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임한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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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부총리 | <colbgcolor=#ffffff,#1f2024> 와타나베 미치오 | |
외무대신 | ||
법무대신 | 타와라 타카시 | |
대장대신 | 하타 쓰토무 | |
문부대신 | 하토야마 구니오 | |
후생대신 | 야마시타 도쿠오 | |
농림수산대신 | 다나부 마사미 | |
통상산업대신 | 와타나베 고조 | |
운수대신 | 오쿠다 게이와 | |
우정대신 | 와타나베 히데오 | |
노동대신 | 곤도 데쓰오 | |
건설대신 | 야마사키 타쿠 | |
자치대신 | 시오카와 마사주로 | |
국가공안위원장 | ||
내각관방장관 | 가토 고이치 | |
총무청장관 | 이와사키 준조 | |
홋카이도개발청장관 | 이에 토모오 | |
오키나와개발청장관 | ||
방위청장관 | 미야시타 소헤이 | |
경제기획청장관 | 노다 다케시 | |
과학기술청장관 | 타니가와 칸조 | |
환경청장관 | 나카무라 쇼자부로 | |
국토청장관 | 토야 요시유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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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기시 노부스케 | 2-3대 미키 다케오 | 4대 가와시마 쇼지로 | 5대 후쿠다 다케오 | ||
6대 가와시마 쇼지로 | 7대 마스타니 슈지 | 8대 마에오 시게사부로 | 9-10대 미키 다케오 | ||
11대 다나카 가쿠에이 | 12대 후쿠다 다케오 | 13대 다나카 가쿠에이 | 14대 호리 시게루 | 15대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 |
16대 니카이도 스스무 | 17대 나카소네 야스히로 | 18대 우치다 쓰네오 | 19대 오히라 마사요시 | 20대 사이토 쿠니키치 | |
21-22대 사쿠라우치 요시오 | 23-24대 니카이도 스스무 | 25대 다나카 로쿠스케 | |||
26대 가네마루 신 | 27대 타케시타 노보루 | 28대 아베 신타로 | 29대 하시모토 류타로 | 30대 오자와 이치로 | |
31대 오부치 게이조 | 32대 와타누키 다미스케 | 33대 가지야마 세이로쿠 | 34대 모리 요시로 | 35대 미쓰즈카 히로시 | |
36대 가토 고이치 | 37대 모리 요시로 | 38대 노나카 히로무 | 39대 고가 마코토 | 40대 야마사키 타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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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대 아소 다로 | 47대 호소다 히로유키 | 48대 오시마 다다모리 | 49대 이시하라 노부테루 | 50대 이시바 시게루 | |
51대 다니가키 사다카즈 | 52-53대 니카이 도시히로 | 54대 아마리 아키라 | 55대 모테기 도시미쓰 | ||
56대 모리야마 히로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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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미즈타 미키오 | 2대 츠카다 주이치로 | 3대 미키 다케오 | 4대 후쿠다 다케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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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미즈타 미키오 | 15대 니시무라 나오미 | 16대 오히라 마사요시 | 17대 네모토 류타로 | 18대 미즈타 미키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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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대 아베 신타로 | 30대 다나카 로쿠스케 | 31대 후지오 마사유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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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대 모리 요시로 | 38대 미쓰즈카 히로시 | 39대 하시모토 류타로 | 40대 가토 고이치 | 41대 야마사키 타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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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대 호리 고스케 | 52대 이시바 시게루 | 53대 모테기 도시미쓰 | 54대 아마리 아키라 | ||
55대 다카이치 사나에 | 56대 이나다 도모미 | 57대 모테기 도시미쓰 | 58대 기시다 후미오 | 59대 시모무라 하쿠분 | |
60대 다카이치 사나에 | 61대 하기우다 고이치 | 62대 도카이 기사부로 | 63대 오노데라 이쓰노리 | }}}}}}}}} |
}}} ||
일본국 제43대 방위청장관 | |||
