피해자 콘노 마리 |
1988년 8월 22일, 사이타마현 이루마시 이루마 빌리지에 살던 당시 4살 콘노 마리(今野真理)를 도로 위 인도교에서 발견하고 “시원한 곳에 가지 않을래?”라며 말을 걸어 차로 유인 후 도쿄도 하치오지시 이츠카이치쵸(五日市町, 현재 아키루노시) 도쿄전력 신타마 변전소에 있는 숲으로 납치했다.
마리가 울음을 터트려 당황한 미야자키는 오후 6시 경에 조수석에서 마리를 교살하고 다음날 비디오 대여점에서 비디오 카메라를 빌려 사후경직으로 인해 굳은 사체에 외설행위를 하면서 이를 카메라로 촬영하였다.
저녁이 되어도 마리가 귀가하지 않자 마리의 부모는 경찰서에 신고했다. 범인이 몸값을 원하는 납치범일 거라고 생각한 경찰은 마리의 자택 전화기에 역탐지 설치기를 연결하고 기다렸으나 범인에게 전화는 오지 않았다.
이후 제3의 피해자였던 난바 에리카의 아버지가 “시신이라도 돌아와서 다행이다”라고 말하는 뉴스를 본 미야자키는 마리의 두부(頭部)를 태워 괴문서와 함께 유족에게 보냈다.
첫 번째 사건은 다른 사건들과 다르게 목격자가 많았다. 길 모퉁이에서 마리가 중년 남성을 따라가는 모습을 남자아이 2명이 목격하였고, 같은 단지에 사는 주부도 마리가 남성의 뒤를 따라 걷는 모습을 목격했다. 미야자키 츠토무는 진술에서 "수상해 보이지 않도록, 일부러 아이와 5m 정도의 일정 거리를 두고 걸었다"고 털어놨다.
3.2. 2번째 사건
2번째 피해자 요시자와 마사미 |
1988년 10월 3일, 사이타마현 한노시의 초등학교에서 당시 7살이었던 요시자와 마사미(吉沢正美)가 오후 2시경 친구들과 단체로 하교하여 집 현관에 란도셀을 놓아둔 뒤 외출하던 중 미야자키 츠토무가 “길을 잃은 것 같은데 아저씨와 같이 갈까?”라고 말을 걸어 유괴했다. 미야자키는 마리를 죽인 장소인 이츠카이치쵸 숲에서 오후 5시 경에 마사미를 살해하고 옷을 벗겨 곧바로 시체에 외설 행위를 하였다. 이 때 목을 졸렸으나 빈사 상태로 살아있던 마사미가 경련을 일으키자 공포를 느껴 코미네 터널(小峰峠)[4]에 시체를 버리고 도망쳤다.
다음날 다시 범행 장소로 돌아가 첫번째 사건처럼 유족에게 뼈를 보내려고 시체를 찾았으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고 도로 옆 도랑에 미야자키의 자동차 바퀴가 빠져 당황해하던 모습을 지나가던 차량이 목격하여 도와주었다. 이 목격자가 번호판의 세 숫자를 정확히 기억한 덕분에 그 증언을 토대로 범인의 차량이 하얀색 해치백의 토요타 코롤라Ⅱ(カローラⅡ)라고 추정되었으나 당시는 밤이어서 시야가 거의 보이지 않았고 미야자키의 차량은 닛산 랭글리였기 때문에 수사의 큰 뒷받침은 주지 못했다.
동기에 대한 공술조서에선 "뭐라 이루 말할 수 없는 스릴이 있었다"고 했다가 1차 감정에서는 역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3.3. 3번째 사건
3번째 피해자 난바 에리카 |
1988년 12월 9일 사이타마현 카와고에시 카와고에 그린파크 단지 내에 살던 당시 4살이었던 난바 에리카(難波絵梨香)는 오후 2시 30분경 어머니와 함께 유치원에서 하교 후 100m 떨어진 친구 집에 놀러나갔고 어둑어둑해질 무렵인 오후 4시 30분 또 다른 친구와 밖에 나와 인사한 뒤 귀가하던 중 자택까지 약 20m 가량의 길에서 미야자키와 마주쳤다. 미야자키는 “따뜻한 곳에 가지 않을래?”라는 말로 에리카를 유인하여 차량으로 납치하였다. 이동 중 에리카가 울음을 터뜨리자 차 주변에 난방을 가동하고 "목욕할 시간"이라고 말하며 에리카의 옷을 벗겨 나체 상태로 만든 후 카메라 조명을 켜서 사진을 찍었다.
에리카가 울음을 그치지 않자 고의적으로 몸 위에 올라가서 압박하여 오후 7시 경에 살해한 뒤 시체를 유린하며 동영상을 촬영했다. 마리와 마사미를 유기했던 나구리촌(名栗村)의 산림에 시체를 유기하고, 옷가지는 요코세강(横瀬川) 근처에 버렸다. 에리카는 시신 발견이 1년이나 늦어진 다른 피해자와 달리 살해 6일 만에 발견되었다.
에리카의 아버지가 “시신이라도 돌아와서 다행이다”라고 말하는 뉴스를 본 미야자키는 이때부터 유족들을 모욕할 작정으로 시체를 유족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체포 후 진술에서 미야자키는 유골을 가족에게 보낸 이유를 “仏心(=불심,자비)라고 말했다.
1988년 12월 15일, 미야자키는 신문에서 발견한 “마가 껴있다(魔がいるわ)”라는 글자를 오리고 조합하여[5] 이루마강이라는 글자를 이어붙인 괴엽서를 이루마시에 살던 첫번째 피해자 콘노 마리의 유족에게 보냈다.
