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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키아 | → | 카르타고 |
비블로스에 남아 있는 페니키아 유적
바트룬에 남아 있는 페니키아 시절 방파벽 유구
페니키아 문명 Phœnicia 𐤊𐤍𐤏𐤍 | 케이난 | ||
초기 페니키아 문명의 세력권 | ||
전성기 페니키아인의 식민도시 및 영역 | ||
존속기간 | 기원전 1200년 이전 ~ 기원전 539년 | |
위치 | 레바논 및 지중해, 북아프리카 일대 | |
도시국가 | 카르타고 게발(비블로스) 수르(티레) 시돈 | |
언어 | 페니키아어 | |
종교 | 가나안 종교(주신: 바알) | |
종족 | 페니키아인 | |
성립 이전 | 히타이트 이집트 신왕국 우가리트 | |
멸망 이후 | 아케메네스 왕조, 고대 카르타고 |
언어별 명칭 | |
페니키아어 | 𐤊𐤍𐤏𐤍 (KNʿN) |
히브리어 | כְּנַעַן (Kənáʿan) |
아람어 | ܟܢܥܢ (knaˁn) |
고전 그리스어 | Φοινίκη (Phoiníkē) |
라틴어 | Phœnicia |
아랍어 | فِينِيقِيَا (Fīnīqiyā) |
영어 | Phoenic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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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No doubt, in their commercial dealings, the Phoenicians spread valuable germs of civilization, but rather as a bird dropping grain than a husbandman sowing seed. they never civilized and assimilated to themselves the nations with which they came into contact.
의심할 여지 없이, 페니키아인들은 상업적 거래를 통해 문명의 세포를 퍼트렸으나, 그 모습은 씨앗을 뿌린 농부가 아닌 낟알을 떨어트리는 새의 모습이었다.[1] 그들은 접촉한 국가를 (강제적으로) 문명화를 시키거나, 동화시키지 않았다.[2]
테오도르 몸젠[3]의 저서 《로마사》(Mommsen's History of Rome) Page 116.
고대 레바논, 시리아, 이스라엘 북부에서 활동했던 민족 집단으로, 현재의 레바논 일대가 그 중심지였다.의심할 여지 없이, 페니키아인들은 상업적 거래를 통해 문명의 세포를 퍼트렸으나, 그 모습은 씨앗을 뿌린 농부가 아닌 낟알을 떨어트리는 새의 모습이었다.[1] 그들은 접촉한 국가를 (강제적으로) 문명화를 시키거나, 동화시키지 않았다.[2]
테오도르 몸젠[3]의 저서 《로마사》(Mommsen's History of Rome) Page 116.
비블로스라는 도시에서 발원했고 인근에 시돈, 티레, 북아프리카에 카르타고 등의 도시를 세운 해양 민족이었다. 중세 이후 대부분은 같은 셈족 계열인 아랍인에게 동화되었고 이탈리아인, 스페인인과 포르투갈인의 혈통에 관여하기도 했다.[4]
비록 현대 레바논인들은 아랍어를 쓰는 아랍인들이지만, 한편으론 페니키아인들을 조상으로 여기고 있고 유전적인 근거도 있다.[5]
현대 레바논 민족의 직계 조상인데 레바논인들 스스로도 그렇게 인식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성립한다. 자세한 역사를 알아보려면 레바논/역사 문서 참조.
기록상으로 확실하게 3,000년이 넘는 고대 문명이면서도, 현대에 독립국가가 존재하여 그 민족 정체성을 지금까지 계승하고 있다.[6] 특히 오늘날 레바논인 중에서도 마론파 신도들이 오늘날 자신들을 고대 레바논인의 후예로 정체성을 규정하는 편이다.
위에서 언어별 명칭을 보면 알겠지만 《성경》에 나오는 가나안 민족이 이들인데 고대 셈어로 이들을 부르는 명칭이 바로 가나안이었다. 페니키아라는 이름은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그리스어가 라틴어로 옮겨지면서 변한 이름이 푸닉이다.
2. 설명
페니키아계 식민 도시들.
