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시마 쇼지로의 역임 지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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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3CA324> 일본국 제15-21, 25-32대 중의원 의원 가와시마 쇼지로 川島正次郎 | |
출생 | 1890년 7월 10일 |
치바현 히가시카츠시카군 교토쿠정 (현 치바현 이치카와시) | |
사망 | 1970년 11월 9일 (향년 80세) |
도쿄도 오타구 자택 | |
학력 | 히사마츠 소학교 (졸업) 칸다 중학교 (졸업) 세이소쿠 영어학교 (졸업) 센슈대학 법학부 (법학과 / 학사) |
정당 | |
의원 선수 | 13 (중) |
의원 대수 | 16, 17, 18, 19, 20, 21, 25, 26, 27, 28, 29, 30, 31, 32 |
지역구 | 舊 치바 1구 |
악력 | 입헌정우회 원내간사 입헌정우회 총무위원 해군성 참여관 (사이토 내각) 자유민주당 부총재, 간사장 중의원 의원 (제15-21, 25-32대 / 舊 치바현 제1구)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제2차 이케다 1차 개조 내각, 제2차 이케다 2차 개조 내각) 제5대 자치청 장관, 제13대 행정관리청 장관 (제2차 하토야마 내각) 1964 도쿄 올림픽 담당 국무대신 센슈대학 총장 치바공업대학 이사장·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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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치인. 자민당의 대표 정치인 중 한명으로서 각료로서는 경량급 자리밖에 경험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파벌을 토대로 부총재, 간사장직을 지내며 당 내 2인자로 자리잡았고, 고노 이치로, 기시 노부스케, 오노 반보쿠 등과 함께 자민당 초창기를 대표하는 거물 정치인으로 평가 받았다.2. 생애
2.1. 초기 생애
1890년 7월 10일 일본 치바현 히가시카츠시카군 교토쿠정 (현 이치카와시)에서 야나기하라 켄지로, 야나기하라 코우 부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생모인 코우가 병으로 사망하고 니혼바시에서 별갑 장사를 하던 가와시마 사이지로의 양자로 입양되었다.이후 도쿄의 히사마츠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희망했지만 가게일을 돕는것을 원했던 양부의 요청으로 인해 1년간 견습공으로 일했다. 하지만 학업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못했던 그는 양모를 설득해 진학에 성공했고, 칸다 중학교 야간학교를 거쳐 세이소쿠 학원 고등학교[1]를 졸업했다. 이후 내무성에서 필생으로 일하면서 구제 센슈대학 법학과를 다녔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는 내무성 경보국으로 발령을 받아 경보국장인 나가타 히데지로 (永田秀次郎, 1876-1945) 밑에서 일했다. 1917년 제13회 일본 중의원 총선거를 앞둔 시기 경보국의 주요 간부들이 자리를 비웠을 때 가와시마는 내무대신 고토 신페이로부터 출마 입후보자들의 일람표를 만들 것을 지시하는 전화를 받았다. 가와시마는 꼬박 밤을 새워 일람표를 만든 뒤 제출하자 고토는 가와시마의 정성을 높게 평가했고, 이를 계기로 그가 선거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기회가 되었다.
1918년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의 총 사직에 의한 고토의 퇴임과 나가타의 귀족원(현재의 참의원) 전출에 따라, 부서를 도서과로 옮기게 된다. 그러나 나가타의 권유로 도쿄 니치니치신문[2] 정치부 기자로 전직하게된다.
기자 재직 당시 오사카 고스톱 사건을 보도해 일본군을 비판하는 기사를 썼던 다카이시 신고로 (高石真五郎, 1878~1967)의 지도를 받았으며, 1921년 하라 다카시 내각의 중의원 해산을 특종으로 보도한적이 있다.
