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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02:21:44

나바리 독포도주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2006년에 방영된 CHUKYO TV 다큐멘터리
'재판의 무게, 나바리 독포도주 사건의 반세기
(裁きの重み 名張毒ブドウ酒事件の半世紀)'

1. 개요2. 사건의 전개
2.1. 시골 공민관에서 일어난 비극
2.1.1. 피해
2.1.1.1. 사망2.1.1.2. 중상2.1.1.3. 경상2.1.1.4. 무사하였던 사람들
2.2. 경찰의 수사2.3. 검찰의 기소2.4. 수사당국의 주장과 증거
2.4.1. 닛카린T가 검출된 포도주병2.4.2. 포도주 병뚜껑에 찍힌 치열2.4.3. 공백의 10분2.4.4. 범인의 자백
3. 수사에 대한 논란
3.1. 강압적인 수사3.2. 미심쩍은 진술 번복3.3. 결정적 증거의 미발견
4. 재판의 경과
4.1. 1심 재판부 - 무죄4.2. 2심 재판부 - 사형4.3. 누명을 벗기 위한 노력4.4. 재심청구 연표
5. 엔자이 사건 지원
5.1. 일본변호사연합회의 구명운동5.2. 재심청구 지원 37년
6. 뒤집혀 가는 증거들
6.1. 치열감정서의 감정 사진은 날조6.2. 포도주 속의 농약은 닛카린T가 아니다
6.2.1. 붉은색 닛카린T와 백포도주6.2.2. 애초에 닛카린T 검출 감정서는 불확실
6.3. 공백의 10분을 채우는 알리바이6.4. 누군가 새로 붙인 병뚜껑 봉인 씰의 흔적
7. 이후
7.1. 2005년 첫 재심 결정7.2. 끝나지 않은 사건7.3. 악화된 건강과 사망7.4. 10차 재심청구
8. 등을 돌린 쿠즈오 마을 사람들9. 관련 미디어
9.1. 영화 '약속 - 나바리독포도주사건 사형수의 생애'9.2. 도카이 테레비 다큐멘터리 영화 - '잠자는 마을(眠る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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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名張毒ぶどう酒事件

1961년 3월 28일 일본 미에현 나바리시의 쿠즈오(葛尾) 마을[1]에서 일어난 독살 사건으로 일본에서는 '제2의 제국은행 사건'으로도 불리는 사건이다.

2010년대에 일본변호사연합협회에서 지원하는 재심청구지원사건 중 가장 큰 논쟁을 불러일으킨 엔자이(冤罪)[2] 사건으로 재심 대상 청구인 오쿠니시 마사루는 유죄 판결의 증거가 연이어 뒤집히는 등 유죄가 맞나 의심까지 가는 상황에서도 53년째 일본의 경직된 사법부[3]에 의해 자유를 빼앗긴 채 최장기 사형수로 복역하던 중 2015년 10월 4일 폐렴으로 생을 마감했다.

일본 엠네스티의 사형수 오쿠니시 마사루에 대한 사형 판결 46년 도표

2. 사건의 전개

2.1. 시골 공민관에서 일어난 비극

쿠즈오 마을에서는 당시 연례행사로 나바리시 쿠즈오(葛尾) 마을 18가구와 나라현 야마베(山辺)군의 야마조에(山添) 마을 7가구가 참여하여 공동으로 농업 개량, 문화생활 개선, 양쪽 마을의 친목을 도모하는 '생활개선클럽'인 미나노카이(三奈の会)[4] 모임을 개최하곤 하였다.

1961년 3월 28일 저녁 7시경 쿠즈오 마을의 쿠즈오 공민분관[5]에서 미나노카이 모임이 열렸는데 회장인 오쿠니시 타루오(奥西 樽雄)를 포함하여 남자 12명과 여자 20명이 참석하였다.

이날 미나노카이에서는 오쿠니시 타루오의 후임을 맡을 회장 및 새 임원을 선출하였으며 1시간 동안 모임의 회의가 있은 뒤 뒤풀이인 연회가 시작되었다.[6]

저녁 8시부터 시작된 연회 자리에서 남자들에게는 청주가, 여자들에게는 백포도주(白ぶどう酒)가 대접되었으며 회장 오쿠니시 타루오의 '건배의 노래'와 함께 모두 첫 잔을 마시는 것을 시작으로 연회가 시작되었다.

술잔이 돌기 시작한 지 십여 분 후 오쿠니시 타루오의 아내인 오쿠니시 후미코(奥西文子)가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면서 쓰러졌고 이어 연회에 참석한 여자들이 차례로 복통과 호흡 곤란을 호소하고 먹은 음식과 피를 토하면서 순식간에 연회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후 경찰 조사에서 누군가가 백포도주에 독극물을 넣은 것이 밝혀졌고 결국 백포도주를 마시지 않아 무사하였던 남자 12명과 여자 3명을 제외한 나머지 여자 12명이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술을 많이 마신 5명은 의료진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사망하고 말았다.

2.1.1. 피해

이 사건으로 미나노카이에 참석하였던 여자 회원 20명 중 술을 마시지 않은 3명을 제외한 17명이 중독 증상을 보였고 그 결과 사망 5명, 부상 12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2.1.1.1. 사망
2.1.1.2. 중상
2.1.1.3. 경상
이들은 사건 당시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아 대부분 1~2개월의 입원 치료 후 모두 퇴원하였으며 사카미네 토미코, 우에다 타미코, 이토 미네코, 하마다 요시코는 고등학교 동창으로 당시 중독 증상이 경미하여 피해자들을 옆에서 도와주는 등 구호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이 중 임신 중이었던 하마다는 부상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입원하지 않고 간단한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갈 정도로 상태가 경미하였다.
2.1.1.4. 무사하였던 사람들
이들은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아 무사하였다고 한다.

백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청주를 마셨던 남자 참석자 12명 전원도 생존하였다.

2.2. 경찰의 수사

사건 당시 미에현 나바리시 경찰은 초동단계에서 단순한 집단 식중독 증상으로 보았으나 이후 중독 증상이 여성들에게만 일어났던 점과 역학조사에서 독극물 혼입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1961년 3월 29일 경찰은 당시 공민관 내부에 있었던 음식물을 전부 수거하여 미에현 위생연구소에 감정을 의뢰하였다.

1961년 3월 31일 미에현 위생연구소에서는 여자들이 마신 백포도주병에서 TEPP[7]농약이 검출되었다고 발표했다.

이에 경찰은 당시 포도주병을 직접 운반하였던 미나노카이 회원 남자 3명을 경찰서로 매일 불러 집중 조사를 하였고 4월 1일 사망한 오쿠니시 치에코의 남편이자 미나노카이의 전임 회장인 오쿠니시 마사루(奥西 勝, 당시 35세)가 사망한 자신의 아내인 치에코가 범인일 것이라며 진술하였다.

그러나 1961년 4월 2일 오쿠니시 마사루는 경찰서에서 돌연 자신의 진술을 바꾸어 자신이 백포도주에 농약을 섞었다고 했고 다음날인 4월 3일에 체포영장이 집행되었다.

