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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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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12fa7> 일본국 제59대 중의원 의장 호리 시게루 保利茂 | Hori Shigeru | |
<colcolor=#c3c965> 출생 | <colbgcolor=#ffffff,#191919>1901년 12월 20일 |
사가현 히가시마츠우라군 오니즈카정 (현 사가현 카라츠시) | |
사망 | 1979년 3월 4일 (향년 77세) |
도쿄도 미나토구 | |
학력 | 주오대학 경제학부 (경제학 / 학사) |
자녀 | 장남 호리 고스케[1] |
정당 | |
의원 선수 | 12 (중) |
의원 대수 | 21, 22, 24, 25, 26, 27, 28, 29, 31, 32, 33, 34[2] |
지역구 | 사가현 전현구 |
약력 | 호치신문 기자 도쿄 니치니치신문 기자 야마모토 조타로 중의원 의원 비서 야마자키 타츠노스케 농림대신 비서관 중의원 의원 (제21-22, 24-29, 31-34대) 제29대 건설대신 (제2차 사토 제1차 개조내각) 제7, 29-30대 내각관방장관 제37대 행정관리청 장관 (제2차 다나카 제1차 개조내각) 제59대 중의원 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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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치인. 12선 중의원, 중의원 의장, 내각관방장관직을 역임하였다.2. 생애
2.1. 유년 시기 - 신문기자 시절
호리는 1901년 12월 10일 일본 제국 사가현 히가시마츠우라군 오니즈카(현 카라츠시)에서 영세농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가계를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가난했다. 아버지는 인력거꾼으로 일하며 돈을 벌었고 그와 그의 어머니, 그리고 호리의 형제들은 밭일, 행상 등의 일을 하며 틈틈히 생계를 꾸려 나가야했다.호리는 집안일을 도우며 소학교를 다녔고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졸업했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 상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철공소에서 견습공으로 일했다. 견습공으로 3년을 일한 뒤 연습생이 된 17살 때 직장을 뛰쳐나와 도쿄로 상경했다.
도쿄에 올라온 그는 와세다대학 이공학부 교수 니시오카 타츠로의 도움을 받아, 검정고시를 통해 사관학교에 입학하길 희망했다. 그는 도쿄에서 여러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며 틈틈히 학업에 열중했고, 시험에 합격했으나 생각이 달라져 사관학교 입학을 포기하게 된다. 그대신 일을 하면서도 학업을 병행할수있는 주오대학 경제학부 경제학과 야간부에 입학했다.
주오대학 교수 사토 마사유키가 호치신문 정치부장 정치부장 이노우에 카츠요시를 소개해준 것을 계기로 대학을 나온 뒤 호치 신문[3]에서 일하게 됐다. 이 무렵 2차 호헌 운동의 여파로 기요우라 게이고 내각이 붕괴되고 입헌정우회, 헌정회, 헌정본당 3당이 연합하여 가토 다카아키 연립내각을 구성했다. 호리는 격동의 정국속에 취재현장을 열심히 누볐으며 훗날 "취재 기자로서는 제법 유능했다. 나는 평생 신문기자로서 붓을 들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라고 회고했다.
이후 호치 신문 치바지국으로 발령을 받았다가 지방취재 생활에 염증을 느껴 1927년 호치 신문을 퇴사하고 도쿄 니치니치 신문[4]에 이직했다. 그리고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으로 이적했다가 니치니치 신문 이적 당시 신세를 진 키도 모토스케 대표이사가 사내 항쟁으로 인해 5개월 만에 쫒겨내자 호리는 얼마 되지 않아 마이니치 신문을 떠났다.
