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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3 02:26:55

니혼대생 살인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사건 경위3. 밝혀진 토쿠다 가의 진실4. 재판 결과5. 그 외

1. 개요

日大生殺害事件

1935년 일본 제국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일본 최초의 보험금 살인사건으로 알려졌다.

2. 사건 경위

1935년 11월 3일 오전 2시 30분경 맨발에 잠옷 차림의 어린 소년과 소녀가 경시청 모토후지 경찰서 이키자카 파출소로 다급하게 뛰어들어오더니, "강도가 들어서 형(오빠)이 살해당했으니 빨리 와 달라"며 도움을 요청했다. 두 사람의 신고를 받은 경찰은 즉시 혼고유미쵸에 있는 사건 현장인 토쿠다 가를 찾아갔다. 두 사람의 말대로 피바다가 된 집 안에는 니혼대학 3학년에 재학중이던 이 집의 장남 토쿠다 미츠구(徳田貢, 당시 24세)가 쓰러져 있었다. 미츠구의 시신에는 무려 22곳에 달하는 상처가 있었으며, 심지어 발바닥까지 흉기에 베이고 찔린 흔적이 남았을 정도로 처참하게 난자당한 모습이었다.

미츠구의 모친 하마(ハマ, 당시 46세)는 "새벽 2시쯤 20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가 집에 쳐들어와 나를 깨우더니, 식칼을 들이대며 돈을 내놓으라고 위협했다. 무서워서 60엔을 건넸지만 위층에서 자고 있던 미츠구가 소리를 듣고 내려와서 남자를 잡으려 했다. 몸싸움을 하던 중 남자가 미츠구를 칼로 난도질하고 60엔을 빼앗아 달아났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토쿠다 가는 하마와 사망한 미츠구 외에 당시 21세와 17세의 두 딸과 11세의 막내아들[1]이 함께 살고 있었으며, 아버지 히로시(당시 51세)는 사할린의 시스카(敷香)[2]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모토후지 경찰서는 이 사건을 강도살인으로 보고 긴급 경계망을 발동했다. 택시회사와 여관을 돌며 탐문수사를 실시하고 라디오를 통해 목격자를 찾는 방송을 내보내는 등 사건 해결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사건의 실마리는 좀처럼 잡히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사건 발생 1개월이 지나도록 단서가 잡히지 않자, 경찰은 이 시기부터 가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가족을 의심하게 된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 범행에 사용된 흉기였던 식칼은 토쿠다 가의 부엌에 있었는데, 피가 전부 씻겨나가 지문 채취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 범인이 부엌 창문으로 침입했다고 했으나, 정작 창문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 다다미 위에 남아 있던 피묻은 발자국이 모친 하마와 장녀의 것 뿐이었다.
* 하마와 장녀가 증언한 범인의 인상이 사망한 미츠구와 비슷했다.
위의 의문점에 더해 가장 결정적인 의문점은 바로 미츠구의 장례식에서 보인 가족의 태도였다. 미츠구의 장례식은 부친 히로시가 사할린에서 돌아온 뒤 11월 9일에 치러졌는데, 이 때 가족들이 슬퍼하기는 커녕 오히려 매우 차분한 태도로 조문객들을 맞았다는 것이다. 보통 강도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용감히 맞서 싸우다 죽었다면 당연히 큰 슬픔에 빠져 있었어야 했건만, 부친 히로시는 아주 태연하게 조문객들을 대하면서 "이것도 운명이니까요....."라는 말을 담담한 투로 했다고 한다.

또한 경찰의 조사 결과 미츠구 앞으로 각각 다른 보험회사의 생명보험이 3개나 걸려 있었고, 총합 약 6만 6천엔 상당의 보험금을 수령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3] 게다가 모친 하마와 다른 자녀들에게는 보험이 걸려 있지 않고 오로지 미츠구에게만 생명보험이 걸려 있었다는 점도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이후 추가 조사를 통해 밝혀진 사건의 진실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3. 밝혀진 토쿠다 가의 진실

가족들은 미츠구가 착한 아들이라고 증언했으나, 경찰 조사 결과 실제 미츠구의 인성은 가족이 말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미츠구는 중학교 시절부터 담배를 즐기는 불량학생이었고, 니혼대학 전문부 치과(現 니혼대학 치의학부)에 입학하기는 했으나 이마저도 부정입학으로 입학한 것이었다. 게다가 카페, 댄스홀, 유곽 등을 전전하며 무절제하고 방탕한 생활을 보낸 탓에 5년 동안 재적해 있었으면서도 아직까지 3학년에 머물러 있는 상태였는데, 이런 상황에서 공부는 하지 않으면서 학비와 하숙비를 전부 유흥비로 탕진하고 그마저도 모자라 여동생(장녀)에게 돈을 요구하는 와중이었다.