2.3. 검찰의 기소

나바리시 경찰로부터 사건을 이관받은 나고야 검찰은 오쿠니시 마사루의 진술과 정황증거를 수집하여 1961년 4월 24일 츠(津)지방재판소에 오쿠니시 마사루를 살인 및 살인 미수로 기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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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니시 마사루(奥西 勝, 당시 35세)

검찰의 발표와 오쿠니시 마사루가 수사당국에서 한 진술을 바탕으로 한 사건 정황은 다음과 같다.
오쿠니시 마사루(奥西 勝)는 쿠즈오마을에서 농업에 종사함과 동시에 마을에 위치한 채석장에서 근무하고 있었으며 1947년 아내 오쿠니시 치에코(奥西 千恵子)와 결혼하였고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고 있다.
그러나 오쿠니시는 채석장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동 마을의 주민이자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 하나를 두고 있던 과부 키타우라 야스코(北浦 ヤス子)와 불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이 사실을 안 부인 치에코와 심각한 불화가 있었고 야스코마저 이후 관계 청산을 요구해 왔다.
이에 절망한 오쿠니시 마사루는 이 삼각관계를 동시에 해소하기 위해여 치에코와 야스코 둘 다 살해할 계획을 하였으며 1961년 3월에 있을 미나노카이 연회장에 쓸 포도주에 TEPP계 농약인 '닛카린T(ニッカリンT)' 를 혼입하여 독살할 것으로 계획해 1961년 3월 28일 오후 5시 20분~30분 사이 공민관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사카미네 토미코가 걸레를 가져오기 위해 오쿠니시 타루오씨 집으로 떠난 순간 마사루는 공민관 현관 앞에 있던 포도주 병의 병뚜껑[8]을 이로 개봉한 뒤 준비한 닛카린T 농약을 담은 대나무통으로 포도주 병에 농약을 혼입하였고 대나무통은 공민관 화로 속에 버리고 닛카린T 병은 인근 하천인 나바리가와(名張川)에 버려 증거를 인멸하려고 하였다. 이후 미나노카이 모임이 진행되면서 백포도주를 마신 피해자 5명을 사망에 이르게 하여 목적을 달성하였고 나머지 15인은 혼입한 농약으로 치사에 이르지 못하였거나 포도주를 마시지 않아 마사루의 목적 달성에 실패하였다.

2.4. 수사당국의 주장과 증거

2.4.1. 닛카린T가 검출된 포도주병

1961년 3월 29일 경찰은 사건 현장인 공민관에 있었던 도시락통과 음식물, 피해자가 흘린 토사물, 포도주와 청주 병을 미에현립 위생연구소에 보내 정밀 감정을 요구하였고 동시에 사망한 5명의 시신에 대한 부검을 의뢰하였다.

3월 31일 미에현 위생연구소에서는 범행 현장에서 뚜껑이 따인 포도주 병 1개와 피해자들이 남긴 포도주 잔의 크로마토그래프 실험 결과 TEPP계 농약인 '닛카린T' 로 보이는 물질이 검출되었다는 감정서를 회신하였다.

이후 나고야의과대학에 의뢰한 사체부검에서도 '에틸계 중추신경장애물질로 인한 심폐정지'와 일맥상통하는 결과였으며 이는 범인으로 지목된 오쿠니시 마사루가 사건 발생 6개월 전인 1960년 9월 지역 농약판매상인 구로다상회에서 100cc 용량의 닛카린T를 구입하였고 이후 범행에서 닛카린T를 포도주병에 혼입하였다는 진술과 연관관계가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2.4.2. 포도주 병뚜껑에 찍힌 치열

오쿠니시 마사루가 체포된 후인 1961년 4월 11일 검찰진술에서 '포도주 병뚜껑을 이빨로 따고 대나무통으로 농약을 주입하였다' 는 진술을 했다.

수사당국은 이 진술을 토대로 개봉된 포도주 병뚜껑을 오사카와 나고야 의과대학에 보내어 오쿠니시 마사루의 치열과 대조하여 범인의 치열로 나올 수 있는 '키스 마크'인지 감정해 줄 것을 부탁하였고 6명의 감정인이 감정한 결과 긍정 3인, 부정 3인으로 동일하게 나누어졌다.

수사당국에서는 이 감정서의 신뢰성이 높다고 주장하였다.

2.4.3. 공백의 10분

마을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하면 범행에 사용된 백포도주는 구입 직후부터 사건이 발생하기까지 약 6시간 동안 미나노카이 집행부의 감시 아래에 놓여 있었고 오쿠니시 마사루가 혼자서 포도주 옆에 있을 수 있었던 3월 28일 오후 5시 20분에서 30분 사이 이외 다른 범인이 범행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지 못하였다는 것이 수사당국의 주장이다.

범행에 사용된 백포도주는 오사카시 니시카와양주양조소(西川洋酒醸造所)에서 1960년 12월 첫째주에 제조된 산신포트와인(三線ポートワイン)으로 1961년 1월 16일자로 397병이 밀봉되어 있었고 1월 20일에 30병이 나바리시 코무(薦生) 마을 소재의 하야시 주점(林 酒店)으로 팔려나갔다.

사건 발생 하루 전인 1961년 3월 27일 밤 10시 쿠즈오 마을 주민 이와나 히사오(岩名 久男)는 마을에서 2.6km 떨어진 술집인 하야시 주점을 찾아 주점 주인의 올케인 후쿠노 키요에(副野 清枝)로부터 백포도주를 구입해 이를 가족들이랑 나누어 마셨고 맛이 꽤 좋아 미나노카이 회장인 오쿠니시 타루오에게 추천하였다.

사건 당일인 1961년 3월 28일 마을 주민이자 미나노카이 회원인 농협직원 이시하라 토시이치(石原 利一)는 직원 동료인 오쿠니시 타루오로부터 미나노카이의 연회에 쓸 술과 도시락 구매를 부탁받았다. 이시하라는 농협사무소에서 출발해 마을로부터 5.7km 떨어진 나바리시 내의 음식점 히로시마야(広島屋)에 들러 오리즈메벤토(折詰弁当)를 사서 농협 지점으로 돌아오던 중 우연히 사료 배달을 가고 있던 잡화상 칸다 타케시(神田 赳)를 만나 그의 화물차를 타고 마을로 향하였고 도중에 하야시 주점을 들러 후쿠노로부터 청주 2짝과 백포도주 1짝을 사서 오후 4시경 마을로 돌아와 오쿠니시 타루오의 집으로 가서 타루오의 아내인 후미코에게 술을 건네주었다고 증언하였다.

오후 4시부터 오쿠니시 마사루가 오쿠니시 타루오의 집에 들른 5시 10분까지 타루오의 집에는 타루오의 어머니인 오쿠니시 코히데(奥西 小英), 타루오의 여동생으로 출산 준비를 위해 고향에 내려와 있던 이나모리 타미(稲森 民), 타미의 시어머니로 출산을 도와주러 같이 내려온 이나모리 유우(稲森ゆう)가 집에 상주하고 있었으며 미나노카이의 여성 회원인 사카미네, 하마다, 우에다, 이토 등이 저녁의 연회 준비를 위해 회장 타루오의 집을 계속해서 들락거리던 상황이었다.

5시 10분경 타루오의 옆집인 오쿠니시 마사루가 포도주 병을 들고 공민관 청소를 담당한 사카미네 토미코와 같이 산 중턱의 공민관으로 올라가 5시 20분경에 공민관에 도착했다. 그러나 도착 직후 걸레를 가지러 사카미네가 다시 타루오의 집으로 내려가게 되었고 사카미네가 다시 공민관에 올라온 시각인 5시 30분경까지 약 10분간 오쿠니시는 누구의 감시하에 놓여 있지 않게 되었다. 5시 30분에는 걸레를 가지러 내려갔던 사카미네가 마을 주민과 같이 올라왔고 6시까지 20명의 사람들이 공민관으로 모이면서 이때부터는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농약 혼입을 할 수 없으므로 수사당국은 5시 20분부터 30분 사이, 이 10분 동안 오쿠니시 마사루가 범행을 저지른 유일한 범인이라고 주장했다.

2.4.4. 범인의 자백

오쿠니시 마사루가 체포된 4월 3일부터 츠(津)지방재판소에 기소된 4월 24일까지 미에현 검찰에서 구속수사를 받으면서 자술을 기반으로 한 여러 자백이 나왔으며 이는 수사당국의 큰 증거가 되었다.

3. 수사에 대한 논란

그러나 이 사건은 수사 단계부터 수사에 대한 문제가 심각하였다.

