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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21:11:30

미시마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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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멤버3. 사건 전개4. 연설문5. 사망

1. 개요

三島事件(みしまじけん)

1970년 11월 25일에 일본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헌법 개정과 자위대 궐기를 주장하며 인질극을 벌이다 할복한 사건. 그가 회장으로 있던 조직 다테노카이의 이름을 따서 다테노카이 사건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은 저명한 문학인이었던 미시마의 명성이나 연설보다는 근현대에서 할복이라는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1]

2. 멤버[2]

3. 사건 전개

1970년 11월 25일 미시마 유키오는 다테노카이 멤버 4명과 이치가야에 있는 육상자위대 동부 방면 총감실을 방문했다. 명목은 우수 대원의 포상이었지만 그곳에서 총감인 육장 마시타 카네토시(益田兼利, 1913 ~ 1973) 총감과 이야기를 나누던 유키오는 자신이 가진 명검 세키노 마고로쿠를 마시타에게 자랑하듯 보여주었다. 마시타가 칼집에 손을 댄 순간 다테노카이 멤버들이 그를 포박해 인질로 삼았다.

소란이 일어나자 자위대 간부 8명이 사태를 파악하려고 총감실로 들어가려고 하자 이들은 일본도로 맞서 쫓아냈다. 간부 중 어떤 이는 심각한 장애를 입을 정도로 손목에 부상을 입기까지 했다.



당시 영상

이후 유키오는 모여든 자위관들과 언론인들을 상대로 30분간 연설을 하겠다고 나서서 발코니로 나가 헌법을 개정하고 자위대가 궐기할 것을 주장하는 일장 연설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자위대 간부들과 조사들은 "자위대하고 뭐 아무 상관도 없는 일개 작가가 왜 나서서 설치냐"라고 불만을 터트리거나 일부는 "왜 점심 때 쳐들어와가지고 밥도 못 먹게 난리냐", "비겁하게 총감님을 인질로 잡다니"라는 등 미시마의 연설에 온갖 비난과 야유를 터트렸다. 유키오의 연설 내용 자체에 동감하지 못하는 측면도 있어서 일부에선 "머리 좀 식히쇼!"라고 하거나 바보라고 하는 등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더군다나 헬리콥터 소리까지 겹쳐서 처음 30분을 연설하겠다고 선포한 유키오는 결국 7분 만에 연설을 접었다.

당시는 종전된 지 겨우 25년 정도 지난 시기였으므로 제국주의 시기 일본군의 폐해를 직접 경험한 세대들이 많았다.[3] 미국도 그와 관련해 일본이 제국주의 부활 같은 소리를 그것도 병력을 동원해서 한다면 경고 수준이 아니라 맥아더의 원래 계획처럼 농업국가로 돌려놓으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런 시대에 대놓고 말도 안 되는 극우적인 주장에 동조한다는 건 자위대로서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자위대는 정치적 중립에 대해 강조하고 계급 명칭에서 관(官)을 사용하는 등 군대색을 배제하여 군대보다는 경찰에 더 가까운 조직이다. 자위관들도 월급 받는 공무원이기 때문에 전부 지원해서 온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자위대를 군으로 바꾼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주장일 뿐이다.

상식적으로 식사 시간 동안 잠시 업무에서 벗어나 편히 밥 좀 먹고 쉬려는데 군대 코스프레 하는 외부인[4]한테 갑자기 지휘관이 인질로 잡히고 칼에 맞아 심한 부상을 입은 대원까지 나온 상황에서 소란의 원흉이 당장 쿠데타를 하자고 외쳐대는 상황이었다.

유키오의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본 일본의 작가 노가미 야에코(野上彌生子)는 "너무 비통하다. 미시마 씨에게 마이크를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 게게게의 키타로의 작가로 잘 알려진 만화가 미즈키 시게루는 "자위관들이 미시마의 연설을 듣기 싫어한 것은 전후의 개인주의향락주의 탓"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지만…[5]


미시마 - 그의 인생의 엔딩씬. 이 사건을 자세히 묘사했고, 중간중간 그가 행했던 기행들, 작품세계도[6] 보여준다. 다만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잔인한 장면이 나오니 주의. 참고로 미시마 역을 맡은 인물은 일본의 배우 오가타 켄(緒形拳, 1937~2008)[7]이 분했다.

4. 연설문

이하는 연설 전문. <>속의 글은 그가 떠드는 군중들에게 호통치는 대목이고 [ ]는 자위대원들의 항의다.
"이 상황에서 내가 자위대에 이야기해서 유감스럽다. 그러나 나는 자위대라는 존재를, 자위대를 믿었다. 일본은 경제적 번영에 몰두하여 마침내 정신적 공황에 빠지고, 정치는 모략(謀略)과 기오심(欺傲心)이………. 이것이 일본이다. 자위대만이라도 일본의 정신을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자위대라는 존재에 ………."
《조용히 들어라! 조용히 들어!》

"자위대가 일본의………, 일본의 큰 뿌리(大本)를 고쳐서 나쁠 것은 없다."