<colbgcolor=#3333cc> 출생 | 1939년 6월 17일 | ||
아이치현 나고야시 히가시구 | |||
사망 | 2016년 9월 9일 (향년 77세) | ||
도쿄도 | |||
재임기간 | 제43대 방위청장관 | ||
1984년 11월 1일 ~ 1986년 7월 22일 | |||
제54대 내각관방장관 | |||
1991년 11월 5일 ~ 1992년 12월 12일 | |||
내각관방부장관 (정무담당) | |||
1978년 12월 8일 ~ 1980년 7월 17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3333cc><colcolor=#ffffff> 가족 | 아버지 가토 세이조, 배우자 가토 아이코, 삼녀 가토 아유코[1] | |
학력 | 츠루오카 제3중학교[2] 고지마치 중학교 (졸업) 도쿄도립 히비야 고등학교 (졸업) 도쿄대학 (법학 / 학사) | ||
최종 당적 | |||
소속 파벌 | 무파벌 | ||
지역구 | 야마가타 3구 | ||
의원 선수 | 13 (중) | ||
의원 대수 |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 | ||
경력 | 외무성 외교관 자유민주당 정조회장 중의원 테러대책특별위원장 일중우호협회장 자민당 동물 애호 관리 추진 의원 연맹 고문 방위청장관 자유민주당 국회대책수석부위원장 자민당·표류 표착물 대책 특별 위원회 위원장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대리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대행 자유민주당 간사장 대리 굉지회 최고고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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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전직 정치인이다.자유민주당 소속으로 굉지회의 프린스로 불렸으며 야마사키 타쿠,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함께 YKK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방위청 장관, 내각관방장관, 자민당 정조회장·간사장·굉지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화려한 공직 경력과 개혁적인 행보로 한때 총리에 가장 가까운 남자로 손꼽혔지만 가토의 난과 비서의 탈세 의혹으로 전국구 거물급 정치인에서 지역 토호 정치인으로 완전히 몰락하여 끝내 총리직에 오르지 못한 채 정치 생활을 마감했다.
2. 생애
아이치현 나고야시 히가시구 시라카베에서 쓰루오카시 시장을 지낸 가토 세이조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야마가타로 이주해 유년시절을 쓰루오카시에서 보냈다.아버지가 자유당 공천을 받아 25회 중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어 국회의원이 되자 가족 일가가 도쿄로 이주했다. 가토도 이때 치요다구에 위치한 고지마치 중학교로 전학했고 3년뒤인 1955년 도쿄도립 히비야 고등학교[3]에 입학했으며 1958년 졸업했다.
이후 도쿄대학 이과에 지원했으나 낙방했고 다음해 문과시험에 합격했다. 대학 재학 시절 당시 번성했던 안보투쟁에 참가했다. 대학 졸업 후 1963년 아사히 신문 입사 시험에 합격했으나 자신이 목표로 한 외교관 시험에선 떨어졌다. 그해 4월 도쿄대학 법학부에 내부 편입했고, 같은해 외무성 시험에 합격한뒤 도쿄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이듬해인 1964년 외무성에 입성했다.
외교관 재직시 국립 국립타이완대학과 하버드 대학교에서 유학했으며 1967년 홍콩 부영사로 있을 때 결혼했다. 1970년 일본에 돌아와 아시아국 중국과 차석사무관이 되었고 얼마 뒤 부친이 향년 6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71년 후원회의 추천을 받아 후계자로 낙점되어 중의원 출마를 선언했고, 이듬해 치러진 중의원 선거에서 구 야마가타 2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당선 이후 다나카 가쿠에이의 파벌인 목요회에 들어가길 희망했으나,[4] 다나카의 비서인 하야사카 시게조가 가토의 지역구인 야마가타 2구는 다나카의 파벌에 속하는 의원이 없어 가토를 영입하기에는 다나카도 부담스럽다며 대신 오히라 마사요시의 파벌인 굉지회에 들어갈 것을 권유했다. 마침 오히라는 가토의 아버지인 가토 세이조와 초선 동기이기도 했기에 굉지회에 들어갈수 있었다.
1978년 오히라 내각이 발족하며 내각관방부장관에 올랐다. 내각관방부장관 재임 시절인 1980년 나리타 국제공항 문제 해결과 관련하여 중핵파를 비롯한 반대파와의 협상에 나서기도 했지만 실패했다.
1984년 제2차 나카소네 내각 당시 방위청 장관으로서 처음 입각했으며 1985년 제3차 개조 내각 발족때도 유임, 1986년까지 재임했다.
이후 1991년 미야자와 내각에서 내각관방장관으로 다시 입각했으며, 이 당시 일본 종군 위안부 문제를 두고 위안소 설치·위안부 모집 등에 일본 정부가 관여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가토 담화를 발표했다.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패배하여 창당 이래 처음으로 야당으로 추락한 자민당은 1994년 7월 자민당 & 일본사회당 & 신당 사키가케 연립정권 발족으로 10개월만에 여당에 복귀했고, 가토는 고노 요헤이 총재 아래 정조회장에 취임했다. 가토는 자사사 연립 정권의 지지자 중 한 명이었다.