1920년 고토 신페이가 도쿄시 시장으로 취임하면서, 가와시마는 본인의 상관을 따라 그의 비서가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평소부터 생각했던 굴지의 소비 도시인 도쿄가 성공하려면 중소 상공업자를 조성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가와시마에게 관련 업무를 맡기게 되었다. 가와시마는 초대 도쿄시 상공과장이 되었고 도쿄중앙도매시장 창설에 기여했다.[3]
2.2. 정계 초기
고토가 도쿄시 시장에서 물러나고 가와시마는 도쿄시청을 떠나 타마가와 수력 전력 회사의 직원으로 일하게 되지만, 1924년 제2차 호헌운동에 따라 제15대 중의원 선거에서 고향인 히가시카츠시카군이 포함된 치바 3구에 입헌정우회 후보로 출마하지만 낙선했다.하지만 케이세이 전철의 창립자인 혼다 사다지로(本多貞次郎, 1858~1937)를 크게 위협해, 정치 신인으로서는 선전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후 가와시마는 고토의 아래에서 일하면서 자신의 실적 등을 크게 홍보하는 선거전을 펼친 끝에 1928년 16대 중원선에서 첫당선에 성공했고, 입헌정우회의 원내간사로 발탁된다. 그러나 그해 아내와 양부, 그리고 비서로 일하고 있던 자신의 조카를 잃는 슬픔에 빠지게 된다.
어린시절 가난하게 고생하며 학창생활을 보낸 가와시마에게는 이렇다 할 연줄이 없었고, 이로 인해 정계에서 큰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러다 입헌정우회의 선배 의원인 마에다 요네조로부터 정계에선 욕심을 내지 말고 넘버 2를 위해 노력하는것이 중요하다는 조언을 듣게 되고, 이 말을 들은 그는 넘버 2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1932년 자신과 친분이 있던 홋타 마사츠루 (堀田正恒, 1887~1951)가 사이토 내각에서 해군성 정무차관이 된 일을 계기로 해군성 참여관에 취임해, 당시 일본 제국의회를 지배하고 있던 일본 육군에 대항하면서 정당정치의 재건을 도모했다.
2.3. 패전 이후
1945년 일제의 패전 직후 연합군 점령하에선 대정익찬회와 관련 없이 무소속 회파에 속해 있었지만, 해군성 참여관 경력이 문제되어 1952년까지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1952년 공직 복귀 이후에는 자유당에 입당해 하토야마 이치로의 측근으로 활동했고, 1955년 제2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에서 자치청 장관과 행정관리청 장관에 임명되어 첫 입각에 성공했다.하토야마 내각에서는 보수합동을 추진해 자유민주당의 창설에 큰 기여를 했고, 1956년 하토야마 총리와 함께 소선거구제 관련 법안 (하토만타)을 제출하지만, 야당의 강한 반발로 인해 끝내 무산되었다.
1957년 기시 노부스케가 총리로 취임하면서 가와시마는 자민당 간사장 자리에 올랐고, 1960년 안보투쟁 당시 당내에 혼란과 동요가 일자 오자와 사에키(오자와 이치로의 부친)를 안보특별위원장으로 선임하여 강행표결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자위대의 출동도 검토하는 등 과정이 매끄럽진 못했지만 미-일 안전보호조약을 비준하는데 성공했다. 비준 이후 기시는 중의원 해산을 꾀했지만 당내에서도 반발이 심하자 기시는 결국 이를 단념하고 내각을 총사직했다.
중의원 해산 이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당인파에선 이시이 미쓰지로와 오노 반보쿠가 후보로 나섰고, 관료파에서는 이케다 하야토가 후보로 나섰다. 그 무렵 가와시마는 기시파 내에서 일정한 세력을 가지고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는 의원 10명과 함께 오노 지지를 표명하고 있었다. 가와시마는 오노에 대해 "당인파가 두개로 나뉘면 관료파인 이케다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당인파는 이시이 하나로 단일화 하는 것이 좋다"고 진언해 오노를 총재선 후보에서 사퇴시켰다 . 그러나 가와시마는 “오노를 지원하려고 생각했지만, 오노가 후보에서 사퇴했기 때문에 이케다를 지지한다”라고 표명해 이케다 지지로 갈아탔고, 이케다의 총재 선출에 기여했다.[4]
1962년 10월 기시파가 해산하면서, 파벌을 후쿠다 다케오에게 양도하는것에 반발하며, 몇몇 인원과 함께 다음달인 11월에 교우 클럽(가와시마파)로 분파했다.