한편 부친 히로시는 독학으로 의사 시험에 합격했을 정도의 노력가로 1931년 사할린으로 건너가 병원을 개업했으나, 안정된 지위를 얻고 나자마자 그 동안 고생했던 것의 반동에서인지 불륜을 저지르게 되었다. 이러한 일들이 겹치면서 병원은 점차 경영난에 빠지고, 이를 타개하고자 병원에 일부러 불을 질러 보험사기를 시도했다. 더 기가 막히는 것은, 남편의 불륜으로 심적 고통이 상당했을 모친 하마가 남편의 계획에 동조해서 지인에게 방화를 부탁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화 시도는 미수에 그쳤다.

결국 토쿠다 가는 히로시의 병원의 경영난과, 아들 미츠구의 끝 모를 방탕한 생활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한번에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미츠구를 살해하고 생명보험금을 수령한다는 계획을 세우기에 이른 것이다.

처음에는 독살을 시도했으나 전부 실패했다. 음식에 독을 섞는 방법은 약이 제대로 녹지 않거나 양 조절에 실패했고, 매독 치료를 가장해서 간호사에게 주사를 놓게 하려 했으나 간호사가 약물의 양에 의문을 품으면서 이마저도 미수에 그쳤다. 이 때문에 생각해 낸 방법이 바로 강도살인을 가장하는 것이었다. 모친 하마는 장녀를 범행에 가담시키기 위해 설득했다. 장녀는 처음에는 아무리 그래도 가족을 어떻게 죽이느냐며 반대했으나, 계속 돈을 요구하는 오빠 때문에 자신이 다니던 대학을 중퇴할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던 터라[4] 결국 모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11월 3일 하마와 장녀는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온 미츠구의 양 손을 결박한 뒤 식칼로 찔러 살해했다. 이후 차녀에게 강도가 들었으니 경찰에 신고하라며 막내아들과 함께 파출소로 보냈던 것이다.

4. 재판 결과

히로시와 하마, 장녀는 12월 6일 모토후지 경찰서에 소환되었다. 히로시는 범행을 계속 부인했으나 3일째 되던 날 장녀가 범행을 자백했고, 히로시와 하마 부부는 살인과 살인미수 및 사기죄, 장녀는 살인 및 살인미수죄로 기소되었다.

1937년 7월 19일 1심 재판에서 히로시는 사형, 하마는 무기징역, 장녀는 징역 6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하마와 장녀는 항소하지 않아 형이 확정되었으나, 히로시는 무죄를 주장하며 항소했다. 그러나 1938년 12월 23일 히로시 측의 항소는 기각되었고, 히로시는 종전 후 가출소한 뒤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5. 그 외

이 사건은 다자이 오사무가 1942년에 발표한 <불꽃놀이>라는 소설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는데, 이 소설은 전시체제 하에서 부적절한 작품이라는 이유로 전문 삭제 명령이 떨어지는 바람에 종전 후인 1946년 12월에 <해뜨기 전>이라는 제목으로 바뀌어 발표되었다.
[1] 파출소를 찾아 신고한 사람은 차녀와 막내아들이었다.[2] 現 사할린주 포로나이스크[3] 당시 대졸 초임이 70엔이었던 시기였고, 6만 6천엔은 현재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약 1억 수천만엔 상당에 해당하는 액수다. 또한 당시는 아직 생명보험이 보편화된 시기가 아니었다.[4] 당시 미츠구가 장녀에게 받아간 금액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장녀가 대학 중퇴 직전에까지 몰릴 정도였다는 것으로 보아 어지간한 대학교 학비를 상회하는 큰 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