사실 페니키아라고 통칭한 것은 로마 제국 시대부터의 일이고, 번성할 당시에는 각각의 도시국가 이름으로 불렸다. 《성경》에 나오는 두로와 시돈이 바로 지중해 인근의 페니키아인 항구 도시인 티루스(티레)와 시돈이었다.
학자들은 페니키아라는 단어가 '붉다', 또는 '자주색'을 뜻하는 셈어 카나안(Canaan)의 정확한 번역은 아닐 수 있어도 동일어라고 추론한다. 이 지역에서 유명했던 자주색 염료의 이름에 기원하는 동일한 뜻의 그리스어 단어가 지역 이름이 된 것으로 보인다(Dau 1984, 9; Salibi 2003, 172). 필립 히티(Philip Hitti)는 오늘날의 시리아 및 팔레스타인 지역을 가리키는 가장 오래된 이름은 '카나안'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자주색 염료는 아카드어로 ‘kina‘ni’, 후리어로 ‘knaggi’, 페니키아어로 ‘kena’, 히브리어로 ‘ken‘an’, 그리스어로 ‘Phoinix’로 불렸다고 한다. 특히 그리스어 ‘Phoinix’는 신화에 등장하는, 스스로 화염에 싸여 스스로 재에서 다시 소생하는 불사조 '페닉스'(Phoenix)와도 어근을 공유한다(Hitti 1972, 82). 조인형은 그리스인들이 이들의 진한 피부색 때문에 '붉은 피부'라고 불렀다고 인용한다(조인형 1982, 121).
다우는 페니키아가 카나안의 번역어이므로 '페니키아'는 그리스 사람들이 부른 이름이고, '카나안'은 스스로를 부른 이름이라고 주장한다(Dau 1984, 18). 한편 코프만은 최소 1세기까지는 페니키아인들이 스스로를 '카나안인'(Canaanites)으로, 그 땅은 '카나안'(Canaan)이라고 불렀다고 전하면서 《성경》 히브리어에서 '카나안인'(Can’ani)은 '상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고대 레바논에서 가장 유명했던 직업인 상업에서 그 이름이 파생되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Kaufman 2000, 4). 반면 히티는 이들이 스스로 '카나안인'이라고 불렀다는 견해에는 동의하지만, 그리스인들이 먼저 그들의 자주색 옷감과 자주색 염료 무역 거래인들을 '페니키아인'이라고 불렀으며, 나중에 BC 12세기에 이르러는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도 '페니키아인'이라는 단어로 대체되었다고 결론을 내린다(Hitti 1972, 83; 1965, 15).
〈마론파의 레바논 국가 정체성 담론 ― 레바논주의를 중심으로〉 이성옥[7]
다우는 페니키아가 카나안의 번역어이므로 '페니키아'는 그리스 사람들이 부른 이름이고, '카나안'은 스스로를 부른 이름이라고 주장한다(Dau 1984, 18). 한편 코프만은 최소 1세기까지는 페니키아인들이 스스로를 '카나안인'(Canaanites)으로, 그 땅은 '카나안'(Canaan)이라고 불렀다고 전하면서 《성경》 히브리어에서 '카나안인'(Can’ani)은 '상인'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고대 레바논에서 가장 유명했던 직업인 상업에서 그 이름이 파생되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Kaufman 2000, 4). 반면 히티는 이들이 스스로 '카나안인'이라고 불렀다는 견해에는 동의하지만, 그리스인들이 먼저 그들의 자주색 옷감과 자주색 염료 무역 거래인들을 '페니키아인'이라고 불렀으며, 나중에 BC 12세기에 이르러는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도 '페니키아인'이라는 단어로 대체되었다고 결론을 내린다(Hitti 1972, 83; 1965, 15).