그로부터 5일이 지난 12월 20일에는 사망한 에리카의 부모의 자택에도 괴문서가 도착했다. 내용은 "에리카, 추위, 기침, 목, 휴식, 죽음(絵梨香 かぜ せき のど 楽 死)"였다. 전문가들이 이 문서를 해독한 결과 문자를 늘어놓고 바꾸어 읽는 아나그램이 사용된 문장으로, 해석해 보면
ERIKA KAZE SEKI NODO RAKU SI→IKIKAE SASE RAREZU KINODOK
“살아돌아갈 수 없어서 딱하다(生き返させられず気の毒)”
“살아돌아갈 수 없어서 딱하다(生き返させられず気の毒)”
라는 문장이 만들어졌다.[6]
그는 다른 소녀들의 사체도 부모에게 보내려고 계획했지만 전날 살해한 2번째 희생자인 마사미의 사체는 부모가 유일하게 회수하여 실패했다.
피해자 자택으로 보내진 상자. |
미야자키 츠토무가 상자를 갖다놓은 피해자 자택. |
1989년 2월 6일, 첫번째 피해자 콘노 마리의 집에 골판지 상자가 놓여 있는 것을 새벽 5시 반경 마리의 아버지가 발견했다. 상자에서는 마리의 것으로 보이는 뼛조각, 치아, 문서가 발견되었다. 마리를 살해한 후 시신을 회수한 다음 미야자키의 자택 앞 논밭에서 쓰레기와 함께 화장하고 남은 것이었다. B5 크기의 문서에는 "마리의 뼈, 불태움, 감정, 증명(真理 遺骨 焼 証明 鑑定)"이라고 적혀 있었다. 인스턴트 카메라로 찍은 사진에는 마리의 옷과 샌들이 찍혀 있었다.
2월 10일, 「이마다 유코」(今田勇子)라는 여성의 이름으로 아사히신문 도쿄 본사에 범행성명문이 날아왔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마다 유코 명의로 보내진 범행성명문. |
범행 성명(犯行声明)
콘노 마리의 집으로 뼈가 들어있는 상자를 보낸 건 바로 저입니다.(今野真理ちゃん宅へ、遺骨入り段ボールを置いたのは、この私です。)
이번 콘노 마리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저 혼자 저지른 짓입니다.
(この、今野真理ちゃん一件に関しては、最初から最後まで私一人がしたことです。)
제가 이곳에 이렇게 진실을 써내려가는 데는 이유가 있기때문입니다.
(私が、ここに、こうして真実を述べるのには、理由があるからです。)
먼저 그 상자에 들어있던 뼈는 명백하게 마리의 뼈입니다.
(まず、あの段ボールに入った骨は、明らかに真理ちゃんの骨です。)
그 증거를 대보겠습니다.(その証かしを立てます。)
먼저, 어떻게 해서 아이를 데려갔는지를 말할게요...
(まず、どうやって連れ去ったかを述べましょう…)
〈중략〉
그 뼈는 정말로 마리의 뼈랍니다.
(あの骨は、本当に真理ちゃんなのですよ。)
콘노 마리의 집으로 뼈가 들어있는 상자를 보낸 건 바로 저입니다.(今野真理ちゃん宅へ、遺骨入り段ボールを置いたのは、この私です。)
이번 콘노 마리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저 혼자 저지른 짓입니다.
(この、今野真理ちゃん一件に関しては、最初から最後まで私一人がしたことです。)
제가 이곳에 이렇게 진실을 써내려가는 데는 이유가 있기때문입니다.
(私が、ここに、こうして真実を述べるのには、理由があるからです。)
먼저 그 상자에 들어있던 뼈는 명백하게 마리의 뼈입니다.
(まず、あの段ボールに入った骨は、明らかに真理ちゃんの骨です。)
그 증거를 대보겠습니다.(その証かしを立てます。)
먼저, 어떻게 해서 아이를 데려갔는지를 말할게요...
(まず、どうやって連れ去ったかを述べましょう…)
〈중략〉
그 뼈는 정말로 마리의 뼈랍니다.
(あの骨は、本当に真理ちゃんなのですよ。)
그 다음날 같은 내용의 괴문서가 콘노 마리의 자택에도 배달되었다. 마리의 장례식이 끝난 당일인 3월 11일에는 아사히신문과 콘노 마리의 자택 양쪽에 2번째 문서가 도착했다.
고백문(告白文)
장례식을 치러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御葬式をあげて下さるとのことで、本当に有難うございました。)
덕분에 제 아이와 함께 드디어 ‘성묘’를 할 수 있게 됐어요.
(御陰様で、私の子、共々、やっと「お墓」に葬ってやれることができました。)
〈중략〉
나는 신에게 싸움을 걸을 수 밖에 없습니다.
(私は、神に斗いを挑まなくてはなりません。)
신에게 “15년[7]은 붙잡히고 싶지 않아”라고 하는 ‘소원’을 빌며 “보고싶은 우리 아이를 저는 만나고 싶다”는 ‘바람’을 필사적으로 지킬 예정입니다.
(神に対し、「15年は捕まりたくない」といウ「願い」をぶっつけて、「私の会いたい子供に私は会いたい」という「望み」を死守するつもりでおります。)
인간이 신에게 도전하는 방법은 그것밖에는 없습니다.
(人間が、神と斗う術は、それしかありません)
장례식을 치러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御葬式をあげて下さるとのことで、本当に有難うございました。)
덕분에 제 아이와 함께 드디어 ‘성묘’를 할 수 있게 됐어요.
(御陰様で、私の子、共々、やっと「お墓」に葬ってやれることができました。)
〈중략〉
나는 신에게 싸움을 걸을 수 밖에 없습니다.
(私は、神に斗いを挑まなくてはなりません。)
신에게 “15년[7]은 붙잡히고 싶지 않아”라고 하는 ‘소원’을 빌며 “보고싶은 우리 아이를 저는 만나고 싶다”는 ‘바람’을 필사적으로 지킬 예정입니다.
