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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3차 나카소네 내각 부총리 가네마루 신 金丸信 | Kanemaru Shin |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 <colbgcolor=#fff,#1F2023>1914년 9월 17일 |
야마나시현 나카코마군 이마스와무라 (현 미나미알프스시) | |
사망 | 1996년 3월 28일 (향년 81세) |
재임기간 | 부총리 겸 민간활력도입담당대신 |
1986년 7월 22일 ~ 1987년 11월 6일 | |
학력 | 도쿄농업대학 전문부 (졸업) |
정당 | |
지역구 | 야마나시 전현구 |
의원 선수 | 12 (중) |
의원 대수 |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
약력 | 구제 니시자키 중학교 생물교사 야마나시현 양조조합 상무이사 중의원 의원 (제28-39대) 우정성 정무차관 제16·24대 자유민주당 국회대책위원장 제34대 건설대신 중의원 의원운영위원장 제14대 긴키권 정비장관 제10대 중부권 개발 정비장관 제23대 수도권 정비위원회 위원장 제3대 국토청장관 제35대 방위청장관 제27대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제26대 자유민주당 간사장 제3차 나카소네 내각 부총리 민간 활력 도입 담당 대신 자유민주당 부총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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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치인. 12선 중의원 의원, 부총리, 자유민주당 부총재, 간사장 등을 역임했으며, 사가와 규빈 사건으로 인해 일본에선 구태 정치인의 대표 격으로 여겨진다.[1]다케시타 노보루와 함께 다나카 가쿠에이의 최측근이었으며, 일본 만화나 드라마 등에서 간사장, 부총재 등의 직책에 있으면서 총리를 움직이는 흑막 캐릭터가 등장한다면 십중팔구는 가네마루 신을 모델로 한 것이다.[2] 또한 8, 90년대 당시 일본 정치인 중에 북일관계에 관심이 많았던 정치인 중 한명으로 1990년 자민당 대표자격으로 일본 사회당 대표와 같이 평양에 방문하여 김일성과 회담을 하였고 그의 행보는 2000년대 초반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북일정상회담과 이후 북일관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2. 생애
2.1. 정계 입문 전
1914년 9월 17일, 일본 제국 야마나시현 나카코마군 이마스와무라(현 미나미알프스시)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네마루 가문은 양조업으로 돈을 벌고 있던 부유한 집안이었다. 조부는 현내 철도 사업에서 중심적인 인물이었고, 삼촌은 야마나시현의회 의장을 역임한 정치인이었다.니시노 소학교를 졸업한 이후 구제 고후 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불량학생으로 낙인 찍혀 퇴학당한 뒤, 아버지의 친구가 교장으로 있는 구제 미노부 중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1933년에는 도쿄농업대학 농학부에 입학하여 유도를 배웠다. 농대 졸업 이후 구제 니시자키 중학교에서 생물학 교사가 되었다. 또한 학생들에게 유도를 가르치거나 야구부 감독을 맡았다.
1938년, 징병으로 인해 일본군에 입대해 중일 전쟁에 참전했다. 관동군으로 발령을 받아 만주로 향했으나 감기에 걸린 뒤 늑막염으로 진행되어 창춘에 있는 병원에 입원, 이후 병역면제되어 전역하였다. 귀국 이후에는 이바라키현에 있는 누나집에서 요양을 하다 친가로 돌아와 과수원을 운영했다.
1941년, 대정익찬회 야마나시 지부의 발족으로 익찬회의 준군사 청년조직인 요코샤 소년단의 단장을 맡았다. 이때 야마나시 중앙은행에서 일하며 현내 재계에 영향력이 있었던 나토리 타다히코의 지우를 얻었다. 1943년에는 야마나시현 양조조합 상무이사로 취임했고,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전국의 전세가 악화됨에 따라 '술집을 반으로 줄이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에는 스스로 술집을 폐업하고 동업자에게도 술집을 폐업하라는 명령을 따르도록 촉구했다. 이후 군수산업의 용접에 사용되는 산소를 만드는 "일등공업"이라는 회사를 설립했지만, 패전과 동시에 사업을 접었다.
대전 이후에는 양조업에서 소주를 만드는 "중앙발효화학공업"이라는 회사를 설립해 대성공을 거두었다. 또 전부터 지우를 얻고 있었던 나토리 타다히코에게 지역 산업 진흥을 위해 철거 예정이었던 "후쿠센 양조공업"이라는 회사의 와인 공장을 인수해 회사명을 "태평양조"로 바꾸어 와인 사업에도 크게 성공했다.