〈마론파의 레바논 국가 정체성 담론 ― 레바논주의를 중심으로〉 이성옥[7]
페니키아인들은 자신들을 푸트 또는 카나안이라고 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성경》에 나오는 바로 그 가나안이다. 유대민족과 다른 것은 종교뿐으로 페니키아의 주신은 《성경》에서 우상으로 자주 언급되는 그 바알이었다. 그러므로 가나안 사람 중에 해안가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다신교 신자가 페니키아인이고, 내륙에서 농업•목축 일신교 신자가 유대인이라고 볼 수 있을 수준이었다.[8] 이들은 여러 이유로 경쟁했지만 교류도 많았는데 특히 궁정이나 신전 같은 건물을 지은 자들이 페니키아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페니키아의 발원지는 비블로스[9]라는 도시이며, 초기에는 가나안 신화의 원산이라 불리는 우가리트를 중심으로 번영했다. 이 시대에는 이집트의 지배를 받았으나 이집트가 가나안에서 힘이 약해지자 독립했다. 우가리트가 전쟁과 재해로 멸망하자 이후 수르(티레)가 비블로스를 대신해 번성했는데 수르는 식민도시 개척에 적극적였고 제노바, 시라쿠사, 크레타에 식민도시를 건설했다.
페니키아인들은 지중해 여러 곳에 식민지를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로마와 100여 년 동안 혈전을 벌였던 포에니 전쟁으로 유명한 카르타고(카르트 하다쉬트)도 페니키아인들의 도시였다. 대서양의 카나리아 제도에도 도시가 있었으며, 아프리카 횡단 과정에서 서아프리카 일대에 건설한 페니키아 도시들은 서기 5세기 경에도 존속했다.
그리고 성경에 타르시스라고 나오는 가디르(𐤀𐤂𐤃𐤓; 현재 카디스)도 페니키아에서 에스파냐 땅의 타르테소스와의 교역을 위해 건설한 도시이다. 서유럽 최초의 도시로 세워졌고, 근대까지 에스파냐 최대의 무역항이자 콜럼버스 항해가 시작된 곳이다. 페니키아인들은 그 일대를 사판이라 불렀는데 사판은 페니키아어로 '토끼가 많은 땅'이라는 뜻으로, 지금도 그 일대에는 토끼, 다람쥐가 많다. 사판이라는 지명이 후대에 라틴어 히스파니아로 변했고, 더 나아가 현재의 국명 에스파냐의 어원이 되었다. 이때 페니키아인들이 진출한 영향으로 현대 유전자 분석 결과 이베리아반도, 북아프리카, 몰타 지역에 페니키아인들의 유전자가 확인되었다.
페니키아인들은 페니키아인들은 장기간 탐험과 항해를 하는 과정에서 상업으로 번성했다. 이들은 최초로 갤리선을 사용했고, 다른 민족들을 압도하는 탐험기술을 기반으로 해상 무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성경》에는 티레의 상당한 무역 규모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상아로 배를 건조하고 은으로 도로를 포장하며 황금으로 높은 누대를 쌓는다고 적었다. 그리고 상업이 번성하면서 상인들 사이에서 이전의 문자와 다른, 상인들이 사용할 만한 간편한 문자가 필요하자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수메르의 설형문자를 발전시켜 페니키아 문자를 만들었다. 페니키아 문자는 그리스 문자, 로마자(라틴 문자)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페니키아 문자에서 파생된 아람 문자는 아랍 문자, 브라흐미 문자 등의 기원이 되었다.
유리를 최초로 개발한 자들이 페니키아의 식민도시인 시돈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유리는 모래에 포함된 성분인 규사로 만드는데, 시돈 해안에는 모래가 많았기 때문에 유리를 개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신명기에서 모세가 즈불룬 지파를 가리켜 언급한 "모래 속에 감추어진 보화"(신명기 33:19)가 유리를 가리킨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우라노스를 거세할 때 쓴 피묻은 낫을 묻은 자리에서 생겨난 민족으로 등장한다. 에우로파가 이곳의 공주였다고 전해지며, 제우스에게 납치당한 이후 같이 돌아다녔던 지역들은 에우로파의 이름을 따 유럽이 되었다. 에우로파는 크레타 섬의 여왕이 되어 크레타 왕들의 기원이 되었고, 오라비 카드모스는 누이를 찾으러 나선 뒤 그리스에서 테베를 세웠다고 한다. 이러한 전승은 페니키아 문명이 유럽의 여러 문명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음을 시사한다.