(神に対し、「15年は捕まりたくない」といウ「願い」をぶっつけて、「私の会いたい子供に私は会いたい」という「望み」を死守するつもりでおります。)
인간이 신에게 도전하는 방법은 그것밖에는 없습니다.
(人間が、神と斗う術は、それしかありません)
범인은 여성이 "아이를 유산해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취지의 범행 성명을 보내며 수사에 혼란을 주려고 했다.
1989년 3월 11일, 콘노 마리를 죽인 가짜 범행 성명을 마찬가지로 2번째 피해자 마사미의 집에 발송했다.
같은 해인 1989년 3월 29일에는 옆 동네인 도쿄도 아다치구에서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이 밝혀지면서 일본 사회가 충격에 빠졌고, 경찰의 관심도 이쪽으로 옮겨가면서 미야자키 츠토무가 잡힐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졌다. 한편 미야자키 츠토무도 이 사건이 알려지고 나서 2개월 간 잠적했다.
3.4. 4번째 사건
4번째 피해자 노모토 아야코 |
1989년 6월 6일, 도쿄도 고토구 아리아케 테니스의 숲(有明テニスの森) 근처에서 당시 5세였던 노모토 아야코(野本綾子)에게 “아저씨는 카메라맨이야. 사진을 찍어줄게”라며 납치하여 시노노메(東雲) 단지에서 800m 떨어진 거리에 차를 세워 차내에서 살해했다.
진술에 의하면 이 사건에서도 그는 수상해 보이지 않으려고 아야코의 앞에 서서 7m정도의 간격을 두고 먼저 걸었다고 한다. 때때로 멈춰서 뒤에 따라오는 아야코를 확인했다고 하는데 흔히 유아 납치라고 생각하면 강제로 아이를 차에 태워 데려가는 인상이지만 미야자키는 머리를 써서 아이가 자신을 따라오게끔 만들었다고 한다.
경계를 풀기 위해 츄잉껌을 건넸는데 아야코가 미야자키의 손이 이상하다고 놀리자 홧김에 목을 졸랐다고 했다. 그 뒤 인근 숲에 유기했던 다른 피해자들과 다르게 미야자키는 자택의 방으로 시신을 옮기고 옷을 벗겨 알콜 같은 것으로 몸을 닦아낸 뒤 유린하는 장면을 비디오로 촬영했다. 4번째 살인은 굉장히 엽기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여러 종류의 톱으로 아야코의 목을 먼저 절단하고 나서 손목과 발목을 절단 후 발목에 줄을 묶어 정육점의 고기처럼 거꾸로 매달아 놓았다. 절단한 동체를 방바닥에 정좌하는 듯이 앉히고 며칠간 방치하거나 시체 일부를 잘라 직접 구워 먹고 피를 비닐 주머니에 담아 마시는 도저히 인간이라면 할 수 없는 잔인한 짓을 저질렀다.[8] 이후 시체가 부패하여 냄새가 심해지자 시신의 여러 부위를 절단해 두부와 손목, 발목을 한노시 미야자와호수 공동묘지(宮沢湖霊園)의 간이 화장실 옆 쓰레기통에 시신을 버리고 도주했다. 시신은 묘지에 참배를 온 회사원이 발견해 신고하였고, 경시청과 사이타마현 경찰의 합동조사본부가 만들어졌다. 이 장소는 사건 발생 이후 철거되어 위령비가 건립되었다.
이후 사체의 일부분을 절단해 벽장 안에 보관했고, 손목과 발목 등의 신체 부위는 화장하거나 숲에 유기했다. 이러한 행위를 한 까닭에 대해 처음 간이감정 문진기록에서 그는 "아무래도 2차원보다는 3차원이 좋았다"고 설명했지만 1차 감정에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고, 최후 피고인 질문에서는 ''갑자기 어린 시절이 그리워졌다"'며 오락가락했다.
일본 경시청에 따르면 초등학생 이하의 범죄 피해자가 토막 살인된 것은 이 사건이 최초라고 한다.
4. 발각
미야자키 츠토무의 정신나간 범죄 행위는 1989년 7월 23일 도쿄도 하치오지시에서 막을 내렸다.히에다 신사(日枝神社)의 공터에서 놀고 있던 두 자매에게 다가가 사진을 찍어준다며 자매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4장의 평범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언니(당시 9세)에게 잠깐 여기서 기다리라고 한 다음 동생(당시 6세)를 풀숲으로 데려가 성기에 카메라 렌즈를 넣으려고 하였지만 위험을 느낀 언니가 집으로 달려가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알려 뛰쳐나온 아버지에게 제압당했다. 미야자키가 깜짝 놀라 도망가려고 하자 자매의 아버지가 ”차 번호 기억해뒀으니 도망쳐도 소용없어!“라고 외쳤고, 이내 다시 되돌아와 모습을 드러냈다. 미야자키는 분노하는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안 할 테니 제발 경찰에는 말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했지만 이 소리를 듣고 달려온 경찰관에 의해 현행범으로 잡히면서 7월 23일 드디어 끔찍한 범죄의 막을 내렸다.미야자키를 제압하던 아버지는 “4번째 사건의 범인도 아직 잡히지 않았는데!”고 외쳤다고 하는데, 그 4번째 사건의 범인이 자신이 잡은 미야자키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아연실색했다고 당시 매스컴의 인터뷰에 대답했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마자 미야자키 가에서 운영하던 아키카와 신문사(秋川新聞社)와 자택에 수많은 기자와 매스컴이 들이닥쳤는데 그의 아버지는 평온하게 “우리 아들은 그런 짓을 할 애가 아니다”라고 얘기했고 “그럼 아들의 무죄를 증명해야하니 방을 보게 해달라”는 취재진의 요구에 “방에 가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라는 묘한 답변을 했다. 그리하여 일본을 경악하게 만들었던 그의 방이 공개되었다. 보통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면 경찰이 먼저 가서 폴리스라인을 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경찰이 기자들보다 1시간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촬영을 막기 전까지 마음대로 미야자키의 방을 관찰할 수 있었다.
