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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오 시게사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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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회 중의원 의장
초대 제2대 제3대
초대
나카지마 노부유키
제2대
호시 토오루
제3-5대
쿠스모토 마사타카
제4대 제5대 제6대
제3-5대
쿠스모토 마사타카
제6대
하토야마 가즈오
제7-10대
카타오카 겐키치
제7대 제8대 제9대
제7-10대
카타오카 겐키치
제11대
고노 히로나카
제12대
마츠다 마사히사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3대
스기타 데이이치
제14·17대
하세바 스미타카
제15·16·20대
오오카 이쿠조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17대
하세바 스미타카
제18·21대
오쿠 시게사부로
제19대
시마다 사부로
제15·16·20대
오오카 이쿠조
제14대 제15대
제18·21대
오쿠 시게사부로
제22·23대
카스야 기조
제24대
모리타 시게루
제16대 제17대
제25대
모토다 하지메
제26대
가와하라 모스케
제27대
호리키리 센베에
제28대
후지사와 이쿠노스케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9대
나카무라 게이지로
제30대
아키타 기요시
제31대
하마다 쿠니마츠
제32대
도미타 고지로
제20대 제21대
제33대
코야마 쇼쥬
제34대
다코 이치민
제35대
오카다 타다히코
제36대
시마다 도시오
제22대
제37대
히가이 센조
제38대
야마사키 다케시
일본 국회 중의원 의장
제23대 제24대
제39대
마쓰오카 고마키치
제40대
시데하라 기주로
제41대
하야시 조지
제42·43대
오노 반보쿠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42·43대
오노 반보쿠
제44대
쓰쓰미 야스지로
제45대
마쓰나가 토오
제46대
마스타니 슈지
제28대 제29대
제47대
호시시마 니로
제48대
가토 료고로
제49·50대
기요세 이치로
제30대 제31대
제51·56대
후나다 나카
제52대
야마구치 기쿠이치로
제53대
아야베 겐타로
제54대
이시이 미쓰지로
제31대 제32대 제33대
제55대
마쓰다 다케치요
제51·56대
후나다 나카
제57대
나카무라 우메키치
제58대
마에오 시게사부로
제34대 제35대 제36대
제59대
호리 시게루
제60·61대
나다오 히로키치
제62대
후쿠다 하지메
제37대 제38대
제63대
후쿠나가 겐지
제64대
사카타 미치타
제65대
하라 켄자부로
제66대
타무라 하지메
제39대 제40대 제41대 제42대
제67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제68대
도이 다카코
제69대
이토 소이치로
제70대
와타누키 다미스케
제43대 제44대 제45대 제46대
제71·72대
고노 요헤이
제73대
요코미치 다카히로
제74대
이부키 분메이
제47대 제48대 제49대
제75대
마치무라 노부타카
제76·77대
오시마 다다모리
제78대
호소다 히로유키
제49대 제50대
제79·80대
누카가 후쿠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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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부경 (1869~1870)
초대
오기마치 산조 사네나루
사법경 (1871~1885)
초대
에토 신페이
2대
오키 다카토
3대
다나카 후지마로
4대
오키 다카토
5대
야마다 아키요시
사법대신 (1885~1947)
초대
야마다 아키요시
2대
다나카 후지마로
3대
고노 도가마
4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5대
요시카와 아키마사
6대
기요우라 게이고
7대
소네 아라스케
8대
오히가시 기테츠
9대
기요우라 게이고
10대
가네코 겐타로
11대
기요우라 게이고
12대
하타노 요시나오
13대
마츠다 마사히사
14대
센게 타카토미
15대
오카베 나가모토
16대
마츠다 마사히사
17대
마츠무로 이타츠
18대
마츠다 마사히사
19대
오쿠다 요시토
20대
오자키 유키오
21대
마츠무로 이타츠
22대
하라 다카시
23대
오키 엔키치
24대
오카노 케이지로
25대
덴 켄지로
26대
히라누마 기이치로
27대
스즈키 키사부로
28대
요코타 센노스케
임시대리
다카하시 고레키요
29대
오가와 헤이키치
30대
에기 다스쿠
31대
하라 요시미치
32대
와타나베 치후유
33대
스즈키 기사부로
34대
카와무라 타케지
35대
코야마 마츠키치
36대
오하라 나오시
37대
하야시 라이자부로
38대
시오노 스에히코
38대
시오노 스에히코
39대
미야기 초고로
40대
키무라 쇼타츠
41대
카자미 아키라
42대
야나가와 헤이스케
43대
고노에 후미마로
44대
이와무라 미치요
45대
마츠자카 히로마사
46대
이와타 추조
47대
키무라 토쿠타로
임시대리
가타야마 데쓰
48대
스즈키 요시오
법무총재 (1948~1952)
1·2대
스즈키 요시오
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3·4대
우에다 슌키치
5대
오오하시 타케오
6대
키무라 도쿠타로
법무대신 (1952~)
초대
키무라 토쿠타로
2·3대
이누카이 타케루
4대
가토 류고로
5대
오하라 나오시
6·7대
하나무라 시로
6·7대
하나무라 시로
8대
마키노 료죠
임시대리
이시바시 단잔
9·10대
나카무라 우메키치
11대
카라사와 토시키
12대
아이치 기이치
13대
이노 히로야
14대
코지마 데츠조
15대
우에키 코시로
16대
나카가키 쿠니오
17·18대
가야 오키노리
19·20대
타카하시 히토시
21대
이시이 미쓰지로
22·23대
타나카 이사지
24대
아카마 분조
25대
사이고 키치노스케
26대
코바야시 타케지
27대
아키타 다이스케
28대
우에키 코시로
29대
마에오 시게사부로
30대
코이 유이치
31대
타나카 이사지
32대
나카무라 우메키치
33대
하마노 세이고
34대
이나바 오사무
35대
후쿠다 하지메
36대
세토야마 미츠오
37대
후루이 요시미
38대
쿠라이시 타다오
39대
오쿠노 세이스케
40대
사카타 미치타
41대
하타노 아키라
42대
스미에이 사쿠
43대
시마자키 히토시
44대
스즈키 쇼고
45대
엔도 카나메
46대
하야시다 유키오
47대
하세가와 타카시
48대
타카츠지 마사미
49대
타니가와 카즈오
50대
고토 마사오
51대
하세가와 신
52대
가지야마 세이로쿠
53대
사토 메구무
54대
타와라 타카시
55대
고토다 마사하루
56대
