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카 가쿠에이 | 후쿠다 다케오 |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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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80년대, 일본 현대정치사상 가장 치열했던 당시 자민당 의원이었던 다나카 가쿠에이와 후쿠다 다케오의 15년여 간의 권력 투쟁을 일컫는 말이다. 가쿠에이(角榮)의 "각(角)"과 후쿠다(福田)의 "복(福)"을 따서 각복전쟁(가쿠후쿠전쟁)이다.
1955년 창당 때부터 70-80년대 당시까지 30년이라는 기간 동안 일본의 여당으로 독주하던 자민당이었기 때문에 자민당의 수장인 총재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의원내각제 국가인 일본에서 나라의 수장인 총리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당내 권력 투쟁에서 승리한 다나카는 록히드 사건으로 인해 총리직에서 퇴임했음에도 20년이 넘게 자민당의 실세 자리를 차지한 반면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후쿠다는 총리 직을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한 채 정계에서 대부분의 기간을 비당권파로 보냈다.
그렇기에 각복전쟁은 단순한 당내의 권력 투쟁을 넘어선 행정부를 차지하기 위한 이권이 걸린 총성없는 전쟁이었다. 좀 더 긴 관점에서 보면 일본의 보수본류가 보수방류의 치열한 견제 속에도 권력을 장악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이 점점 정책, 가치관 대결보단 머릿수와 돈 싸움으로 흐르는 경향을 보이지만 경제 정책에선 결의 차이가 컸는데 다나카가 수출을 중시하면서도 '열도개조론'과 토건으로 대표되는 확장재정주의자였다면 후쿠다는 내수를 중시하는 재정긴축주의자였다. 다나카의 정책이 석유 파동으로 비틀거릴 때 잠시나마(1973~74년 7월) 대장대신이 된 것이 후쿠다였다. 때문에 어찌보면 일본판 포퓰리즘과 관료 엘리트주의의 대결이라고도 볼 수 있다.[1]
밑바닥부터 노력을 통해 올라온 자수성가형 정치인이었던 다나카와 명문가 출신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은 후쿠다의 출신 및 성향의 차이 탓에 어느 정도는 계급투쟁적인 성격도 있었다고 분석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어찌됐든 본질은 자민당 내 권력 투쟁이긴 했다.
2. 경과
2.1. 1라운드
이케다 하야토에게 총리직을 물려받아 6년여간 총리로 장기집권한 사토 에이사쿠는 '2기 6년에 걸쳐 총리했으니 이제 슬슬 후계자에게 물려주고 나는 물러날까'라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일단 사토는 후계자로 친형 기시 노부스케의 파벌인 세이와 정책연구회를 물려받은 후쿠다 다케오를 생각했지만 사토 내각에서 요직을 맡으며 무시할 수 없이 성장한 다나카 가쿠에이의 세도 만만치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한편 다나카는 1970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사토가 후쿠다에게 총리직을 물려줄 것을 걱정했다. 그러자 다나카는 자민당 부총재였던 가와시마 쇼지로와 함께 "사토 총리님이 계속 하셔야죠"라고 사토에게 3선 도전 무드를 조성했다. 이에 맞서 후쿠다도 "님 제발 저한테 총리직을 물려주세요"하고 사토에게 간청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그 사이에 다나카는 사토파의 의원 3분의 2를 자기 사람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1972년 총재 선거를 앞두고 사토는 다나카와 후쿠다를 불러 2위를 한 사람이 1위를 밀어주라고 제안해 둘에게 약속을 받았지만 후술할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둘 다 약속을 지키지는 않았다.