1964년 자민당 총재선에서 병사한 오노 반보쿠에 이어 부총재 자리에 올랐다. 이케다가 지병인 식도암으로 인해 퇴진할 때에는 후계자인 사토 에이사쿠를 지명하는데 큰 공을 세웠고, 사토 정권에서도 부총재의 지위를 유지하며 여당 내 2인자의 지위를 유지했다.
1970년 봄 도쿄도 도지사 선거를 준비할 무렵부터 지병인 천식이 악화되어 요양 차 하와이로 향했다. 처음에는 병세가 회복 되는 듯 싶었지만 가을에 예정된 자민당 총재 선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격무를 보다 건강을 해쳤다.
사토 총리가 후임으로 대장관료 출신인 후쿠다 다케오를 지지한다는 얘기를 들은 가와시마는 "기시, 이케다, 사토까지 관료 출신이 내각을 계속 이끌었다. 민심은 관료 출신 정치인에게 싫증이 나 있다"라며 후쿠다의 라이벌인 다나카 가쿠에이를 후임 총재로 지지했다. 지금 총재 선거에서 후쿠다와 맞붙어선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다나카는 사토의 4선을 추진했다.
기시는 사토에게 물러날 것을 중용했고 후쿠다도 이를 기대했지만 후쿠다가 직접 사토에게 이를 권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이에 가와시마는 후쿠다의 라이벌이었던 다나카 가쿠에이를 지지. 다나카가 세력을 확대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1970년의 자민당 총재선에서는 후쿠다를 밀어주려는 계획을 하고 있던 사토를, 가와시마 부총재, 다나카 간사장이라는 입장에서, 총재선에 출마시켜 사토 정권의 연명을 도모해, 사토의 지지를 얻고 싶은 당 내 중도파를 사토 지지로 돌리는데 큰 기여를했다.
결과적으로 사토는 미키 다케오와 마에오 시게사부로와의 일기토 끝에 4선에 성공했지만, 정권 말기의 레임덕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다나카에 넘겨주게 된다.
그러나 총재선으로부터 9일 뒤인 11월 9일, 지병인 천식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도쿄도 오타구 산노의 자택에서 향년 80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가와시마의 사망 이후 그의 파벌인 교우클럽은 맹우였던 시이나 에쓰사부로에게 넘어갔고, 시이나의 정계은퇴 후 소멸되어 남은 인원은 목요회 (다나카파), 번촌정책연구소 등으로 넘어갔다.
3.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24 - 1940 | 정계 입문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40 - 1942 | 정당 해산 |
익찬정치회 | 1942 - 1945 | 창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45 | 제2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인한 정당 해산 공직 추방 |
| 1952 - 1954 | 입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54 | 탈당 |
| 1954 - 1955 | 창당 |
| 1955 - 1970 | 합당[5] 별세 |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24 | 제1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치바 3구 | | ? (?%) | 낙선 (6위) | |
1928 | 제1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 | 당선 (3위) | 초선 | ||
1930 | 제1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치바 1구 | ? (?%) | 당선 (3위) | 초선 | |
1932 | 제1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 | 당선 (4위) | 재선 | ||
1936 | 제1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 | 당선 (3위) | 3선 | ||
1937 | 제2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 | 당선 (4위) | 4선 | ||
1942 | 제2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익찬정치회 | ? (?%) | 당선 (4위) | 5선 | |
1952 |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치바 1구 | | 36,558 (12.5%) | 당선 (2위) | 6선 |
1953 |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37,079 (13.2%) | 당선 (3위) | 7선 | ||
1955 |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90,984 (25.4%) | 당선 (1위) | 8선 | |
1958 |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90,984 (25.4%) | 9선 | ||
1960 |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2,175 (25.2%) | 10선 | |||
1963 |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1,919 (24.0%) | 11선 | |||
1967 |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8,388 (16.8%) | 당선 (2위) | 12선 | ||
1969 |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42,044 (19.2%) | 당선 (1위) | 13선[6] |
5. 여담
- 살아 생전 경제합리성을 중시한 파벌 운영을 중요시 했으며, 파벌의 인원수가 지나치게 많을 경우 파벌을 유지하는 자금 조성에 지장이 생기므로 파벌의 규모를 20명 안팎으로 운영했다. 파벌 규모가 10명 후반대 정도만 되어도 국무대신을 배출할 수 있고, 큰 경쟁 없이 입각자를 배분할 수 있었기 때문에 20명 안팎의 파벌 인원을 유지했다.
