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東洲斎 写楽(? ~ ?)일본 에도 시대의 우키요에 화가.
2. 혜성처럼 등장한 화가
기존의 일본 화가들과는 다른 독특한 개성과 얼마 안 되는 동안에만 활동하고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사실 때문에 그 정체를 두고 오늘날까지도 각종 논쟁이 일고 있다.1794년 5월, 에도에 갑자기 이전에 보지 못했던 화가가 나타났다. 그는 스스로를 도슈사이 샤라쿠라고 말하면서 활동을 시작했다.
보통 샤라쿠가 그리는 그림은 가부키 배우들을 선전하기 위한 그림이 많았다. 당시 가부키 배우들은 오늘날로 치면 아이돌급의 인기를 누리던 사람들이라 요즘으로 치면 아이돌 화보집을 전문적으로 찍는 사진가같은 포지션. 그 당시 일본의 화가들은 이러한 그림들을 그릴 때면 가부키 배우들을 무작정 미화하여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샤라쿠는 당시로서는 매우 신선하게도 배우들의 특징을 잡고 그것을 과감하게 강조하는 스타일을 취했다. 또한 표정이나 포즈도 대단히 다이나믹하게 그리는 특징이 있었다. 이전의 일본에서는 최대한 정적으로 그린 그림이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을 보면 확실히 독특했던 부분. 이 때문에 어떤 배우들의 경우는 자신을 그린 그림이 너무 기괴하다며 대놓고 불쾌해했다고 한다.
이러한 특성 때문인지 당대 기록들에서 샤라쿠의 그림에 대한 우호적인 평가는 드문 편이고 그림 자체도 그리 잘 팔리는 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심지어 샤라쿠의 그림은 소장할 가치를 못 느끼겠다며 도자기 싸는 포장지로 취급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당시 우키요에는 서민들이 향유하던 가판대 잡지같은 다색 판화로 찍어낸 값싼 인쇄물인지라 딱히 샤라쿠의 그림만 포장지 취급당한 건 아니었다. 당장 당대 인기 화가였던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작품집조차도 도자기 포장지로 쓰여졌다.
3. 활동 시기
대체로 일본 미술사가들은 짧은 샤라쿠의 활동 기간을 4기로 나눈다.- 1기: 1794년 5월에 내놓은 흑운모판에 그린 그림 28점.
- 2기: 1794년 6,7월에 내놓은 그림들. 인기 가부키 배우의 전신화 7점과 그 외 그림들 31점.
- 3기: 1794년 11월에 내놓은 그림들. 초연되는 가부키들의 공연을 그린 그림 44점 외에 12점.
- 4기: 1795년 1,2월에 내놓은 그림들. 봄에 공연된 가부키의 그림들과 소수의 스모 그림들.
샤라쿠의 작품들 중 평가가 가장 높은 것은 1기 작품들이며 이 시기에 샤라쿠의 대표작들이 많다. 이후로 갈수록 평가가 별로 좋지 않은 편인데, 일각에서는 1,2기와 3,4기가 미묘하게 화풍의 차이가 있으므로 후기에는 어시스턴트들을 두고 샤라쿠풍으로 그리게 한 대량생산물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이후 샤라쿠는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홀연히 사라져버렸고 그의 그림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도자기 싸는 포장지로 쓰여져 해외에 도자기 수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우키요에 판화들과 같이 유럽에까지 흘러갔다. 그런데 19세기 유럽에서 이렇게 샤라쿠의 그림이 흘러들어간 것을 발견한 유럽측에서 이전 일본에서 받은 평가와는 정반대의 평가를 받았다. 독특한 그의 화풍을 유럽인들은 높이 평가했고 화가들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빈센트 반 고흐도 파리 거주 시절에 우키요에를 접했고 샤라쿠의 작품을 모사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이런 평가가 역으로 일본으로 돌아오면서 다이쇼 시대에 이르러서야 일본에서는 샤라쿠에 대하여 재조명이 이루어졌다.
4. 그는 누구인가?
느닷없이 나타났다 느닷없이 사라지고, 불과 10개월이란 시간 동안 140여점의 그림을 남기고 활동을 그만둔 점, 당대의 화풍과는 다른 그림을 그렸다는 점에서 그의 정체를 두고 많은 설왕설래가 일기 시작했다. 그의 정체로 주장된 사람들은 이렇다.- 당대 최고의 우키요에 명인이었던 우타가와 도요쿠니
- 가부키노 엔쿄
- 가쓰시카 호쿠사이
- 기타가와 우타마로
- 화가 겸 난학자 시바 고칸
- 다니 분초
- 마루야마 오쿄
- 산토 교덴
- 가부키 배우 나카무라 지조
- 서양화가로 유명했던 도이 유린
- 소설가 짓벤샤 잇쿠
- 하이쿠 시인 다니 소가이
- 김홍도
- 신윤복[1]
- 네덜란드 화가[2]
하지만 샤라쿠라고 주장된 화가들의 그림 중 일부는 샤라쿠의 화풍과 흡사한 면모가 있긴 하나 대부분 샤라쿠의 그림으로 보기에는 뭔가 부족한 면이 없지 않다.