결국 열린 총재 선거에서는 다나카와 후쿠다 외에 오히라 마사요시, 미키 다케오가 출마한 가운데 다나카와 후쿠다는 156:150으로 불과 6표차로 결선 투표로 가서 다나카와 후쿠다의 1:1 대결이 되었다. 다나카는 혹시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출마하면 표가 분산되어 후쿠다에게 패할 것을 염려한 나머지 나카소네에게 "7억엔 줄 테니까 이거 먹고 떨어져"하여 나카소네의 불출마를 성사시켰고 결선 투표에서는 282:190으로 다나카가 승리하여 사토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다나카가 오히라파 등에게 현질을 시전한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2.2. 휴전
1974년 일본의 언론인 다치바나 다카시가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 - 그 금맥과 인맥'\이라는 제목으로 문예춘추 11월 호에 다나카의 여비서 사토 아키코를 겨냥한 논평을 발표하여 다나카의 금권정치에 문제를 제기하자 다나카는 여론의 거센 반발을 받고 총리직을 사임했다.다나카는 후임 총리로 외무대신이었던 오히라 마사요시를 지지하며 오히라를 총리로 내세우고자 작업하였지만 당시 부총재였던 시이나 에쓰사부로가 "뇌물수수 의혹 때문에 밀려났는데 차기 총재 선거에서 이런 식으로 관여하면 정치생명을 유지하기 힘들다"며 다나카에게 노골적으로 경고하였다. 이러한 사정으로 결국 주류 파벌이 아닌 미키가 총리가 되었다.
1976년, 록히드 사건이 터지면서 미키 총리가 다나카를 구속시키려고 하자 다나카는 이에 격렬하게 맞섰다. 결국 다나카는 라이벌이었던 후쿠다에게 연합을 제안했고 후쿠다도 여기에 가세해서 다나카, 후쿠다, 오히라의 연합으로 미키를 끌어내리는 데 성공했다.(미키 내림)
이후 미키 총리의 후임 자리를 놓고 후쿠다는 오히라 마사요시와 연대했는데 이 과정에서 밀약을 맺었다.(오오후쿠 밀약 사건) 바로 후쿠다가 앞서 2년 간 총리를 한 후 오히라에게 총리직을 넘긴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되어 총리가 된 후쿠다는 라이벌이었던 다나카와 연대한 가운데 미키파와 나카소네파가 연대한 비주류에 맞서서 국정을 운영했다. 후쿠다 다케오의 이미지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1977년 참의원 선거에서 사회당 내 계파 갈등으로 일부 계파가 분당되는 호재로 예상보다는 나쁘지 않은 성적표를 거두었다.
2.3. 2라운드
1978년 후쿠다는 자민당 총재 임기를 마쳤다. 원래 오오후쿠 밀약대로라면 오히라에게 총리직을 넘겨줘야 했지만 후쿠다는 까짓거 재선하지 뭐라며 오오후쿠 밀약을 무효화시켜 버렸다.제대로 통수 맞은 오히라는 뿔이 나서 총재 선거 출마를 선언했고 다나카는 오히라를 지원하면서 각복전쟁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표면적으로는 후쿠다-오히라의 전쟁이었지만 오히라의 뒤에 다나카가 있었기 때문에 각복전쟁 2라운드가 된 셈이었다.
다나카에게도 이유가 있었는데 자칫 후쿠다를 내버려 뒀다간 후쿠다가 언제 록히드 사건을 빌미로 자신을 쳐낼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게다가 후쿠다와 오히라가 연대한 상황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는데 둘의 연대가 깨지면서 얼씨구나!라면서 뛰어들었다.
이에 다나카는 자신의 파벌에 속한 다케시타 노보루에게 대외비이던 당원명부를 빼돌릴 것을 지시했고 다케시타가 당원명부를 빼돌리자 이것을 보고 고토다 마사하루가 다나카파 의원들의 비서들을 총동원해 당원들의 집집마다 방문하고 전화로 지지를 호소하면서 당초 여론조사로는 후쿠다가 압도적으로 오히라를 앞서는 것으로 나왔지만 막상 자민당 총재 예비선거의 결과는 748:638로 오히라가 승리를 거두었다.
물론 예비선거였기 때문에 후쿠다파에 속했던 모리 요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2]는 본선에 출마해서 오히라를 이기면 됩니다!라고 후쿠다에게 강권했지만 후쿠다는 패장은 군사를 논하지 않는 법이라면서 본선 출마를 포기했다. 그리하여 오히라는 무투표로 자민당 총재에 당선되어 오히라 내각이 탄생했고 후쿠다파는 비주류가 되었다.