미카즈키 아키라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57대
나가노 시게토
58대
나카이 히로시
59대
마에다 이사오
60대
타자와 토모하루
61대
미야자와 히로시
62대
나가오 리츠코
63대
마츠우라 이사오
64대
시모이나바 고키치
65대
나카무라 쇼자부로
66대
진노우치 타카오
67·68대
우스이 히데오
69대
야스오카 오키하루
70대
고무라 마사히코
71대
모리야마 마유미
72·73대
노자와 다이조
74·75대
노오노 치에코
76대
스기우라 세이켄
77대
나가세 진엔
78·79대
하토야마 구니오
78·79대
하토야마 구니오
80대
야스오카 오키하루
81대
모리 에이스케
82·83대
치바 케이코
84대
야나기다 미노루
85대
센고쿠 요시토
86대
에다 사쓰키
87대
히라오카 히데오
88대
오가와 도시오
89대
다키 마코토
90대
다나카 케이슈
91대
다키 마코토
92대
다니가키 사다카즈
93대
마쓰시마 미도리
94·95대
가미카와 요코
96대
이와키 미츠히데
97대
카네다 카츠토시
98·99대
가미카와 요코
100대
야마시타 다카시
101대
가와이 가쓰유키
102대
모리 마사코
103대
가미카와 요코
104·105대
후루카와 요시히사
106대
하나시 야스히로
107대
사이토 겐
108대
고이즈미 류지
109대
마키하라 히데키
110대
스즈키 게이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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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 상공대신 (1925~1943)
초대
다카하시 고레키요
2대
노다 우타로
3대
카타오카 나오하루
4·6대
후지사와 이쿠노스케
5대
나카하시 도쿠타로
6대
타와라 마고이치
7대
사쿠라우치 유키오
8대
마에다 요네조
9대
나카지마 쿠마키치
10대
마츠모토 조지
11대
마치다 추지
12대
카와사키 타쿠키치
13대
오가와 고타로
14·18대
고도 타쿠오
15대
요시노 신지
16대
이케다 시게아키
17대
핫타 요시아키
14·18대
고도 타쿠오
19대
후지와라 긴지로
20대
고바야시 이치조
임시대리
가와다 이사오
21대
도요다 데이지로
22대
사콘지 세이조
23대
기시 노부스케
24대
도조 히데키
군수대신 (1943~1945)
초대
도조 히데키
2대
후지와라 긴지로
3대
요시다 시게루
4대
토요다 테이지로
5대
나카지마 치쿠헤이
2기 상공대신 (1945~1949)
25대
나카지마 치쿠헤이
26대
오가사와라 산쿠로
27대
호시시마 지로
28대
이시이 미쓰지로
임시대리
가타야마 데쓰
29-30대
미즈타니 조사부로
임시대리
요시다 시게루
31대
오야 신조
32대
시나가키 헤이타로
통상산업대신(1949년~2001년)
초대
시나가키 헤이타로
2·6·17대
이케다 하야토
3대
다카세 소타로
4대
요코오 시게루
5대
다카하시 류타로
7대
오가사와라 산쿠로
8대
오카노 키요히데
9대
아이치 기이치
10·11·12대
이시바시 단잔
13·14대
미즈타 미키오
15대
마에오 시게사부로
16대
타카사키 타츠노스케
2·6·17대
이케다 하야토
18대
이시이 미쓰지로
19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20대
사토 에이사쿠
21·22대
후쿠다 하지메
23·24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25대
미키 다케오
26·27대
칸노 와타로
19·28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29대
오히라 마사요시
30대
미야자와 기이치
31대
다나카 가쿠에이
32·33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34·36대
고모토 토시오
35대
다나카 다쓰오
34·36대
고모토 토시오
37대
에사키 마스미
38대
사사키 요시타케
38대
다나카 로쿠스케
39대
아베 신타로
41대
야마나카 사다노리
42대
우노 소스케
43대
오코노기 히코사부로
44대
무라타 케이지로
45대
와타나베 미치오
46·47대
타무라 하지메
48대
미쓰즈카 히로시
49대
가지야마 세이로쿠
50대
마츠나가 히카루
51대
무토 가분
52대
나카오 에이치
53대
와타나베 고조
54대
모리 요시로
55대
구마가이 히로시
임시대리
하타 쓰토무
56대
하타 에이지로
57대
하시모토 류타로
58대
츠카하라 슌페이
59대
사토 신지
60대
호리우치 미쓰오
61대
요사노 가오루
62·63대
후카야 다카시
64대
히라누마 다케오
경제산업대신 (2001년~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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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
히라누마 다케오
3-5대
나카가와 쇼이치
6대
니카이 도시히로
7·8대
아마리 아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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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대
아마리 아키라
9·10대
니카이 도시히로
11·12대
나오시마 마사유키
{{{#!wiki style="margin: -16px -11px" }}}
13대
오하타 아키히로
14대
가이에다 반리
15대
하치로 요시오
16대
에다노 유키오
17대
모테기 도시미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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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오부치 유코
19·20대
미야자와 요이치
21대
하야시 모토오
22·23대
세코 히로시게
24대
스가와라 잇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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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6대
가지야마 히로시
27·28대
하기우다 고이치
29대
니시무라 야스토시
30대
사이토 겐
31·32대
무토 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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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기시 노부스케
2-3대
미키 다케오
4대
가와시마 쇼지로
5대
후쿠다 다케오
6대
가와시마 쇼지로
7대
마스타니 슈지
8대
마에오 시게사부로
9-10대
미키 다케오
11대
다나카 가쿠에이
