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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 1899년 12월 3일 | ||
히로시마현 도요타군 요시나촌 (現 히로시마현 타케하라시) | |||
사망 | 1965년 8월 13일 (향년 65세) | ||
도쿄도 | |||
재임기간 | 제58대 내각총리대신 | ||
1960년 7월 19일 ~ 1960년 12월 8일 | |||
제59대 내각총리대신 | |||
1960년 12월 8일 ~ 1963년 12월 9일 | |||
제60대 내각총리대신 | |||
1963년 12월 9일 ~ 1964년 11월 9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친인척 | 전처조부 히로사와 사네오미[1] 손녀사위 테라다 미노루 | |
학력 | 우미코우토 중학교 (졸업) 제5고등학교[2] (졸업) 교토제국대학 법학부 (법학 / 학사) | ||
정당 | |||
파벌 | 굉지회 | ||
지역구 | 히로시마 2구 | ||
의원 선수 | 7 (중) | ||
의원 대수 | 24, 25, 26, 27, 28, 29, 30 | ||
약력 | 고등문관시험 합격 대장성 관료 중의원 의원 제6대 자유당 정무조사회장 제6대 자유당 간사장 제2·7·19대 통상산업대신 전일본거합도연맹 설립자 및 초대 회장 제55·61-62대 대장대신 제4대 자유민주당 총재 제58-60대 내각총리대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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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경제관료 출신 정치인. 제58~60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다.내각총리대신 재임 중 소득배증 정책을 실시하여 일본 고도경제성장의 기초를 다졌으며, 후임 내각총리대신인 라이벌 사토 에이사쿠와 함께 자민당의 최전성기를 열어준 내각총리대신이다.
2. 생애
2.1. 내각총리대신 이전
교토제국대학(現 교토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1925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대장성 관료를 시작으로 공직에 입문하였다. 친구였던 사토 에이사쿠와 마찬가지로 이케다 또한 출세와는 거리가 먼 부침많은 관료 생활을 보내지만[3] 실력을 키우고 인내심 있게 기다려 대장성 내 관료 최고의 자리인 사무차관까지 오르게 된다. 이후 퇴직하고 곧 정계에 입문, 요시다 시게루의 오른팔이자 경제 참모로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요시다 내각의 주요 각료로서 정책(경제, 산업 분야)에 관여하였다.1949년에는 3차 요시다 내각의 대장대신, 통상산업대신으로 재직하면서[4]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닷지 라인이라는 강력한 긴축재정정책을 실행하였다. 때문에 경제가 일시적으로 큰 불황을 겪었는데[5] 이런 상황에서 이케다 대신은 다음과 같은 실언을 한다.
위 발언의 출처는 야당 의원과의 질의응답인데, 실제 발언을 정확히 살펴보면 "부실한 기업은 속히 청산해서 다른 기업의 발목을 잡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고, 서민들이 보리를 먹게 되더라도 경제기조를 바꿔서는 안된다"는 요지로 언론에 소개된 것과는 의미가 상당히 달랐다. 그러나 이미 언론에서 대서특필되어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자아냈고 요시다 내각의 지지율을 크게 깎아먹는데 일조한 바 있다.
사토 에이사쿠와는 구마모토 제5고등학교 동창이며, 요시다 시게루의 휘하에서 정치 생활을 해낸 요시다 스쿨 세대. 그러나 내각총리대신 자리를 두고 동기이자 친구[7] 따위의 감정은 젖혀둔 채 사토가 내각총리대신 자리에 올라가는 시절은 지키려는 이케다와 뺏으려는 사토의 권력투쟁으로 유명했다.
2.2. 내각총리대신 시절
내각총리대신 취임 후 |
내각총리대신으로 집권하던 시기 두 번에 선거가 있었는데 이케다가 수상 겸 당 총재로서 이끈 자유민주당은 득표율 50% 이상을 모두 넘겼다. 특히 제 29회 중의원 선거에서 이루어낸 296석은 자민당이 현재까지 깨지못하고 있는 최대 의석 점유율이다.