2.4. 3라운드
비록 오히라가 총리가 되긴 했지만 다나카파의 대량 현질로 된 사태라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후쿠다파는 오히라 내각에 대놓고 딴지를 걸었으며 오히라도 밀약을 깬 후쿠다에게 감정이 좋을 리가 없어서 양측은 내내 으르렁거렸다.이런 가운데 1979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1976년 중의원 선거보다 1석이 적은 248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고 후쿠다 등의 비주류는 오히라의 책임론을 제기하면서 총리 사임을 촉구했다. 이에 오히라는 거칠게 맞서면서 양측의 갈등은 극한으로 치달았다. 결국 국회에서 열린 국가수반 투표에서 관례를 깨고 같은 자민당에서 오히라와 후쿠다 두 명이 후보로 나서는 사태가 발생했다.(시토카 항쟁)
오히라는 겨우 결선투표에서 후쿠다를 따돌리고[3] 69대 총리가 되긴 했지만 양측의 갈등은 극한으로 치달아서 사회당이 시위 차원에서 낸 오히라 내각 불신임 동의안을 후쿠다가 낼름 받아먹어서 비주류를 총동원해 본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불신임 동의안을 통과시켜 버렸다. (해프닝 해산)
당시 오히라는 지지율이 20%대까지 떨어진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사상 유례없는 중참 동시 선거로 정국 돌파를 시도하던 중이었는데 건강도 안 좋았던 터에 이 문제로 시비까지 붙자 엄청난 스트레스로 급성 부정맥을 일으켜 유세 도중 쓰러졌고 결국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선거가 끝난 뒤에 사망한 거라면 양자 모두 패배하는 상황으로 야당 연합으로의 정권교체가 이뤄졌겠지만 선거운동 도중이라서 오히라의 사망으로 자민당은 내홍을 멈추고 초당적으로 선거에 임해 오히라에 대한 동정 여론을 업고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2.5. 4라운드: 킹메이커 다나카, 후쿠다 최후의 역습
중의원·참의원 동시선거에서의 압승으로 자민당이 회생한 가운데 오히라 총리의 사망 등으로 오히라와 각을 세웠던 후쿠다는 총리로 나서기가 애매한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 오히라파의 중진이면서 다나카파와도 가교가 있던 스즈키 젠코가 총리로 취임하였다.스즈키는 당의 화합을 강조하면서 취임했지만 사실상 스즈키의 뒤에는 다나카가 있었고 다나카는 킹메이커 역할을 하게 되면서 일본 정치의 흑막으로 자리잡았다.
스즈키 총리가 대미관계 악화와 증세 문제로 논란을 일으키긴 했지만 자민당의 의석수가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장기집권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스즈키는 1982년 10월에 차기 총재선거에 불출마를 선언하고 다음달에 그대로 총리직을 퇴임했다.
스즈키의 퇴임에는 킹메이커 다나카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오죽하면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스즈키의 불출마 선언 1주일 전부터 차기 총리로 취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하니 말 다했다.
원래는 총재 선거를 치르지 않고 당내 타협을 통해서 차기 총리를 옹립할 작정으로 나카소네파와(그 뒤에 있는 다나카) 후쿠다파 간에 협상이 진행되었다. 이때 자민당 의원 타무라 켄은 총리직과 자민당 총재직을 분리[4]할 것을 제안하며 나카소네 총리-후쿠다 총재 체제로 가자고 제안했지만 이것이 무산되면서 결국 총재 선거가 치러지게 되었다. 다나카의 지원을 받은 나카소네와 후쿠다파의 차세대 주자인 아베 신타로가 대결한 가운데 다나카파, 나카소네파, 스즈키파의 지지로 나카소네가 당선되어 총리가 되었다.
