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91년부터 2002년까지 진행된 시에라리온의 내전.2. 상세
우리가 찾아간 코이나두구 빌리마야 마을에는 손발이 잘려나간 부상자들이 넘쳐났다. 현지인들은 하나 둘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딸을 지키려다 두 손을 모두 절단 당했다는 아버지, 어린 딸의 손목이 잘려나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던 어머니, 반군의 강압으로 친구의 다리를 잘라야 했다던 소년병의 증언이 이어졌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얘기들이었다.
"대통령에게 가서 너희들이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 걸 보여줘라." 반군들이 시민들의 손을 자르면서 했던 말이다. 정부군에게 자신들의 강인함을 보여주기 위해, 시민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해 반군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손발을 잘랐다.
전쟁의 기억 때문에 매일 악몽을 꾼다는 한 소년병의 이야기는 더 충격적이다. "반군의 강압에 마약을 먹고 사람을 죽였다. 사람이 완전히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뼈를 바르는 일을 해서 내 별명이 '본(bone, Qu)'이었다.”
박신양씨는 현지인들이 쏟아내는 이야기를 듣고 "도무지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다이아몬드 때문에 사람들의 팔다리를 잘랐다는 사실이 너무 큰 충격이고 특히 그랬다는 걸 용서하기 어렵다" 며 마음 아파했다.
내전으로 얼룩진 시에라리온에 가다 박신양편
딸을 지키려다 두 손을 모두 절단 당했다는 아버지, 어린 딸의 손목이 잘려나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던 어머니, 반군의 강압으로 친구의 다리를 잘라야 했다던 소년병의 증언이 이어졌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얘기들이었다.
"대통령에게 가서 너희들이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 걸 보여줘라." 반군들이 시민들의 손을 자르면서 했던 말이다. 정부군에게 자신들의 강인함을 보여주기 위해, 시민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해 반군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손발을 잘랐다.
전쟁의 기억 때문에 매일 악몽을 꾼다는 한 소년병의 이야기는 더 충격적이다. "반군의 강압에 마약을 먹고 사람을 죽였다. 사람이 완전히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뼈를 바르는 일을 해서 내 별명이 '본(bone, Qu)'이었다.”
박신양씨는 현지인들이 쏟아내는 이야기를 듣고 "도무지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다이아몬드 때문에 사람들의 팔다리를 잘랐다는 사실이 너무 큰 충격이고 특히 그랬다는 걸 용서하기 어렵다" 며 마음 아파했다.
내전으로 얼룩진 시에라리온에 가다 박신양편
라이베리아 내전 당시의 군벌 찰스 테일러 | '혁명연합전선(RUF)'의 지도자이자 시에라리온 내전의 전범 포데이 산코 |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내전 중 하나로 꼽히는 시에라리온 내전은 약 11년간 지속되면서 수많은 사망자와 이재민들을 낳았다. 다이아몬드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내전으로 인해 천연 자원이 풍부했던 시에라리온은 전체 인구인 450만 명 중 35만 명이 사망했고 150만 명이 난민으로 전락했다. 4천 명의 신체가 절단되어 인구 대비 장애인 수는 세계 최고를 기록했고 평균 수명은 35세로 떨어지는 비극을 겪었다. 전형적인 자원의 저주.
시에라리온 내전이 이렇게 장기화되고 잔인했던 이유는 바로 풍부한 다이아몬드 광산과 지하 자원을 노린 외세의 개입 때문이다. 1972년 2월 14일 서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시에라리온에서 968.9캐럿의 다이아몬드 원석이 발견되었다.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이 다이아몬드에 '시에라리온의 별'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이로부터 모든 불행이 시작되었다. 시에라리온에 다이아몬드가 무궁무진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심지어 내전을 치르던 라이베리아의 독재자 찰스 테일러까지 라이베리아군을 반군으로 위장시켜 내전을 더욱 부채질했으며 수많은 국가들이 자기들 입맛에 맞는 서로 다른 무장 세력들을 지원하면서 개막장으로 치달았다.