이케다 하야토 내각총리대신 재임 기간 동안 일본의 GATT(現 WTO) 가입(1963년), IMF 가입(1963년) 및 총회(1964년) 개최, OECD 가입(1964년), 도쿄 올림픽 개최(1964년)가 일어났다.
도쿄 올림픽 폐막 다음날인 1964년 10월 25일 건강 악화로 사의를 표명하여(실제 퇴진은 11월 9일) 그대로 국립암연구센터에 입원한 후 의외로 차기 자민당 총재로 라이벌이었던 사토 에이사쿠를 지명했다.[10] 그리고 후두암 진단을 받아 치료를 했지만 1965년 8월부터 병세가 악화되어 결국 사망하였다(향년 65세). 라이벌 사토에게 내각총리대신직을 스스로 넘겨준걸 보면 어쩌면 죽음을 예감했을지도 모르겠다.[11]
그의 죽음 이후로도 이케다 가문의 정치는 데릴사위인 이케다 유키히코 전 외무대신, 그리고 외손녀사위인 테라다 미노루 총무대신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네덜란드에서 (1962년) |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49 | 제2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히로시마 2구 | | 61,072 (22.8%) | 당선 (1위) | 초선 |
1952 |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90,091 (29.9%) | 당선 (1위) | 재선 | |
1953 |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8,387 (25.0%) | 당선 (1위) | 3선 | ||
1955 |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2,191 (21.9%) | 당선 (1위) | 4선 | ||
1958 |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83,913 (28.6%) | 당선 (1위) | 5선 | |
1960 |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3,817 (28.2%) | 당선 (1위) | 6선 | ||
1963 |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4,507 (24.2%) | 당선 (1위) | 7선[12] |
4. 기타
- 일본 역대 내각총리대신들 중 재계 영향력이 가장 강한 사람[13]이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한 자금 동원력도 발군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오늘날 금권정치의 대명사로 통하는 기시 노부스케나 다나카 가쿠에이도 이케다에는 못 미친다는 평가도 있다.
- 내각총리대신이 되고 굉장히 효율적으로 언론을 통해 자신과 경제 정책 등을 홍보하며 언론인과 기자들과도 격의없이 잘지내 이들은 이케다 하야토에게 호의적이었다. 라이벌이었던 사토 에이사쿠가 언론인과 기자들을 싫어했고 내각총리대신이 되어서도 언론과의 사이도 굉장히 안좋았던 것과 달리 이케다 하야토는 이전 국무대신 시절과는 다르게 언론에 중요성을 인식하고 기존과 다른 홍보 전략을 잘 사용하여 인식 전환의 유연성을 가지고 사토 에이사쿠 보다도 먼저 내각총리대신이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14]
- 내각총리대신이 되고 마음가짐을 기존과 다르게 하기위해 재직중 좋아하는 골프도 치지 않았으며 수상관저에서 진행하는 파티에서 나오는 진수성찬 음식들을 초청받은 사람들만 먹게하지 않고 따로 포장하여 가족들까지 챙겨주어 가지고 가도록 하는 등 최대한 검소하게 지내려 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 내각총리대신이 아닌 각료 국무대신인 대장대신 재직 시절에는 굉장히 자신의 주장을 자신있고 스스럼 없이 관철시켰는데 위에 나온 중소기업 도산이나 보리 사건 예시처럼 당시 의회에서 비판 받은적도 있지만 끝까지 자신의 장점인 경제분야에 대해 설명하고 좋은 평가를 받은 사례도 있다.
그 순간 질문한 야당 의원도, 듣고 있던 여당 동료 의원, 각료들도 이 발언에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고 일순간 의회 내 정적이 흘렀다고 한다.[15] 이케다 하야토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이 소신이었던 자유 무역 관점에 대해 한마디로 답변을 마치고는 담담한 표정으로 자기 자리로 가버렸다. 이전 보리 발언처럼 큰 비판이 있을 수 있겠구나 했지만 애매한 말투로 요리조리 피해가는 일반적인 관료 출신 정치가들과는 궤를 달리 했다고 생각해 오히려 국민들로 하여금 일반적인 관료 출신 정치인이 아닌 경제통 정치가로서 이케다 하야토를 다시 보게끔 한 긍정적 사례이다.[16]
- 재정, 세무 전문 대장성 관료 출신답게 수치화를 통해 근거를 마련해 정책을 입안했으며 경제 정책은 직접 자신이 계산까지 하여 국민과 기자들에게 상세히 설명해 정책 신뢰성과 명확성을 높이려고 노력했다.