3.1. 강압적인 수사

미에현 위생연구소에서 농약검출사실이 발표된 3월 31일 이후 경찰과 수사당국은 포도주 운반에 직접적인 개입을 한 남자 회원 3명을 대상으로 매일 강도 높은 수사를 하였다. 범인으로 지목된 오쿠니시 마사루는 3월 31일부터 4월 2일 범행시인 기자회견[9]까지 매일 8시간 이상 경찰서에서 자백을 강요받았으며 조사가 끝난 후에도 집에 동행한 경찰이 마사루의 집에 머무르며 사정청취를 하였고 심지어 집에서도 일거수일투족 모두를 감시하는 등 인권 침해를 반복하였다고 한다. 아무리 수사한다고 해도 저들은 단지 불구속 상태의 피의자 신분이었다. 이런 정황에 비추어 볼 때 피의자의 진술은 공정하고 평온한 상태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진술로 현저히 자백의 증거능력이 떨어진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경찰은 오쿠니시의 자백 기자회견을 기다렸다는 듯이 체포영장을 집행하였다.

3.2. 미심쩍은 진술 번복

사건이 나고야 검찰로 넘어가면서 사건의 윤곽은 오히려 더 이상한 방향으로 잡히기 시작하였다.

경찰에서 진술한 참고인 진술과 검찰이 대동한 참고인 진술에서 시간과 장소의 오차가 너무나 심각하였고 이 중 몇 개의 진술은 도저히 간과하고 넘어갈 수 없을 정도의 오차를 보일 정도였다. 전술한 '공백의 10분'은 '검찰 수사에서 뒤집힌 증언들을 총합해서 작성된 알리바이'다.

가장 큰 오차는 농협 직원 이시하라가 3월 28일 당일 자신의 백포도주 구매 시각과 백포도주 병뚜껑을 딴 사람이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증언이었다.

당초 이시하라는 '오후 2시에 농협에서 출발하여 백포도주를 사서 칸다씨의 화물차를 타고 타루오씨의 집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3시 이전'이라고 증언하였는데 4월 검찰의 참고인 조사에서 오후 3시에 도착하였다는 증언을 번복하고 4시 이후라고 증언하였으며 이시하라에게 술을 팔았던 점주 올케인 후쿠노도 '이시하라에게 술을 판 시각은 2시에서 3시 사이였다'에서 '4시 이후 저녁 먹을 즈음해서 이시하라씨가 가게에 왔다'고 증언을 번복하였다.

거기다 이시하라로부터 후미코와 함께 술을 건네받았다고 주장한 이나모리 유우는 검찰 참고인 조사 이후 갑자기 '5시 10분경쯤이었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진술하였고 검찰은 도리어 참고인 조사 전 이나모리 유우의 사전청취조사록을 공개하지 않았다.

이어 수사 초기에 '처음 포도주 병 병뚜껑을 딴 사람' 에 대한 진술도 번복되었는데 당초 오쿠니시 타루오가 '아내(후미코)가 나에게 병을 건네주길래 내가 땄다'고 진술하였고 경찰 단계에서 이시하라의 증언은 '사건 당일 연회장에서 오쿠니시 치에코의 부탁으로 자신이 이빨로 포도주 병뚜껑을 따서 치에코에게 병을 건네주었다(1961년 3월 29일, 30일 증언)' 에서 '치에코가 아니라 후미코의 부탁이었다'로 정정되었으며(3월 31일 증언) 이후 '그게 포도주 병이었는지 청주 병이었는지 잘 모르겠다\'로 급격히 뒤바뀌었고(4월 12일 증언) 이후 '내가 이빨로 딴 병은 청주 병이었다\'로 완전히 엎어져 버렸다(4월 16일 증언).

3.3. 결정적 증거의 미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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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행에 사용되었다고 주장된 닛카린T(ニッカリンT)

수사당국은 오쿠니시의 진술을 보강할 결정적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였는데 바로 범행에 사용하고 버린 닛카린T 농약병과 대나무통의 흔적이었다.

오쿠니시는 범행 직전 대나무통에 농약을 따른 다음 병을 신문지에 싸서 마을 앞을 지나가는 강인 나바리가와(名張川)에 내다 버렸으며 병이 강물을 따라 떠내려갔다고 진술하였고 대나무로 만든 통은 공민관에서 농약을 포도주 병에 따른 직후 화로 속에 던져 버렸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현장 검증 결과 강에 던진 빈 농약병은 진술과 달리 떠내려가지 않고 그대로 가라앉았으며 몇 번 재시도하여도 동일한 결과가 나타났다. 결국 진술이 사실일 경우 범행에 사용된 농약병은 떠내려가지 않고 가라앉아야 하며 이에 따라 수사당국에서는 나바리가와 주변에서 해녀까지 동원하여 농약병을 수색하였으나 농약병 비슷한 것 하나 찾아내지 못하였다.

화로 속에 던진 대나무통도 화로 내부에서 대나무숯이나 농약 성분을 검출하지 못하여 실패하였다.

당초 오쿠니시 마사루가 '대나무통을 셔츠 주머니에 숨겨두었다' 고 진술하였고 셔츠를 토대로 비교분석을 한 결과 대나무통을 넣어 둔 셔츠에서 대나무 성분이 검출 되었지만 사건 당시 오쿠니시가 입고 있던 셔츠에서는 대나무 성분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4. 재판의 경과

4.1. 1심 재판부 - 무죄

1964년 12월 23일 츠(津)지방재판소 형사부(재판장 오가와 준(小川 潤))에서는 오쿠니시 마사루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였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유죄를 확실히 입증할 수 없는 경우는 피고를 무죄로 본다'는 형사법적 기본준칙에 따라 무죄가 선고되었다.

무죄가 선고되었기 때문에 오쿠니시 마사루는 석방되었지만 나고야 검찰에서는 이날 바로 항소하였다.

4.2. 2심 재판부 - 사형

1969년 9월 10일 나고야(名古屋)고등재판소 항소부(재판장 이와타 마코토(岩田 誠))에서는 원심 판단을 뒤집는 판결을 내렸다. 이는 1945년 패전 이후 지금까지 일본에서 1심에서 무죄 → 항소심에서 사형으로 판결이 뒤집힌 유일한 케이스다.

항소심 재판부에서는 기존 증명력이 부정되었던 병뚜껑 치열감정서 중 오사카대학 의학부 교수인 마츠쿠라 토요하루(松倉 豊治)가 제출한 감정서에 대한 증명력을 높게 판단하고 병뚜껑에 찍힌 치열의 '키스 마크'가 오쿠니시 마사루의 치열과 비슷하다는 증거를 채택하였다.[10]

그리고 재판부는 '피고인이 범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검찰에서 진술한 피고인의 자백이 피고인이 유죄라고 판결을 내릴 수 있을 만한 신뢰성이 있다\'면서 피고의 보강이 부실한 자백에 대해 매우 높은 증명력을 인정해 버렸다.

항소심 재판부는 원심법원에서 판결한 무죄판결을 뒤집고 피고 오쿠니시 마사루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석방된 오쿠니시 마사루는 법정구속되었다.

오쿠니시는 바로 상고하였으나 1972년 6월 15일 최고재판소에서는 나고야고등재판소의 판결을 인용하여 상고기각 판결을 내렸고 오쿠니시의 사형 판결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오쿠니시 마사루의 길고 긴 사형수 인생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4.3. 누명을 벗기 위한 노력

오쿠니시 마사루는 사형 판결이 확정된 다음해인 1973년 4월 15일 나고야고등재판소에 재심 청구를 요청하였지만 1974년 1월 9일 기각당하였다. 그러나 매년마다 재심을 청구하였고 1977년부터는 일본변호사연합회의 '재심지원' 사건으로 등록되었으며 2015년까지 근 37년 동안 당사자뿐만 아니라 일변협의 담당변호단이 검찰과 재판소를 상대로 재심청구를 신청하였다.