당초 경찰 조사에서 츠토무는 과거에 저지른 범행을 부인하였으며 조사관의 물음에도 무언으로 일관하거나 자신이 하지않았다고 거짓말로 일관했다. 그러나 앞선 3건의 범행은 자백을 했는데 그는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2번째 사건(요시자와 마사미)의 범행만은 부인하고 나섰다. 하지만 조사관의 면밀한 프로파일링과 차량 안에서 장갑과 비닐끈, 루미놀에 의한 혈흔 증거가 발견되자 2번째 사건도 본인이 한 짓이라고 자백했다.
그가 범행을 자백한 지 하루만인 8월 10일 마지막 희생자인 아야코의 머리가 발견되었으며 9월 2일 검사가 기소에 착수하게 되었다. 츠토무가 시신을 묻은 장소를 안내함에 따라 9월 6일 첫번째 희생자 마리의 손발이, 9월 13일 회수에 실패한 마사미의 사체가 뒤늦게 발견되었다. 그 전에 주요 단서를 제공했던 옷과 신발, 그리고 현관 열쇠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당시 옷에 묻은 것이 혈흔이라는 말이 있었으나 아니라고 한다. 미야자키의 생일인 8월 21일에는 경찰이 압수한 5,763개의 비디오 테이프에서 콘노 마리의 시신을 촬영한 비디오가 발견되었다. 23일에는 노모토 아야코의 비디오도 발견되었다.
조사 결과 그는 소녀를 살해할 때마다 집에 짚인형을 두고 방을 어둡게 한 후 머리에 머리띠를 두르고 양초를 여러 개 켜고 검은 옷을 입은 채로 손을 위아래로 휘저으며 죽은 할아버지에 대한 부활의식을 벌였다고 한다.
취재진이 촬영한 미야자키의 아지트. |
그의 방에는 5,763개의 비디오 테이프가 있었으며, 그 안에 호러 영화와 로리 상업지 몇 편이 있었던 것이 밝혀지자 언론이 대대적으로 오타쿠=잠재적 가해자란 등식을 사용하면서 비난받았다.
5. 범행의 계기?
사건을 일으키기 3개월 전이었던 1988년 5월 11일 미야자키 츠토무가 평소 잘 따르던 할아버지가 강아지와 산책 중 뇌출혈을 일으켜 갑작스레 사망하였다.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미야자키의 행동은 급격하게 변해가기 시작했다고 한다.5월 21일 추모회에서 미야자키는 친척들에게 폭언을 퍼부었고 할아버지의 49재 때는 가족들과 언쟁하다가 창문 유리를 깨 버렸다. 동네의 비디오 렌탈샵에서 45개의 테이프를 절도했으며 이 시기부터 카메라로 여기저기 다니며 여성들을 찍기 시작했다.
범행이 한창 진행되던 1988년 12월에는 모아둔 돈이 없어졌다는 아버지의 물음에 격노하여 차량 문짝에 아버지의 머리를 끌어당겨 박아 버렸는데 이 일로 아버지는 머리를 절개할 정도의 큰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다. 병문안을 가던 차 안에서 어머니가 주의하는 말을 하자 어머니까지도 폭행했다.
1989년 피해자의 유골이 든 상자와 범행성명문을 보낸 후에도 비디오샵에서 물건을 훔치는 건 계속되었다.
6. 체포 이후와 최후
“저는 (살인을)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누가 했지?“
”쥐 인간(ネズミ人間)이나 또 다른 자신“
”어째서 그렇게 생각해?“
”온통 까만 와중에 밝은 빛이 나타나서 그 속에서 쥐 인간이나 또 다른 나 자신이 살해행위를 하고있었습니다.
“그걸 보았나?”
“직접 보는 건 싫어요. 억지로 보게 만들어서 무서웠습니다”
체포 후 취조 진술에서 형사와 미야자키가 나눈 대화.
”그럼 누가 했지?“
”쥐 인간(ネズミ人間)이나 또 다른 자신“
”어째서 그렇게 생각해?“
”온통 까만 와중에 밝은 빛이 나타나서 그 속에서 쥐 인간이나 또 다른 나 자신이 살해행위를 하고있었습니다.
“그걸 보았나?”
“직접 보는 건 싫어요. 억지로 보게 만들어서 무서웠습니다”
체포 후 취조 진술에서 형사와 미야자키가 나눈 대화.
범행 일체를 자백했던 츠토무는 공판이 시작되자 "또 다른 인격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다중인격은 정신이상자이므로 형사책임을 물을 수 없고, 여기에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을 자주 벌인 점 등이 고려되어 그가 진짜 다중인격인지의 여부가 재판의 가장 중요한 변수로 떠올랐다. 그래서 체포 1년 반이 지난 1990년 3월 30일이 되어서야 도쿄지방법원에서 시작된 심리는 판결까지 7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 중 절반은 2차례에 걸친 츠토무의 정신 감정에 소모되었다. 1차 감정결과 '극단적인 인격적 편향(즉, 인격장애)'으로 정신장애는 아니며 완전한 책임 능력이 인정되었으나 2차 감정에서는 '다중인격'과 '조현병'[9]으로 책임 능력이 일부 부정되었다. 이 경우 심신미약으로 분류되어 사형 선고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법원은 1차 감정 결과를 수용했고 1997년 4월 4건의 아동 유괴살인 혐의를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다. 이에 변호인 측은 재감정을 청구했지만 기각되었다. 10회에 걸친 피고인 질문을 실시한 끝에 2001년 6월 28일 도쿄고등법원은 츠토무의 항소를 기각하고 사형을 선고한다. 이에 같은 해 7월 10일 상고하면서 판례의 사건번호도 헤이세이 13년(2001년)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2006년 1월 17일 최고재판소 역시 상고를 기각해 변호인 측이 판결 정정을 요청하였으나 2월 1일 기각하면서 사형 판결을 최종 확정하였다.
