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임 지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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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13・28대 방위청 장관 | |
<colcolor=#fff><colbgcolor=#3CA324> 일본국 제24-39대 중의원 의원 에사키 마스미 江﨑真澄 | Esaki Masumi | |
출생 | 1915년 11월 23일 |
아이치현 이치노미야시 | |
사망 | 1996년 12월 11일 (향년 81세) |
도쿄도 | |
학력 | 구제 제8고등학교 (졸업) 니혼대학 법학부 (법학 / 학사) |
정당 | |
의원 선수 | 17 (중) |
의원 대수 | 22, 23, 24, 25,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중) |
지역구 | 舊 아이치현 제3구 |
악력 | 도쿄시 공무원 센슈대학 교수 호쿠에쓰석유 감사 다이토석유 이사 일본강판 상무 제4대 경제심의청장관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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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전직 정치인. 에사키 데쓰마 의원의 부친이다.2. 생애
1915년 11월 23일 아이치현 나카지마군 이치노미야정 (현재의 이치노미야시)에서 태어난 에사키 마스미는 구제 사립 토호상업학교를 거쳐 구제 8고등학교(현 나고야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아 결핵에 의해 학교를 중퇴해야 했고, 이후 니혼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해 모교인 토호상업학교의 교사로 재직했다.토호상교 교사 재직 중 동 학교 교장인 시모이데 요시오의 비서를 거쳐 1946년 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일본자유당 소속으로 구 아이치현 제3구에 입후보해 첫 당선되었다.
에사키는 자유당에서 총무회장, 간사장을 지낸 히로카와 고젠의 최측근으로 활동하였고, 1952년 히로카와가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예산위원회에서 야당 의원 니시무라 에이이치를 향해 바카야로라고 말해 물의를 일으킨 "바카야로 사건"에 항의한 당 내 소수파인 하토야마 이치로의 파벌에 합세한 후 총재인 요시다에 의해 제명되는 사태가 일어나자 오가타 다케토라의 파벌로 위치를 옮겼다. 하지만 그해 총선에서 처음으로 낙선을 겪었다. 이듬해 1953년 총선에서 당선되어 국정에 복귀했고, 1956년 오가타가 심근경색으로 급사하자 한동안 스나다 시게마사의 측근으로 지내다가 보수방류 파벌인 기시 노부스케파에 합세했다.
1960년 제1차 이케다 하야토 내각에서 방위청 장관으로 발탁되어 첫 입각에 성공했다. 같은해 후지야마 아이이치로가 자신의 파벌인 애정회(후지야마파)를 창설하자 합류했다. 이듬해인 1961년에는 자민당 국회대책위원장을 지냈다.
1971년 7월 발족한 제3차 사토 에이사쿠 개조내각에서 방위청 장관인 마스하라 케이키치와[1] 니시무라 나오미[2]가 잇따라 사임하자 그해 12월 30일 후임 방위청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같은해 미즈타 미키오, 무라카미 이사무가 미즈타파를 결성하자 이에 참여하였다.
1972년 제2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는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장, 홋카이도 개발청장관직을 맡으며 두번째로 입각했다. 1973년에는 초대 자민당 간사장 대리직을 맡으며 다나카 내각의 대변인 역할을 맡았다. 1974년 다나카가 록히드 사건으로 내각 총 사퇴라는 결정을 내렸으나, 다나카의 정치적 영향력은 오히려 더욱 강해졌다. 에사키는 훗날 중의원 의장을 지내는 타무라 하지메와 함께 다나카의 파벌인 목요회에 가입했다.
1976년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록히드 사건의 핵심 인물인 다나카파에 속해있다는 이유로 미키파의 가이후 도시키에게 1위 자리를 내주었지만, 동 시기 자민당 총무회장,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을 맡으며 체급을 키웠다. 1978년에는 자민당 아이치현 지부의 회장을 맡았다.
78년 12월 제1차 오히라 마사요시 내각이 출범하자 통상산업대신에 임명되었다. 1985년 제2차 나카소네 야스히로 2차 개조내각에서는 총무청장관 겸 대외경제문제·민간활력도입 특명담당상직을 맡게 되었다. 1987년 다나카파가 분열되어 다케시타 노보루의 경세회와 니카이도 스스무의 니카이도 그룹으로 갈라지자 에사키는 다나카파의 옛 중진으로서 니카이도 그룹에 잔류했다. 그러나 그의 측근인 요시카와 히로시와 오키 히로시는 경세회 행을 택하며 에사키와 결별했고, 에사키와 함께 다나카파의 중립파 의원이었던 이마에타 노리오도 경세회로 이탈했다.