4.4. 재심청구 연표

일본변호사연합회의 재심사건지원 변호인단은 1977년 5차 재심청구부터 본격적으로 지원을 시작하였으며 1991년 5차 재심청구에 대한 이의제기기간 중 '나바리사건 전국지원네트워크'가 결성되었다.
번호 신청날짜 청구대상재판소 재판 선고날짜 비고
1차 1973/04/15 나고야고등재판소 기각 1974/01/09
2차 1974/06/04 나고야고등재판소 기각 1975/11/21
3차 1976/02/17 나고야고등재판소 기각 1976/04/05
4차 1976/09/27 나고야고등재판소 기각 1977/03/25
5차1977/05/18 나고야고등재판소 기각 1988/12/14 심리개시전 증인심문절차 진행
1988/12/19 나고야고등재판소 기각 1995/03/31 청구기각에 대한 이의신청
1995/04/05 최고재판소 기각 1997/01/28 신청기각에 대한 특별항고
6차1997/01/30 나고야고등재판소 기각 1998/10/08
1998/10/12 나고야고등재판소 기각 1999/09/10 청구기각에 대한 이의신청
1999/09/16 최고재판소 기각 2002/04/08 신청기각에 대한 특별항고
7차2002/04/10 나고야고등재판소 인용 2005/04/05 형사제1부로 배당
2005/04/08 나고야고등재판소 인용 2006/12/26 인용결정에 대한 검찰의 이의신청[11]
2007/01/04 최고재판소 인용 2010/04/05 재심취소결정에 대한 특별항고[12]
나고야고등재판소 기각 2012/05/25 재심개시취소결정
2012/05/30 최고재판소 기각 2013/10/16 취소결정에 대한 특별항고
8차2013/11/05 나고야고등재판소 기각 2014/05/28 형사제1부로 배당
2014/06/02나고야고등재판소기각2015/01/09 청구기각에 대한 이의신청[13]
2015/01/09 최고재판소 취하 2015/05/15[14] 9차 재심청구를 제기하기 위한 변호인단의 특별항고취하[15]
9차2015/05/15 나고야고등재판소 기각 2015/10/04 오쿠니시씨의 사망으로 심리종료결정
10차2015/11/16 나고야고등재판소 기각 2017/12/08 형사제1부로 배당
2017/12/08 나고야고등재판소 기각 2022/03/03 청구기각에 대한 이의신청
예정 최고재판소 취소결정에 대한 특별항고

사망한 오쿠니시의 여동생이 유족으로써 사망한 오빠 대신 재심 청구를 하여 재판이 진행 중이다.

5. 엔자이 사건 지원

5.1. 일본변호사연합회의 구명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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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리사건 변호단 변호단장 스즈키 이즈미(鈴木 泉) 변호사. 사진은 2010년 7차재심취소파기결정이 최고재판소로 나온 직후 기자회견장에서의 모습이다.

스즈키 변호사의 홈페이지. 홈페이지 우측 하단의 '私と「名張毒ぶどう酒事件」'이라는 배너로 들어가면 나바리 사건에 대한 자료를 볼 수 있다.

1972년 도쿄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16] 1982년 나바리 사건 변호단에 들어와 2002년 7차 재심청구신청부터 단장을 맡았다. 이 사건 자체가 상당히 오래된 터라 스즈키 변호사의 대학 졸업년도에 이미 오쿠니시는 재판소에서 무죄를 다투고 있었다.

5.2. 재심청구 지원 37년

1977년 일본변호사연합회에서 지원한 이 사건의 첫 재심지원청구 변호인단이 구성되었다.

요시다 키요시(吉田 清) 변호사를 첫 변호단장으로 한 4명의 변호인단은 1977년 제5차 재심청구를 했다.

5차 재심청구는 비록 1997년 특별항고 기각결정으로 실패하였지만 요시다 변호단장 아래에서 20년 동안 이 사건의 전문적인 증거수집은 기존에 오쿠니시 혼자서 맨 땅에 헤딩하는 수준으로 증거를 수집하던 수준을 벗어나 본격적인 무죄의 변론을 입증하는 데 충분한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1995년 특별항고신청 때 제출되었던 병뚜껑 치열감정서의 조작 입증은 이후 사형 판결의 핵심이 되었던 유일한 실질증거를 무효화시킴으로써 오쿠니시의 무죄 입증을 더욱 확실하게 보여준 변론이었다.

그러나 20년의 세월도 세월인지라 변호단에 참가할 당시부터 60세의 고령이었던 요시다 키요시 변호사는 1994년 의뢰피고인보다 먼저 사망했다.

2대 변호단장으로 히라바 야스하루(平場 安治)가 요시다의 뒤를 이어 5차 재심 특별항고에 대한 추가변호와 이어 5차 재심이 최종적으로 기각되자 바로 6차 재심을 청구하였고 6차 재심에서 과거 피해 당사자들에 대한 증거보전, 새로이 발견된 증거 제출로 재판부에서 긍정적인 답변을 받을 수 있을 거라 한껏 들떠 있던 차 2002년 히라바 변호사도 고령으로 85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2002년부터 스즈키 변호사가 단장직을 맡았고 선배 변호사들이 찾아놓은 탄탄한 증거 덕분에 7차 재심청구에서 한 맺힌 '재심' 결정을 받게 되었다.

6. 뒤집혀 가는 증거들

1973년 이후 전문 변호인단이 가세하면서 변호인단이 전방위로 자료를 모으고 무죄 입증에 근거할 만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이 모은 자료들은 기존의 수사기관이 제시한 증거들을 전면에서 들고 까 버릴 정도의 막강한 증명력을 가지게 되었다.

6.1. 치열감정서의 감정 사진은 날조

원래부터 긍정 3, 부정 3의 애매모호한 증거능력을 가지고 있던 치열감정서는 논란의 대상이었는데 1990년대 초반 변호인단의 치열감정에 대한 재의뢰와 실제 실험을 가지고도 '같은 치열을 가진 사람이 다시 똑같은 모양의 병뚜껑을 이로 딴다고 하여도 같은 치열간극의 모습이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입증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나고야고등재판소 항소부에서 원심을 뒤집고 인정한 오사카 의과대학 마츠쿠라 토요하루(松倉 豊治)의 치열감정서에 실린 중요 비교자료 사진이 날조되었다는 것이 1995년 변호인단에 의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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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쿠라가 제시한 치열감정 감정서에 실린 두 사진은 동일 배율상의 비교 사진이 아닌 배율이 완전히 다른 사진을 배율 조정하여 마치 두 개의 사진이 같은 상황에서 찍힌 사진인 것처럼 조작된 사진이었다는 것이었다.

병뚜껑에 나타난 치열과 오쿠니시가 실험실에서 씹은 치열의 간극이 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나타났다는 항소심의 유일한 증거가 위증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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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 감정 사진. 두 사진은 완전히 다르다.

1995년 5차 재심청구를 진행하면서 변호인단은 기존의 2D 감정 사진이 아닌 3D 입체 감정 사진을 제출하였고 나고야재판소에서는 이를 인용했지만 특별항고를 기각해 버렸다.[17]

6.2. 포도주 속의 농약은 닛카린T가 아니다

1961년 사건 당시 농약이 담긴 포도주는 미에현 위생연구실로 옮겨져 역학조사를 받았고 3월 31일 미에현 연구소로부터 TEPP계 농약이 검출되었다는 연구소 회신을 받았으나 나중의 조사 결과 이것도 거짓이었다는 게 드러난다.

6.2.1. 붉은색 닛카린T와 백포도주

오쿠니시 마사루가 수사기관에 체포된 후 현장검증이 실시되었는데 오쿠니시의 자발적(?)인 진술을 바탕으로 이로 병뚜껑을 따서 대나무통으로 농약을 주입하는 장면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당시 현장 검증에 쓰인 포도주는 적포도주였던 것이다.

변호인단에서는 '이 현장 검증은 확실한 하자가 있는 검증' 이라면서 이의신청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인터넷을 통하여 전방위로 수소문한 결과 '50년 전에 단종된 닛카린T 농약'을 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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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들의 노가다(?) 덕분에 후쿠시마현[18]의 모 화공약품 폐기장에서 봉지도 뜯지 않은 신품 닛카린T를 구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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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 결과 확실히 1961년산 닛카린T는 붉은색 액체로 백포도주에 섞이는 순간 색이 변하는 것이 눈에 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즉, 붉은색 닛카린T를 가지고 하는 현장검증에서 현장에 쓰인 백포도주가 아닌 적포도주를 쓴 것은 검증에 있어 중대한 하자를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증거로 쓸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이것으로 변호인단은 7차 이의신청을 냈으나 검찰측에서 1961년산 닛카린 T는 투명색의 액체와 붉은색 액체 두 개가 혼용되어 시판되었다는 사실을 주장해 변호인단측의 증거소멸을 부정하였고 검찰의 손을 들어주면서 또 기각 판결을 받아야만 하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변호인단에서 알아낸 더 중요한 물증이 있었으니...