페니키아의 번영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으로 레반트의 페니키아 도시가 몰락하면서 막을 내렸다. 그 이후 카르타고가 서지중해권의 중심 도시로 부상해서 한동안 번영을 누렸지만 카르타고마저 로마 제국와의 전쟁에서 패전하여 멸망당했다. 결국 정치적 구심점을 잃은 나머지 페니키아 도시들도 서서히 로마에 동화되면서 페니키아 문명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3. 탐험
페니키아인들은 갤리선을 타고 바다를 누비며, 많은 탐험을 해왔던 민족이다. 당시 사람들은 새를 육지에 날리거나 섬에 있는 특이한 구름의 형태, 밤하늘의 별로 위치를 파악했다고 하는데 천문관측과 조수간만의 차이, 조류의 흐름에 대한 전문지식하에 항해술을 한층 더 발전시켜 원양항해와 야간항해를 최초로 성공시켰다. 천문항해술을 발전시켜 별의 위치에 대한 법칙을 발견해 장기간 항해를 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그렇다보니 당대 지중해 세계에서 페니키아인들의 항해술은 자타공인 최고로 인정 받았고, 외국에서는 항해를 맡길 일이 있으면 페니키아인들을 고용했다고 한다. 이들은 항해에 가장 중요한 세 요소인 조선술, 항해술, 천체술 3박자를 모두 갖춘 자들로 갤리선을 처음 만들었다는 점에서 발전된 조선술을 짐작할 수 있다.덕분에 이들은 지중해, 홍해, 인도양, 대서양을 종횡무진 돌아다니며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연결하는 중개무역을 했다. 페니키아인들의 교역은 현대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방식의 교역이 아니었다고 한다. 페니키아인들의 주 교역은 '침묵의 거래'였다. 원주민이 해안에 상품을 놓고 물러나면, 페니키아인들이 물건을 보고 그에 걸맞은 금이나 상품을 내려놓고 가져가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된다면 직접적인 접촉은 드물었을 것이니 교역지의 기록이나 유물도 드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우라도 미지의 존재와 교류한 이야기로서 하나의 전설로 구전되었을 가능성은 있다.[10]
이들은 주석을 찾기 위해 브리튼 섬까지 오갔고[11] 호박과 모피를 찾아 발트해에 있는 덴마크와 스칸디나비아 반도도 오갔다고 한다. 그리고 항로를 알고 있는 극히 일부의 상인들만 특정 상품을 취급했다. 당대 지중해인들은 지브롤터 해협 너머로 항해하기를 꺼렸으나[12] 그리스인들이 말하길, 금을 찾아 개의치 않고 전진했다고 한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다른 도시국가들보다 상업으로 번성할 수 있었다.
고대 이집트 파라오의 명령을 받아 최초로 아프리카를 일주하며 희망봉까지 도달한 민족이기도 하다. 당시 파라오는 나일강 대운하를 건설하려다 비용 문제 때문에 그만둔 이후 새 항로를 찾기 위해 페니키아인들을 고용해 아프리카 대륙이 바다로 둘러싸였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할 것을 지시했다. 페니키아인들이 파라오의 지원하에 출항, 연안 항해을 하며 희망봉까지 진출한 것이었다. 이들이 항해 과정에서 아프리카 연안 지대에 몇 곳의 도시를 건설했는데, 이 도시들은 5세기에도 존속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남반구에서 정오에 태양이 북쪽에 있음을 확인했는데, 헤로도토스가 이에 대해 기록을 남길 때, "정오에 해가 북쪽에 떠 있었다고 하는데, 거짓말 같아서 믿기 힘들다"고 부연 설명을 남겼다. 역설적으로 오늘날 이 기록이 페니키아인들이 아프리카를 일주한 명확한 증거가 된다. 적도를 지나 남반구에 접어들면 정오에는 해가 북쪽에 보이기 때문이다.[13]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배에 밀 씨앗을 가득 실어서 항해 중에 정박하는 곳마다 농사를 지어서 식량을 충당했고, 2년 만에 아프리카 일주를 마쳤다고 한다. 특이한 점은 이들의 항해 방향이 훗날 포르투갈의 인도 개척로와 반대방향이었다는 것이다. 홍해에서 출발해 시계 방향으로 아프리카를 돌았으며, 태양이 오른쪽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헤로도토스의 히스토리아에도 기록된 내용이다.[14]
티레의 최전성기를 이끈 기원전 950년 무렵 히람 1세는 이스라엘의 홍해 항구를 공유하기 위해 솔로몬 왕과 경제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을 계기로 티레와 이스라엘은 동방 진출을 함께했고, 아프리카를 넘어 인도와 중국까지(!) 갔다고 한다.