2.2. 정계 활동
신문 기자 생활을 그만둔 호리는 입헌정우회 간사장 야마모토 조타로(山本条太郎, 1867~1936)의 밑에서 일했고, 이후 농림대신이 된 야마자키 타츠노스케(山崎達之輔, 1880~1948)의 비서로 근무하며 농림 관계 회사에서 근무했다.1942년 제2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된 마츠오카 헤이이치가 선거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하자 호리는 무소속으로 사가 2구에 출마해 무투표 당선되었다. 일본의 패전 이후 그는 하토야마 이치로가 결성한 일본자유당에 참가하려 했지만, 야마자키 타츠노스케의 반대로 인해 마치다 추지의 일본진보당에 입당했다. 1946년 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사가현 전현구에 출마하여 당선, 그러나 GHQ의 공직 추방으로 대부분의 의원들이 자격 정지 처분을 받고 추방을 당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1947년 일본진보당이 해산되자 진보당 재직 시절 호리와 같은 파벌에 소속된 이누카이 다케루[5]와 함께 아시다 히토시를 중심으로 한 일본민주당 결성에 참가한다. 그러나 1947년 4월 제2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선거활동 중 정치자금 위반으로 인한 추가처분으로 처벌을 받아 불출마하였고, 이 처분은 이듬해 해제되었다.
1948년 일본민주당이 분열되자 요시다 시게루의 민주자유당을 거쳐 1950년 자유당 창당에 합류했다. 이후 요시다의 정치적 제자인 "요시다 스쿨"의 일원으로서 내각에 중용되었다. 그해 제3차 요시다 제1차 개조내각에서 49세의 나이로 첫 입각하였으나 세간의 반응은 그렇게 좋지 않았고,[6] 1951년 내각관방장관으로 이동했다. 요시다는 호리에게 "내각관방장관직이 단순히 총리 보좌직이라고 생각지 말고, 당시 총리 대신이라면 어떻게 생각할지,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일해달라."라는 조언을 했다.
호리는 요시다 자유당에서 요시다 4봉행(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 히로카와 고젠, 호리 시게루)의 한명으로 활동하며 전전 입헌정우회 출신 정치가들이 추방 해제로 족족 복귀하며 요시다에게 퇴진 압력을 가하자, 마쓰노 쓰루헤이와 함께 원로 정치인과 현직 정치인들의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다.
1952년 시게미쓰 마모루를 중심으로 한 개진당이 창당되어 호헌파와 개헌파의 대립이 격화되자, 자유당 내 하토야마파의 공격에 반격하기 위해 요시다 총리로부터 불시 해산(抜き打ち解散)을 준비할것을 명 받았고, 이 해산은 일본국 헌법 제7조에 의한 첫 국회 해산이 되었다.
이 해산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것은 마쓰노와 요시다 4봉행 멤버 정도였으며 중의원 의장 오노 반보쿠, 자유당 간사장 하야시 조지, 자유당 총무회장 마스타니 슈지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을 정도였다. 특히 오노는 요시다가 국회 해산을 추진하는 걸 알지 못했고, 의장으로 선출된 지 불과 3일밖에 되지 않은 신분인 그는 격노하여 호리를 맹비난했다.
1952년 8월의 불시 해산 이후 1953년 3월에는 바카야로 해산이 이어졌다. 총선이 반복될 때마다 자유당은 1당 지위를 지켰지만 과반 의석은 한번도 획득지 못했고 당 내부에선 요시다에 대한 비토 여론이 들끓기 시작한다 1954년에 조선 의옥 사건이 터지면서 야당이 다시 제5차 요시다 내각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을 제출하려 하자 요시다는 이번에도 해산으로 맞서고자 했다. 하지만 측근들이 이를 만류하면서 요시다는 불신임 결의안이 본회의에 상정되기 전에 결국 퇴진했다.
1954년 요시다 내각이 총 사퇴하고 제1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이 성립되자 야당 정치인으로 변했다.[7] 그리고 1년후 보수 합동 정치인 자유민주당이 창당하자 이에 참가했고 자민당 내에서는 사토파(주산회)에 속했다.
제1차 이케다 하야토 내각이 성립되자 자민당 총무회장에 선임되었지만 1963년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낙선하면서 물러나게 되었다. 호리는 1964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 이케다가 출마하면서 3선을 노리자 사토의 출마를 종용했다. 하지만 다나카 가쿠에이가 요시다를 설득하면서까지 이케다와 사토의 중재에 나서자 호리는 다나카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이케다는 3선에 성공했지만 후두암 발병으로 인해 곧 물러나게 되었고, 사토가 신임 총재에 오르게 되었다.