더불어 시에라리온 내전은 서아프리카의 정치 상황과도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라이베리아의 찰스 테일러는 1989년 모모흐 대통령에게 시에라리온을 라이베리아 무장투쟁 기지로 사용하겠다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시에라리온이 라이베리아에 파병된 ECOWAS 주도의 평화유지군에 약 300명의 병력을 파병한 것에도 불만이 있었으며 시에라리온이 혼란에 빠진 상황을 틈타 국경 지역에 산재한 다이아몬드를 비롯해 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경제적 목적도 작용했다. 리비아 역시 RUF를 만든 포데이 상코에게 군사 훈련을 제공하여 내전을 부추겼다는 비난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시에라리온 내전은 1991년 3월 23일 라이베리아의 찰스 테일러가 이끌던 '라이베리아 애국전선(NPFL)'의 지원을 등에 업은 포데이 산코의 혁명연합전선(RUF)이 전쟁을 선언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부정부패 척결을 주장하며 1985년 쿠데타로 집권한 조셉 모모 정권을 공격했다.
포데이 산코가 일으킨 반란의 명분은 모모 대통령과 측근들이 부패해 있었고 4만 명에 이르는 레바논 정착민과 소수의 세네갈인들이 다이아몬드 광산 채굴권과 무역, 상업 등 시에라리온 경제의 70~80%를 쥐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하 자원은 곧 전쟁 자금의 주요 공급원이었고 내전은 시간이 지날수록 다이아몬드 광산을 차지하려는 싸움으로 전개됐다. RUF의 포데이 상코는 시에라리온 동부의 다이아몬드 광산들을 장악해 이를 자금원으로 무기를 사들여 세력을 넓혀 갔다.
내전 초기부터 RUF 반군은 시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마을에 불을 지르고 비전투원인 민간인들을 공격해 죽이거나 도끼로 손목과 발목을 자르는 잔혹 행위를 저질렀으며 여자들은 반군에게 강간당하기 일쑤였다. 국제구조위원회(IRC)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반군은 강간을 하나의 테러 전술로 일상화시켰다. 한 마을의 젊은 여자들이 다 도망갔을 경우 60세가 넘는 여성조차 강간 피해자가 됐다. 1999년 1월 이들이 대대적인 공세를 펴면서 프리타운을 절반 이상 점령했을 때 수많은 희생자가 생겼다. 반군은 3주 동안 무차별적인 살육과 방화, 약탈, 강간 그리고 도끼로 손목을 자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국제적인 인권감시기구인 'Human Right Watch'가 펴낸 한 보고서는 손목 절단을 "시에라리온 8년 내전에서 가장 잔혹하고 집중적인 인권침해 행위"라고 기록했다. 서부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의 내전이 전세계의 눈길을 끈 것도 그때의 잔혹상이 언론 보도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
반군이 시민들의 손목을 절단한 이유는 투표를 못 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였다.[1] 무엇보다 농경 사회에서 손을 잃는 것은 곧 생존 수단을 잃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죽음과 다름없는 고통을 주는 극악한 전쟁범죄였다. 신식 무기로 중무장한 반군들은 대규모 다이아몬드 광산 지역을 하나 둘 점령하며 무차별 살인과 강간을 비롯한 수많은 전쟁범죄를 저질렀지만 그 중에서 가장 극악한 범죄는 아이들을 납치해 소년병을 육성한 것이었다. 반군은 10살 남짓의 나이 어린 소년들을 강제로 납치한 뒤 그들에게 마약을 투여하고 총과 도끼를 쥐어줌으로써 잔인한 살인병기로 만들었다. 11년의 내전 기간 동안 7천 명이 넘는 아이들이 반군에게 납치되어 부모와 같은 시민들을 죽이고 손목을 자르는 데 앞장섰다. 심지어 마약에 취한 아이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른 채 총을 쏘고 도끼를 휘둘렀다.
내전 기간 동안 RUF는 라이베리아의 찰스 테일러와 다이아몬드를 불법적으로 거래하여 무기를 수입했다. RUF는 1991년에서 1999년 사이에 불법 다이아몬드 거래로 연간 2억 달러의 수익을 낸 것으로 추정된다. 2003년 유엔은 다이아몬드 공정거래를 위해 다이아몬드 원산지를 추적할 수 있는 '킴벌리 프로세스' 감시 체제를 구축하고 분쟁 지역에서 채굴된 다이아몬드에 대한 국제적인 거래를 금지하는 협의를 이끌어냈다. 2007년 개봉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는 시에라리온 내전과 분쟁 광물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내전이 한창이던 와중에 1992년 포데이 상코의 공격에 정부군이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데 불만을 품은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고 쿠데타의 주동자인 밸런타인 스트래서 대위가 정권을 잡아 4년간 통치했지만 1996년 1월 또 다른 군 지도자 줄리어스 마다 비오에 의해 축출당했다. 집권한 비오는 자유 선거를 통한 민정이양을 약속했고 계엄령 하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시에라리온 인민당(SLPP)의 아메드 테잔 카바가 승리하여 1996년 3월 29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카바 대통령은 그 해 11월 말 RUF 지도자 포데이 상코와 아비장 평화 협정(Abidjan Peace Accord)을 체결하지만 조약 내용이 지켜지지는 못했다.