1995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당시 가토는 같은 파벌이던 고노가 아닌 헤이세이 연구회의 하시모토 류타로를 지지했고, 하시모토가 총재직에 오르자 간사장에 취임했다. 다음해인 1996년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오자와 이치로가 이끄는 신진당과의 양당 대결을 승리로 이끌었고, 선거 직후 자민당은 과반수에 미달했지만 노나카 히로무 간사장 대리와 함께 신진당의 분열로 인해 탈당한 의원들의 영입전을 벌여 자민당이 단독으로 중의원 과반수 복귀를 이루어내는데 큰 공헌을 했다.
하지만 1998년에 치러진 제18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자 간사장직에 물러났고, 이후에도 당 내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면서 하시모토의 후임에 오부치 게이조를 지지했다. 그해 12월 미야자와 기이치 전 총리가 굉지회 회장에서 물러나자 그 후임으로 굉지회의 제6대 회장에 취임한다. 이때 가토가 굉지회 회장에 선출된것에 대해 반발한 고노 요헤이, 아소 다로 등은 굉지회를 이탈해 대용회 (현재의 지공회)를 결성한다.
1999년 자민당 총재선거 당시 총리인 오부치 게이조가 자자공 (자민당 - 자유당 - 공명당) 연립정권을 지지하자 이에 반발하여 근미래정치연구회의 회장인 야마사키 타쿠와 함께 출마했으나 패배했고, 오부치는 개각을 하면서 가토와 야마사키의 파벌을 일부러 소외시켜 당내 비주류로 전락시켰다. 총재 선거 출마를 앞두고 있던 오부치는 자신이 무투표로 당선되길 원했으나 가토와 야마사키가 갑자기 총재선 출마를 선언하자 격노했다. 평소 온후한 인품을 지니고 있던 오부치 였으나, "그 녀석은 나를 쫒아내려 했다"라고 말해 가토와 야마사키에 대한 분노와 견제의 뜻을 나타냈다.
오부치의 뒤를 이어 총리에 취임한 모리 요시로가 각종 잡음으로 인한 낮은 지지율에도 정권을 이어나갈 뜻을 보이자, 가토는 본인의 정치생명을 걸고 야당이 제출한 내각불신임안에 찬성할 계획을 세웠고, 이것이 바로 일본 정치의 주류 파벌을 보수본류에서 보수방류로 크게 변화시킨 가토의 난이다.
가토의 난은 노나카 히로무와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반격으로 인해 처절한 실패로 끝났고, 굉지회는 호리우치 미쓰오 전 통상산업대신을 주축으로 하는 호리우치파, 고가 마코토 전 운수대신을 주축으로 한 고가파, 그리고 다니가키 사다카즈 국가공안위원장을 주축으로 하는 다니가키파[5] 로 분열되었다. 설상가상으로 2002년 3월 자신의 비서가 탈세혐의로 인해 체포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굉지회 회장 사임과 자민당을 탈당했고, 한달 뒤인 4월 중의원을 사퇴했다.
다음해인 2003년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당시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국회에 복귀했다. 하지만 차기 총리 후보로 유력시 되었던 과거와 달리 본인의 실책으로 자신의 정치적 파벌을 완전히 상실해 야마가타현 일대의 토호 정치인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이후 자민당에 복당한 뒤 다시 굉지회로 돌아와 최고고문에 올랐으나, 2005년 9월 굉지회 최고고문직을 사임하고 굉지회도 탈퇴했다.
한때 자민당 내부에서 분열되어 있던 굉지회의 세 파벌(호리우치파, 고가파, 다니가키파)을 하나로 통합하는 대굉지회 구상이 부상하자 가토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파벌에 복귀하는 것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고 결국 자신이 파벌에서 탈퇴함과 동시에 정계은퇴 까지 무파벌을 유지하면서 대굉지회 구상은 떡밥으로 남게 되었고 2023년 자민당에서 불거진 파벌 정치자금 문제로 인해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67년만에 굉지회 해체를 결정하면서, 대굉지회 구상은 끝내 실현되지 못하고 영원히 떡밥으로만 남게되었다.
