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인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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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이라크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이라크 시민들 | 티그리스 강가에서 나룻배의 노를 젓는 이라크 소녀 |
이라크 축구팬들 |
1. 개요
영어: Iraqi아랍어: العراقيون
쿠르드어: گهلی عیراق
시리아어: ܥܡܐ ܥܝܪܩܝܐ
튀르키예어: Iraklılar
이라크의 국민들을 의미한다.
2. 상세
대개 아랍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랍 흑인들도 이라크에 거주하고 있다.이라크 북부 산악 지역에는 쿠르드인, 야지디가 거주하며 이 외에도 아시리아인, 만다야교 신도들이 거주한다.
이슬람 발흥 이전의 아랍 문명을 따져봐도 위에 쓴 페르시아 문명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영향을 받은 것 못지않게 셈어파 중동 문명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유사점이 많았던 문화다. 언어 변화의 경우 메소포타미아-시리아인들의 아람어와 아랍어는 같은 어파이다.[1] 오늘날 이라크의 주요 종교인 이슬람도 따지고 보면 기독교-유대교와 같은 신을 믿고 경전과 교리도 공유하는 부분이 많은 같은 종교의 다른 분파라고 볼 수가 있다.
3. 오해 및 편견
3.1. 현대 이라크인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인과 관련이 없는가?
고대 이라크는 메소포타미아이다. 이슬람 혐오 때문인지 메소포타미아랑 현대 이라크는 단절되어 있다고 하던가 고대 이집트와 현대 이집트가 단절되어 있다는 식의 잘못된 사관이 인터넷에서 흔히 보이는데, 메소포타미아 역사의 고전인 조르주 루(Georges Roux)의 『메소포타미아(La Mesopotamie)』만 하더라도 영어판 제목은『고대 이라크(Ancient Iraq)』이다.메소포타미아는 아카드 제국 이후 현재까지 근 4000년간 확고하게 셈 계열 민족이 절대다수를 차지했던 지방이다. 아카드어, 아람어, 아랍어 모두 셈어파의 언어이다. 수메르어의 경우는 고립어라서 비록 계통이 이질적이긴 하지만, 아카드 제국은 "셈어로 통일된 수메르"이기에 이라크와 연속성이 있다. 만약 수메르어를 쓰지만 이라크 바깥에 있는 국가가 있다면 역사적 귀속성이 논쟁적이었을지 모르나, 그런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디아도코이 왕조, 페르시아계 제국, 튀르크계 제국 등 타 민족의 기나긴 지배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문헌으로 확인할 수가 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시절에는 중앙집권능력이 부족해서 수도와 그 인근 지역인 이란 남부 파르스 지방 외엔 그다지 지배력이 좋지 못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지역에서 토착 정치세력은 그대로 유지한 채 복속만 시키면서 어느 정도 자치를 보장해주고 공물을 받아내는 선에서 그쳤고, 디아도코이 시기에도 비슷하게 그리스인들이 집중 거주하는 일부 헬레니즘 도시와 그 근교를 제외하면 기존 토착민의 반 자치형식으로 지배했다. 파르티아도 마찬가지였다. 사산 왕조의 경우에는 이전 왕조들과는 달리 확실한 중앙집권적인 제국이였지만, 이란인과 비이란인의 황제라는 그들 황제의 칭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로아스터교를 믿고 인도유럽어족의 이란어파계 언어를 쓰는 이란계 민족과 다른 기독교의 종파 중 하나인 네스토리우스교를 믿고 셈함어족 셈어파계의 아람어를 쓰는 아시리아인들은 종교의 차이와 사산조 페르시아의 기독교 탄압으로 더더욱 정체성 면에서 거리가 멀어졌다. 후대의 투르크인들의 지배기에도 주로 투르크인들의 정착이 중앙아시아, 이란, 튀르키예, 남부 러시아 타타르스탄 및 캅카스 지방에 몰렸기에 투르크화의 물결을 피할 수가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이 페르시아-헬레니즘 문화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맞으나 단방향이 아니라 쌍방향으로 영향을 받은 만큼 페르시아-헬레니즘 문화의 탄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페르시아 문명 탄생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영향은 로마 문명 탄생에서 그리스 문명의 영향력 그리고 동아시아 문명 탄생에서 중국 문명의 영향과 비견할 수준이고, 그리스 문명의 독자성과 개성은 부정할 수가 없으나 그 맹아는 이집트-시리아-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의 영향을 깊숙하게 받아서 싹을 틔웠다.