6.2.2. 애초에 닛카린T 검출 감정서는 불확실

변호단에서 전방위로 닛카린T의 정보를 입수하고 있을 무렵 닛카린T의 개발자인 이마무라 켄노스케(今村 健之助)가 1961년 당시 미에현 위생연구소에서 나온 나바리 사건 농약검출보고서를 보고 '이건 닛카린T가 아니다' 라고 주장한 것을 변호단에서 알아낸 것이다.

이에 바로 미에현 위생연구소의 연구자료를 토대로 다시 검증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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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에현 위생연구소에서 제출한 크로마토그래피 조사결과표.

사건현장의 포도주병(1.), 포도주에 시판되는 TEPP계 농약을 섞은 실험군(2.), 시판 TEPP계 농약을 동일 용량의 37℃ 물에 3시간 동안 가수분해한 실험군(3.), 그리고 시중 TEPP계 농약(4.)의 크로마토그래프 분석자료다.

크로마토그래프에서 나오다시피 TEPP가 물이나 포도주에 들어간다고 하여 완전 분해가 되지는 않고 TEP계 유기용매인 트리에틸피로인산으로 남게 되며 크로마토그래프에 TEP계 용매인 트리에틸피로인산이 남아 표시된다(2, 3). 가수분해나 용해과정을 거치지 않은 순수 TEPP도 마찬가지(4).

그러나 사건 현장에서 수거해온 포도주 병에서 분석한 크로마토그래프에서는 TEP계인 트리에틸피로인산이 남아 있지 않았으며(1.) 이는 닛카린T와 같은 TEPP계 농약보다 가수분해 속도가 월등히 더 빠른 다른 농약이 섞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미에현 연구소에서는 다음과 같은 감정서를 발송하였으나 검찰에서는 '포도주 속에 들어간 닛카린T가 매우 적어 TEP계 용매가 검출되지 않았을 뿐이다' 라고 주장하였고 항소심 재판부는 검찰의 견해를 덜컥 인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TEP계 용매가 검출되지 않을 정도의 낮은 용량의 TEPP 농약이 섞여들어갔다면 치사량에 한껏 미치지 못하는 정도라는 것으로 '농약에 의해 죽었다'는 인과관계가 부정되어 버린다.

당시 검찰이 '닛카린T' 로 입을 맞추어 놓고 진술을 받았으니 지금 와서 다른 농약을 써서 죽였다고 들이대 봤자 결국 자가당착에 빠지는 격이 된다.

2020년 들어 포도주병에 대한 감정을 다시 한 결과 포도주병에 혼입된 독극물이 기존에 알려진 농약 '닛카린 T'가 아닌 또다른 맹독성 독극물임이 확실하다는 것이 굳어졌다.

6.3. 공백의 10분을 채우는 알리바이

사건 당일인 1961년 3월 28일 유일하게 오쿠니시 마사루가 주변의 감시 없이 포도주 병과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변호단이 강력하게 반박하고 나섰다.

1988년 5차 재심청구기간 중 증인대질심문을 하는 절차에서 동네 주민 Y씨가 사건 당시 '타루오씨 집에서 음식 준비를 하다가 잠시 타루오네 화장실에 들렀었는데 마사루씨가 집 반대편 길에서 자기 소를 끌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는 증언을 한 것이었다.

이는 1961년에도 마사루씨와 일부 동네 주민들의 공통된 진술인 '소몰이' 진술로 단지 그 시각이 언제였느냐가 문제가 되던 시점이었는데 동네 주민 Y씨는 포도주를 배달한 이시하라씨가 집에 와서 후미코에게 술을 전해주고 난 뒤 자신이 요리를 준비하러 들어갔다가 얼마 뒤 화장실로 나왔다는 증언을 하였다.

따라서 원래 이시하라가 술을 전해 주고 난 10~20분 뒤에 사카미네와 오쿠니시 마사루가 공민관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는 증언이 뒤집어져 버리는 것이다.

이 증언을 바탕으로 하게 된다면 오쿠니시는 사카미네, 오쿠니시 두 명이 올라가 사카미네만 내려온 것이 아니라 사카미네, 오쿠니시 둘 다 같이 내려왔으며 이후 두번째 올라가는 길에 사카미네, 오쿠니시 그리고 마을 주민 셋이 같이 포도주를 들고 올라간 것이 되기 때문에 수사기관이 만든 알리바이를 가지고도 오쿠니시는 절대로 공민관에서 혼자 포도주와 같이 있을 수 없는 논리적 오류가 생기는 것이다.

6차 재심청구기간 중 변호단에서는 당시 나바리 경찰 수사서장이었던 나카니시의 수사기록 노트인 '나카니시 노트' 를 법원에 제출하였는데 이 노트에서는 수사 개시 4일 후 사카미네가 경찰에서 '마사루씨는 공민관에서 다른 주부들과 함께 있었다' 는 진술을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사건 직후 사카미네가 신문기자와의 인터뷰에서도 똑같은 진술을 하여 이 진술이 사카미네가 가진 가장 명확한 진술임에 틀림없고 따라서 이 진술을 토대로 하면 공백의 10분은 처음부터 있지도 않게 되는 것이다.

6.4. 누군가 새로 붙인 병뚜껑 봉인 씰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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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니시의 기존 알리바이에서는 밀봉된 포도주병 뚜껑을 스스로 이빨로 뜯어 대나무 대롱을 가지고 독극물을 혼입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2020년 변호인단에서 병뚜껑 봉인 씰을 섬유학 전문 교수에게 감정을 의뢰한 결과 시중에 판매되는 가정용 풀(糊)의 성분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제조 당시 접착된 다른 봉인 씰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것이었다. 즉, 누군가가 봉인 씰을 뜯었다가 풀로 다시 붙였다는 것인다.

기존까지 오쿠니시는 '봉인 씰은 찢어서 떼어냈다.'고 자백하였고, 다른 관계자 3명은 '봉인은 감싸져 붙어 있었다.'고 증언하였기 때문에 오쿠니시 외 다른 인물이 봉인 씰을 건드렸다는 뜻이 된다. 구태여 오쿠니시가 공민관에서 10분 동안 혼자 있으면서 독극물을 혼입하지 않더라도, 이미 공민관 혹은 그 바깥 어딘가에서 병이 뜯겨 독극물이 혼합된 채 다시 봉인되어 이동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설사 연회장에서 봉인이 실수로 뜯겼다고 하더라도 뜯긴 봉인을 풀로 다시 붙이기는 일반적인 행동도 아닐뿐더러 주류 품평회도 아닌 시골 친목회에서 쓸 술의 봉인 씰을 굳이 풀로 다시 복구할 필요 또한 없으니 말이다.

7. 이후

7.1. 2005년 첫 재심 결정

2005년 4월 5일 나고야고등재판소에서는 2002년 신청된 7차 특별항고신청을 받아들여 이 사건에 대한 재심재판부를 열기로 하고 이에 오쿠니시 마사루에 대한 사형 집행 정지결정을 내렸다.

무려 재심 신청으로부터 32년 만에 이 사건이 다시 법의 심판대에 서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 재심재판은 5차 재심신청에서 받아들여진 치열감정서의 효력 완전상실과 닛카린 T의 혼입 과정 및 당시 현장 검증의 부당성과 포도주 병에 대한 농약 분석 오류에 대해 주장을 하여 오쿠니시 마사루에 대한 완전무죄를 끌어내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2005년 4월 8일 나고야검찰청에서는 재심재판개시결정에 대해 이의신청을 하고 2006년 12월 26일 나고야고등재판소는 뜬금없이 검찰의 이의결정을 인용해 재심재판을 닫아 버리고 오쿠니시에 대한 사형 집행 정지를 취소해 버렸다.

