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임 지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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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65-66・71-72・75대 대장대신 | |
<colcolor=#fff><colbgcolor=#3CA324> 일본국 제23-34대 중의원 의원 미즈타 미키오 水田三喜男 | Mizuta Mikio | |
출생 | 1905년 4월 13일 |
치바현 아와군 소모촌 (현 카모가와시) | |
사망 | 1976년 12월 22일 (향년 71세) |
도쿄도 분쿄구 | |
학력 | 구제 아와중학교 (졸업) 구제 미토고등학교 (졸업) 교토제국대학 법학부 (법학 / 학사) |
정당 | |
의원 선수 | 13 (중) |
의원 대수 |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
지역구 | 舊 치바 3구 |
악력 | 도쿄시 공무원 센슈대학 교수 호쿠에쓰석유 감사 다이토석유 이사 일본강판 상무 제65-66・71-72・75대 대장대신 제4대 경제심의청장관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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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치인. 대장대신, 통상산업대신, 경제심의청 장관,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을 지냈으며 전후 일본 고도경제성장기를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꼽힌다.2. 생애
미즈타 미키오는 1905년 4월 13일 치바현 아와군 소로촌 (현재의 카모가와시)에서 태어났다. 미즈타의 집안은 400년전인 1400년대에 사누키국에서 치바로 이주해온 집안으로서,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소로촌의 촌장을 맡았다.구제 아와중학교ㆍ구제 미토고등학교(현 이바라키대학)를 졸업하고 1925년 교토제국대학 법학부에 진학했다. 대학 시절에는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해 동 대학의 교수이자 마르크스 경제학의 선구자였던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 1879~1946)의 보디가드를 자처했다가 경찰에 검거되기도 하였다.[1]
1931년 교토제국대학 졸업후 도쿄시 공무원으로 잠시 공직생활을 하다가 퇴직한 뒤 센슈대학 강사를 거쳐 호쿠에쓰석유 감사, 다이토석유 이사, 일본강판 상무 등 산업계에서 활약하였고, 1946년 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일본자유당의 공천을 받고 구 치바 3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1953년 제4차 요시다 내각에서 경제심의청 장관직에 임명되면서 첫 입각에 성공했다. 이후 자유당에서 수 차례 정무조사회장을 역임했고 당인파 의원들이 대거 소속되있던 오노 반보쿠파에 소속되었다. 1955년 보수합동으로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자 정무조사회장에 유임되었고 이시바시 단잔 내각과 제1차 기시 노부스케 내각에서 통상산업대신직을 맡았다.
1960년 제1차 이케다 하야토 내각 출범 시 대장대신에 임명되었고, 이케다 내각의 국정공약인 소득배증계획, 고도경제성장 플렌을 안정적으로 추진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어지는 사토 에이사쿠 내각에서는 후쿠다 다케오와 번갈아가며 대장대신직을 맡았고, 사토 정권 말기인 1971년에 발생한 닉슨 쇼크로 인해 크게 변동하는 국제금융정세 속에서 변동환율제를 처음으로 도입하여 일본 재정을 안정시킨 인물로 평가받았다.[2]
정치적으로는 오노 반보쿠의 사망 이후 오노파가 후나다 나카의 일신회와 무라카미 이사무의 일양회로 나눠지자 미즈타는 후나다의 일신회에 참여했다. 그러나 무라카미가 구 오노파의 대동단결을 외치며 파벌의 통합을 요구하자, 다시 한번 무라카미파로 적을 옮겼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후지야마 아이이치로의 파벌인 애정회를 끌어들여 통합해 미즈타파를 새롭게 결성했고, 당 내 중간파벌의 영수로 활동했다.
1976년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인 12월 22일 천공복막염으로 인해 향년 71세의 나이로 갑작스레 사망했다. 일본 경제통으로 재정 경험이 풍부했던 그였기에 언론에서는 "일본 경제계의 별이 졌다"라며 애도했고, 사후 훈1등 욱일대수장이 수여되었다.[3]
3.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46 - 1948 | 창당 |
| 1948 - 1950 | 창당 |
| 1950 - 1955 | 창당 |
| 1955 - 1976 | 합당 사망 |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46 | 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치바현 전현구 | | - (-%) | 당선 (7위) | 초선 |
1947 | 제2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치바현 제3구 | 36,315 (13.48%) | 당선 (1위) | 재선 | |
1948 | 제2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29,381 (9.34%) | 당선 (3위) | 3선 | |
1952 |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45,270 (13.42%) | 당선 (2위) | 4선 | |
1953 |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48,443 (15.06%) | 당선 (1위) | 5선 | ||
1955 |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40,290 (12.92%) | 당선 (3위) | 6선 | ||
1958 |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63,832 (18.81%) | 당선 (1위) | 7선 | |
1960 |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0,556 (20.13%) | 8선 | |||
1963 |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6,264 (23.22%) | 9선 | |||
1967 |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3,827 (22.83%) | 10선 | |||
1969 |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2,637 (16.44%) | 당선 (2위) | 11선 | ||
1972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5,516 (17.74%) | 12선 | |||
1976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5,739 (17.20%) | 당선 (1위) | 13선[4] |
5. 여담
- 대문의 프로필 사진에도 나와있지만 부처와 같은 이마의 혹이 트레이드 마크였다. 미즈타의 혹은 이케다 내각에서 대장대신으로 입각했을 때부터 생기기 시작해, 사자에상의 원작자 하세가와 마치코의 만화인 심술쟁이 할머니(いじわるばあさん)의 에피소드 소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5]
- 도슈사이 샤라쿠의 작품을 비롯한 우키요에의 수집을 취미로 삼았으며, 현재는 치바현 토가네시에 위치한 조사이 대학, 조사이 국제대학[6]에 있는 미즈타 미술관에서 그가 생전에 수집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6. 둘러보기
[1] 그가 가와카미의 경호원을 맡았던 이유는, 유도 5단에 검도 3단의 실력을 자랑하는 실력자였기 때문이다.[2] 당시 널리 알려진 평가로는 대장대신으로 대표적인 사람은 전쟁 전 다카하시 고레키요, 전후에는 미즈타 타키오만 있다라고 고평가 받으며 전후 일본 경제를 이끈 대표적 인물로 인정받는다.[3] 그의 사후 지역구 자리에는 전체 6위로 낙선한 야당 일본사회당 치바 치요세 후보가 보궐선거 없이 승계 당선되었다.[4] 1976.12.22 임기 중 사망[5] 다만 미즈타는 그의 말년인 1973년 이 혹을 수술로 제거하였다.#[6] 미즈타 본인이 1965년 설립한 4년제 사립대학이다.
분류
- 일본의 남성 정치인
- 자유당(1950년) 국회의원
- 자유민주당(일본) 국회의원
- 1905년 출생
- 1976년 사망
- 카모가와시 출신 인물
- 제22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3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4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5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6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7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8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9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0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1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2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3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4대 일본 중의원 의원
- 교토대학 출신
- 일본 재무대신
- 일본 경제산업대신
- 일본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 자유민주당(일본) 간사장
- 정3위
- 욱일대수장
- 폐렴으로 죽은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