2006년 8월 15일 17시 50분경, 야마가타현 쓰루오카시에 위치한 가토의 친가에 방화 사건이 일어났다. 그의 집에 불을 지른 방화범은 일본 우익단체의 회원으로, 가토가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비판적인 발언을 하고 있었던 것에 항의를 나타내고 싶었다"고 방화의 동기를 밝혔다.
이에 대해 자민당 초선의원 이나다 도모미는 이를 두고 정치 심포지엄에서 "선생의 집이 불탔다"고 경솔한 어조로 발언하여 큰 비판을 받았다. 한편 일본공산당과 사민당 의원들은 가토의 항의발언에 공감의사를 보였기 때문에 가토는 좌파 진영과의 연계를 의식하기 시작한다.
2008년 2월 자민당의 야마사키 타쿠, 민주당의 센고쿠 요시토, 에다노 유키오, 공명당의 히가시 준지, 사민당의 쓰지모토 기요미 등과 함께 초당파 스터디 그룹인 "라의 모임"을 창설했다. 당초 이 그룹은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과 정계 재편을 향한 리버럴 세력 결집을 목적으로 하는 "비빔밥의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발족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풍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이집트의 태양신인 라에서 이름을 딴 라의 모임으로 개칭된다.
2008년 7월 일중우호협회장에 취임했다. 같은 달 닛폰BS방송에 출연하여 "납치 피해자는 북한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며 북한과의 외교 교섭이 정체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고이즈미 내각 당시 관방부장관이던 아베 신조가 후쿠다 야스오 관방장관의 안을 뒤엎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 발언에 대해 납치 피해자 가족 등 관련 단체가 거세게 항의하자 가토는 일본이 약속을 어겨 북한이 일본을 불신하게 되었기에 교섭이 정체 상태에 되었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고 해명했다.
또 김정일을 "그 나라(북한)에서는 일종의 천황 폐하 같은 포지션의 인물이지요." 라고 말해 논란을 빚었다.
2009년 1월 야마가타현지사 선거가 열리자 현직 지사였던 사이토 히로시를 지지했지만, 사이토는 야권과 자민당 참의원 기시 고이치가 지지한 요시무라 미에코에 밀려 낙선했다. 그해 9월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민주당 돌풍에도 불구하고 당선되어 13선 의원이 되었다.
2010년 2월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의 비서가 정치자금규정법 위반으로 기소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하토야마는 과거 가토의 비서가 기소되었을 때 비서가 죄를 지었으면 의원도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었는데 하토야마가 총리직에서 사퇴하길 거부하자 가토는 "어째서 과거와 현재의 발언이 다른가. 총리가 됐다고 책임을 지지 않는건가"라고 비판했다.
2010년 8월 한일 병합 100주년을 계기로 식민지 지배를 입은 피해자와 그 후손들에게 충분한 배상을 촉구 할 것을 추구하는 "한-일 과거사의 해결과 미래를 향한 평화의원회의"를 창설했고, 한국 국회의원들과 함께 평화의원회의의 유일한 자민당 의원으로써 일본의 한국 병합에 대한 위법성, 위안부 합의 문제의 해결 방법 등에 대해 논의했다.
2012년 12월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가토는 자민당 중앙당과 야마가타현지부의 지지를 받았지만 같은 지역구의 참의원이었던 기시 고이치가 이에 반발, 사카타시 시장을 지낸 무소속 후보인 아베 주이치를 지지하여 조직이 분열되는 상황이 일어났다.
가토는 반 자민당 세력을 결집한 무소속 후보인 아베에게 패배했으며 73세 이상 후보자는 비례대표 출마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자민당 규정에 따라 비례대표 부활에도 실패하여 낙선했다. 당시 선거에서 가토는 자당의 압승 속에 자민당 후보로서는 유일하게 도호쿠 지역에서 낙선한 후보가 되었다.
가토는 중의원직에서 낙선한 뒤 일중우호협회 회장으로 일중 관계 개선을 위해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와 함께 중국측 우호 협회 회장과 회동을 가졌고, 2013년 4월 지역구를 셋째 딸인 아유코에게 넘겨준뒤 정계를 은퇴했다.
2014년 전 운수대신인 고가 마코토와 함께 임팔 전투에서 희생한 병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미얀마를 방문했다가 쓰러져 2년동안 요양 생활을 해야 했고, 2016년 폐렴으로 인해 병세가 악화되어 그해 9월 9일 도쿄도 내 병원에서 향년 77세의 나이로 같은 세대의 동료들보다 일찍 사망했다.