이에 2007년 1월 4일 변호인단에서 최고재판소에 나고야고등재판소의 재심취소결정은 부당하다는 특별항고를 제기하였고 최고재판소에서는 2010년 4월 5일 이례적으로 고등재판소의 재심취소결정을 뒤집는 '재심취소파기결정' 을 선고해 재심사건을 원심인 나고야고등법원으로 환송했다.[19]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의 이의제기를 성공한 변호인단은 '이제 무죄평결만 바라면 되겠다!' 싶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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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게도 2012년 5월 25일 나고야고등재판소 제2형사부에서는 '사건의 실질증거로 채택된 증거에 대해서 의심을 가질 부분이 없고 피고의 자백에 높은 신뢰를 줄 수 있다' 며 재심취소결정을 내렸다.[20]

변호단에서는 재심취소결정에 대한 특별항고를 제기하였으나 최고재판소는 2013년 10월 16일자로 7차 재심청구에 대한 특별항고를 기각시켰다.

변호단에서는 기각결정 다음날 국민구호위원회 전국네트워크 홈페이지를 통하여 항의성명을 발표하였다. 일본어

7.2. 끝나지 않은 사건



2010년 오쿠니시 마사루의 84세 생일을 맞이하여 84개의 카드로 마사루의 무죄를 주장하는 퍼포먼스를 하는 나바리 사건 네트워크시민단 사람들.

2013년 1월 14일 오쿠니시는 하치오지 의료형무소에서 자신의 87번째 생일을 맞이하였다.

변호인단에서는 2013년 11월 5일부로 나고야 고등재판소에 제8차 재심청구신청을 하였다.

2014년 재심청구 기간 동안 희망을 걸 수 있는 판결이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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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시즈오카 된장공장 전무 일가족 피살 사건인 속칭 '하카마다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48년 간 도쿄구치소에서 복역하던 하카마다 이와오(袴田 巖, 전 프로복서)가 2번의 재심청구[21] 끝에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재심개시결정'을 내려 2014년 3월 27일 도쿄구치소에서 석방되었다.[22] 2024년 9월 26일 무죄 판결을 받았다.출처

하카마다 사건도 일본변호사회의 지정 재심사건으로 시즈오카 검찰의 고문에 가까운 무리한 자백 강요가 있었던 점, 유일한 증거인 된장독 속에서 나온 혈흔이 묻은 바지가 조작된 증거였다는 점, 재판소에서 검찰증거만을 채택하여 사형 판결이 나온 점, 몇번의 재심청구가 씹힌 채 사건이 질질 끌여지면서 반세기를 넘겼다는 점 등 나바리 독포도주 사건과 유사점이 많은 사건이라 이 사건이 재심개시가 되면서 당사자가 석방까지 되었다는 것은 8차 재심에서 무언가 기대를 가져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게 하였다.

그러나...

7.3. 악화된 건강과 사망

2012년 12월 오쿠니시는 재심 특별항고 청구기간 중 고열과 폐렴 증세로 인해 나고야 구치소의 수형 생활을 할 수 없어 도쿄 하치오지 의료형무소로 이감되었다.

2013년 5월 2일 오쿠니시의 폐렴 증세가 다시 악화되어 중환자실로 이송되어 긴급 수술을 받았다.

2일 자정에 스즈키 변호단장에게도 급히 연락이 가서 긴급회의가 열렸으며 오쿠니시의 특별면회인인 이노 마사미(稲生 昌三)가 하치오지 의료형무소에 면회를 신청하여 수술이 끝난 오쿠니시를 만났다고 한다. 병명은 보통의 폐렴이 아닌 메티실린내성(MRSA)을 가진 슈퍼박테리아에 감염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자가호흡이 불가능한 상태라 인공호흡기에 의지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된 것으로 밝혀졌다.

2013년 7월 6일까지 이노 마사미의 특별면회기록에 따르면 자가호흡이 불가능하여 인공삽관과 통증 억제를 위해 진정제를 놓는데 진정제를 놓는 주기에 따라 정신을 잃는 혼수상태가 반복되었으며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이름을 부르면 겨우 부름에 응답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다행히 고비는 무사히 넘겼고 지속적인 치료로 인해 2014년 5월 7일까지 인공호흡기에 의한 호흡을 유지하며 특별면회인의 부름에 간신히 응답을 하는 정도 수준까지 회복되었다.

그러나 2015년 10월 4일 결국 폐렴에 의한 다발성장기부전으로 하치오지 의료형무소에서 옥사했다. 향년 89세. 원본 번역본

오쿠니시는 자신이 무죄라는 것을 끝내 인정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사망 시점에 오쿠니시 마사루의 복역 기간은 49년으로[23] 이는 일본의 사형수 132인[24] 중 최장기수이며 당연히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가장 오래 복역한' 사형수이기도 하다.[25]

오쿠니시의 사망 당일 국제엠네스티 일본 지부에서는 오쿠니시 마사루 사형수가 부당한 재판으로 사형 판결을 받고도 검찰의 방해로 제대로 된 재심을 받지 못한 채 옥중에서 사망한 것을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엠네스티 페이지
오쿠니시 마사루씨의 죽음을 헛되이 해서는 안된다.

2015년 10월 4일 '나바리 독포도주 사건'의 오쿠니시 마사루씨가 하치오지 의료형무소에서 그 생애를 마쳤다. 국제 엠네스티 일본지부에서는 사형 판결을 받고 46년 간 구치소에서 무죄를 외쳤던 오쿠니시씨의 죽음을 애도하며, 재심개시를 여러차례 거부하여 끝내 정의의 실현을 하지 못하게끔 만든 나고야고등검찰청 및 최고검찰청을 강력히 비난한다.

오쿠니시씨가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이 사건, 미에현 나바리시에서 1961년에 여성 5명이 독살당하였다. 사건의 수사에 중대한 하자가 있는것으로 알려졌다. 당초부터 오쿠니시씨가 범인으로 지목되었고 장시간의 조사에 자백이 강요되었다. 사형 사건에는 상당한 증거가 필요하다. 츠(津)지방재판소에서는 제한된 물증으로는 범인을 특정 할 수 없으므로 무죄 판결을 내렸음에도 불구, 나고야 고등재판소에서 뒤집혀 사형판결이 내려졌다.

당시 수사과정 중 밀실에서 고문으로 자백이 이끌어졌다. 또한 증거의 조작도 여러군데에서 보여졌던 시대로, 엔자이(冤罪)의 온상은 지금까지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강요된 자백에 의한 증거에 대해 증거능력을 인정 받아 온 것 또한 적정 절차를 무시한 것이었다. 물증이 극히 한정되어 오쿠니시씨가 범인이 아니라는 개연성이 높다고 알려져 왔다. '의심으로 벌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되돌아가 조금이라도 유죄가 의심된다면 재심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오쿠니시씨는 목숨이 붙어있는 한 싸우겠다며 강한 결의를 가지고 긴 시간동안 구속 생활을 견뎌왔다. 그러나 사형수로써 생활은 체력도, 기력도 빼앗는 것이었을 것이다. 누명의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변호인단의 주장 뿐만 아니라 감정 결과에서도 분명하다. (사형을) 집행하지도 않고 방치한 상태는 마치 검찰청이 (오쿠니시씨의) 죽음을 기다린 것 처럼 보인다. 재심이 개시되지 않은 것을 애통하게 여긴다.

오쿠니시씨의 죽음으로 사법부는 배워야 한다. 조사에 있어 자백의 강요는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못한다. 사형은 누명의 가능성을 가진 사람의 목숨을 빼앗게 된다. 목숨이 끊어지면 돌이킬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오쿠니시씨의 인생은 검찰의 부정의(不正義)의 역사이다. 검사의 사명은 공익의 대표자로서 억울한 사람을 벌하지 않고, 실체진실을 풀어나가는데 있다. 이러한 과오는 두번 다시 반복돼서는 안된다. 검찰청이 개인의 인권을 존중하고 무죄추정을 철저히 하여 새로운 엔자이 사건을 만들지 말 것을 요구한다.