1984년 나카소네의 임기가 끝나고 나카소네가 총재 선거에 출마해 재선을 노리자 후쿠다는 마지막 공격을 가했다. 나카소네가 총리가 될 때 스즈키파에도 입각을 보장했지만 막상 나카소네 1기 내각은 다나카소네 내각이라고 불릴 정도로 다나카파와 나카소네파가 독점해 스즈키파의 불만이 폭발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되자 스즈키는 후쿠다에게 다나카파의 2인자였던 자민당 부총재 니카이도 스스무를 총재로 옹립할 것을 제안했고 후쿠다도 이에 동의했으며 여기에 야당인 공명당, 민사당과도 연합했다.(니카이도 옹립구상) 이를 통해 다나카파를 분열시켜서 종국에는 나카소네의 총재 재선을 막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니카이도 옹립구상이 무위로 돌아가면서 사실상 후쿠다의 마지막 역습도 실패했다. 문제는 다나카파 내에서 다케시타를 중심으로 점점 다나카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심지어 아예 '창정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별도의 파벌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결국 이 일의 여파로 다나카의 입지가 크게 약해지면서 정치적 영향력은 차세대 주자들에게로 넘어가게 되는 등 다나카파의 분열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이후 다나카파의 차세대 주자였던 다케시타와 후쿠다파의 차세대 주자였던 아베가 연대하면서 길고 길었던 각복전쟁도 막을 내렸다.
3. 21세기의 각복전쟁?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다나카와 후쿠다 모두 사망하면서 각복전쟁이 더 이상 일어날 일은 없었지만 2001년 본래 후쿠다파에 속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총리가 되면서 나는 경세회[5]의 지원 없이 총리가 된 최초의 인물이라고 공언하면서 다시 각복전쟁의 불이 붙나 하는 관심이 집중되었다. 경세회는 요시다-사토-다나카-다케시타로 이어지는 족보를 가진 자민당내 주류 파벌이었기 때문에 각복전쟁 리턴매치가 성사되는 게 아니냐는 관심을 모았다. 아니나 다를까 고이즈미는 일본우정 민영화를 목적으로 중의원을 해산하고 새로 치르는 중원선에서 당총재로서 다나카의 후예 의원들을 공천권을 휘둘러 대거 숙청했고[6] 이때서야 다나카파는 정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다나카의 장녀인 다나카 마키코 외무대신과 후쿠다의 장남인 후쿠다 야스오 관방장관[7]이 고이즈미 내각의 외교정책을 놓고 대립해 각복전쟁의 재림인가라는 관심을 모으기도 했지만 두 사람이 모두 파벌의 영수는 아니었던 고로 이전의 각복전쟁과는 차원이 다르긴 하다.[8]
2007년 후쿠다 야스오가 총리가 되면서 민주당 오자와 이치로와의 대결구도 속에 각복전쟁의 재림이라는 화제를 모으기도 했는데 오자와 이치로는 다나카의 애제자로 불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쿠다 야스오는 아버지만 하지는 못해서[9] 아버지의 각복전쟁을 재현하지는 못했다.
46회 중원선에서 후쿠다 다케오의 손자인 후쿠다 다쓰오는 무난하게 당선된 반면[10] 비서 급여 횡령 혐의로 자민당에서 탈당하는 등 구설수가 많아 민주당에 입당한 뒤에도 민주당 정권 몰락에 일조했다는 평을 받는 다나카 가쿠에이의 딸 다나카 마키코는 낙선했다.