2.2. 정계 입문
어느 세무서에서 '술집은 술을 밀조하고 세금을 거두지 않고 있다.'는 발언을 하여 이에 분노를 느껴 이 때부터 정계에 뜻을 품었다고 한다.아버지와 함께 공직에서 추방되고, 마찬가지로 공직에서 추방된 나토리 타다히코는 소년단 시절 동지들을 모아 "맥들회"를 결성해 가네마루도 이 모임에 참여했다. 1951년 야마나시현지사 선거에서 다른 모임의 추천을 받은 아마노 히사시가 당선되었고, 나토리와 가네마루는 아마노를 용공분자로 적대하였다.
지사 취임 이후 나토리와 가네마루는 아마노에게 접근했다. 1953년 제3회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나토리의 친형 히로세 히사타다가 아마노에게 추천을 받고선 출마하자, 선거캠프에 참가해 선거활동에 참여했다. 선거 이후 가네마루는 선거법 위반으로 경찰의 조사를 받지만 증거가 되는 명함 5장을 순식간에 삼켜 기소를 면했다고 한다.
참의원선 이후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가네마루는 중의원 총선거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나토리의 친형인 히로세 히사타다는 "사토 에이사쿠는 언젠가 반드시 재상이 될 남자다. 선거를 하려면 반드시 파벌에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며 가네마루에게 권유하여, 가네마루는 사토 에이사쿠를 찾아갔다. 그러나 사토는 "너와 같은 어중간한 녀석은 쓸모가 없다."라고 말하며 가네마루를 쫒아냈다. 가네마루는 격노하였으나 이후 히로세의 의원 취임으로 다시 사토를 찾아가 무사히 자민당의 사토파에 들어갔다.
1958년 제2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 공천으로 야마나시현 전현구에 출마하여, 트럭의 화물칸에서 유세를 하였다. 또한 자신이 교사 시절 가르쳤던 학생들과 친구들, 자신의 회사 사람들도 선거 운동에 동참하였다. 이후 선거에서 6만 9354표를 얻어 첫 선거만에 1위로 당선되었으나, 한 달 뒤 아내 가네마루 레이코를 협식증으로 떠나보냈다. 그의 동기에는 전 총리 아베 신조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 다케시타 노보루 전 총리 등이 있고 실제 그들과도 친하게 지냈었다고 한다.
1960년, 일미안보조약 개정과 관련하여 국회에서 소란이 있었을 때, 당시 중의원 의장을
이후 1961년에 둘째 부인인 가네마루 에츠코와 재혼하여 당시 사토파의 간부였던 호리 시게루가 매주인 역할을 해주어, 이후 호리를 "정치의 스승"이라고 말하며 존경하기 시작했다. 1963년에 우정성 정무차관으로 취임했다.
1972년 가네마루는 자민당 간사장이 된 호리의 지지를 받아 노동대신에 취임한 츠카하라 토시오의 후임으로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에 취임했다.[4]
그러나 이후 실시된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호리가 각료 출신의 후쿠다 다케오를 지지하자 이에 반하여 가네마루가 높게 평가하고 있었던 같은 파벌인 다나카 가쿠에이를 지지해 다나카파 결성에 동조했다.
다나카는 가네마루가 총재선에서의 활약을 높게 평가하며 건설대신의 자리를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제1차 다나카 내각이 성립되었을 때 기무라 다케오가 건설대신을 맡았다. 이후 가네마루는 국회대책위원장에서 유임되었고 제2차 내각에서 건설대신으로 입각하며 자신이 원하던 관직을 얻었다.
차기 미키 다케오 내각에서는 국토청 장관으로 취임하였다. 또 미키 끌어내리기의 기운이 높아졌을 때, 가네마루는 미키에게 중의원 해산을 권했으나 미키가 해산을 결정하지 않아 이후 미키에게 불신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가네마루는 미키의 대항마가 나타나지 않으면 후쿠다 다케오 선에서 정리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 사이가 틀어져버린 후쿠다와 호리의 관계 수복을 주선하였다.
1976년, 후쿠다 내각 하에 중의원 의원 운영위원장으로 취임하고, 동시에 호리는 중의원 의장이 되었다. 1977년, 후쿠다 개조 내각에서 방위청 장관으로 취임했다. 임기 내에는 "자위대가 외국에 위협을 주면 안된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적에게 위협을 주지 않는게 무슨 방어인가."라며 외국에 적대적인 발언을 하였다.