12대
후쿠다 다케오
13대
다나카 가쿠에이
14대
호리 시게루
15대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16대
니카이도 스스무
17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18대
우치다 쓰네오
19대
오히라 마사요시
20대
사이토 쿠니키치
21-22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23-24대
니카이도 스스무
25대
다나카 로쿠스케
26대
가네마루 신
27대
타케시타 노보루
28대
아베 신타로
29대
하시모토 류타로
30대
오자와 이치로
31대
오부치 게이조
32대
와타누키 다미스케
33대
가지야마 세이로쿠
34대
모리 요시로
35대
미쓰즈카 히로시
36대
가토 고이치
37대
모리 요시로
38대
노나카 히로무
39대
고가 마코토
40대
야마사키 타쿠
41대
아베 신조
42대
타케베 쓰토무
43대
나카가와 히데나오
44대
아소 다로
45대
이부키 분메이
46대
아소 다로
47대
호소다 히로유키
48대
오시마 다다모리
49대
이시하라 노부테루
50대
이시바 시게루
51대
다니가키 사다카즈
52-53대
니카이 도시히로
54대
아마리 아키라
55대
모테기 도시미쓰
56대
모리야마 히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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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이시이 미쓰지로
2대
스나다 시게마사
3대
사토 에이사쿠
4대
고노 이치로
5대
마스타니 슈지
6대
이시이 미쓰지로
7대
호리 시게루
8대
아카기 무네노리
9대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10대
나카무라 우메키치
11대
마에오 시게사부로
12대
후쿠나가 켄지
13대
시이나 에쓰사부로
14대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15대
스즈키 젠코
16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17대
스즈키 젠코
18대
나다오 히로키치
19대
마쓰노 라이조
20대
에사키 마스미
21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22대
쿠라이시 타다오
23대
스즈키 젠코
24대
니카이도 스스무
25대
다나카 타츠오
26대
호소다 키치조
27대
가네마루 신
28대
미야자와 기이치
29대
아베 신타로
30대
이토 마사요시
31대
미즈노 키요시
32대
카라사와 슌지로
33대
니시오카 다케오
34대
사토 고코
35대
키베 요시아키
36대
무토 카분
37대
시오카와 마사쥬로
38대
모리 요시로
39대
후카야 다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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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토 사다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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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마 후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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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와 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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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카이 도시히로
4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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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노세 료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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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케 유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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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야 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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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다 히로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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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다 세이코
53대
니카이 도시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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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다 히로유키
55대
다케시타 와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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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가쓰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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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슌이치
58대
사토 쓰토무
59대
후쿠다 다쓰오
60대
엔도 도시아키
61대
모리야마 히로시
62대
스즈키 슌이치
}}}}}}}}}