- 1961년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겸 행정관리청 장관 재직 당시 1964 도쿄 올림픽을 대비해 도카이도 신칸센과 수도고속도로 완공 등 인프라 구축에 박차를 가했고 이는 고도경제성장에 큰 도움을 주며 이케다 내각의 소득 배증 계획의 성공에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
- 일본 정계의 거물로서 문화, 교육계의 발전에도 공헌을 세웠다. 특히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의 회장을 맡으면서 일본 레슬링계의 발전에 큰 지원과 금액을 아끼지 않았고, 오노 반보쿠와 함께 일본 레슬링계를 발전시킨 몇 안되는 정치가로 꼽힌다. 또한 자신의 모교인 센슈대학 총장 재직 시절 센슈대학 부속 마츠도 고등학교 설립 등의 업적을 세우며 센슈대학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는 측면도 가지고 있다.
- 나리타 국제공항을 현재의 위치에 건립시킨데 기여를 한 인물이기도 하다. 1962년 도쿄 제2국제공항 건설 계획 당시 운수대신인 아야베 겐타로와 건설대신인 고노 이치로는 신공항의 건설 부지 후보로 각각 치바현의 우라야스시와 기사라즈시를 선택했지만, 일본 정부는 제2공항의 부지를 토미사토시로 결정했었다. 그러나 공항건설에 앞서 도미사토시 시민들의 반대운동이 잇따르자, 가와시마는 나리타시 산리즈카를 대안으로 내세웠고, 결국 이 안에 정부와 자민당 본부의 동의를 이끌어 내며 지금의 나리타 국제공항이 세워졌다.[7][8]
- 2019년에 방영한 NHK 대하드라마 이다텐 ~도쿄 올림픽 이야기~ 에서는 일본의 중견배우 아사노 타다노부가 가와시마를 연기했으며, 도쿄 올림픽의 유치를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며 유치 운동을 혼란시키는 악역으로 묘사되었다.
6. 둘러보기
[1] 세이소쿠 영어학교로도 알려져 있으며, 이 학교의 주요 동문으로 이시바시 단잔, 김성수, 조소앙, 조만식 등이 있다.[2] 마이니치 신문의 전신.[3] 이때 중앙도매시장 중 창설된 어시장이 바로 츠키지시장이다.[4] 당연히 가와시마가 이시이를 지지할줄 알았던 오노 입장에서는 통수를 맞은 입장이 되었고, "가와시마에게 속았다"라는 말을 하며 후보직을 사퇴한것을 후회했다는 후일담이 있다.[5] 자유당과의 신설 합당[6] 1970.11.9 임기 중 사망[7] 하지만 가와시마도 처음에는 토미사토시의 반대 여론을 이유로 하네다 공항의 규모를 축소 한 뒤 도쿄만을 매립, 증축시켜 기사라즈시에 공항을 세울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하네다공항의 혼잡 등의 이유로 해당 계획은 무산되었고, 일본 궁내청이 산리즈카의 궁내청 어료목장 부지 제공을 희망하면서 부지 후보가 최종적으로 변경되었다.[8] 그러나 단순히 토지 보상 문제만 해결하면 끝이라는 마인드를 갖고 있던 일본 정부와 정부 여당의 안일한 선택이 나리타 투쟁이라는 유혈사태를 현재진행형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하는 의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