2년 뒤인 2008년 6월 17일 검찰청의 사형 집행 명령으로 사형이 집행되어 최후를 맞았다. 향년 45세. 방을 나와 사형장으로 향하는 길에서 간수장에게 마지막 남긴 말은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가 아닌 "아직 못 본 비디오가 있는데 말이지."였다고 하는데 이는 사형수 전문 인터뷰어인 저널리스트 오즈카 노타카의 발언에 기반했다.
재판 내내 "깨지 않는 꿈 속에서 했던 느낌", "쥐인간이 나왔다"는 말을 했고 자신이 발언하지 않을 때는 그림을 그리는 등 재판에 관심도 주지 않는 불량한 태도를 보였다. 덤으로 구치소에서 그린 그림을 보면 알몸 상태로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남자라든지, 한 남자가 죽마 같은 것을 타고 있고 옆에는 얼굴 없는 간호사가 썩소를 짓는다든지 하는 그림이라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상당히 소름이 끼칠 정도다. 해당 그림을 모아놓은 블로그의 링크. 사람에 따라 공포를 느낄 수 있으니 주의.
7. 반응
피해자들은 오후 시간대에 집 근처에서 지나가던 중 변을 당했다. 어린 딸이 귀가 시간이 되어도 귀가하지 않아 부모들이 경찰서에 실종 신고를 했다. 부모들은 딸들이 무사히 돌아오길 손꼽아 기다렸으며 동영상에서 보이듯이 요시자와 마사미의 어머니는 기자들에게도 "딸이 무사하길 부탁드린다"고 울면서 애원을 할 정도였다.검거 후 피해자들의 장례와 유가족들의 반응 |
검거 후 사건 상황 정리 |
사건 이후 장례식은 가족, 친척들이 모인 가운데 각각의 집 혹은 장례식장에서 엄숙하게 치러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가해자인 미야자키 츠토무의 사형 후 남겨진 유골은 친모가 인도하길 거부해 무연고화되고 말았다.
이 사건이 과거 일본에서 수차례 벌어진 아동 성범죄, 살인 사건 이상으로 부각된 가장 큰 이유는 피살자가 무려 4명인 데다 네크로필리아라는 충격적인 범행 동기, 언론에 의미심장한 도전장을 보내거나 피해자의 부모에게 딸의 신체 일부를 보내는 등 제정신이 아닌 짓들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사건 이후 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안 부모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픔에 잠기고 인생도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피해자들의 부모들은 "그는 인간이 아니다"라고 평했다.
일본 경찰은 이 사건에 이례적으로 프로파일링을 수사기법에 동원하면서 프로파일이 일본에서 쓰인 최초의 사건이 되었다.
8. 후폭풍
8.1. 히키코모리와 오타쿠들
Q: 전 오타쿠 집단이란 성적인 열등감이나 주류사회에서 인정받기 힘드니까 자기들 나름대로 오타쿠 세계를 만들고 이 세계 안에서 자기들 나름대로 지위를 높이고 인정 받을려고 하다보니 수준 높은 작품들이 등장해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사회적인 차별이 차차 사라지다 보니 이러한 동기 부여가 불가능하게 되어서 그다지 수준높은 작품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만…
아즈마 히로키: (단호하게) 아니요. 오타쿠는 지금도 차별을 당하고 있습니다. 확실히요. 그리고 자신들도 분명히 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이라는 장르 자체도 주류 사회에서 분명히 차별적인 대우를 받는 중입니다. 이런 상황은 1980년대와 비교해도 전혀 바뀌지 않은 상황입니다. 1980년 초반만 해도 나카모리 아키오 씨가 오타쿠라는 단어를 만들어내기 이전부터 "애니나 게임에 빠진 녀석들 왠지 기분 나쁘지 않아?”하는 인식은 확실히 존재해 있었고.
그런데 일본에서 오타쿠 차별이 극심해진 것은 1988년에서 1995년 사이입니다. 즉, 미야자키 츠토무 사건이 발생한 때부터 에반게리온이 공개될 때까지지요. 말하자면 에반게리온 이후에는 일반의 인식이 과거의 상태로 돌아왔을 뿐이죠. 저만 해도 1989년부터는 주위 사람들에게 "나 애니메이션 보고 있다."고 절대로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저는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이나 나디아 같은 작품을 보고 있었습니다만 그걸 숨기지 않으면 안되는 분위기였죠. 그러니 최근의 오타쿠들이 차별을 당하지 않게 되었는가 하면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고 단지 1989년부터 1995년까지가 차별이 특히 극심했던 것 뿐이란 겁니다.
Q: 한국에서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에서는 자국의 애니나 만화, 게임에 대한 일반 국민의 인식은 아주 좋을거라는 신앙에 가깝다고 해도 좋을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그게 실제로는 다르다는 것이죠?
아즈마 히로키: 물론입니다. 이상하게 외국의 관계자분들은 모두들 그렇게 상상하시는 분이 많습니다만 실상은 아주 다릅니다. 너무나 다르죠.
아즈마 히로키 인터뷰 – 2. 오타쿠 문화에 투영된 일본의 오늘날#[10]
아즈마 히로키: (단호하게) 아니요. 오타쿠는 지금도 차별을 당하고 있습니다. 확실히요. 그리고 자신들도 분명히 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이라는 장르 자체도 주류 사회에서 분명히 차별적인 대우를 받는 중입니다. 이런 상황은 1980년대와 비교해도 전혀 바뀌지 않은 상황입니다. 1980년 초반만 해도 나카모리 아키오 씨가 오타쿠라는 단어를 만들어내기 이전부터 "애니나 게임에 빠진 녀석들 왠지 기분 나쁘지 않아?”하는 인식은 확실히 존재해 있었고.