<colbgcolor=#0230ae>
일본국 제58대 중의원 의장
마에오 시게사부로
前尾繁三郎 | Maeo Shigesaburō
출생 1905년 12월 10일
교토부 요사군 미야즈정 (현 교토부 미야즈시)
사망 1981년 7월 23일 (향년 75세)
도쿄도
재임기간 제15대 통상산업대신
1957년 7월 10일~1958년 6월 12일
제26대 홋카이도 개발청장관
1966년 8월 1일~1966년 12월 3일
제29대 법무대신
1971년 7월 5일~1972년 7월 7일
제58대 중의원 의장
1973년 5월 29일~1976년 12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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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학력 교토부립 미야즈 중학교 (졸업)
구제 제1고등학교 (졸업)
도쿄제국대학 (법학 / 학사)
직업 정치인
최종 당적

지역구 교토 제2구
의원 선수 12 ()
의원 대수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6 ()
약력 대장성 공무원
와카야마 세무서 세무서장
주세국 국세 제1과장
대장성 조폐국장
자유민주당 간사장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굉지회 제2대 회장
제58대 중의원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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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유년기 ~ 관료생활2.2. 정치경력 초반2.3. 정계의 거물로서2.4. 말년
3. 소속 정당4. 선거이력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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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의원 의장을 역임한 일본의 정치인. 굉지회의 제2대 회장을 맡았다.