"나는 이러한 현실을 느꼈다. 일본 근본이 왜곡되어 있다. 아무도 이 현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일본 근본이 왜곡되어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그래서 자위대가 일본 왜곡을 바로 고쳐야 한다. 그래서………."

《조용히 들어라! 조용히 들으라고!》

"그 때문에 나는 자위대를 응원했다."

《조용히 하라고 했는데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겠나? 조용히 해라!》

"그래서 말인데, 지난해 10월 21일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지난해 10월 21일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지난해 10월 21일, 신주쿠에서 반전 데모가 일어났는데 경찰력에게 완전히 제압당했다. 그 일을 목격한 날에 나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이런다고 헌법이 개정되지 않을 거라고 느꼈다."

"왜냐하면 소위 자민당이라는 것이, 자민당이라는 것이 경찰 권력을 가지고 어떤 데모든 진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기 때문이다."

"치안 출동은 필요 없어졌다. 치안 출동이 필요 없어졌단 말이다. 치안 출동이 필요 없어졌다는 것은 곧 헌법 개정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논리가 이해가 되는가?………."

"제군은 이미 지난 해 10월 21일 이후로 헌법을 지키는 군대가 되었다. 자위대가 지난 20년간 피와 땀으로 기다린 헌법 개정 기회는 사라졌다. 헌법 개정은 이미 정치 프로그램에서 제외되었다. 마침내 사라지고 말았다. 왜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는가?"

"나는 지난해 10월 21일부터 1년 동안 자위대가 화내기를 기다렸다. 이제는 더 이상 헌법 개정 기회는 없다! 자위대가 국군이 되는 날은 사라졌다! 건군 본의는 없다! 그것이 가장 개탄스럽다. 자위대에게 건군 본의는 무엇인가? 일본을 지키는 일. 일본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일본을 지킨다는 것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와 문화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잘 들어라! 잘 들어! 조용히! 조용히 해! 얘기를 들어라! 여기 남자 한 놈이 목숨을 걸고 제군에게 외치고 있다. 알겠는가? 알겠는가?》

"지금 일본인이 일어나지 않으면, 자위대가 일어나지 않으면 헌법 개정은 없다. 제군은 영원히 미국 군대가 되고 만다."

"시빌 컨트롤(civil control)……… 시빌 컨트롤에 중독되었다. 시빌 컨트롤이란 새 헌법 아래에서 억압받는 것만이 다는 아니다."

"……… 그래서 나는 4년을 기다렸다. 4년을 기다렸단 말이다. 자위대가 일어나는 날을……… 그랬던 자위대의……… 최후의 30분, 최후의 30분을……… 기다리겠다."

"제군은 무사(武士)다. 제군은 무사(武士)다. 무사(武士)가 자기를 부정하는 헌법을 왜 지키는가? 왜 자기를 부정하는 헌법을 위해 일하고 자기를 부정하는 헌법에 순종하는가? 헌법이 존재하는 한, 제군은 영원히 구제받지 못한다."

"지금 헌법은 끝없는 정치적 모략을 통해 제군이 합헌(合憲)인 것처럼 위장했으나, 자위대는 위헌(違憲)이다. 자위대는 위헌(違憲)이다. 너희들도 위헌(違憲)이다. 마침내 자위대가 헌법을 지키는 군대가 되었다는 사실을 왜 인식하지 못하는가! 나는 제군이 그것을 부정하는 날을 오랫동안 기다렸다. 제군은 사소한 것에 눈이 어두워 진정 일본을 위해 들고일어날 때를 놓쳐버렸다."

【그럼 왜 우리 총감(總監)님에게 부상을 입힌 건가?】

"저항했기 때문이다. 제군이 일본을 허수아비로 만든 헌법에 순종했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제군 중에 한 사람이라도 나와 함께 들고 일어날 놈은 없는가?"

"…한 놈도 없군. 좋다! 무(武)는 칼이다. 자신의 사명이지………."

【그래도 무사인가! 그래도 무사인가!】

"이제 제군이 헌법 개정을 위해 들고 일어나지 않겠다는 것을 충분히 알겠다. 이것으로 자위대에게 품은 내 꿈은 사라졌다. 여기서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겠다."

"천황 폐하 만세! 천황 폐하 만세! 천황 폐하 만세!"

5. 사망

경시청 검사결과에 따르면 계획한 대로 할복 자살을 결심한 유키오는 상의를 벗고 자신의 배에 단도를 찔러넣었다. 원래는 할복하고 배에서 흘러나온 자신의 피로 유서를 쓸 생각이었는데, 고통이 너무 심해서 글씨를 쓰는 것은 무리였다고 한다. 그 대신 칼로 배를 가른 뒤 스스로 내장을 꺼냈고, 이 고통을 이기려고 혀를 깨물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실 할복 자살은 미디어에서 비장하게 묘사하는 것과는 전혀 달라서 쉽게 시도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일단 배를 단도로 찔러넣고 내장을 손상시켜야 하는 과정 자체가 두꺼운 지방층을 관통해야되는 것이라 웬만한 정신력이 있는 사람들도 할복자살은 시도하기 어렵다. 웬만한 일반인들은 조그마한 압정에만 찔려도 아파서 데굴데굴 구른다는 것을 잘 생각해보자.