일본지부 성명
2015년 10월 4일

7.4. 10차 재심청구

2015년 11월 16일 사망한 오쿠니시 마사루를 대신하여 유족인 여동생 오카 미요코(岡 美代子)가 나고야고등재판소에 제10차 재심청구를 신청하였다. 오카는 기자회견에서 "오빠는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도와주세요."라고 호소하며 고개를 숙였다.

변호인단에서는 사건 당시 쓰였던 독극물이 오쿠니시가 자백한 농약과 다른 물질이라고 주장하였고 새로운 증거를 확보하여 재판부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2017년 12월 8일 나고야고등재판소 형사1부(재판장 야마구치 히로유키[山口裕之])는 제10차 재심청구를 기각하는 결정을 하였는데 변호인단이 제출한 새로운 증거 28점에 대하여 '무죄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명확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따라 변호인단은 이의신청을 하여 이의심(異議審)이 진행되었다.

2019년 8월 7일 변호인단은 제10차 청구의 기각 이의심에서 '오쿠니시씨가 범행을 일으킬 기회는 없었다.'는 요지의 보충서를 제출하였다.

2020년 10월 28일에는 상기한 새로운 증거로 '증거의 포도주병 봉인지에서 가정용 풀의 성분이 검출되었다.'는 요지의 감정서를 제출하였다.

11월 30일에는 포도주에 혼입된 독극물은 지금까지 포도주에 혼입되었다고 알려진 농약과 다른 것이라는 분석 감정서를 제출하였다.

2022년 3월 3일 제10차 재심청구기각 이의심을 맡았던 나고야고등재판소(재판장 카노 신지[鹿野 伸二])는 '감정서가 과학적 근거에 이루어진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이유를 들어 심리불속행 결정을 내렸다. 이에 대해 변호인단은 불복해 최고재판소에 특별항고할 것을 밝혔다.

8. 등을 돌린 쿠즈오 마을 사람들

오쿠니시 마사루와 나바리 사건 변호인단을 힘들게 하였던 건 비단 경직된 일본 사법계뿐만이 아니다.

1961년 3월의 그 사건으로 친구를 잃고 가족을 잃고 부모를 잃고 이웃을 잃은 쿠즈오 마을 사람들은 오쿠니시 마사루를 이 사건의 진범으로 굳게 믿고 어떠한 반론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으며 '지금 와서 재심청구한다고 진범이 밝혀지는가' 라면서 오쿠니시가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려는 시도를 매우 탐탁찮게 보았다. 사건 당시에도 오쿠니시가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항소심이 진행되자 마을 주민들이 오쿠니시의 집으로 쳐들어가 오쿠니시의 모친과 여동생, 중학생 아들과 소학생 딸을 끌어내 집단 린치를 가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쿠니시 일가는 쿠즈오 마을에서 쫓겨나듯이 나와야만 했다. 마을에 있던 오쿠니시가의 묘비도 주민들이 파헤쳐 버려 밭이 되었다. 최상단 다큐멘터리 동영상에서도 변호인단이 현장 검증을 위해 쿠즈오 마을에 들어서자 주민들이 불편한 기색으로 변호인에게 불만을 표시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일본어를 몰라도 한 번에 심정을 알 수 있는 상당히 불만 섞인 볼멘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만약 오쿠니시 마사루가 범인이 아니라면 1961년의 쿠즈오 마을의 주민들 중 누군가가 범인이라는 것인데 그러면 이웃을 의심해야 하며 이미 죽었을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아직까지 마을에 그때의 살인마가 멀쩡하게 살아서 마을에 남아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불안감으로 쿠즈오 마을의 공동체의식에 크나큰 장애를 가져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26]

이 사건으로 누나 신야 요시(新矢 好)를 잃은 남동생 신타니 타케시(神谷 武, 사건 당시 23세)는 2010년에 7차 재심결정 취소파기결정이 나면서 재심청구가 이루어지자 아사히신문에서 "오쿠니시가 범인이 아니라면 결백하다는 증거를 보여달라" 는 인터뷰를 하기도 하였다.

짧은 시간이었긴 하지만 법원의 재심결정에 대해서도 상당한 불신을 보냈던 건 마을 주민들이었다. 신타니 타케시는 2012년 7차 재심청구 기각결정이 나자 주니치신문에서 '사건을 잊을 수는 없지만 이제 법으로 요란 떠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또다른 주민도 '더이상 재심청구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하였다. 사건 당시 구장(마을 이장)이었던 히라이 후지타로(平井 藤太郎)씨도 '이렇게 작은 마을에서 범인이 다른 사람이라면 벌써 나왔지 않겠느냐' 며 일축하였는데 정작 오히려 사건 당시 마을에서 떠돌던 '오쿠니시가 자기 아내 살리려고 아내에게 포도주를 마시지 마라고 하였다더라' 는 낭설은 곧이곧대로 믿었다. '아내랑 내연녀를 골로 보내고 싶었다'는 진술이 사실이라면 아내에게 와인을 마시라고 적극 권장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의문 같은 건 뒤로 미뤄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마을 주민들조차 졸속수사에도 불구하고 마을의 안녕과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범인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어도 추문이 돌던 오쿠니시 마사루를 희생양으로 삼고 수사기관이 짠 알리바이에 적극 동조하였다.' 는 의혹이 제기되어도 이상하지 않는 것이다. 하술한 도카이 테레비의 다큐멘터리 영화 '잠자는 마을(眠る村)'에서도 조용한 산골 마을에서 일어난 이 살인사건을 두고 작은 사회 속에서 공동체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지 속에서 마을 주민들이 어떻게 사건을 대하고 있는가를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9. 관련 미디어

9.1. 영화 '약속 - 나바리독포도주사건 사형수의 생애'


예고편

約束 - 名張毒ぶどう酒事件死刑囚の生涯

2013년 2월 16일 일본 순회개봉.

나바리 독포도주 사건의 사형수 오쿠니시 마사루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그린 영화.

주연
홈페이지

9.2. 도카이 테레비 다큐멘터리 영화 - '잠자는 마을(眠る村)'


예고편

2019년 2월 2일 개봉. 홈페이지

주쿄 권역 방송사인 도카이 테레비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2017년 동명의 다큐멘터리를 공중파로 특집 방영하였고 이 해 일본 민간방송연맹상(특별표창부문/방송과공공성)최우수상, 2018년 제66회 키쿠치 간 상을 수상하였다. 2019년 다큐멘터리 영화로 극장 순회개봉하였다.
이 사건, 아직 해결을 보지 못했다.

미에현과 나라현에 걸쳐 있는 쿠즈오 마을. 쇼와 36년, 마을의 친목회에서 5명의 여자가 죽었다. 포도주에 혼입된 독극물로 인한 중독사. 사건으로부터 6일 뒤, 체포되었던 오쿠니시 마사루가 범행을 시인한다. 당시 35세. "처와 애인과의 삼각관계를 청산할 목적이었다."고 자백한다.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마을사람들은 오쿠니시의 범행을 입증하려는듯 재빠르게 증언을 바꾸어 나갔다.
하지만 첫 공판, 오쿠니시는 일전 무죄를 주장하였다. 자백은 "강요된 것이었다."고 호소하였다. 1심은 무죄. 그러나 2심은 사형판결, 최고재판소는 상고를 기각. 쇼와 47년, 오쿠니시는 확정사형수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사건이 일어났던 공민관을 부숴버렸고 오쿠니시가의 묘를 파내 밭을 만들어 버렸다. 오쿠니시는 독방에서 재심을 계속 요구하였으나, 헤이세이 27년 10월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향년 89세. 하치오지 의료형무소에서의 고독하고 원통한 옥사였다.