그런데 일본에서 오타쿠 차별이 극심해진 것은 1988년에서 1995년 사이입니다. 즉, 미야자키 츠토무 사건이 발생한 때부터 에반게리온이 공개될 때까지지요. 말하자면 에반게리온 이후에는 일반의 인식이 과거의 상태로 돌아왔을 뿐이죠. 저만 해도 1989년부터는 주위 사람들에게 "나 애니메이션 보고 있다."고 절대로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저는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이나 나디아 같은 작품을 보고 있었습니다만 그걸 숨기지 않으면 안되는 분위기였죠. 그러니 최근의 오타쿠들이 차별을 당하지 않게 되었는가 하면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고 단지 1989년부터 1995년까지가 차별이 특히 극심했던 것 뿐이란 겁니다.
Q: 한국에서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에서는 자국의 애니나 만화, 게임에 대한 일반 국민의 인식은 아주 좋을거라는 신앙에 가깝다고 해도 좋을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그게 실제로는 다르다는 것이죠?
아즈마 히로키: 물론입니다. 이상하게 외국의 관계자분들은 모두들 그렇게 상상하시는 분이 많습니다만 실상은 아주 다릅니다. 너무나 다르죠.
아즈마 히로키 인터뷰 – 2. 오타쿠 문화에 투영된 일본의 오늘날#[10]
중고등학교 다닐 때 애니메이션을 무척 좋아했다. 느지막이 그 세계에 뛰어들었기에 당시 예닐곱 가지가 있던 애니메이션 잡지 가운데 가장 비싼 것을 골라 매달 샅샅이 읽으며 ‘압축 덕후화’를 추진했다. 공부에도 사회에도 별 관심이 없었던 나에게 애니메이션의 세계는 거의 살아가는 낙 그 자체였다. 그러다가 고3 때 어떤 사건을 맞게 되었다. 소위 ‘연속 유아 유괴살인 사건’이다. 네 명의 어린아이들을 납치해 죽인 이 사건의 범인은 20대 청년이었는데, 그를 통해 일종의 사회문제로 부각된 것이 ‘덕후’(마니아를 일컫는 일본어 ‘오타쿠’를 한국어로 빗댄 말)였다. 티브이에서도 거의 매일 그의 ‘병적인 행태’가 보도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거의 외우다시피 하며 애독했던 애니메이션 잡지를 끊었다. 다른 ‘덕후’ 친구들에게도 거리를 두기 시작하고 ‘덕후의 징후’로 보일 만한 것을 내 몸에서 지우려고 애썼다.
『무명의 말들』, 후지이 다케시 출처
『무명의 말들』, 후지이 다케시 출처
사건 에후 일본 언론들에서 '자기방(房)족'(현재의 히키코모리에 해당) 문제가 폭넓게 제기되기도 했다.
범인이 오타쿠인 탓에 사건 이후 만화, 애니 등 서브컬처에 대한 인식이 나빠졌고 경찰은 코믹 마켓 행사장을 급습하여 진행을 방해하기 시작했으며 지방에선 공권력이 나서서 만화 내용까지 간섭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코미케 측은 단속이 적은 도쿄 시내로 들어가 사실상 행사를 음성적으로 치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이후 기성세대들도 점차 코믹 마켓을 좋은 눈으로 보면서 옛일이 되었다.[11] 한 아나운서가 코믹 마켓 입장대기줄을 향해 "이곳에 수많은 미야자키 츠토무가 있습니다"라며 그를 비판하는 내용을 방송했다는 흙오이 괴담이 퍼졌을 정도다. 이전에도 로리콘을 역겹게 보는 시선은 많았지만 이 시기에는 돌팔매질당할 수준이었다.
당시 언론 보도가 대단히 비판적인 것은 사실이고 이런 방송이 있었다는 소문도 돌고 있지만 일본의 오덕들도 이런 방송이 실제로 있었다는 증거를 찾지 못해 현재까지도 도시전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TBS 테레비의 인기 아나운서 쇼오지 노리코가 코믹마켓을 취재하면서 "이곳에 10만 명이나 되는 미야자키 츠토무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는 내용이 가이낙스 창설 멤버인 오카다 토시오가 쓴 "마지메나 이야기" 1998년 글에 실렸고, 2003년 신죠샤에서 나온 <미야자키 츠토무 사건>이라는 책에도 동일하게 기재되었으므로 단순히 도시전설이라고 치부하지 못한다.
이것 역시 일방적인 주장·경험담이며 결정적으로 증거가 없다. 1988년에는 아카이빙된 영상자료를 VHS로 복사, 구매하려면 비싼 값을 치러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방송사 관계자라면 녹화 테이프를 확인하여 단번에 알아낼 수 있겠지만 일본은 과거 방송자료의 아카이빙이 한국보다 뛰어나다고는 해도 100% 아카이빙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니 결국 이러한 로스트 미디어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결국 악마의 증명이 되어 부재를 증명할 수는 없었다.
이 사건 이전에는 일본의 오타쿠라는 존재는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존재긴 했지만 세간에 그렇게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존재는 아니었다.[12] 그런 존재가 언론에 소개되지 않다가 이 사건 때문에 가장 최초로 소개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의 오타쿠들이 이 사건으로 인한 따가운 시선에서 벗어나기까지는 근 20년에 가까운 세월이 걸렸으나, 현재까지도 좋은 이미지라고는 할 수 없다.