2. 생애

2.1. 유년기 ~ 관료생활

1905년 12월 10일 교토부 요사군 미야즈정에서 가난한 도자기공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마에오의 두 형은 고등학교를 졸업한뒤 도예가가 되었고, 그도 가업을 이어 도제일을 배울 예정이었지만 소학교 시절 마에오의 성적이 다른 아이들보다 좋은 것을 눈여겨 본 담임교사가 마에오의 부모를 설득해 중학교에 진학시켰고, 졸업 후 도쿄로 상경해 구제 제1고등학교에 진학했다.[1][2]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한뒤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진학했고, 졸업 후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와 사법과에 합격했다.

고등문관시험 합격 후 마에오는 일본 대장성에서 관료생활을 시작했다.[3] 1930년 11월 결핵과 늑막염 발병으로 인해 휴직계를 냈고 1932년까지 투병생활을 계속 함에 따라서 원칙상 휴직 기간이 1년을 넘기면 퇴직해야 한다는 규정을 따라서 부득이하게 대장성을 퇴직했지만, 5년 동안 요양한 후 1935년 복직에 성공한다. 그리고 이 시기 마에오의 대장성 4년 선배였던 이케다 하야토도 수포증으로 휴직했다가 복직했다.

복직이후 마에오는 와카야마현의 세무서로, 이케다는 오사카의 세무서로 발령 받아 서로 갈라졌지만, 성격은 정 반대였지만 비슷한 시기 병으로 휴직 후 복직했다는 점과 애주가라는 공통점으로 인해 금방 절친이 되었다. 이케다는 마에오에게 "내가 주세국장이 되고, 네가 국세과장이 되도록 하자"라고 서로 맹세하기도 했다.

이후 마에오는 세무국장으로서 나고야와 오사카의 세무감사국에서 근무하였고, 1940년 도쿄세무감독국 직세부장이 되어 세타가야로 이사를 갔고, 이때 이케다도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거주하고 있었다.[4] 1942년 9월 마에오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술라웨시섬에 위치한 마카사르시의 사정관으로 부임했다. 이후 1944년 4월 일본으로 귀국해 도쿄재무부국장이 된 이케다의 부탁으로 국세2과장이 되었고, 1947년 이케다가 대장차관으로 승진하자 후임 주세국장으로 동시에 승진했다.

그해 마에오는 연합군 최고사령부와 일예정신고납세제도와 할당과세를 둘러싸고 서로대립하다 주세국장직에서 경질당할 위기해 처했다. 그러나 가타야마 내각의 대장대신이었던 쿠루스 타케오(栗栖 赳夫, 1895-1966)가 그의 해임에 반대했고, 그의 비서인 모리나가 데이치로가 대장성의 한직에 해당하는 조폐국장직을 맡을 것을 요구하며 "지금 당신이 조폐국장을 거치지 않고 퇴직한다면 GHQ를 자극하게 되고 향후 대장성이 GHQ와 교섭하기가 어려워진다. 3일이라도 좋으니까 조폐국장을 역임해 달라" 라는 부탁을 했다. 결국 그는 주세국장직을 사임하고 조폐국장직에 올랐으나, 더 이상의 승진은 무리라는 것을 직감하며 정치 입문을 결심했고, 1948년 일본 민주자유당에 공천을 신청하며 그해 12월 조폐국장을 사임했다.

2.2. 정치경력 초반

1948년 민주자유당의 공천을 받은 마에오는 다음해 열린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교토 2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당선의 배경에는 교토 지방의 세무관들과 각종 조합 단체들이 힘을 모아 그의 선거운동을 도왔기 때문에 첫 당선을 완수할 수 있었다고 한다.[5] 이렇게 하여 국회에 입성한 그는 제4차 요시다 내각에서 자민당 정조회장 고쿠레 부타유 아래에서 부회장을 맡았고, 개진당의 고모토 토시오와 함께 이자보급법 개정안을 두고 서로 의논하기도 했다.

이후 중의원 지방행정위원장과 외무위원장을 거쳐 1957년 제1차 기시 노부스케 내각 성립 당시 통상산업대신에 임명되면서 처음으로 입각했다. 이때 중소기업기본법 제정과 석유 유전 개발 허가와 일본무역진흥협회 설립 등의 업적을 남겼다. 1959년 개각으로 이케다 하야토가 통상산업대신이 되자 굉지회의 회장인 그는 마에오를 자민당 경제조사회장으로 앉혀 소득배증론을 구체화하도록 했고, 1960년 이케다가 총리에 오르며 소득배증계획은 물 만난 고기처럼 빛을 발했다.