이후 후쿠다파가 후쿠다의 총재 재선을 위해 중의원 해산 카드를 시전하였으나, 가네마루는 '대의명분이 없는 해산은 안된다.'는 이유로 해산에 반대했다. 결국 중의원이 미해산된 채 총재 선거가 실시되어 다나카파와 동맹 관계를 맺고 있던 오히라 마사요시가 후쿠다를 끌어내리고 총리, 총재직에 취임했다. 이후 오히라 내각에서 가네마루는 국회대책위원장에 재취임했다.
1980년, 헌정사상 최초로 중의원과 참의원이 동시에 선거를 치렀을 때, 가네마루는 세대교체론을 주장하며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정권 수립을 반대하였고, 이로 인해 당시 뒤에서 나카소네를 밀어주고 있었던 다나카와 가네마루의 관계가 악화되어 가네마루는 의원 동기인 다케시타 노보루와 관계를 쌓아가기 시작했다.
1984년, 측근이었던 오자와 타츠오를 간사장으로 내세울 것을 원했던 다나카의 요구에 나카소네가 반발하여 다나카와 적대 관계였던 가네마루를 간사장으로 지명했다. 다음 해 다나카파 내에 훗날 헤이세이 연구회의 전신이 되는 "창정회"를 결성했다. 이러한 움직임이 자신과 적대 관계였던 가네마루가 다케시타를 총리로 내세워 자신을 끌어내리려하는 쿠데타라는 것을 깨달은 다나카는 이 모임을 전격 반대했으나, 발족 이후 다나카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자 기세는 점점 창정회로 기울기 시작했다. 창정회를 반대하는 파벌 내 세력들을 모으기 위해 일단 창정회를 해산하고, 1987년에 독립된 파벌인 "경세회"를 결성했다. 다케시타가 총리로 취임한 이후 가네마루는 경세회의 회장직을 맡았다.
1989년, 소비세 도입으로 인한 불인기와 리크루트 사건의 발생으로 인해 다케시타 내각이 총사퇴했고, 차기 총재로 우노 소스케가 취임했으나 그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가네마루는 후쿠다 다케오를 총재로 옹립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소식을 듣고 실패했다.
그러나 우노 내각이 제15회 참원선에서 과반수 확보에 실패해 총사퇴를 결정하면, 최대 파벌의 회장이었던 가네마루는 큰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우노의 퇴진 이후 뉴리더가 리크루트 사건으로 인해 총재 선거에 출마할 수 없게 됐기 때문에, 이를 노려 가네마루는 총재 선거 출마를 고민하지만 다케시타의 반발로 무산되어 결국 출마를 포기했다.
이후 가이후 도시키가 총리로 선출되고 가네마루는 같은 파벌의 젊은 의원 오자와 이치로에게 눈을 돌려 1989년 다케시타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자와를 자민당 간사장으로 취임시키는 등 오자와의 강력한 방패가 되었으나, 평소 오자와를 못마땅하게 보던 하시모토 류타로와 가지야마 세이로쿠 등 다케시타와 가까운 의원들이 이러한 가네마루의 행동에 반발하였고, 이것이 다케시타파가 분열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1990년 9월 24일 가네마루는 자민당 대표단 자격으로 타나베 마코토 위원장이 이끄는 일본 사회당 대표단과 같이 조선노동당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이틀 뒤인 9월 26일 김일성 주석과 가네마루, 타나베의 3자회담이 열려 이 자리에서 일본 대표단은 가이후 도시키 총리의 친서를 전하였고 이에 김일성은 북-일 국교 교섭 개시 제안을 하였다. 이에 9월 28일 평양에서 조선로동당, 자유민주당, 일본사회당의 대표가 모여 3당 공동선언을 채택했는데, 공동선언의 내용으로는 북일 국교수립과 식민지 전후 보상에 관한 내용으로 북일관계에 한 획을 건 역사적인 선언이었다.
왼쪽부터 가네마루 신, 김일성, 타나베 마코토 |
1991년 자민당 총재선에서 오자와에게 출마를 촉구했으나 본인이 고사하고, 다른 파의 후보를 옹립하기로 결정했다. 파벌 내에서 하시모토 류타로가 가장 높은 인기를 자랑하고 있던 가운데, 가네마루와 오자와는 파벌 내의 이론을 무릅쓰고 미야자와 기이치를 지지했고, 와타나베 미치오에게도 지지를 구했다. 미야자와가 총리직에 오른 이후 1992년, 가네마루는 자민당 부총재직에 취임하여 정권이 안정된 뒤 미야자와 내각의 지주가 되었다.