- 일본에서 실시된 각종 역대 전후 내각총리대신 평가 여론조사에서 요시다 시게루, 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 다나카 가쿠에이,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같이 높은 순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 당시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와 함께 자유민주당 내 정치적 라이벌로 뽑힌 오노 반보쿠는 엘리트 관료 출신 정치가를 정말 싫어하기로 유명했다. 그 이유로는 자신이 관료 출신이 아닌 처음부터 정치로 바로 진입한 인물이었고 엘리트 관료들의 특징인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며 자신의 주장을 애둘러 표현하려는 특징을 오노는 굉장히 싫어했던 것이다. 하지만 엘리트 관료 출신인 이케다 하야토에 대해서 만큼은 예외였다. 위에 나온 사례인 레몬 발언 사건처럼 "이케다 하야토 군은 엘리트 관료 출신임에도 정말 소심하지 않다. 세상을 아는 친구라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라이벌인 그를 절찬한 바 있다.
- 프랑스 샤를 드골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소니의 최신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자랑하는둥 상황과 맞지 않는 딴소리를 한 덕분에 '트랜지스터 라디오 세일즈맨'이란 비아냥을 들었다. 드골이 측근에게 한 말이었는데 반드골 성향이었던 르 피가로에 누설되었고, 이 기사가 다시 일본 언론에 의해 보도되면서 이케다의 체면은 구겨진다. 그런데 이런 전후 사정을 모르는 한국 내 칼럼니스트들이 반도체 세일즈에 앞장선 내각총리대신으로 미화하는 기사를 쓰는 촌극을 빚어내기도 하였다.
- 1962년 10월 21일, 일본 가나가와현 오다와라시에서 열린 도덕재무장운동(MRA, Moral-Re-Armament) 행사 후 대담에서 김종필이 '일본이 포츠담 선언(1945년 7월 26일)을 빨리 수용했더라면 소련이 대일선전포고(1945년 8월 8일)를 급조할 일도 없었고, 소련군이 한반도로 내려올 일도 없었기 때문에 한반도의 분단에는 일본의 책임도 어느 정도 있다'라는 논지의 말을 하자 이케다 하야토가 김종필의 나이를 묻더니(그 당시 김종필의 나이는 서른여섯)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시기의 지사(志士)를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종필이 정확히 누구를 비유하는 거냐고 묻자 '오쿠보 도시미치'라고 대답했다.[17]
- 1963년에 일본공산당의 노사카 산조의 조선 인민에 대한 비도덕적인 행위에 대해 내각총리대신은 진정으로 반성하고 있는가에 대한 답변으로 "조선을 병합한 이후 일본의 비행에 대해서는 나는 견문이 적어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합니다."라고 답변해서 논란을 일으켰다.
- 술과 담배를 매우 좋아했고 술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다 좋아했지만 그 중에선 위스키를 가장 좋아했다. 특히 닛카 위스키를 좋아했는데, 닛카 위스키 창업자 타케츠루 마사타카와는 중학교 동창 사이여서 주변 지인들에게 닛카 위스키를 권했다고 한다. 그리고 담배피는 사진이 굉장히 많을 정도로 애연가였다. 죽기 직전까지 금연을 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결국 후두암에 걸렸다.
- 요시다 내각의 대장대신 시절 한 해 예산 편성이 끝나면 이케다 하야토는 예산 편성 담당 부서인 대장성 주계국의 직원 한 사람, 한 사람과 회식에서 술잔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까탈스러운 다른 정치가 각료들과는 달리 앞서 설명에 있듯이 주량이 엄청나고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여서 이케다가 맡은 내각 성, 청의 분위기는 늘 좋았다고 한다.