다만 에도 시대에 그의 정체를 기술한 유일한 기록이 존재한다. 에도에 대한 고증학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던 사이토 겟신이 1844년 저술한 <증보 우키요에 유고>에 의하면 그(도슈사이 샤라쿠)는 사이토 주로베에(斎藤十郎兵衛)라 불리던 노가쿠 배우라는 기술이 있다. 이 배우가 살던 곳은 핫초보리로 여기에는 아와 도쿠시마번의 번주인 하치스가 가문의 저택이 있었으며 여기에 하치스가 가문이 고용한 노가쿠 배우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 공교롭게도 샤라쿠의 그림을 팔아준 화상의 가게와 샤라쿠가 거주했다고 알려진 곳도 이 근방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이토 주로베에가 노가쿠 배우였기 때문에 주로 가부키 배우들을 그린 것이라는 추측을 하는 이들도 있다. 또한 그의 이름인 '도슈사이 샤라쿠'도 이를 암시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東洲斎라는 이름에 에도 동쪽에 집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다는 것. 이렇게 되면 에도 동쪽에 거주할만한 곳인 핫초보리나 쓰키지 근처밖에는 없는 터라 이 사이토 주로베에가 샤라쿠의 정체가 확실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사이토 겟신의 기록 외에는 사이토 주로베에의 실체를 증명할만한 문헌이 없어서 다른 화가나 예술인이 가명을 쓰고 화가 일을 잠시 한 것이라는 주장도 대두되었다.
그러나 근래의 미술사가들과 역사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다시금 샤라쿠=사이토 주로베에 설이 유력한 주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에 대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 노가쿠 배우들에 대한 기록들을 뒤져본 결과 사이토 주로베에란 이름이 기재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 하치스가 가문의 고문서들을 살펴본 결과 사이토 주로베에란 이름이 배우 항목에 기재되어 있었다.
- 에도의 문화인들에 대해 적은 기록에 의하면 핫초보리 항목에 "샤라쿠금기 지장다리"라는 언급이 있어서 핫초보리 지장다리 근처에 샤라쿠금기라는 인물이 살고 있었던걸로 보인다. 샤라쿠금기라는 이름을 쓴 이유는 그가 도슈사이 샤라쿠이기 때문이라는 것.
- 사이타마현의 정토종 사찰의 기록에 의하면 "핫초보리 지장다리 사이토 주로베에"이란 인물이 1820년 3월 7일 사망해 화장되었다라는 기록이 있어서 그가 1820년까지 살아있었던 걸로 보인다.
이러한 기록들을 근거로 현재 일본 학계에서는 사이토 주로베에 설을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다만 일부에서는 만약 노가쿠 배우인 사이토 주로베에가 샤라쿠라면 왜 노가쿠 배우를 하던 그가 느닷없이 10개월 동안 화가일을 하다가 갑자기 그만둔 이유가 뭐냐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생각만큼 그림이 잘 안 팔려서 그림 그리는 것을 포기했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5. 작품
<배우 이치카와 에비조 [3]상>, 1794년 作,37.8 x 25.1cm, 도쿄 국립 박물관 |
<3대 오타니 오니지의 얏코에도베>, 1794년 作, 도쿄 국립 박물관 |
6. 기타
- 독일의 미술 평론가 율리우스 쿠르트가 1910년에 그의 저서 <SHARAKU>에서 샤라쿠를 렘브란트, 벨라스케스와 더불어 3대 초상화가로 칭송했다는 말이 정설처럼 알려져 있지만[4] 실제로 SHARAKU에는 그런 내용이 적혀 있지 않다고 한다.
- 일본의 영화 감독인 시노다 마사히로가 1995년에 샤라쿠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사나다 히로유키가 주연을 맡았다.
-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일본의 미술 역사에 큰 이름을 남기고 감쪽 같이 사라진 천재 화가가 김홍도일 수도 있다는 가설은 꽤나 매력적인 소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때 이러한 가설을 소재로 영화나 웹툰이 만들어진 적이 있다. 2008년에 김홍도 샤라쿠 설을 토대로 황정민 주연의 영화 <샤라쿠>가 기획된 바 있다. 그러나 당시 엔화 환율 상승으로 일본 현지 촬영이 잠정 연기되었다가 그대로 기획이 엎어진 것 같다. 웹툰으로는 김홍도가 샤라쿠라는 설을 바탕으로 만든 봄툰의 적화소가 있다. 양희석도 레진코믹스에서 샤라쿠 스캔들을 연재하였다.
- 피그마로도 2018년에 테이블 미술관 시리즈로 대표작인 3대 오타니 오니지의 얏코에도베가 입체화되어 출시되었다. 넘버링은 Figma NO.SP-100. 피그마인 만큼 원작 재현을 위한 그림 프레임과 하반신과 사지, 도검까지 모두 구현되어 있다.
[1] 김재희 작가가 이 가설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기 위한 가설이라 다른 설들과 달리 근거는 아예 없다.) 가상 역사 추리소설 <색, 샤라쿠>를 쓴 바 있다.# # 소설 바람의 화원에서는 에필로그에서 화자인 김홍도가 홀연히 사라진 신윤복을 그리워하며 '샤라쿠라는 왜인이 다채로운 채색화를 그린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혹시 신윤복이었을까' 하는 식으로 언급되는데, 애초에 해당 작품의 본편 줄거리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이고 해당 장면도 '이런 소문을 들었는데 그게 신윤복이었을까, 저런 소문도 들었는데 그게 신윤복이었을까' 하는 식의 독백이라 말 그대로 스치듯 언급되었을 뿐이다.[2] 나카지마 세쓰코라는 사람이 주장한 바 있다.#[3] 본명이 아니라 예명(藝名)인데,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명문 가부키 배우 집안의 예명이다.[4] 3대 초상화가에 벨라스케스 대신 루벤스를 포함시킨 버전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