1992년, 참의원선 당시 도치기현에서 야마오카 겐지를 응원 연설하고 있던 도중 우익 인사로부터 총격을 받았으나, 총알은 모두 빗나갔고 가네마루도 무사히 살아났다.
2.3. 정계 은퇴 후 말년
1992년 8월, 사가와 익스프레스에서 정치자금 5억 엔을 개인자산에 축재한 사실이 발각돼(사가와 규빈 사건) 결국 가네마루는 부총재직을 사임하고, 정치자금규정법 위반을 인정했다.[5] 이후 법원에서 벌금 20만 엔이 선고돼 형벌이 너무 가볍다는 여론이 들끓자 이에 가네마루는 10월 중의원을 사직하고, 다케시타파 회장직에서도 물러나며 정계에서 은퇴했다.1993년 가네마루가 도쿄지방검찰청에 체포되었는데, 검찰은 그가 '1987년부터 89년까지 소득 약 18억 4230만 엔을 숨기고 10억 3775만 엔을 탈세했다.'고 밝혔다. 가네마루는 수사에서 모든 죄를 인정했으나, 보석으로 가석방된 이후에는 '정계재편을 위한 정치자금'이었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이후 가네마루는 당뇨병으로 인해 왼쪽 눈이 거의 실명되었으나, 마지막까지 형사 공판을 계속 진행하리란 생각으로 끝까지 공판에 임했다. 그러나 가족들의 걱정으로 결국 1996년 3월 21일에 공판이 정지되었다.
1주일 뒤 3월 28일에 뇌경색으로 사망했다. 향년 81세.
3.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41 - 1945 | 입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45 - 1958 | 제2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정당 해산 |
| 1958 - 1996 | 입당 정계 입문 정계 은퇴 사망 |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58 |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야마나시 전현구 | | 69,354 (17.8%) | 당선 (1위) | 초선 |
1960 |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1,435 (18.5%) | 재선 | |||
1963 |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2,206 (15.9%) | 당선 (4위) | 3선 | ||
1967 |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1,339 (17.4%) | 당선 (2위) | 4선 | ||
1969 |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8,660 (17.1%) | 5선 | |||
1972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2,954 (27.4%) | 당선 (1위) | 6선 | ||
1976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7,609 (14.2%) | 당선 (3위) | 7선 | ||
1979 |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2,007 (19.7%) | 당선 (1위) | 8선 | ||
1980 |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6,919 (18.4%) | 9선 | |||
1983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6,449 (21.2%) | 10선 | |||
1986 |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12,530 (22.8%) | 11선 | |||
1990 |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1,756 (19.7%) | 12선[6] |
5. 둘러보기
[1] 건설 분야의 이권을 주로 다루고 흑막 정치를 하다가 돈 먹고 퇴진한 게 딱 다나카 가쿠에이 시대의 정치인 느낌을 준다.[2] 대표적으로 생추어리의 이사오카 간사장[3] 의장도 부의장도 아닌 신진 의원이 의장석에서 의사진행을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는 노령인 데다가 당시 발목을 다친 상태였던 중의원 의장 기요세 이치로를 야당 의원들로부터 엄호하며 의장석으로 인도하였던 일을 가네마루 신이 하였던 것이다.[4] 당시 국회대책위원장은 각료 경험이 있는 입각자가 맡는 것이 관례였고, 각료 경험이 없는 가네마루가 국회대책위원장이 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5] 당시 가네마루의 집을 압수수색을 했는데 금괴들이 여럿 나오게되자 그가 김일성을 통해 금괴를 받았다는 루머가 돌았다.[6] 1992.10.21 의원직 사직
분류
- 일본의 남성 정치인
- 일본의 부총리
- 일본 국토청 장관
- 일본 건설대신
- 일본 방위대신
- 일본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 제28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9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0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1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2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3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4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5대 일본 중의원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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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7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8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9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자유민주당(일본) 국회의원
- 1914년 출생
- 미나미알프스시 출신 인물
- 교육인 출신 정치인
- 기업인 출신 정치인
- 1996년 사망
- 뇌경색으로 죽은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