'야쿠자와 헌법', '인생후르츠'의 도카이테레비가 "쇼와의 미스테리"를 흔들어깨운다.


나바리 독포도주 사건 - 전후 유일하게 사법부가 무죄에서 사형으로 바꾼 사건. 57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많은 의혹이 있다. 결정적인 물증의 부재, 자백의 신빙성, 이중 삼중으로 바뀐 관계자들의 진술. 그리고 어째서 사법부는 고집스럽게도 재심을 거부하고 있는 것인가? 이러한 의혹에 도전하는 것은, '야쿠자와 헌법','인생후르츠'의 도카이 테레비 방송. 내레이션에 오쿠니시 마사루를 연기하였던 나카다이 타츠야. 헤이세이 마지막 겨울에 공개하는 혼신의 미스테리. 제66회 키쿠치 칸 상을 수상한 "도카이테레비 다큐멘터리 극장" 제11탄.


[1] 현재는 나바리시 쿠즈오(葛尾)와 나라현 야마베군 야마조에무라(山添村)에 속한 쿠즈오(葛尾) 두 행정구역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사건 당시에는 미에현 나바리시에 속한 같은 마을이었다. 일본의 시, 군 개념은 한국과 다르므로 시정촌 항목 참조.[2]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건.[3] 한 번 기소하고 판결하면 절대 뒤집지 않는 게 특징이다. 헌법재판소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오죽하면 한국의 대법원-헌법재판소 이원화 체제를 부러워할 지경이다. 물론 기소 자체를 극히 신중하게 하기 때문에 대부분은 진범이지만 문제는 억울한 사람이 아예 없지는 않다는 것이다.[4] 미에(三重)현의 三과 나라(良奈)현의 奈를 합친 이름.[5] 정식 명칭은 나바리시 코모하라공민관 쿠즈오분관(名張市 薦原公民館 葛尾分館)으로 큰 마을인 옆동네 코모하라(薦原) 마을 공민관의 분관 형식을 띄고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후 26년간 폐가로 방치되다가 1987년 마을 주민들이 '살인 사건이 일어난 곳이라 재수없다'며 해체하였고 공민관은 마을이 나바리시와 나라현 야마베군으로 나누어지면서 각 지역에 따로 새 건물이 지어졌으며 사건 현장에는 5명의 희생자를 모시는 공양탑(供養塔)과 함께 마을 게이트볼장이 들어섰다.[6] 당시 쿠즈오 마을 일대는 인구 140명이 조금 넘는 아주 작은 농촌 지역이라 유흥을 즐길 만한 오락 시설이 전무하였으며 1년마다 한 번씩 개최하는 미나노카이의 연회 자리가 이들이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축제였다.[7] 테트라에틸피로인산(TetraEthyl PyroPhosphate). 1940년 독일 바이엘사에서 개발한 유기계 살충제로 급성 경구 반치사량(LD50)이 2mg/kg(마우스)밖에 안되는 맹독성 농약. 1971년 이후 사용이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8] 당시 범행에 쓰인 포도주 병은 보통 와인 밀봉 방식인 코르크가 아닌 독특하게 생긴 이중 병뚜껑으로 밀봉하였고 그 겉에는 봉인 씰이 붙어 있었다.[9] 경찰의 반강제적 인터뷰였다는 것이 정설이다.[10] 법원이 유죄의 증거라고 제시된 증거에 대하여 증명력을 부여하여 이를 채택할 자유는 법관의 자유심증에 의한다. 자유심증주의 문서 참고.[11] 검찰의 이의신청으로 재심결정이 취소되었다.[12] 특별항고신청이 인용되어 사건이 나고야고등재판소로 환송되었다.[13] 형사제2부로 배당[14] 취하날짜[15] 이때 오쿠니시는 하치오지 의료형무소에서 사경을 헤메고 있었고 변호인단도 '오쿠니시씨의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재심신청을 다시 할 것' 이라고 밝혔다.[16] 대학 재학 당시가 엔자이 사건의 시초로 불리는 야카이(八海) 사건이 사회적으로 떠들썩했기 때문에 이 소식을 들은 스즈키는 '억울한 사람들을 돕겠다'는 뜻으로 변호사 시험에 지원하였다고 한다. 변호사가 되고 나서 처음부터 이런 일을 하는 게 운명이었나 보다.[17] 이 결정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전혀 다른 감정사진이 한 치열에서 나올 수 있다면 치열 감정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즉, 가장 유력한 물리적 증거인 치열 감정은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의미다.[18] 다행히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 이전이다.[19] 기존 재심재판부는 형사1부였으나 재심취소 파기 이후에는 형사2부로 이송되었다.[20] 부당결정(不当決定) 걸개를 들고 있는 사람은 노지마 마사토(野嶋 真人) 변호사로 변호단 참가 21년차라고 한다.[21] 하카마다 사건의 판결 확정은 1980년 12월 12일로 나바리 사건보다 늦은 터라 재심횟수가 적다.[22] 시즈오카 검찰의 갖은 방해로 석방 후 시즈오카 고등재판소에서 재심취소결정이 내려졌으나 이에 불복해 최고재판소에서 파기환송결정이 내려져 현재도 재심재판이 속행 중이다.[23] 미결구금일수까지 합쳤을 경우 사형 확정 일자부터 기산하면 만 43년이다.[24] 2015년 10월 기준. 현재 일본의 사형수는 107명이다.[25] 마루요 사건(マルヨ無線事件, 이것도 엔자이 사건이다.)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사형수' 로써만 52년째 복역 중인 최장기 사형수 복역 기록을 가진 오다 노부오(尾田信夫)가 있긴 하지만 오쿠니시의 사형 확정 일자가 2년 정도 늦어서 그렇지 오쿠니시의 재판 기간이 더 길어 총 구금일수는 오쿠니시가 더 많다. 다만 오쿠니시는 미결구금 중 무죄로 석방되었던 때가 있어 최장 연속 복역 기록은 하카마다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었으나 재심으로 석방된 하카마다 이와오의 48년이다. 하카마다의 기록은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 한편 오쿠니시 사망 전 최고령 사형수는 원래 1973년 사이타마 2인여성 살인사건의 범인인 이시다 토미조(石田 富蔵)로 만 92세였으나 2014년 4월 전립선암으로 도쿄구치소에서 사망하였다. 물론 이 두 명이 사형수 복역만 한 채로 집행되지 않고 옥사한 것은 일본 사법부도 이들이 범인이라는 확신이 없어 정말 범인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질 때까지 기다렸기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 야마지 유키오, 가나가와 마사히로, 고바야시 가오루 등 범죄 행위의 진상이 명백한 사형수는 판결 뒤 수년 내에 바로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선고 순서 및 죄질과 무관하게 무작위로 법무장관 명의의 사형 집행 명령이 내려지기 때문이다. 죄상이 명백함에도 오랫동안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던 예외로는 아사하라 쇼코옴진리교 일당이 있었지만 이쪽은 사형시킬 경우 옴진리교 잔당들의 움직임을 우려했기 때문에 제외된다.[26]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누명에 이런 전개가 있다. 집안에서 가장 문제아였던 자식 하나가 어머니의 살인범으로 체포되어 옥사했는데 뒤늦게 그의 알리바이가 증명된 되었지만 그 사건은 내부인이 행한 살인 사건이 확실하였기 때문에 그의 무죄 증명이 오히려 살인범은 남은 집안 사람 중 있다는 게 밝혀진 꼴이라 집안은 공포에 휩싸인다.[27] 실제 오쿠니시 타츠노는 아들의 옥바라지를 하면서 힘들게 살다가 1988년에 사망했다.[28] 가와무라 후사키치(川村 富左吉, 1931-2005). 오쿠니시를 지키는 모임 아이치현 지부장으로 1987년 12월부터 2005년 10월에 74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총 259번의 수발 면회를 다니면서 오쿠니시의 입과 손의 역할을 한 특별면회인. 가와무라의 사후에는 이노 마사미(稲生昌三)와 하야카와 유키코(早川幸子)가 특별면회인의 역할을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