1997년 5월 아비장 평화 협정 불이행에 불만을 품은 하급 장교가 또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카바 대통령을 축출하고 조지 폴 코로마가 군혁명위원회(AFRC)를 통해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민간정부를 전복시킨 코로마 정권은 국내적으로 카바 대통령을 따르는 민병대의 공격을 받았으며 국제사회의 심각한 비난과 제제를 받았다.
이에 사태 해결을 위해 시에라리온 인근 국가들이 나섰다.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WAS)가 나이지리아 주축의 서아프리카평화유지군(ECOMOG)을 1997년 시에라리온에 파병했지만 상황을 해결하지 못했고 오히려 코로마는 스스로 대통령임을 선언했다. 그 해 8월 영연방은 카바 대통령의 무조건 복귀를 선언하고 ECOMOG는 병력을 3배로 키워 코로마 정권을 압박했다. 결국 1998년 2월 ECOMOG는 수도인 프리타운을 점령하고 3월 카바는 대통령에 복귀했다.
그러나 1년도 채 되지 않아 1999년 1월 RUF가 프리타운을 점령해 민간인을 대상으로 사지절단, 강간 등 극악무도한 범죄를 자행하는 일이 일어났다.[2] 물론 ECOMOG가 EO[3]의 지원으로 RUF와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프리타운을 탈환했지만 RUF는 1997년 나이지리아에서 체포된 포데이 상코가 풀려날 때까지 계속 싸우겠다면서 항전했다. 이에 ECOMOG 주도국인 나이지리아는 자국에 가해질 부담을 덜하기 위해 포데이 상코를 풀어주고 평화 협정을 체결할 것을 시에라리온에 촉구했다.
이에 유엔과 아프리카통일기구(OAU)의 중재 하에 1999년 7월 토고에서 로메 평화협정(Lomé Peace Agreement)이 체결되었다. 즉각 전투를 중단하고 유엔 평화유지군을 파병하여 무장 해제를 감시하도록 하는 한편 포데이 상코를 석방하여 부통령직을 주는 것이 주 내용이였다. 미국 클린턴 행정부까지 적극 개입한 이 평화 협정으로 시에라리온 정부와 RUF 반군 양측은 싸움을 그쳤다. RUF 반군들은 내전 기간 동안 자행한 무차별 살육과 손목 절단, 강간 등 범죄 행위를 사면받는 대신 무장 해제를 하기로 했다. 양측은 임시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2년 뒤(2001년) 총선과 대선을 치르기로 합의했다. 손목 절단이란 무시무시한 테러 행위로 악명 높았던 RUF의 반군 지도자 포데이 상코는 그동안 저질렀던 전쟁범죄 행위에 대해 포괄적인 백지 사면(blanket pardon)을 받고 부통령에 준하는 예우를 받게 됐으며 심지어 각료 4명의 임명권까지 얻었다. 오랫동안 시에라리온 동부 밀림지대에서 지냈던 포데이 상코는 수도 프리타운의 호화 저택에서 지내면서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해 대통령이 될 생각까지 했다. 1990년대 발칸반도를 피로 물들였던 보스니아 전쟁과 코소보 전쟁에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를 비롯한 수십 명이 전쟁범죄자로 기소된 것과는 전혀 다른 결말이었다.