사토는 1966년 개조내각을 성립하며 호리를 농림대신에 선임하려고 했지만 자민당 부총재 가와시마 쇼지로와 간사장 다나카 가쿠에이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2.3. 정계의 거물로서
1967년 제31회 중원선에서 10만표를 얻으며 국정에 복귀한 호리는 제2차 사토 제1차 개조내각에서 건설대신에 입각하였다. 1968년 11월에는 제2차 사토 2차 개조내각에서 두번째 내각관방장관 임기를 시작하였다. 호리는 당초 고령의 나이를 이유로 관방장관직을 고사했지만 사토의 권유로 직책을 받아들였다.사토는 도쿄대 투쟁 사태 등 학생운동이 격화되자 대학운영임시조치법을 입법시켜 학생운동을 진정 시키고자 하였다. 호리는 사카타 미치타가 작성한 초안이 학내 폭력 문제를 단속하기에 부족하다며 자민당 내에서 반대가 쏟아져 나왔다.[8] 호리는 당시 경찰청 장관 고토다 마사하루 등을 만나 "다소 미온적인 내용이어도 대학 당국의 자주적인 노력을 촉진하는 문부성의 안으로 입법시키자"라고 설득했고, 자민당 내부와 야당들도 일제히 반대했지만 간사장 다나카 가쿠에이의 설득으로 결국 해당 법안은 통과했고, 학생운동이 누그러지는 모습을 보였다.
1971년 7월 제3차 사토 개조 내각이 출범하면서 호리는 관방장관에서 물러난 뒤 자유민주당 간사장이 되었다. 호리의 역할은 오키나와 제도 반환과 후쿠다 다케오에게 원만하게 정권을 이양해 주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그해 6월 치러진 제9회 참원선에서 야당 공투가 성공하며 자민당이 예상외로 의석수가 약간 감소했다.
그리고 9년간 의장으로 재임하던 시게무네 유조에 대한 자민당 내의 반감이 거세져 시게무네가 의장에서 물러나고 고노 켄조가 새로 의장에 취임했다. 호리는 두 사람을 중재하려 했으나 의장에서 물러나는 시게무네가 "고노가 야당과 결탁했다"라고 말해 고노가 격분하면서 호리의 중재는 실패로 돌아갔다.
사토는 본래 후쿠다 다케오를 후임 총재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차기를 노리던 다나카 가쿠에이는 사토가 미처 손쓸 틈도 없이 사토파의 대다수를 자신의 파벌로 끌어들였다. 호리는 다나카파에 합류하지 않은 사토파의 의원들을 끌어들였으나 두 파벌간의 세력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컸고, 그 결과 후쿠다는 1972년 총재선에서 다나카에게 패배했다.
1973년 11월 제2차 다나카 1차 개조내각이 성립하자 그는 행정관리청 장관직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7월 치러진 제10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이 패배하자 당시 대장대신인 후쿠다가 환경청 장관인 미키 다케오와 함께 사임했다. 호리는 후쿠다의 사임을 만류했으나 후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호리도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같이 사임했다. 그 해 말에 록히드 사건이 표면화되어 다나카가 퇴진에 몰리자 호리는 자유민주당 부총재 시이나 에쓰사부로와 함께 미키를 후임 총재로 추대하는 시이나 재정을 이끌어냈다.[9]
1976년에 록히드 사건의 여파로 다나카가 구속되자 미키에 대한 책임을 물어 미키 내림이 발생했다. 이때 호리는 시이나, 후나다 나카, 소노다 스나오 등과 함께 거당체제협의회를 결성해 미키의 퇴진에 앞장섰다. 호리는 미키의 후임으로 후쿠다 다케오를 추천했고 오히라 마사요시와 다나카 가쿠에이의 측근들을 통해 오히라와 다나카의 허락을 받아냈고, 미키 내림에 함께한 시이나, 소노다, 오히라, 스즈키 젠코와 함께 후쿠다에게 정권을 이양하되 2년뒤 오히라에게 정권을 넘겨줄것을 약속하는 다이후쿠 밀약을 맺었다.