물론 이슬람화 이후 아랍어로의 언어 교체가 일어난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2] 그것이 이슬람 이전 이라크의 거주민이 현대 이라크인의 조상이 아니라는 근거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늘날 통용되는 아랍인의 정의는 본질적으로 사용 언어(아랍어)에 근거해 규정된 집단이지, 혈통에 근거해 정의된 것이 아니고, 사용 언어에 근거해 오늘날 아랍인으로 정의되는 아라비아 반도 밖의 민족 집단은 기본적으로 이슬람화 이전의 토착민이 언어의 측면에서 동화되고 아랍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된 집단이기 때문이다. 같은 관점에서 보면 현대 이라크인이 언어의 관점에서 아랍인으로 동화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이유로 이슬람 이전 이라크 거주민과의 혈연, 문화적 연관성이 부정된다고 볼 수는 없다.
비록 고대 이후의 이라크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크게 달라진 듯한 느낌이 들 수도 있으나, 교과서나 백과사전에서 헬레니즘 문명이란 그리스 문명과 중동 토착문명의 융합이라고 하는 것처럼 기존 토착문명의 연장 선상이지 완전히 문명 교체 현상이 일어난 게 아니다. 중동의 아랍화와 이슬람 문명권의 경우는 유목민이거나 자체 농업 기반이 매우 빈약하지만, 교역로에 의존해서 간신히 이루어진 소규모 상업 도시인인 아랍인의 자체적인 문화적인 역량이 근린 문화에 비해서 낮아서 언어나 종교적인 분야를 제외하고는 중동 토착 문명에서 거의 일방적인 영향을 받아들이고 지배지들의 문명을 서로 융합시켜 탄생한 문명이다. 애초에 고대와 현대의 문화와 언어 등이 완전하게 일치하는 지역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3], 이라크도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부터 시작하여 시간이 갈수록 다양한 문화가 들어온 나라인 것이다. 당연히 대다수의 이라크인들은 메소포타미아가 이라크와 관련이 없다는 주장에 대해 매우 불쾌해하며 메소포타미아를 조상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여긴다.
3.2. 이라크는 이슬람 근본주의가 활개친다?
다른 이슬람주의자들도 사탄으로 간주하는 알카에다, 유일신과 성전, 다에쉬라는 단체가 이라크 영내에서 활동하면서 이라크인이 이슬람 근본주의를 기본으로 탑재했다는 편견이 비이슬람 사회에 만연해있다.다에쉬의 전신인 유일신과 성전의 창시자는 이라크가 아닌 요르단 출신의 이슬람 극단주의자인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며 그들은 사담 후세인 정권 멸망 이후에 이라크의 혼란을 틈타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4] 2003년 이후에 걸프 왕정 국가들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라크에게도 수니파 이슬람주의를 수출했고 이에 이란 정부는 시아파 이슬람주의를 수출해서 이라크의 종파 갈등이 극에 다랐다. 또한 이라크를 점령한 미군, 영국군들은 이라크인에게 고문을 자행하여 반서방주의가 이라크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다에쉬는 이런 정치 환경에서 급속도로 성장할 수가 있었으며 2010년대 아랍의 봄의 실패를 이용해 이라크와 시리아 내륙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라크는 아예 대놓고 이슬람 법계인 샤리아를 국법으로 채택하여 이슬람 근본주의에 입각한 신정통치를 하는 이웃나라인 이란이나 사우디아라비아,[5] 모로코, 쿠웨이트, 카타르, 요르단, 오만 등[6] 여러 아랍권의 군주국들, 리비아나 모리타니 같은 일부 북아프리카 아랍국들처럼 샤리아가 아닌 윗나라인 튀르키예처럼 대륙법계를 채택하고 있으며 내각책임제 형태의 공화정을 하고 있다.
4. 습지 아랍인(Marsh Arabs)
습지 아랍인의 전통 가옥인 무디프 (المضيف)
이라크 남부의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사는 이라크인. 강 위에 수상가옥을 짓고 살며, 배를 타고 다닌다. 위의 사진에 배를 타고 다니는 소녀가 바로 습지 아랍인이다. 과거에는 인도에서 왔다거나, 수메르인의 후손이라는 추측이 있었으나 습지에서 살아가는데도 사막의 유목민족인 베두인과 비슷한 풍습이나 사회체계를 갖고 있는 것을 볼 때, 베두인의 후손일 가능성을 높게 점치고 있다. 애초에 수메르인들이 셈족에 동화된것이 기원전 18세기때의 일이고, 습지 아랍인에 대한 기록이 나온것은 10세기에 이를러서였다. 다만 고대 수메르식의 갈대 집과 선박을 만들어 생활하고 있는 등 부분적으로 수메르의 특성을 이어받기는 한 것으로 보이며, 이들도 자신들이 수메르의 후손이라는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기도 한다.