3.1. 아메리카 탐험?
페니키아인들이 아메리카까지 진출했다는 설도 있다. 한노[15]보다 앞서 탐험을 시작한 탐험가 히밀코[16]의 항해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이 바다는 항해하는 데 무려 넉 달이나 걸렸다. 바다가 너무 넓어서 바람의 힘으로 배를 나아가게 할 수 없었고, 바닷물은 고요히 머물러 있었다. 또한 여울 사이에 해초들이 튀어 나왔는데, 그 해초가 마치 덤불처럼 우거져서 배가 걸릴 지경이었다. 바닷물은 깊지 않아서 바닥에는 얼마 안되는 물이 간신히 차 있을 뿐이었다. 바다의 야생동물들이 언제나 여기저기에서 출몰하고, 느리게 움직이는 배 사이로 바다괴물들이... (중략)
몇몇 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이 대목은 바하마 제도의 얕은 사구와 흡사하고 항해에 넉 달이나 걸렸다고 하니 대서양을 횡단하는 데에 걸린 시간이라고 한다. 당대 헤라클레스 기둥이라 불린 지브롤터에는 페니키아의 도시들이 자리잡아 있었는데 이 일대의 페니키아인들과 카르트 하다쉬트인들은 지브롤터 해협 너머의 바다를 항해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카르타고 주화에서도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가 묘사되었다고도 한다. #
다만, 이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학자들은 이런 해석을 서아프리카나 서유럽 지역으로 항해한 기록을 곡해한 결과로 보고 있다. 이 지역으로 항해하는 중에 경유해 갈 수 있는 곳 중에서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의 바다나 도버 해협, 지브롤터 해협, 스페인의 갈리시아 지방과 바스크 지방의 앞바다, 카나리아 제도 및 적도 이남의 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 지역 등 기록에서 언급하는 지리적 특징을 만족하는 곳이 꽤 있기 때문이다. 인도양을 횡단하는 항해에 대한 기록이라는 설도 있는데 서기 8세기경까지는 기후 및 항해 기술의 문제로 연안 항해밖에 하지 못했으니 충분히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17] 사실 페니키아인들보다 원양 항해 능력을 발전시켜온 후대의 탐험가들도 11세기쯤에나 아메리카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으며, 그조차도 한두 번 정도만 방문한 단발성 항해였으므로 16세기 이전까지는 지속적으로 교류하거나 탐험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때문에 연안 항해를 했던 페니키아가 아메리카와 교류했다는 설은 큰 지지를 못받고 있다.
이집트의 미라 중에는 담배, 코카인 반응이 확인되었는데 그 원산지가 아메리카 대륙이라서 페니키아가 아메리카와 교류했다는 주장이 잠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그러나 후속 연구에 의하면 미라에서 확인된 담배나 코카인은 실제로는 발굴에 동원되었던 이집트인 인부들이 사용한 것이라고 밝혀져 이 주장은 현재는 사장되었다.