당장 생전에는 한미한 가문 배경을 돈으로 만회했던 다나카가 이겼지만 결국 저승에서는 아들을 총리로 만들어 최초의 부자(父子) 총리를 탄생시킨 엘리트 명문가의 후쿠다가 웃게 되었다.[11]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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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이후의 보수방류는 꼭 후쿠다의 경제정책에만 경도되진 않고 있다.[2] 이들은 당시 30대 후반~40대 초반으로서 아직 비교적 젊은 나이였다. 이들이 총리가 되는 건 20여 년 뒤인 2000년대 초반이었고 고이즈미가 모리의 후임 총리가 됨으로써 둘이 연달아 총리가 되었다.[3] 딱 17표 차였다.[4] 내각제에서는 최다 의석수 확보 정당(제1정당)의 대표가 총리를 하곤 하지만 어디까지나 관습일 뿐 실제로는 이게 명문화되어 있지 않아 꼭 여당 대표=총리가 의무인 것은 아니다. 대통령제는 그 시초 미국이 처음부터 성문헌법을 갖고 시작하여 그 법칙이 비교적 상세히 규정되어 있는 반면 내각제는 그 시초 영국이 지금까지도 불문헌법, 관습헌법을 채택하여 많은 부분에서 관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많기 때문에 이것이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끼쳐 내각제는 이런 식으로 총리-총재 이원화라는 변칙적 구성도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 관습을 깨는 것일 뿐 법을 깨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5] 고이즈미 총리 시절에는 하시모토 류타로가 회장이었다.[6] 다나카 가쿠에이의 딸 다나카 마키코도 공천배제했지만 마키코는 무소속으로 생환했다.[7] 공교롭게도 이 둘은 와세다대학 선후배 관계다. 연배로는 야스오가 마키코보다 8년 연상이라 대선배다.[8] 무엇보다 후쿠다 야스오는 고이즈미 임기 끝까지 관방장관직을 지키지 못했다. 참고로 고이즈미 퇴임 당시 내각관방장관은 아베 신조였다.[9] 야스오는 전형적인 샌님 스타일이었는데 야스오 자체가 원래 정치에 큰 뜻이 없어서 다케오는 장남 야스오 대신 차남에게 정치 지분을 물려주려고 했으나 차남이 아버지보다 먼저 죽어 어쩔 수 없이 야스오에게 물려준 케이스였기 때문이다. 다케오는 아들 야스오를 "저 녀석은 낯짝이 앏아서 정치 오래 못해."라고 디스하곤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야스오는 아버지처럼 계파 전쟁에 앞장서기는커녕 총리직도 오래 지키지 못했다.[10] 이후 다쓰오는 당 총무회장이라는 요직 중의 요직에 올라 젊은 나이에 승승장구하다가 2022년 통일교 관련 발언 파문으로 인해 총무회장에서 부간사장으로 좌천되었다.[11] 후쿠다는 다나카에게 포스트 사토로 한 번, 오히라 연합으로 한 번하여 두 번이나 당했던 인물이기 때문에 다나카에 원한이 많은 인물이었고 당시 자민당의 실세로 군림하며 승승장구했던 다나카와 달리 후쿠다는 자신의 파벌을 잘 다져 겨우 총리직에 한 번 올랐으나 오히라 연합에 패배하여 총재 재선에 실패했다. 그러나 다나카 사후에 딸이 여러 사건사고와 논란 등으로 인해 낙선하여 반강제로 정계 은퇴를 맞아 몰락해버린 다나카 가문과 달리 후쿠다의 사후에는 자신의 아들이 총리직을 역임하고 손자까지 의원 3선만에 당 내의 주요 요직인 총무회장 자리에까지 오르면서 후쿠다 가문은 승승장구했다. 그 승승장구하던 가문을 한 순간에 몰락시킨 통일교 게이트가 일어나기 전까지. 여기에 일본 정치자금 문제로 또 한 번 타격을 입었다. 거기다 파벌마저도 다나카의 목요 연구회는 다케시타 노보루와 가네마루 신, 오자와 이치로 등이 반란을 일으켜 경세회로 분리되어 사실상 해체된 반면 후쿠다의 청화회는 2000년대에 들어 모리 요시로와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내부 갈등으로 혼란스러운 파벌을 정리하고 파벌을 자민당 최대 파벌로 올려놓으면서 파벌로 따졌을 때도 후쿠다의 완벽한 승리가 되었다. 그러나 상술한 정치자금 문제로 청화회가 해체를 맞이하게 되면서 사후에도 이어진 두 정치인의 싸움은 전개로만 봤을 땐 후쿠다의 완승으로 보이지만 결과는 아무도 승리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