다른 아랍인에 비해 피부가 어두운 편이다. 다만 이라크에 고대로부터 동아프리카 계통의 유입이 다수 이루어졌기 때문에 혼혈인들이 상당수 주거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기는 한데, 무역상이나 군인으로 들어온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는 노예로 끌려와 정착한 것이다. 잔즈 반란이 바로 이라크 남부 습지를 개간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아프리카 노예들이 일으킨 봉기였다.
걸프전 이후, 사담 후세인에게 정적의 피난처로 찍히는 바람에 탄압을 받았다. 후세인 정권은 습지를 사막으로 만들고, 수상 정착민 등을 쫒아냈다.[7] 이라크 전쟁 이후에 사막으로 만든 습지는 어느 정도 복구되었지만 돌아온 사람은 적은 편. 현재 인구 10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민물고기를 잡는 어업을 하거나, 물소나 소 같은 가축들을 기르며 생활한다. 또 지천에 널려있는 갈대를 이용해 집을 짓거나 이슬람 사원을 건설한다.
5. 실존 인물
5.1. 남성
- 나지 샤우캇
- 누리 알 사이드
- 누리 알 말리키
- 두르감 이스마일
- 라시드 알리 알 가일라니
- 마흐무드 디얍
- 모하나드 지아즈
- 무함마드 아자위 알리
- 무함마드 하산 아비 알마하신
- 문타데르 모하메드
- 바르잔 이브라힘 알 티크리티
- 사담 후세인
- 술탄 하심
- 아드난 키랄라
- 아미르 알바지
-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
- 아부 이브라힘 알하셰미 알쿠라시
- 아부 타신 알 살리히
- 아비드 하미드 마흐무드
- 아야드 푸타이 알 라위
- 오마르 보르칸 알 갈라
- 알리 하산 알 마지드
- 우다이 후세인
- 이자트 이브라힘 알 두리
- 잘랄 탈라바니
- 잘랄 하산
- 쿠사이 후세인
- 타하 야신 라마단
- 파한 주부리
- 하이다르 알 아바디
- 함무라비
- 후세인 라시드 알 티크리티
- 후세인 카멜
5.2. 여성
6. 관련 문서
[1] 인도유럽어족 게르만어파 할 때 나오는 것처럼 어족보다 어파가 더 세부 분류이고 훨씬 더 언어적 친연성이 가깝다.[2] 이슬람 이전에도 계통상 아랍어와 가까운 언어가 통용되던 지역이므로, 셈어파와 연관이 적은 언어가 통용되던 지역에 비해 아랍어로의 언어 교체가 일어나기 비교적 쉬운 환경이었다고 추론해 볼 수는 있다.[3] 지형상 고립되어 황하 문명이 길게 이어져 온 중국조차 당나라 이후로 많이 바뀌었다.[4] 심지어 이 사람과 이 사람이 주도하던 유일신과 성전은 이라크 전 당시 미군과 전쟁을 치르던 다른 이라크내 저항 세력 단체들로부터도 미움을 샀다.[5] 극단적인 수니파 이슬람 근본주의 사상인 와하비즘의 발원지이자 중심지로, 사우드 가문이 압둘와하브와 와하비즘을 적극 밀어주고 메카, 메디나와 같은 이슬람교의 성지들을 비롯한 아라비아 반도의 영토 대부분을 장악하여 건국한 국가가 바로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다.[6] 그래도 이 쪽은 절도범의 손, 손가락을 절단하거나 간통범을 직접 돌로 때려죽이는 극단적인 샤리아 율법을 시행하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비해서 샤리아를 유연하게 준수하는 편이다.[7] 이를 주도한 사람이 사담 후세인의 차남인 쿠사이 후세인이었다.[8] 유대인의 기원이 이라크 일대로 추정되며 성경에서도 아브라함의 고향이 우르라고 나와있다. 다만 성경에서의 우르가 수메르의 우르를 칭하는 건지 확실하지는 않다. 물론 유대인이 가나안에 정착할때까지 여러번의 구성원 변화가 있었으리라고 추정되는데다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일대에 정착하면서 타 민족들도 유대인에 동화되기도 했고, 이스라엘이 로마 제국의 영향력에 들어가면서 유대인들이 중동 전역과 유럽 각지로 퍼지고 혼혈되는 과정을 거쳐 현대의 유대인이 되었다.