이케다는 내각 성립 직후 마에오를 자민당 간사장 자리에 세우려 했으나, 당 내 중진의원들의 반발로 인해 그 자리는 자유당 간사장을 맡았던 마스타니 슈지에게 돌아갔다. 1961년 기시파·사토파가 정치 폭력행위 방지법 입안을 둘러싸고 이케다 내각을 무너뜨릴 조짐을 보이자 내각 개각을 단행하여 마에오 시게사부로를 자민당 간사장 자리에 앉혔으며 사토파와 기시파의 반복적인 공세를 막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이 시기 마에오는 늑막염의 재발과 당뇨병의 발병으로 병원에 자주 입원하는 등 힘겨운 나날을 보내야 했으며 1962년 그는 이케다에게 간사장 사직을 희망했으나 이케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대신 병원에서 요양하며 업무를 보도록 배려했다. 하지만 마에오의 간사장 재임 기간이 길어지자 자칫하면 그가 배후에서 주로 활동하는 미키 부키치 같은 정치인이 될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이케다는 후임 간사장에 미키 다케오를 임명시키고 그를 퇴진시켰다.[6]

1964년 굉지회의 회장이자 내각총리대신인 이케다가 지병인 후두암으로 인해 공직에서 물러나자 마에오는 이케다를 뒤를 잇는 제2대 굉지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2.3. 정계의 거물로서

굉지회의 회장이 된 마에오는 사토 에이사쿠·고노 이치로·후지야마 아이이치로로 구성된 자민당 차기 총재 선거에서 후지야마를 지지했고, 고노 이치로와 후보 단일화를 위해 평소 고노와 친분이 있던 후나다 나카를 찾아가 단일화를 요구했지만 후나다가 이 요청을 거절하는 바람에 후보 단일화는 실패했고, 결국 사토가 무난하게 차기 총재 당선에 성공했다.

1965년 6월 그는 신임 자유민주당 총무회장으로 발탁되었다. 이는 이케다의 추천에 의해 발탁된 것이였고, 이케다는 "마에오를 중심으로 오히라, 스즈키 젠코는 마에오를 도와라. 곧 다나카의 시대가 올 것이니 이에 대비하여라"라는 말을 남기고 그해 8월 사망했다. 굉지회를 이어받은 시게사부로는 파벌을 정권 획득을 위한 단체가 아닌 정책 연구 집단이라고 여기는 생각이 강했고, 이러한 생각에 불만을 품고있던 파벌 내 타 의원들과 종종 마찰을 빚었다.[7] 1968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 사토의 3선 저지를 위해 출마했으나 95표라는 초라한 성적을 받아들이며 참패했다. 이는 자민당 내 중소파벌을 이끌고 있던 미키 다케오 보다도 뒤떨어지는 성적이었다.[8] 총재선에서의 참패로 충격을 받은 마에오는 이대로라면 파벌이 라이벌인 오히라에게 넘어갈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을 느꼈고, 고군분투하여 다음 총재 선거를 준비했다.

1970년 자민당 총재선을 앞두고 당시 총리인 사토 에이사쿠가 "4선 이후 내각 개조 시 마에오파 의원들을 대거 입각시켜 주겠다"라는 제안을 했고, 그도 이 제안에 승낙해 총재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사토 지지를 선언했다. 그러나 다나카 로쿠스케[9], 타자와 키치로, 시오자키 준[10] 등의 소장파 의원들이 거세게 항의하였고, 마에오는 1971년 4월 파벌 회장을 오히라에게 넘겨주고 회장직에서 물러났다.[11] 1971년 7월 사토 내각의 개편시 제29대 법무대신으로 임명되었다.

2.4. 말년

1973년 중의원 의장인 나카무라 우메키치가 의장직을 사임했을때 후임 의장으로 선임되었다. 1976년 미키 총리가 의회 해산 일정을 정하지 못해 중의원 해산 없이 임기 만료로 국회가 해산되었고, 마에오는 일본국 헌법 제7조에 의한 중의원 해산 서사를 낭독하지 않고 의회를 해산한 최초의 중의원 의장이 되었다.[12] 의장 퇴임 이후에는 자민당 최고 고문직에 올랐다.

1979년 그동안 정치적 견해로 대립해 왔던 오히라 마사요시가 총리에 선출되자, 마에오는 화해의 자리를 마련해 오히라와의 깊었던 앙금을 풀었다. 하지만 그해 10월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전직 중의원 의장 신분으로 자신의 정치인생 사상 최초로 낙선하는 일이 벌어지자 정계를 은퇴하려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 무렵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황이 그의 자택에 방문해 "건강에 유의하고 앞으로도 나라를 위해 힘써주길 바란다" 라는 쇼와 덴노의 말을 전하자 마에오는 감격해 "죽을 때까지 나라를 위해 정치 생활을 이어가겠다" 라는 다짐을 했다. 이듬해 그는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1위로 당선되며 그의 다짐대로 공직에 복귀하는데 성공했다.

