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8-18 04:38:45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리비아의 역사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0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color:#1D1D1D; margin: -6px -1px"
선사 & 고대 중세 & 근세 근대 현대 리비아
T베르베르
리부
페니키아카르타고
누미디아
로마 제국반달 왕국 동로마 제국 우마이야 왕조 피흐리 왕조 무할라브 왕조 아글라브 왕조 파티마 왕조 파티마 왕조 지리 왕조 노르만 무와히드 왕조 하프스 왕조 오스만 제국
카라만리 왕조
이탈리아령 리비아 대영 제국리비아 왕국리비아 아랍 공화국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리비아 내전국민합의정부
C 펜타폴리스 헬레니즘 제국 동로마 제국 압바스 왕조 툴룬 왕조 이크쉬드 왕조 힐랄족,
술라임족
파티마 왕조
가니야족
아이유브 왕조
국민의회
F가라만테스 왕국 베르베르
/
투아레그
프랑스
※ T는 트리폴리타니아 지역, C는 키레나이카 지역, F는 페잔 지역, 붉은색은 튀니지 방면 세력(오스만, 영국 제외), 녹색은 이집트 방면 세력(이탈리아, 카다피 정권 제외)
}}}}}}}}}}}} ||

{{{#!wiki style="margin:-10px"<tablebordercolor=#008640> 파일:카다피.png무아마르 카다피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bgcolor=#008640><colcolor=#fefcdf>생애<colbgcolor=#fff,#1f2023>생애
가족 아내 사피아 파르카시 · 아내 파티아 알 누리,(이혼), · 장남 무하마드 카다피 · 차남 사이프 알 이슬람 · 3남 알사디 카다피 · 4남 무타심 카다피,(사망), · 5남 한니발 카다피 · 6남 사이프 알 아랍 카다피,(사망), · 7남 카미스 카다피,(사망), · 8남 밀라드,(입양), · 장녀 아이샤 카다피 · 차녀 하나 카다피,(입양),
사상 카다피주의
사건 · 사고 2011 리비아 민주화 운동
관련 전쟁 리비아 공습 · 리비아-차드 전쟁 · 제1차 리비아 내전 · 오디세이 새벽 작전
관련 정치인 가말 압델 나세르 · 콘돌리자 라이스
평가 평가
기타 녹색서 · 리비아 아랍 공화국 ·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 자마히리야 · 리비아 대수로 · 이슬람 사회주의 · 아랍 사회주의 · 알-자마히리야 TV
파일:빨간색 깃발.svg 사회주의 · 파일: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국기.svg 제3국제이론 }}}}}}}}}
리비아 아랍 사회주의 인민 자마히리야
الجماهيرية العربية الليبية الشعبية الإشتراكية
[1]
대리비아 아랍 사회주의 인민 자마히리야
الجماهيرية العربية الليبية الشعبية الإشتراكية العظمى
[2]
파일: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국기.svg 파일: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국장.svg
<rowcolor=#fff> 국기 국장
1977년 3월 2일 ~ 2011년 10월 20일
الحرية والاشتراكية والوحدة
연합, 자유, 사회주의
자마히리야 선포 이전멸망 이후
리비아 아랍 공화국 리비아
<colbgcolor=#008640><colcolor=#FFF> 국가 알라후 아크바르
수도 트리폴리(1977~2011)
시르테(2011)[3]
정치체제 자마히리야, 카다피주의
혁명지도자[4] 무아마르 카다피[5]
총인민회의 서기장[6] 모하메드 압둘 콰심 알즈와이 등
총인민위원회 서기장 바그다디 마흐무디
종교 이슬람교[7]
언어 아랍어
인구 6,365,563명(2009년)
통화 리비아 디나르
1. 개요2. 역사
2.1. 초기(리비아 아랍 공화국)2.2. 자마히리야2.3. 붕괴
3. 국가로서의 영향4. 둘러보기

1. 개요

1977년 자마히리야 선포 이후의 무아마르 카다피 치하의 리비아를 뜻한다. 카다피는 리비아 아랍 공화국 시절을 포함해 무려 42년간 리비아를 통치하였다.

2. 역사

2.1. 초기(리비아 아랍 공화국)

카다피는 1969년 이드리스 1세가 터키 순방을 나간 틈을 타 쿠데타를 일으켜 부패한 왕정을 전복시키고 한순간에 트리폴리타니아에서부터 국민 영웅이 되어 리비아 아랍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가말 압델 나세르의 영향을 받은 카다피는 이집트를 참고해 아랍 사회주의적 정책을 추진했고, 석유 회사들을 전부 국유화시켜 리비아를 아프리카 전체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로 만들었다. 하지만 카다피에게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나세르는 혁명 1년 만인 1970년 사망하고, 이집트와의 관계는 소원해지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이집트, 바트주의 시리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아랍 공화국 연방[8] 창립을 추진했으나 약 5년간 간단한 연맹을 유지했음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아 통합은 무산되었다. 튀니지마그레브 국가들과도 연합을 추진했다. 그 후로 이집트와는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하다 결정적으로 안와르 사다트 정권이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를 시도하자 카다피는 이집트와 단교하고 이집트적 요소를 국가 상징에서 삭제[9], 이집트와는 적국이 되어버렸고 자마히리야를 공식 정치 체제로 선포하며 나세르주의 체제는 막을 내렸다.