2.4. 말년
1976년 12월 미키가 총리에서 물러나고 후쿠다가 후임 총리로 선출되자, 호리는 중의원 의장에 취임했다. 그는 의장으로 재직하면서 원만한 국회 운영을 위해 노력했고 야당도 호리의 중후한 인격에 경의를 표해 여야간 큰 충돌 없이 무난한 국회운영이 이루어졌다.1977년 제11회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만족할만한 승리를 거두며 당세가 회복되자 후쿠다파 에서는 중의원을 해산하고 의석수를 늘려 후쿠다 총리의 재선을 위한 밑거름으로 삼아야한다고 주장했지만, 호리는 해산을 만류했다.[10] 1978년 들어서 해산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지만 이는 오히라에 대한 후쿠다의 불신을 키웠다.
그리고 얼마뒤 후쿠다가 총재 재선에 도전했고 후쿠다는 협력을 위해 호리를 찾았으나 "나는 2년 전의 일(다이후쿠 밀약)에 책임을 느끼고 있다"라며 후쿠다의 협력을 거절했으며 후쿠다 내각 2년 동안 간사장으로 재직한 오히라를 높이 평가했다. 총재 선거 결과 다나카파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은 오히라가 예상보다 더 큰 표 차이로 후쿠다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1978년 말 호리는 간암 투병으로 인해 의장업무를 수행하기 어려운 상황에 빠졌고 이듬해 1월 중의원 의장직을 사퇴했다.
그리고 2개월 뒤인 1979년 3월 4일 도쿄 미나토구의 병원에서 간암 투병 중 심부전으로 인해 향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지역구는 장남 호리 고스케가 이어받았다.
3.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44 - 1945 | 정계 입문 |
| 1945 - 1947 | 창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47 | 정당 해산 |
| 1947 - 1948 | 입당 |
| 1948 - 1950 | 창당 |
| 1950 - 1955 | 창당 |
| 1955 - 1979 | 합당 사망 |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44 | 제21회 일본 중의원 의원 보궐선거 | 사가 2구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무투표 당선 | 당선 | 초선[11] |
1946 | 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사가 전현구 | | - (-%) | 당선 (5위) | 재선 |
1949 | 제2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48,686 (12.5%) | 당선 (2위) | 3선 | |
1952 |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62,737 (14.4%) | 당선 (1위) | 4선 | |
1953 |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55,589 (13.0%) | 당선 (2위) | 5선 | ||
1955 |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56,165 (13.1%) | 당선 (1위) | 6선 | ||
1958 |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62,497 (14.0%) | 당선 (2위) | 7선 | |
1960 |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62,224 (14.0%) | 8선 | |||
1963 |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53,128 (12.5%) | 낙선 (6위) | |||
1967 |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03,863 (24.0%) | 당선 (1위) | 9선 | ||
1969 |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116,173 (28.0%) | 10선 | |||
1972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7,704 (21.5%) | 10선 | |||
1976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90,208 (18.5%) | 11선[12] |
5. 여담
- 일명 "모장"이라는 별명으로 밀실형, 조정형 정치가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적을 동지로 만드는데 능숙해, 특유의 욕심 없는 성격과 중후한 인품으로 보수본류를 유지시키는데 기여했다.
