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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北京議定書(辛丑條約)신축 각국 화약, 베이징 의정서, 의화단 의정서로도 불린다. 1901년 9월 7일 체결된, 청과 열강 11개국(영국, 프랑스, 독일국, 미국, 러시아 제국,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스페인, 벨기에, 네덜란드) 사이의 조약이다.
2. 원인
1899년 청나라에서 부청멸양(扶淸滅洋 : 청을 도와서 서양과 일본을 멸하자!)[1]을 슬로건으로 앞세운 의화단 운동이 일어난다. 이러자 실권자인 서태후는 의화단 운동을 이용해서 서양 세력들을 혼내줄 계획을 세운다.[2] 그리고 곧 선전포고를 한다. 그에 대항하여 서양과 일본은 8개국 연합군을 결성하여 청나라 군대와 의화단을 박살내고 베이징을 점령한다.[3] 그리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청나라에서 이홍장과 아이신기오로 이쾅이 전권대표로 나서서 서양의 요구대로 체결한게 바로 베이징 의정서이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사실상 서구열강과 일본의 반식민지로 전락하고, 껍데기만 남게 된다.3. 조약 서명국
3.1. 열강 대표
- 스페인 왕국 - 전권대사 베르나르도 데 콜로간 이 콜로간(Bernardo J. de Cologan y Cologan, 1847 ~ 1921): 신축조약의 최선임자로 다른 전권대사들보다 베이징 공관에서 가장 오래 근무했기에 조약 대표를 맡았다. 조약 체결도 스페인 공사관에서 이루어졌다.
- 영국 - 전권대사 어니스트 메이슨 사토우(Ernest Mason Satow, 1843 ~ 1929)
- 러시아 제국 - 전권대사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기르스 (Михаил Николаевич (фон) Гирс, 1856 ~ 1924)[4]
- 일본 제국 -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郎, 1855 ~ 1911)
- 프랑스 - 전권대사 폴 보(Paul Beau, 1857 ~ 1926)
- 미국 - 특사 윌리엄 우드빌 록힐(William Woodville Rockhill, 1854 ~ 1911)
- 독일 제국 - 전권대사 알폰스 뭄 폰 슈바르첸슈타인(Alfons Mumm von Schwarzenstein, 1859 ~ 1924)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전권대사 모리츠 치칸 폰 발보언 남작(Moritz Czikann Freiherr von Wahlborn, 1847 ~ 1909)
- 이탈리아 왕국 - 전권대사 주세페 살바고 라지(Giuseppe Salvago Raggi, 1866 ~ 1946)[5]
- 벨기에 왕국 - 전권대사 남작 아돌프 마리 모리스 주스텡(Adolphe Marie Maurice Joostens, 1862 ~ 1910)
- 네덜란드 왕국 - 전권대사 프리돌린 마리뉘스 크노벨(Fridolin Marinus (Frits) Knobel, 1857 ~ 1933)
3.2. 청나라 대표
4. 내용
1. 배상금 원금 4억 5,000만냥, 연리 4%로 1902년부터 1940년까지 39년간에 걸쳐 총 9억 8,200여만 량을 지불할 것.
1. 의화단 운동의 주모자를 처벌할 것.
1. 외국군의 베이징 주둔을 허가할 것.
1. 대고포대를 비롯하여 베이징에서 해안가에 이르는 통로에 방해가 되는 각 포대를 모두 철거할 것.
1. 베이징과 산해관에 걸친 철도연변의 주요 지역 12곳(황촌, 낭방, 양촌, 톈진, 군량성, 당고, 노대, 탕산, 난주, 창려, 친황다오, 산해관)에 열강 군대가 주둔하도록 할 것.
1. 청나라는 총리아문 대신 외무부를 설치해 6부의 위에 둘 것.
1. 의화단 운동의 주모자를 처벌할 것.
1. 외국군의 베이징 주둔을 허가할 것.
1. 대고포대를 비롯하여 베이징에서 해안가에 이르는 통로에 방해가 되는 각 포대를 모두 철거할 것.
1. 베이징과 산해관에 걸친 철도연변의 주요 지역 12곳(황촌, 낭방, 양촌, 톈진, 군량성, 당고, 노대, 탕산, 난주, 창려, 친황다오, 산해관)에 열강 군대가 주둔하도록 할 것.
1. 청나라는 총리아문 대신 외무부를 설치해 6부의 위에 둘 것.
5. 결과
청나라의 시한부 인생 스타트. 청은 망해가기 시작하고 결국 1911년 신해혁명으로 뒤집어진다.6. 여담
체결에 1년 가량이 소모되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자기네들이 보다 더 많은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1940년까지 지급하기로 하였던 배상금이었지만 100% 완전히 지급되지는 않았다. 10여년 후 1차세계대전에 연합국으로 참전한 중화민국은 패전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대한 배상금 지급을 정지하였다. 1917년의 혁명으로 새로이 건국된 소련 정부는 제정 러시아 시절 외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의 폐지를 공식화하였고 그와 함께 배상금을 포기하였다. 일본의 경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지급이 정지되었다. 나머지 영국, 미국, 프랑스 등에 대한 배상금의 경우 1차대전에 연합군에 중국을 참전시킬려는 외교적 노력의 일환으로 5년간 지급이 유예되었고 일부는 돌려받았다. 돌려받은 배상금은 유학생들의 유학비, 중국 내 대학 설립비 등으로 환산되었다. 중일전쟁 와중이던 1938년 미국, 영국은 배상금 지급을 정지하였고, 1943년 미국, 영국, 중국은 신협약을 체결하여, 중국에서의 특권을 폐지함과 동시에 정식으로 배상금을 폐지한다. 1943년까지 지급한 배상금의 총액은 5.76여억냥이고 지급하기로 한 금액의 약 58%였다.
[1] 조선의 동학 농민 운동때도 척양척왜 구호를 썼다. 여기서 양은 洋鬼子의 줄임말로 양놈이라고 하는게 정확한 번역이다.[2] 당시 광서제는 서양세력과의 타협을 주장했으나 서태후에 묵살당한다.[3] 서양은 아니지만 일본도 있다.[4] 알렉산드르 3세시절 외무장관인 니콜라이 기르스(1820-1895)의 아들이다. 루마니아와 오스만 제국에서 대사직을 수행하였으며 1915년에서 1917년 러시아 혁명 전까지는 이탈리아 대사였다. 이후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하였다.[5] 이탈리아의 외교관이자 식민지 총독, 정치인으로서 베니토 무솔리니의 탄생과 죽음을 보았고 죽기 직전에는 이탈리아의 군주제 종식을 승인하는 국민 투표 승인을 보게 된다. 파시즘을 혐오했지만 확고한 군주주의자였으며, 그래서 퇴임 후 사망까지 수년간 유복하지만 정치적으로 고립된 삶을 보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