8.2. 가해자 가족[13]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준 흉악 사건인 만큼 가해자인 츠토무의 가족들도 엄청난 손가락질과 고통을 받았다. 언론들의 취재 세례부터가 엄청났는데 아침부터 밤까지 1천여명이 넘는 취재진이 집 앞 도로에 꽉 찼다.츠토무의 집에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은 츠토무의 가족과 오랜 지인이었던 사카모토 테이지라는 도쿄신문 기자였는데 '인쇄업을 경영하는 집의 미야자키'가 범인이라는 속보를 듣고 급히 달려왔다. 그는 기자로서 취재를 하기 위해 질문을 계속하면서도 친하게 지내던 지인의 아들이 살인범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스러운 감정을 억눌러야 했다고 한다.
체포 1시간 정도만에 수많은 언론인들이 밀어닥쳤고, 아버지는 각 취재에 필사적으로 대답해야 했다.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묻는 질문, 아들의 방을 공개해 달라는 요청 등을 받아들여 빛도 들어오지 않고 어두컴컴한 방에 천장까지 수집한 영화, 방송, 호러 및 로리 비디오, 애니메이션, 아이돌잡지 등이 센세이셔널하게 보도되었다.
미야자키 츠토무의 신상이 알려지면서 집에는 갖은 협박과 비난 전화가 끊이질 않아 가족은 전화선을 아예 뽑아 놓아야 했고 큰 상자에 다 채우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양의 비난 엽서와 편지들이 쇄도했다. 보낸 사람의 이름과 주소는 없이 '당신도 죽어', '두 딸을 죽여버리자' 등의 끔찍한 내용들이었다. 츠토무의 두 여동생에게 악담을 퍼붓는 편지가 다수였고, 조의금 봉투가 동봉된 것도 있었다.
이 다음에는 경찰이 현장검증을 위해 폴리스라인을 둘러치면서 집 안에 자유롭게 들어갈 수는 없게 되었다. 이후 부모는 약 1달간 경찰 관계자가 아닌 사람과 대화할 일이 없을 정도였고, 연일 장시간에 걸쳐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체포 1달이 지난 뒤에야 츠토무의 아버지가 사카모토 기자에게 연락을 해 심경을 말하겠다고 했는데 사카모토를 보자마자 껴안고 웅크리고 앉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카모토는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매일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죽는 것은 몇 초면 끝나니까요. 죽고 싶습니다, 죽고 싶어요..."
"죽으면 웃을 수 있을 겁니다."
"신문도 텔레비전도 보기가 무섭습니다. 헬리콥터 소리만 들어도 또 우리 집을 취재하러 오는 것은 아닌지 생각되어 심장이 조여옵니다. 그래도 생때같은 아이가 죽은 피해자 부모들을 생각하면 참아야겠지요."
"특별히 말씀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까?"
"끔찍한 죄를 지은 것이기에 감히 무엇을 바란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사건에 관계없는 사람들까지 고통에 빠지는 것이 괴롭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사건에)관계없는 사람들까지 직장을 그만두거나 몸을 숨겨야 했습니다. 이런 일에 대해 무언가 하지 않으면…"
츠토무의 부모가 사카모토에게 털어놓은 말. <월간 문예춘추> 1989년 10월호, 사카모토의 기사 '단독회견기, 바늘방석에 앉은 부친(單獨會見記 針のムシロに座る父親)'에서.
이때 두 사람의 모습은 1달 사이 홀쭉하게 여위고 실제 나이보다 10년은 더 늙어 보였다고 한다."죽으면 웃을 수 있을 겁니다."
"신문도 텔레비전도 보기가 무섭습니다. 헬리콥터 소리만 들어도 또 우리 집을 취재하러 오는 것은 아닌지 생각되어 심장이 조여옵니다. 그래도 생때같은 아이가 죽은 피해자 부모들을 생각하면 참아야겠지요."
"특별히 말씀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까?"
"끔찍한 죄를 지은 것이기에 감히 무엇을 바란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사건에 관계없는 사람들까지 고통에 빠지는 것이 괴롭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사건에)관계없는 사람들까지 직장을 그만두거나 몸을 숨겨야 했습니다. 이런 일에 대해 무언가 하지 않으면…"
츠토무의 부모가 사카모토에게 털어놓은 말. <월간 문예춘추> 1989년 10월호, 사카모토의 기사 '단독회견기, 바늘방석에 앉은 부친(單獨會見記 針のムシロに座る父親)'에서.
이러니 더 이상 동네에서는 살 수 없었다. 가족들은 오래 살던 마을을 떠나 이사해야 했으며[14] 직장이라고 해서 멀쩡히 다닐 수 있을 리가 없었다.
8.3. 한 가정의 파멸
- 미야자키의 아버지: 그의 아버지는 체포 후 한 번도 재판을 방청하러 오지 않았고, 츠토무가 사선변호인을 구해 달라는 부탁도 거부했는데 "사선변호인을 쓰는 것은 자신을 지키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해서는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에 대해 사죄가 되지 않는다."라고 사카모토 기자에게 말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사죄가 되길 바라고 한 행동인 것 같지만 이게 잘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사선변호인을 쓰지 않으면 국선변호인을 쓰게 되는데 그 비용은 국민 세금이다. 피해자 생각은 하지 않고 적반하장의 태도로 나오면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쓰며 초호화 변호인단을 내세워서라도 기를 쓰고 무조건 자식을 감싸려 드는 뻔뻔한 부모들보다야 낫겠지만 경제적 능력이 없는 가해자를 돕기 위한 제도가 충분히 지불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이용되는 것이 좋은 일인지 일본에서도 이러한 취지의 비판이 있었다. 그렇지만 사선변호인을 썼으면 썼다고 또 비난받았을 것이다.
츠토무의 아버지는 동생과 똑같이 딸들을 위해 이혼하여 자녀들이 외가 성을 따르도록 했다. 피해자의 이름을 쓴 종이를 매달아 놓고 매일 빌면서 용서를 구하고 아무리 사죄해도 갚을 수 없는 죄를 자신들 나름대로 갚을 길을 계속 찾으며 살았다고 한다.