- 핵무장론자였다. 물론 내각총리대신 때는 아무런 말도 안 했지만 사석에서 특히 술이 들어가면 국가 안보 차원에서 핵무기가 필요하다고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18]
- 다나카 가쿠에이가 양녀의 혼처를 알아보러 다닌다는 걸 알고 이케다가 자신의 조카를 소개해줘 둘을 결혼시켰다. 고로 이케다 하야토와 다나카 가쿠에이는 사돈지간이 된다.
- 히로시마 카프의 광팬이었다. 만년 하위 클래스였던 구단 순위에 짜증내며 당시 4번 타자였던 토요타 야스미에게 직접 전화를 걸을 정도였다.
- 이케다 하야토의 정치 활동에 관해서는 그와 관련된 서적 중에 《이케다 하야토 정치의 계절에서 경제의 계절로》가 출판되어 있으며 가볍게 참고하기 좋다.
5. 둘러보기
[1] 조슈 출신 유신십걸[2] 1949년 신학제 개편 때 구마모토대학에 통합되었다. 평생의 라이벌 사토 에이사쿠 총리와 동문.[3] 대장성 내에서 비주류였던 교토제국대학 출신이었던 데다가(대장성은 외무성, 내무성과 함께 일본 제국 3대 요직이었으므로 주로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경제학부 출신이 많았다.) 건강 또한 매우 좋지 않았다.[4] 원래 요시다는 자신의 도쿄제대 이래의 절친이자 재계의 원로였던 미야지마 세이지로(宮島清次郎)를 대장대신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미야지마가 1년생 의원이던 이케다를 불러 대장대신 면접을 본 후 요시다에게 강력히 천거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미야지마는 이후로도 이케다를 매우 높이 평가하여 재계의 후배들과 이케다를 연결하였고 이것이 이케다가 경제계에 거대한 영향력을 구축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5] 이를 닷지 불황이라고 한다. 닷지 불황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해소된다.[6] 이 발언은 이케가미 료이치의 만화 작품 생추어리에서도 인용되어 나온다. #[7] 이케다가 정계에 입문한 계기가 사토의 추천이다. 이케다 하야토가 총재로 선출된 직후 사토 에이사쿠를 찾아가 고마워하며 차기를 약속했다고 한다.[8] 일본 최후의 19세기 태생(1899년생) 수상이었다.[9] 당시 대장대신(現 재무대신)이던 미즈타 미키오가 계획 실무 책임인으로 추진하고 미야자와 기이치가 1962년 경제기획청 장관으로 실무 계획 구성을 참여하였다.[10] 위키백과에선 이를 이케다 재정이라 부른다.[11] 이케다 하야토는 사토 에이사쿠가 총재로 지명되었다는 소식을 비서관 이토 마사나리로부터 듣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잘됐다, 사토라면 내가 편하지' 라고 말했다고 한다.[12] 1965.08.13 사망[13] 특히 이케다와 가까웠던 경제인 4명(나가노 시게오 신일본제철 회장 겸 일본상공회의소 회장, 고바야시 아타루 일본개발은행 총재, 사쿠라다 다케시 닛신방적 회장 겸 일경련 회장, 미즈노 시게오 산케이 신문 회장)을 가리켜 재계사천왕이라 할 정도였고 이들을 중심으로 경제계가 뭉쳐 이케다를 지원하였다.[14] 이케다의 전임자인 기시가 중도 퇴진한 만큼 곧바로 동생인 사토 에이사쿠가 총재선거에 나서기 힘들었던 면도 있다.[15] 자기 고향이자 지역구의 농산물을 맛없다고 했으니 정치가로서는 다음 선거에서 표가 떨어질 수도 있는 치명적 발언이다.[16] 이케다 하야토는 단 한마디로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가가 아니라 경제만큼은 소신있는 경제통 정치가라는 인상을 심어준 사례로 유명하다.[17] 김종필 증언록[18] 참고로 이케다의 고향과 지역구가 히로시마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