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임한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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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제7대 농림수산대신 | |
일본국 제61대 운수대신 | |
일본국 제30-33·35-39대 중의원 의원 야마무라 신지로 山村新治郎 | Yamamura Shinziro | |
<colbgcolor=#3CA324><colcolor=#fff> 출생 | <colbgcolor=#fff,#1F2023>1933년 4월 28일 |
치바현 사와라시 | |
사망 | 1992년 4월 12일 (향년 58세) |
학력 | 가쿠슈인대학 정경학부 (정치학 / 중퇴) |
부모 | 아버지 야마무라 신지로[1] |
자녀 | 1남 2녀 |
위계 | 정3위 |
정당 | |
의원 선수 | 9 (중) |
의원 대수 | 30[2], 31, 32, 33, 35, 36, 37, 38, 39 |
선거구 | 치바 2구 (중선거구) |
약력 | 야마무라 신지로 중의원 의원 비서 중의원 의원 (제30-33·35-39대) 운수정무차관 (제3차 사토 내각) 농림수산대신 (제7대, 제2차 나카소네 내각) 운수대신 (제60대, 우노 내각) 중의원 예산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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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치인. 농림수산대신, 운수대신, 운수정무차관, 9선 중의원 의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 일본항공 351편 공중 납치 사건으로 일본 내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되었다.2. 생애
2.1. 사건 이전 삶
1933년 4월 28일, 일본 제국 치바현 사와라시에서 태어났다. 야마무라가는 에도 시대 때부터 미곡상을 영위하는 명문가였으며, 9대째의 야마무라 신지로 때부터 정계와 깊은 연관을 가졌다. 10대째의 아버지 야마무라 신지로는 자민당의 국회대책위원장과 내각의 행정관리청 장관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었다.지바현립 사하라고등학교[3]를 졸업하고 가쿠슈인대학 정경학부 정치학과를 중퇴, 정치수업을 위해 아버지 신지로의 의원 비서가 되었다.
1964년 아버지 신지로가 사망하여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치바현 제2구 출마해 첫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1970년 제3차 사토 내각에서 운수정무차관으로 취임했다.
2.2. 일본항공 351편 공중 납치 사건
같은 해에 일본인을 태운 여객기가 납치되어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김포국제공항에 정착한 일명 일본항공 351편 공중 납치 사건이 벌어지자, 당시 운수정무차관이었던 야마무라는 자신의 상관인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운수대신과 함께 서울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야마무라는 납치범들과 협상을 벌여 인질인 승객들을 모두 풀어주는 대신, 자신이 인질이 되겠다고 설득했고, 결국 납치범들은 조종사 3명을 제외한 인질들을 모두 풀어주고 야마무라를 인질로 데리고 북한 평양으로 이륙했다. 이후 야마무라는 사건일자인 3월 31일에서 5일 뒤인 4월 3일에 일본에 귀국했다.이후 일본에서는 야마무라를 국민적 영웅으로 치켜세우며 화제가 되었고, 당시 총리였던 사토 에이사쿠에 의해 내각총리대신 현창을 수여받았다.
2.3. 사건 이후와 사망
1976년 제34회 중원선에서 한번 낙선하였으나 1979년 제35회 중원선에서 다시 국정에 복귀, 1983년 제2차 나카소네 내각에서 제7대 농림수신대신에 취임하고 1989년에는 우노 내각에서 제60대 운수대신에 취임했다. 또한 1991년에 중의원 예산위원장에 취임했다.1992년 4월 12일, 자민당 방북단 단장으로서 북한으로의 출국을 하루 앞두고 있었으나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차녀에 의해 칼에 찔려 자신의 아내 앞에서 사망했다. 향년 58세. 당시 일본에서 현직 국회의원이 암살당한 사례는 아사누마 이네지로와 니와 효스케에 이어 3번째였다.
그를 살해한 차녀는 심신상실로 인해 판단능력이 흐트러져있다고 판단하여 불기소 처분되었으나, 4년 뒤인 1996년에 자살했다.
그의 사망 이후 5번째 아들이 후계자로 이름을 올렸지만, 너무나도 비극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후보로 나오지 않았고, 이로써 야마무라가의 세습은 막을 내렸다. 그 대신 그의 비서였던 지츠카와 유키오가 구 치바 2구에 신생당 공천을 받아 당선되어 지반을 이어갔다.
3.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64 - 1992 | 정계 입문 사망 |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64 | 1964년 일본 중의원 의원 보궐선거 | 치바 2구 | | 68,124 (36.9%) | 당선 (1위) | 초선 |
1967 |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48,116 (19.9%) | 당선 (1위) | 재선 | ||
1969 |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42,339 (15.7%) | 당선 (3위) | 3선 | ||
1972 |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56,265 (17.5%) | 당선 (1위) | 4선 | ||
1976 |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45,157 (12.2%) | 낙선 (6위) | |||
1979 |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2,155 (19.2%) | 당선 (2위) | 5선 | ||
1980 |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1,256 (24.0%) | 당선 (2위) | 6선 | ||
1983 |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79,588 (22.8%) | 당선 (2위) | 7선 | ||
1986 |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6,838 (22.2%) | 당선 (2위) | 8선 | ||
1990 |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88,101 (21.3%) | 당선 (2위) | 9선[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