1989년 6월 니카이도가 니카이도 그룹에서 이탈하며 무파벌 신분이 되자 에사키는 구 니카이도 그룹의 새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한편 그해 8월에 열린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에사키는 자신의 파벌에 속해 있던 하야시 요시로[3]를 지지했으나, 그의 옛 측근인 요시카와는 고모토 토시오파인 가이후 도시키를 지지해 둘의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그해 총재선은 경세회의 지지를 받은 가이후의 승리로 끝났다.
그해 이치노미야시 시장 보궐선거에서 자신이 추천한 후보가 가이후가 추천한 후보에게 패배해, 지역 내 정치적 영향력이 줄어든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1990년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되면서 17선을 기록했지만,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자신의 비서와 후원회장, 현의회 의원, 정의회 의원들이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에사키는 모든 책임을 지고 아이치현 연합회장 선거에 불출마 했다.[4]
1992년 12월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불출마를 선언하며 정계를 은퇴했다. 그의 지반은 장남 에사키 데쓰마가 이어받았으며, 하타 쓰토무와 함께 정치개혁을 하고 싶다는 아들을 뜻을 존중해 데쓰마의 신생당 참여를 지지했다. 정계를 은퇴한 뒤엔 정계를 일본무도관 회장에 취임해 아이치와 도쿄를 왕복하며 생활했다. 그러나 1996년 여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투병생활을 진행하다 그해 12월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
3.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45 - 1948 | 정계입문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48 | 정당 해산 |
| 1948 - 1950 | 창당 |
| 1950 - 1955 | 창당 |
| 1955 - 1996 | 합당 사망 |
4. 선거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46 | 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아이치현 제1구 | | - (-%) | 당선 (10위) | 초선 |
1947 | 제2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아이치 3구 | 60,722 (28.3%) | 당선 (1위) | 재선 | |
1948 | 제2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74,637 (33.6%) | 3선 | ||
1952 |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67,033 (29.3%) | 4선 | ||
1953 |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43,228 (19.1%) | 낙선 (4위) | |||
1955 |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1,520 (29.7%) | 당선 (1위) | 5선 | ||
1958 |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79,883 (29.8%) | 당선 (1위) | 6선 | |
1960 |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6,902 (19.60%) | 7선 | |||
1963 |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7,761 (41.67%) | 8선 | |||
1967 |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2,372 (36.39%) | 9선 | |||
1969 |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1,397 (36.21%) | 10선 | |||
1972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4,397 (27.29%) | 11선 | |||
1976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7,643 (24.35%) | 당선 (3위) | 12선 | ||
1979 |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17,928 (28.35%) | 당선 (2위) | 13선 | ||
1980 |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26,648 (26.99%) | 14선 | |||
1983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7,918 (25.36%) | 15선 | |||
1986 |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31,763 (27.66%) | 16선 | |||
1990 |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5,980 (19.60%) | 당선 (3위) | 17선 |
5. 여담
- 다나카 가쿠에이가 뇌출혈로 쓰러지기 전인 1985년 2월 25일, 도쿄 프린스 호텔에서 하타 쓰토무가 주최한 정치파티에 참석한 다나카는 "다나카파의 총재 후보는 첫번째로 니카이도 스스무, 둘째는 에사키 마스미, 셋째는 고토다 마사하루다." 라는 말을 하며 다케시타 노보루를 견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다나카는 세대 교체 보다는 시간 벌기를 위해서 이런 말을 한 목적이 더 컸고, 다나카파 내에서도 에사키를 차기 회장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 일본음악재단의 회장을 1975년 부터 1992년까지 맡았다.
[1] 전일본공수 시즈쿠이시 공중충돌 사고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2] "유엔은 시골의 협동조합", "중국이 유엔에 가입하면 상황이 나빠진다", "몰디브는 토인국이다" 라는 발언을 해 세간의 물의를 빚자 사임했다.[3] 하야시 요시마사의 부친.[4] 처음에는 방위청 장관을 지낸 무라타 케이지로와 연합회장 출마를 둘러싸고 마찰이 있었지만, 세이와 정책연구회의 회장인 아베 신타로가 대화로 해결하자는 의견을 제시해 두 사람의 의논 이후 에사키가 무라타에게 회장직을 양보하는 것으로 끝이났다.
분류
- 일본의 남성 정치인
- 자유당(1950년) 국회의원
- 자유민주당(일본) 국회의원
- 1915년 출생
- 1996년 사망
- 이치노미야시 출신 인물
- 제22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3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4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5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7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8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9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0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1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2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3대 일본 중의원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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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7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8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9대 일본 중의원 의원
- 니혼대학 출신
- 일본 총무대신
- 일본 경제산업대신
- 일본 방위대신
- 일본 국가공안위원장
- 정3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