그리고 할복한 유키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유키오의 카이샤쿠로 예정된 모리타 마사카쓰는 유키오의 목을 내리치는 데 두 번이나 실패했다. 결국 검도 유단자인 고가 히로야스가 유키오의 목을 내리쳤다.[8] 이후 유키오를 가장 믿고 따르던 충신 모리타도 곧바로 미시마를 따라서 할복을 시도하고 "어서 목을 쳐!" 소리치고 나서 목이 내려쳐 사망했다.

구글 검색 등 통해 볼 수 있는 유키오의 시신이나 자살 현장 사진을 보면 흑백 사진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처참함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당사자인 유키오는 그저 편안한 표정을 짓고 최후를 맞았지만, 할복 현장은 완전히 흥건한 피바다에다 엉망이 된 시신이 뒹구는 바람에 지옥 그 자체였다. 이후 참수된 유키오의 머리와 시신을 봉합한 뒤 장례를 치렀다. 유키오의 머리(열람주의)

사건 이후 일본에서는 유키오가 할복한 이유를 두고 갖가지 분석이 제기되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이야 미시마가 외친 대로 일본의 평화헌법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지만 유키오 자신도 늙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서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유키오는 "내가 나가이 가후(1879 ~ 1959)[9]처럼 늙는다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하겠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또는 영웅주의에 심취해서 그랬다는 분석도 있다. 어떤 글에 따르면 미시마는 "사이고 다카모리는 50살에 영웅으로 죽었다. 지금의 나이(45세)라면 나도 영웅의 최후 연령에 도달한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라고 적었다고 한다. 그를 긍정적으로 보는 쪽은 일본과 일본인을 향한 애정이 자기애를 초월한 달관적인 경지에 도달해서 죽음으로 표현했다고 주장한다.

사건 이후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총감실 현장을 방문했다. 유키오와 절친이었던 이시하라 신타로[10]도 현장을 찾긴 했지만 총감실까지 들어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미시마가 자살할 때 쓴 세키노 마고로쿠제2차 세계 대전 참전자로 한때 미시마와 검도로 친분을 쌓았던 후나사카 히로시에게서 받은 것으로 미시마 사건 3년 뒤인 1973년 후나사카는 세키노 마고로쿠-미시마 유키오, 그 죽음의 비밀(関ノ孫六―三島由紀夫、その死の秘密)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순박했던 미시마와의 추억을 회고하는 동시에 미시마가 어떻게 그러한 인간이 되었는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미시마 사건을 계기로 1973년에 자위관 복무선서에 '일본국 헌법 및 법령을 준수하며'라는 문장이 들어갔다. 자위대 내부에서 미시마의 의견 자체에는 공감하는 자위대원들이 상당수 나왔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는 위헌의 여지가 있는 자위대의 입장상 주저하고 있었지만 미시마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그 덕분에 자위대가 헌법 준수를 확실히 하게 된 것이다.

[1] 실제로 당시 해외에선 이 자살을 통해 일본 내에 군국주의 부활 여론이 부상하는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올 정도였다. 다만 후술하듯 일본 군부조차도 미시마의 연설을 대놓고 비웃는 사람이 나올 정도로 미사마의 주장은 너무 허황되고 극단적이며 비현실적인지라 일본 내에서도 미시마를 깠으면 까지 대놓고 옹호하는 인물은 드물었다.[2] 나이는 사건 당시 기준.[3] 당시에는 30대까지만 해도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경험했고, 전후에 태어난 아이들 역시 부모형제로부터 전쟁의 참상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현재는 전쟁의 참상을 겪은 이가 노년층이고 그 아이들이 이미 중장년층이어서 이들을 제외하면 거의 옛날 얘기 취급받긴 한다.[4] 심지어 미필이다.[5] 다만 미즈키 시게루는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위안부 증언 만화까지 그린 양심적인 인물이다. 미시마가 그런 사상을 갖게 된 동기는 이해한 듯. 물론 미시마의 사상까진 동의하지 않았다.[6] 대표적으로 금각사.[7] 1983년나라야마 부시코나 2007년작 NHK 대하드라마 풍림화산에서 우사미 사다미츠 역을 맡는 등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한 일본의 원로 배우이며, 장남 오가타 간타와 차남 오가타 나오토도 모두 배우이다. 여담으로 한국의 배우 이순재보다 오가타가 세 살 연하다.[8] 결국 히로야스는 자살 방조 등의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모범수로 가석방되었다. 1947년생으로 현재도 생존 중이다.[9] 일본의 대표적인 관능 소설가.[10] 지금은 극우 정치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소설가로 명망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