4. 관련 문서
[1] 흔히 "페니키아는 문명의 씨앗을 뿌린 농부가 아니라, 낟알을 물어다 준 새다."라고 번역되는 문구의 실제 문장은 위와 같다.[2] 페니키아는 당시 지중해권의 모든 문명을 흡수한 선진적인 문명이었으며, 이들의 문화(종교, 문화, 사상 등)가 그리스로 넘어가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3] 1817~1903. 독일의 고전학자로 자신의 저서인 《로마사》로 1902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4]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과 스페인 남부 및 포르투갈 중남부는 페니키아계인 카르타고의 식민지였다. 다만 시칠리아 섬은 동부의 그리스 폴리스의 식민지와 서부의 페니키아 계열 식민지가 양립한 곳이었다.[5] 다만 민족학적으로 봤을 때 민족 구분의 핵심 요소가 언어라는 걸 생각한다면 직계 조상이라 부르기엔 조금 애매하다. 아랍어와 페니키아어가 같은 셈어파에서 갈라져 나온 형제 관계긴 하지만 기원전 11세기부터 이미 아랍어와 페니키아어는 서로 갈라져서 다른 언어로 존재했고 지금 페니키아어 자체는 아랍어 등 다른 언어로 대체돼서 사멸되었다. 콥트어를 썼던 고대 이집트인들과 아랍어를 쓰는 현대 이집트인들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6] 사실 아주 드문 사례는 아닌데 황하 문명의 후예인 중화권 국가들과 페르시아 제국의 후손인 현대 이란, 고대 이집트의 후예인 이집트인 등이 그 예시다.[7] 물론 이 외에도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해당 논문에서도 여러 설 중 하나로 소개한 것이다.[8] 비록 이스라엘의 일신교 신학이 예언자 이사야 이전까지는 세련되지 못했고, 가나안의 영향으로 다신교가 유입되기도 했지만 가나안(곧 페니키아)과 자신들의 종교가 다르다고 인식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왕정 시대에 다신교가 때로는 국교에 준하는 위치까지 올라올 정도로 막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설령 이것이 인기를 얻는다고 해도 엄연한 '외래' 문화로 인식되었다. 즉 당대의 이스라엘인들과 가나안인들은 서로의 토착 종교가 다르다고 인식을 확실했다.[9] 이집트로부터 파피루스를 수입해서 팔았던 곳이라서 그리스어로 파피루스를 뜻하는 비블로스가 도시명이 되었다.[10] 홋카이도 본토의 아이누족들이 쿠릴 열도의 친척 부족들을 목격한 것이 와전된 크로복클 전설이나 그리스인들이 인도이란어파 계열의 유목민을 목격한 것이 와전된 켄타우로스 설화 등이 대표적이며, 화물 신앙도 현대 문명의 이기의 산물인 비행기나 군함, 헬리콥터를 본 부족민들의 착각으로 만들어진 신앙이다.[11] 콘월에 거대한 주석광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석은 지중해에서 구하기 어려운 자원이었고 페니키아 내에는 산지가 없다. 소금을 주고 물물거래 했다고 하며, 이런 교류는 지중해에서 청동기 문화가 번성하는 요인이 되었다.[12] 일설에 따르면 그 이남은 낭떠러지라고 생각해서 그랬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보다는 당대 지중해인들에게 지브롤터 해협 너머의 바다에서 안전하게 항해할 기술이 없었다. 페니키아인들 이전에도 북유럽까지 가서 호박이나 청동기의 원료가 되는 주석을 구했지만 그때는 육로를 이용했다.[13] 북회귀선 이남으로 내려가면 1년 중에 해가 정오에 천정보다 북쪽에 위치하는 날이 생긴다. 북회귀선에서 하짓날 정오에 태양이 천정에 위치한다.[14] 여담으로 후일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아프리카를 돌아서 카르타고를 정복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 때 계획한 침공 루트도 방향이 같다.[15] 파라오의 의뢰를 받아 아프리카 항해를 나섰던 사람이다. 한노는 아프리카 대륙을 대서양 쪽 방향으로 서쪽 해안을 따라서 항해했고, 그 결과로 오늘날의 카메룬 앞바다까지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항해하던 중 마주친 침팬지 혹은 고릴라와 싸움을 벌여 가죽을 벗기기도 했다고 전해진다.[16] 주석을 찾기 위해 북쪽으로 항해를 했고, 그 과정에서 브리튼 섬을 발견했다.[17]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인도양을 어떻게 알았냐는 주장도 있으나 동지중해권 문명은 기원전 1000년부터 이미 홍해 해로와 페르시아 육로를 통해 인도와 교류하고 있었다. 가령 계피와 같은 인도산 향신료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단어는 대부분이 고대 타밀어에서 차용한 것들이다. 특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 이후에는 페르시아 육로가 더욱 애용되었다. 다만 홍해 해로도 자주 애용되었기 때문에 당시 인도로 가는 바닷길의 중간 기착지였던 예멘은 당대 그리스인들에게 '아라비아 펠릭스'라고 불리면서 막대한 부를 누린 중개 무역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