결국 아버지는 1994년 11월 20일 피해자들의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재산과 집을 매각하여 송금한 뒤 높이 30m의 타마가와 강 다리에서 투신자살했다.
다음 해 2월 도쿄 지방재판소 공판에서 변호사에 의해 아버지가 남긴 유서가 낭독되었고 1995년 4월 문예춘추에 사키 작가가 이를 실음으로써 대중에 공개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오랫동안 신세를 졌습니다.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고 작별을 해서 죄송합니다. 자식의 일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에도 가관인 건 츠토무 이 작자는 죄책감은커녕 도리어 "아버지가 그렇게 되어 속이 시원합니다"라고 발언했다. 오히려 변호인은 때로 목이 메어 말을 하지 못했는데 피고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메모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동정적인 시선도 있었지만 비판도 있었다. 사키 작가도 '현실로부터의 도피'라며 비난했다.[15]
- 미야자키의 어머니: 사건 이후 이사했으나 살던 곳 근처 묘소에 꽃을 들고 나타난 모습이 동네 주민들에게 목격되었다. 현재 사는 곳을 물어봐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행방을 알 수 없으며 사형당한 미야자키의 시신을 인수하는 것을 거부했다.
- 아버지의 형제 5명 중 2명의 남동생: 5개의 회사에서 임원을 역임할 정도로 능력 있던 아버지의 남동생은 회사를 그만뒀고, 회사를 아내 명의로 돌리고 퇴직했다.
- 또 다른 남동생: 두 딸(츠토무의 친사촌)의 미래를 위해 아이들의 성을 부인의 성으로 바꾸고자 이혼했다.
가문 2개가 통째로 그야말로 풍비박산났다. 언론에서는 츠토무의 부모의 부부간 관계, 할아버지의 존재 등 가족에 대한 상세한 보도가 이어졌고 사건의 원인의 하나로 가정환경을 거론하는 분석도 많았다. 어머니는 자신에게 던져지는 혐오의 시선이나 정신적 고통에 대해 "자식이 죄를 저지른 이상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지만 숙부, 숙모, 사촌 등과는 관계가 없는 것 아니냐고 사카모토에게 호소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공무원인 사촌들이 사직한 것은 그것이 주간지에 보도되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다.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게 살해당한 아이들의 유가족은 비통하게 계속 살아가는데, 도피를 할 수도 없고 고통스러워하며 공판을 지켜볼 뿐인데. -위의 책
미야자키 츠토무의 집안은 피해자들에게 보상하기 위해 상당한 규모였던 집과 집이 있던 땅도 팔았고 많았던 재산도 처분했기 때문에 지금은 그 크던 집을 매각하여 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렇게 마련한 현금을 유족들 각각에게 나누어 주었지만 그 배상금이 유족 측 입장에서 큰 액수는 아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범죄 가해자의 가족과 친인척에 대한 괴롭힘이 상당히 심각해서 21세기에도 관련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아키하바라 무차별 살상사건의 범인의 동생이 자살한 사례, 사세보 여고생 살인사건의 가해자 아버지가 자살한 사례가 특히 유명하다.
심지어 츠토무와 이름이 같을 뿐이거나 외모가 좀 닮은 게 다인 사람들마저 그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도 피해를 보았고, 전국의 오덕들과 독신 남성들이 괴물 취급을 받았다고도 한다. 사실 이러한 사회적 경향은 대한민국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은데 유영철이나 정남규 같은 흉악범죄자가 언론에 공개되면 그 범죄자와 같은 이름을 쓰는 사람들이 피해를 보면서 개명 신청이 급증한다. 이유는 다르지만 미국인들 역시 9.11 테러 이후에는 9월 11일에 태어난 사람들 중에 법적으로 생일 변경을 하려고 시도한 사람들이 많았다.[16] 북한에도 이와 비슷하게 김일성의 기일인 7월 8일과 그 앞뒷날에 태어난 사람들은 생일을 바꿔야 하는데 대표적으로 강나라가 그런 사례이다.
[1] 하치오지시. 정황상 하치오지시는 아동 2명이 살해된 지역이며, 용의자가 거주하던 지역과 인접한 곳이다.[2] 이루마시, 한노시, 카와고에시[3] 이 중 2명의 아동은 공통적으로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살해당했다. 지금은 방치된 하치오지시 옛 코미네 터널 변전소 숲에서 살해하고 시체는 숲에 유기했다고 한다.[4] 일본에서 심령스팟으로 유명한 곳.[5] まがいるわ(魔がいるわ)→いるまがわ(入間川)[6] 실제로는 U 한 글자가 부족하다.[7] 당시의 살인죄 공소시효.[8] 그러나 검찰 측은 정신이상을 주장하기 위한 허위 진술이라고 판단했다. 판결에서도 검찰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식인행위는 허위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9] 일본 정신건강학회 용어로는 통합실조증(統合失調症)[10] 본 인터뷰는 2004년에 이루어졌다. 2020년대의 일본 사회에 적용하긴 어려운 관점이니 참고 정도만 하면 된다.[11] 출처: <망가 vs 만화> - 손상익 저. 초록배매직스. 2000. p53.[12] 당시에는 애니나 아이돌을 좋아하는 부류의 사람들로 취급받았는데 그나마 츠토무의 범행 이전보다 취급이 좋았다. 범행 이후 이들은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13] 이 문단은 스즈키 노부모토의 <가해자 가족>을 참조하였다.[14] 실제로 이사가 이루어진 것은 체포 약 1년 후이다.[15] 이것은 츠토무의 아버지가 과도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피해를 입은 것을 전혀 감안하지 않은 의견이다. 그가 자신이 저지른 잘못만큼의 비판만 받았다면 자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16] 이쪽은 본인 생일에 추모일이 겹치면 눈치 보여서 파티를 못 하기 때문이다. 물론 눈치 안 보는 사람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