장례식에는 YKK의 일원이었던 야마사키 타쿠 전 자민당 부총재와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 모리 요시로 전 총리, 아오키 미키오 전 내각관방장관, 아베 신조 총리, 스가 요시히데 내각관방장관 등의 인사가 참여했고, 야당 인사로는 오자와 이치로 생활당 대표, 시이 가즈오 공산당 위원장, 간 나오토 전 총리 등이 참여했다.
3. 정치 성향
미키 다케오 전 총리와 더불어 자민당 내 대표적인 리버럴 (좌파) 인사였으며, 일본이 과거 한국과 중국에 대해 식민통치 시절 저지른 잘못을 사죄하고 헌법9조 개정에도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등 자민당 내부에서 일본 정치의 극우화를 비판한 몇 안되는 인사 중 하나였다.가토는 2007년 1차 집권기를 보내던 아베 신조 총리가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한 일을 두고 "미국에 가서 할 것이 아니라 한국 국민에게 먼저 사과해야 한다"고 발언했으며, 고노 담화를 수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아베 총리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냈고 집단자위권 행사 용인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4.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72 - 2002 | 입당 정계 입문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02 - 2003 | 비서의 탈세 사건으로 인한 탈당 |
| 2003 - 2016 | 복당 정계 은퇴 사망 |
5.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72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구) 야마가타 2구 | | 65,987 (21.15%) | 당선 (2위) | 초선 |
1976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7,496 (24.16%) | 재선 | |||
1979 |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4,382 (23.10%) | 당선 (1위) | 3선 | ||
1980 |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8,806 (33.44%) | 4선 | |||
1983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3,170 (34.57%) | 5선 | |||
1986 |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12,194 (33.30%) | 6선 | |||
1990 |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3,717 (30.39%) | 7선 | |||
1993 |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28,784 (44.29%) | 8선[6] | |||
1996 |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야마가타 4구 | 112,033 (65.77%) | 9선 | ||
2000 |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31,181 (72.14%) | 10선[7] | |||
2003 |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야마가타 3구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37,206 (58.92%) | 11선 | |
2005 |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159,486 (69.58%) | 12선 | ||
2009 |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30,502 (56.86%) | 13선 | |||
2012 |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0,303 (35.24%) | 낙선 (2위) |
6. 여담
- 일본의 정치인들이 기자회견을 할때 일어서서 기자회견을 하는 일명 기립형 기자회견을 정례화 시킨 인물이다. 본래 일본 정치인들은 기자회견을 할때 앉아서 기자회견을 하는 착석형 기자회견 방식이 주류였으나, 가토가 관방장관 재직 중이던 1992년 10월 앉아서 회견을 하면 TV에서 잘 안보인다는 지지자의 지적을 받아 개선사항을 행동으로 옮긴것이 그 시초이다. 그가 기립형 기자회견을 실시한 이후, 다른 일본의 정치인들도 기립형 기자회견을 실시하게 되었다.
7. 둘러보기
[1] 제2차 기시다 제2차 개조내각 어린이정책, 저출산대책, 남녀공동참획, 독자활로 담당 내각부 특명담당대신[2] 재학 도중 전학.[3] 아베 노부유키, 마치무라 노부타카등의 거물 인사들을 배출한 일본 명문 고등학교 중 하나이다.[4] 처음에는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가토의 결혼식 당시 주례를 맡은 인연으로 본인의 파벌인 정책과학연구소에 들어올것을 권유했으나, 가토는 나카소네와는 잘 안 맞는다며 이를 거절했다.[5] 다니가키는 훗날 굉지회에서 독립한 뒤 자신의 파벌에 소속된 의원들을 이끌고 유린회를 결성했다.[6]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7] 2002.3 자유민주당 탈당
2002.4.9 의원직 사퇴
2002.4.9 의원직 사퇴
분류
- 일본의 남성 정치인
- 일본 방위대신
- 일본 내각관방장관
- 제33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4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5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6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7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8대 일본 중의원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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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0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1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2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3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4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45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자유민주당(일본) 국회의원
- 1939년 출생
- 2016년 사망
- 히가시구(나고야) 출신 인물
- 도쿄대학 출신
- 외교관 출신 정치인
- 정3위
- 욱일대수장
- 폐렴으로 죽은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