- "백술은 일성이 없다" 라는 모토로 정계활동을 했다. 한때는 책사, 전략가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말년 중의원 의장 시기에는 성실하고 중후한 인품이 높게 평가되어, 여야의 틀을 넘은 인망이 주목을 받아 명의장 이라고 평가되었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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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무대신 | 요시다 시게루 | |
법무총재 | 오오하시 다케오 | |
대장대신 | 이케다 하야토 | |
문부대신 | 아마노 데이유 | |
후생대신 | 하시모토 료고 | |
농림대신 | 네모토 류타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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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임소 장관 | 나카야마 도시히코 | |
지방자치청 장관 | 오카노 기요히데 | |
대신자치청 장관 | 오카자키 가쓰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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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border-top: 0px none; border-left: 10px solid #33d6ad; border-right: 10px solid #33d6ad; text-align: center; margin: -6px -11px; padding: 7px; min-height: 34px" {{{#!wiki style="margin: 0 -16px -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31px; word-break: keep-all" | 직위 | 명단 |
<colcolor=#fff> 부총리 | <colbgcolor=#ffffff,#1f2024> 오가타 다케토라 | |
외무대신 | 오카자키 가쓰오 | |
법무대신 | 이누카이 타케루 → 가토 료고로 → 오하라 나오시 | |
대장대신 | 오가사와라 산쿠로 | |
문부대신 | 오다치 시게오 | |
후생대신 | 야마가타 카즈미 → 쿠사바 류엔 | |
농림대신 | 우치다 노부야 → 호리 시게루 | |
통상산업대신 | 오카자키 가쓰오 → 아이치 기이치 | |
운수대신 | 이시이 미쓰지로 | |
우정대신 | 츠카다 주이치로 | |
노동대신 | 코사카 젠타로 | |
건설대신 | 토츠카 쿠이치로 → 오자와 사에키 | |
방위청장관 | 기무라 도쿠타로 | |
내각관방장관 | 후쿠나가 겐지 | |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 ||
<colbgcolor=#007a60> 보안청 장관 | 기무라 도쿠타로 → 폐지 | |
경제심의청장관 | 오카노 기요히데 → 아이치 기이치 | |
자치청 장관 | 츠카다 주이치로 | |
홋카이도개발청 장관 | 토츠카 쿠이치로 → 오노 반보쿠 → 오가타 다케토라 | |
국무부장관 | 안도 마사유키 → 오노 반보쿠 → 오노기 히데사부로 → 가토 료고로 → 후쿠나가 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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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34~ 2023. 문부대신, 자치대신,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12선 중의원 의원 역임.[2] 재직 중 사망.[3] 스포츠 신문인 스포츠 호치로 유명한 신문사며, 현재는 요미우리 신문의 산하에 있다.[4] 마이니치 신문의 전신 신문사[5] 이누카이 쓰요시 전 총리의 장남.[6] 그러나 요시다는 호리의 노동대신 재직 시절 그의 끈기와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7] 그래봤자 1년후 자민당의 창당으로 야당 정치인으로 지낸건 1년에 불과했다...[8] 사카타의 초안에는 대학분쟁 발생을 때 학장이 즉시 문부대신 에게 상황을 보고할 것, 분쟁 발생으로부터 9개월 이상(재발의 경우는 6개월 이상) 경과해도 수습이 곤란할 때는, 문부대신은 해당 학부의 교육 연구 기능을 정지할 수 있는 행위 등의 문부성 중심의 내용이 들어있었다.[9] 이 과정에서 시이나는 호리에게 내각의 주요 요직을 짤 것을 요구했고 가네마루 신 등 일부 인사들은 호리를 총리로 옹립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10] 호리가 해산을 만류한 이유는, 오히라파와 후쿠다파간 맺어진 다이후쿠 밀약의 약속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였기 때문이다.[11] 단독출마[12] 1979.3.8 임기 중 사망
분류
- 일본 제국의 정치인
- 일본의 남성 정치인
- 일본 내각관방장관
- 일본 중의원 의장
- 일본 총무대신
- 일본 건설대신
- 일본 농림수산대신
- 일본 노동대신
- 제24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5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6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7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8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29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1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2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3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제34대 일본 중의원 의원
- 자유당(1950년) 국회의원
- 자유민주당(일본) 국회의원
- 자유민주당(일본) 간사장
- 1901년 출생
- 1979년 사망
- 카라츠시 출신 인물
- 주오대학 출신
- 기자 출신 정치인
- 심부전으로 죽은 인물
- 종2위
- 욱일대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