2.2. 자마히리야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자마히리야 문서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자마히리야#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자마히리야#|]]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어쨌든 오일 쇼크를 적극 활용해서 리비아는 세계적으로도 잘사는 나라가 되었던것도 있었기 때문에 1975년 녹색서를 출간하고 1977년에는 리비아에 자미히리야라는 새로운 체제가 선포되어 국가, 국기 등이 바뀌었다. 이는 민족주의, 이슬람주의, 아랍 사회주의 등의 내용이 있었다. 이후 리비아는 미국을 비롯한 제1세계와 적대시 했으며, 이들에게 수 차례 테러를 감행했다. 또 친소련 정책을 추진했고, 제3세계 아프리카 국가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그리고 이때부터 알-자마히리야 TV를 통한 언론 프로파간다를 시작하였다.

1986년에는 차드와의 분쟁이 생겼다.(리비아-차드 분쟁) 이때 미국프랑스같은 국가의 공습을 받았다. 이후 카다피는 탈냉전 이후의 북한처럼 핵무기 개발을 추진했다.

하지만 핵개발은 소련 해체걸프전 이후의 저유가로 지지부진하게 되었고 리비아의 경제상황이 1990년대에 연 평균 두자릿수대의 물가상승률을 기록하고, 외국인 노동자들을 해외로 내보내야할 정도의 침체를 겪었다. 이 시절에도 이웃나라인 알제리[10], 이집트, 튀니지는 물론이고 나머지 아프리카 전체보다는 나았지만 침체상태라는 점은 변함이 없었고 90년대 말부터 리비아의 경제가 다시금 나아지기 시작했지만 그 이전의 트리우마가 남아있어서인지 카다피도 현실주의 노선을 취하게 되었고 2003년에 핵무기 개발 포기선언을 했다. 이후로 리비아는 다시금 폭풍같은 경제성장을 하게끔 되었다. 그런데 2011년에 들어서 아랍의 봄의 물결이 리비아에도 불어닥치고 만다.

2.3. 붕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제1차 리비아 내전 문서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제1차 리비아 내전#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제1차 리비아 내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2011년 수도 트리폴리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2월 23일 카다피는 국민을 상대로 탄압을 했으며 반군이 된 일부 시민들도 내전을 선포했다. 결국 제1차 리비아 내전 당시 NATO가 개입했고, 8월에는 수도 트리폴리가 반군에게 함락되어 시르테로 천도하였으며, 10월에는 시르테까지 함락되어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은 무너진다. 이후 국가과도위원회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정국이 안정되지 못하고 NATO 국가들도 이후 리비아 신정부의 국정 안정에는 큰 도움을 주지 못하여 제2차 리비아 내전이 발발하여 NATO가 괜한 혼란을 일으켰다는 비난을 받았다.

3. 국가로서의 영향

먼저 부패한 왕정을 무너뜨리고 리비아의 치안을 안정시켰으며 과거 발전이 없던 리비아를 석유 국유화로 크게 발전시켰다. 물이 부족한 리비아를 위해 대한민국 동아건설의 도움을 받아 리비아 대수로 사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래서 리비아가 반미, 반서방, 반공주의 성향이 강했어도 일반적인 제3세계 테크를 타서 다 같이 매우 가난해지지 않았다는 평가가 있다. 독재국가에 대해 갖는 일반적인 편견과는 달리 상당히 진보적인 사회정책과 높은 수준의 복지정책을 추구했다. 그래서 카다피는 개발독재자로도 꼽힌다.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의 복지정책은 표면적으로는 대학교 교육까지 무상 교육과 해외 와병 치료 지원 등의 무상의료 정책, 식사와 주택 공급 등의 기초적 생활 보장 등이 시도되었으나 무상교육 체제는 학비는 무상이라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교재와 교사의 부족으로 잘 작동하지 않았고 의료 무료화도 무상으로 제공되는 낮은 서비스 이상의 제대로 된 치료를 받으려면 비용을 동반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 실효성은 많이 떨어졌다. 카다피 정권 시기 리비아의 복지정책은 아프리카 전체 기준으로는 상당한 수준이나 카다파 부족 등 정권 우호세력에 수혜가 편중된 경우도 많았다. 아랍의 세속 독재자들이 그렇듯 리비아 국내의 이슬람 근본주의이슬람 극단주의를 강력한 중앙권력으로 찍어 눌러 억제하는 역할도 했다. 카다피는 정치적으로 이슬람을 강조하고, 세계 곳곳의 테러조직들을 지원하면서도 오마르 알바시르를 제외한다면 이슬람 근본주의적 단체와는 철저히 선을 그었다. 또한 범아프리카주의를 강조하여 아프리카 민족회의, 남서아프리카 인민기구, 모잠비크 해방전선, 기니카보베르데 아프리카독립당과 같이 제국주의적 행보에 맞서는 단체들을 지원해 줬고, 비단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흑표당, 동티모르 독립혁명전선, 카나크 사회주의 민족해방전선, 자유 파푸아 운동처럼 민권운동/독립운동을 위해 외부의 도움이 절실했던 단체들 역시 지원해줬다.