하지만 평화 협정 후 반군의 무기 반납은 지지부진했다. 평화 협정에는 '반군이 무기를 반납하면 300달러의 정착금을 받고 민간인으로 돌아간다', '본인이 바랄 경우 심사를 거쳐 시에라리온 정부군으로 재편될 수도 있다'는 조항이 있었다. 300달러는 시에라리온 물가로는 5인 가족이 6개월 동안 살 수 있는 큰 돈이다. 이에 10개 지역에 무장해제 전투원들을 수용하는 비무장 수용소가 생겼다. 하지만 포데이 산코 무장 반란군의 주력이 무장 해제를 거부한 채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로 남아 있었다. 무기를 버리고 반군에서 손을 떼겠다는 자들은 정부군 출신 반란군이거나 병약자 등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심지어 이들 중 상당수는 일반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정부군으로 편입되길 바랐는데 총을 버리고 민간 사회로 복귀한다고 해도 실업자만 많은 사회로 나가 봐야 별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에라리온 경제의 핵심인 다이아몬드 광산을 포함한 국토의 절반 가량은 여전히 반군들의 통제 아래 놓여 있었고 반군이 점령지에서 무자비한 공포 정치를 펴는지라 시에라리온 유엔 평화유지군조차 그곳에 제대로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RUF가 평화 협정을 준수하지 않고 2000년 5월 다시 프리타운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평화 협정은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이에 RUF가 평화 협상을 지킬 의지가 없다고 판단한 영국은 카바 정부를 지원하고 영국인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 개입을 결정했다. 영국은 약 800명의 낙하산 부대를 투입한 '팔리서 작전'을 통해 프리타운을 탈환했고 포데이 상코의 집을 급습해 그를 체포함으로써 시에라리온 내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4] 2002년 1월 18일 카바 대통령은 시에라리온 내전이 끝났다고 선언했고 2002년 5월 총선에서 카바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대통령으로 재선됐다. 그 와중에 정신 못 차리고 총선에 정당으로 참여한 RUF는 당연히 국민들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했다.
시에라리온에서 성공적인 활동을 벌인 ECOMOG는 2017년에는 노벨평화상 후보에 거론되기도 했다. 이후 아프리카 국가들은 유엔 평화유지군을 대체하여 아프리카연합(AU) 또는 역내 지역 기구가 주도하는 평화유지군을 파병하여 아프리카 분쟁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오랫동안 지속된 내전과 군부독재 정권으로 인해 국가가 엉망이 되어 버린 대표적인 사례이다. 시에라리온의 소년병 문제는 현재까지도 매우 심각하며 내전 당시 많은 사람들이 다이아몬드 광산에 강제로 동원되었던 데다 이 과정에서 많은 무장 세력들의 개입이 피해를 더욱 키웠다.
3. 기타
벌거벗은 세계사 시에라리온 편에서 게스트로 출연한 김영미 PD[5]가 시에라리온 현지 취재 당시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현지인들 중에는 다이아몬드가 뭔지도, 어디에 쓰이는 건지도 모르는 사람이 허다했으며 심지어 한 소년은 외국에서 결혼식에 쓰인다는 말에 놀라서 다이아몬드를 절대 가지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이 속한 부족 사람들은 다이아몬드를 피가 고인 저주를 품은 돌로 여긴다면서 절대 가지려 하지 않는다고 증언했다고 한다.[1] 반군이 내세운 이 명분이 억지 주장이라는 것은 이들이 투표권조차 없는 어린이와 갓난아이들의 손목까지 무차별적으로 절단한 사실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반군은 시민들의 양 손을 묶어 나무 그루터기 위에 올려두고 "긴 팔을 원하냐? 반팔을 원하냐?"라고 물었다고 하는데, 여기서 긴 팔은 팔꿈치 아래로, 반팔은 팔꿈치 위로 팔을 절단하겠다는 뜻이었다고 한다.[2]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에서는 반군들에게 수도인 프리타운 전체가 개발살난다.[3] Executive Outcomes. 에벤 발로우 등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정권 해체 후 퇴역한 전직 군인들이 주축이 되어 세워졌고, 아파르트헤이트가 끝나면서 같이 일자리를 잃은 전직 남아공 경찰 및 특수부대, 아프리카 민족회의 산하 무장조직 민족의 창 출신 인력들, 소련 붕괴 이후에는 동구권 출신 파일럿과 정비인력까지 추가로 끌어모아 구성된 PMC. 이들은 시에라리온에 Mi-24 하인드 헬기와 Mi-8, BMP-2 장갑차까지 투입시켰다(...)[4] 체포된 포데이 상코는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 성노예, 강간, 살인, 소년병 육성 등의 17가지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기다리다가 2003년 7월 29일 밤 뇌졸중으로 인해 사망했다.[5] 분쟁지역 취재 전문 PD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