1981년 7월 23일 교토시의 자택에서 지병인 심근경색으로 인해 별세했다. 향년 75세. 그의 사망 이후 종2위와 욱일대수장이 수여되었으며, 마에오의 지역 기반은 교토부의원 출신 노나카 히로무가 이어받았다.

3.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48 - 1950 창당


1950 - 1955 창당


1955 - 1981 합당
사망

4. 선거이력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49 제2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교토 제2구

40,745 (11.06%) 당선 (3위) 초선
1952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52,425 (11.85%) 재선
1953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55,296 (14.24%) 3선
1955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0,250 (14.82%) 당선 (2위) 4선
1958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3,114 (19.83%) 당선 (1위) 5선
1960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77,458 (18.28%) 6선
1963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12,327 (26.36%) 6선
1967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0,091 (20.79%) 7선
1969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0,689 (17.90%) 당선 (2위) 8선
1972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98,845 (15.14%) 당선 (4위) 9선
1976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19,984 (16.84%) 당선 (3위) 10선
1979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03,005 (14.98%) 낙선 (6위)
1980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82,922 (24.13%) 당선 (1위) 11선[13]

5. 여담


[1] 마에오는 "본래대로라면 오사카에서 도예가일을 해야 할 운명이었는데, 담임 선생님의 판단이 내 운명을 바꿔놓았다" 라고 회고했다.[2] 한편 고등학교 재학 시절 아침 식사 때 밥 7그릇, 미소시루 12그릇을 모두 먹어치워 독일어로 를 뜻하는 마건(Magen)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3] 대장성 입직 시험 당시 후쿠다 다케오로 부터 대장성 소속 4개 국(주계국, 주세국, 은행국, 이재국)의 이름을 쓰는 문제가 나올 것이라는 조언을 들었으나, 주계국과 은행국만 쓰고 주세국과 이재국을 잊어버렸다고 한다.[4] 이 시기 이케다가 자신이 희망했던 주세국장이 되자 마에오에게 전화를 걸어 기뻐했다는 소식을 전했으며, 훗날 마에오는 "이케다가 총리대신에 올랐을때도 그때만큼 기뻐하진 않았다"라는 기억을 회고했다.[5] 마에오는 술도 잘 못 마시고 가슴에 꽃을 장식하는 것도 부끄러워하는 내성적인 성격 탓에 유세에 어려움이 많았으나, 성실하고 인품이 있다는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어필하고 무엇보다 화폐를 제조하는 조폐국장을 역임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또한 파나소닉의 창업주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최신식 고성능 마이크를 빌려주어 마에오 캠프의 사기를 높여주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이점들이 모두 합해져 당선될수 있었다.[6] 마에오의 간사장 재임 기간 3년은 2019년 니카이 도시히로가 5년으로 기록을 깨기 전까지 역대 자민당 간사장 최장 재임기간이었다.[7] 특히 이케다 내각에서 관방장관직을 역임하며 정권을 지탱해 온 오히라 마사요시와의 불화가 심했으며, 1968년 총재선을 앞두고 오히라가 마에오에게 보낼 정치자금을 일부 통제 시키는 일도 발생했다.[8] 참고로 사토는 이해 총재선에서 249표, 미키는 107표를 얻었다.[9] 다케다 료타의 큰아버지.[10] 시오자키 야스히사의 부친이다.[11] 특히 다나카 로쿠스케는 "나는 이케다 전 총리가 살아있었다면 이케다파에 계속 몸담을 생각이었지만, 이제 다시는 굉지회의 회파에 참석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며 마에오를 거세게 비판했다.[12] 이와 별개로 굉지회 회장 사임후 같은 대장성 관료 출신 선배 시이나 에쓰사부로, 나다오 히로키치와 함께 삼현인의 모임(三賢人の会)이라 불리며 다나카 내각 부터 미키 내각 까지 정국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13] 1981.7.23 임기 중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