다만 영외적으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나 이집트[11],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 카다피와 원수인 나라 시선에서는 국민들을 탄압하고 이웃 국가를 살육하는 독재 정권으로 규정되어서 정권기 내내 서방의 경제 제재 등을 당했으며 카다피 역시 사담 후세인,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바샤르 알아사드 등 반미, 반서방 노선을 앞세운 독재자로 규정되어서 요주의 인물로도 지목받았다. 스스로를 '아프리카의 수호자'라고 지칭하고 다닌 카다피의 대외적 발언과는 달리 카다피는 자신의 의중에 따라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반군 및 테러조직들을 후원하거나 미국이나 유럽이 그랬듯 자신도 이디 아민, 찰스 테일러, 장베델 보카사, 오마르 알바시르, 무사 다디스 카마라 등 자신이 지원하는 독재자들의 우간다-탄자니아 전쟁, 제1차 라이베리아 내전, 시에라리온 내전[12], 중앙아프리카 제국 수립 등 침략 전쟁이나 인권탄압을 지원하며 혼란을 일으키고 다니는 일을 빈번하게 저질렀다. 차드에 묻혀 있는 우라늄을 탐내서 리비아-차드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따라서 리비아 자마히리야 정부에 당한 것이 있는 차드, 탄자니아, 우간다[13] 등의 나라에서의 평도 좋지 않은 편이다.

아프리카 연합의 설립과 정착에 적지 않게 기여하는 등의 공로는 있다. 카다피는 아랍세계에 근세까지 만연했던 노예무역에 대해 전향적인 입장에서 비판하는 등 북아프리카 뿐만 아니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지지를 받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편이고 실제로 아프리카 연합의 초창기는 리비아가 지도했다. 아프리카 연합 국가들도 리비아 내전 당시 카다피의 입장을 지지하는 등 양자의 우호관계는 신뢰가 상당 부분 깔려있었다. 실제로 카다피 정권은 아프리카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에 전적인 투자를 하고 아프리카 연합의 의정기구 비용, 아프리카의 통신 인프라 개선을 지원하는 등 리비아의 국력을 총력을 다해 아프리카 연합에 투자했기 때문이다.

4. 둘러보기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bgcolor=#000><colcolor=#fff> 상징 옛 국가 · 국가 · 국기 · 국장
역사 역사 전반 · 리비아 왕국 · 리비아 아랍 공화국 ·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카다피주의 / 자마히리야) · 제1차 리비아 내전 · 제2차 리비아 내전
정치·치안·사법 정치 전반
외교 외교 전반 · 아랍 연맹 · 이슬람 협력기구 · 아프리카 연합 · 리비아국 여권
경제 경제 전반 · 리비아 디나르
국방 리비아군
문화 문화 전반 · 요리 · 쿠스쿠스 · 타진 · 주크라 · 리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 아랍어 방언
인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 오마르 무크타르 · 무아마르 알 카다피 · 칼리파 하프타르 · 파예즈 알사라지
지리 사하라 사막 · 트리폴리타니아 · 페잔 · 키레나이카
민족 마그레브 아랍인(방글라데시계)
}}}}}}}}} ||

[1] 1977년 ~ 1986년[2] 1986년 ~ 2011년[3] 기사(영어) 2011년 8월 트리폴리가 함락됨에 따라 천도.[4] 최고지도자[5] 1979년 총인민회의 서기장에서 물러난 후 혁명지도자 지위를 신설하여 상왕처럼 권력을 행사했다.[6] 헌법상 & 명목상 국가원수[7] 국교였으나 세속주의 정책으로 사실상 국교의 기능은 없었다.[8] 아랍 연합 공화국의 후신이다.[9] 정작 새로 채택한 국가인 신은 위대하다네는 이집트의 군가이다.[10] 알제리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11] 초기에는 아랍 사회주의나세르주의 혁명 동지였지만 이후 사이가 틀어져 전쟁을 겪었다. 리비아는 이집트에게 패배했다.[12] 그나마 카다피 본인도 나중에는 찰스 테일러의 삽질에 경악하여 제2차 라이베리아 내전에서는 테일러를 포기하고 서아프리카에서 손을 떼기도 했다.[13] 독재자인 이디 아민을 지원하여 수많은 국민들이 살육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